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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그릇을 모으라  (왕하 4:1-7)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선지자의 제자,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열왕기하 2장에 보면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상당한 수의 제자들의 수(50여명)가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선지자라는 것이 교육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를 제외하곤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구약의 시대, 성경은 적어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시기에 현재의 신학교와 같은 선지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신앙적으로 부흥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던 시대였습니다. 

갈멜산의 전투로 유명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라 평가 받던 아합왕과 그의 뒤를 이은 여호람은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던 왕들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셀라 선지자들 850명을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다 진멸한 뒤에도 엘리야는 이세벨의 추격을 받으며 "이스라엘에 오직 나만 남았으니..."하며 영적인 외로움을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천명의 사람을 남겨둘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사건 이후로 엘리사를 후계자로 임명하며 남은 생을 이러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남은 자들을 찾아내어 훈련시키면서 곳곳에 선지자의 무리들을 양육하거나 훈련시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라의 분위기가 왕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 선지생도들의 삶은 대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한 아내의 남편되었던 선지자의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위한 선지생도가 되었지만 무슨 경위인지 모르지만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빚만을 남긴체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경제 활동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과부들은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이었지요. 

룻기를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 남기워진 이삭을 주어 살아가는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갚는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빚쟁이들이 독촉을 하다가 급기야 두 아들을 데려가 종을 삼고자 합니다. 남편도 죽고 이젠 두 자녀 마저 팔릴 기가 막힌 환경이 이 여인이 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권자이시니까 이런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얘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가정에 닥친 이 여인과 같은 가정의 고난은 선한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래도  어두운 세상에서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결국 고통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고통의 현장에 들어서면 그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고통은 현실로서 여전히 많은 신앙인들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빚만을 남긴 채 죽은 선지자의 제자.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경우는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죄나 악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그릇된 생각입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렇지 하는 생각이나 말들은 신앙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 입니다. 


고통의 현실에 있어서 "왜?" 라는 문제에 매달리면 우리는 점점 더 절망하게 됩니다.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에게, 저들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왜 하나님이 이런것을 허락하셨을까? 생각하다보면 미로에 갇힌 것처럼 점점 더 하나님이 멀어지고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피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1.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가? 

원망이나 기가막힌 일이 일어났을때, 대개 사람들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앞에서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문을 닫아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선지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에게 나왔습니다"당신이 이 모든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자를 만났습니다. 

1절에 보니까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조용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응어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엘리사를 찾아가 조용, 조용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죽을 것 같고, 괴로운 그 마음을 토합니다.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원망이나마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소연을 하던, 원망을 하던, 아니면 부르짖고 매달리던, 이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그 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렘 33:2-3)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국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에게 나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할 수 있는 자에게 나아가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행할 수 없는 자에게 이야기 할때가 살펴 보면 더 많습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능력없는 자가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일을 행하십니다. 성취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것들을 보여 주십니다. 


2. 여인의 고백-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여인은 엘리사에게 절규합니다. 

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습니다. 이제 빚쟁이들이 와서 두 아들을 종삼겠다고 합니다. 

여인의 의도는 이겁니다. 

  • 신앙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 그리고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신앙 좋은 사람이 좋게 죽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한 신앙인 이었지만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죽을 때에 자기 자녀들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나라의 기울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분의 제자들은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했습니다. 


신앙인이 좋게 죽으면 좋겠지만 좋지 않게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든지 신앙인은 죽으면 하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결국 신앙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지껏 남편의 신앙에 의지해서 살았는데, 남편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떠났습니다. 이제 나 어떡해요...

아내의 말은 무엇입니까?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는 부르짖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은 말을 못합니다. 

여인은 믿음 좋은 사람의 아내였을는지는 모르지만 믿음 좋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엘리사의 응답 -너의 믿음을 채워라.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엘리사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아내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신앙좋은 남편이 죽었으니 내 하소연좀 들어주십시오. 거기다가 좀 더 기대하는 것은 '내가 억울하니까 날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사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네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 말이 엘리사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네 집에 있는것이 무엇이냐?" 


지금 아내가 엘리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가진 것이 있다면 날 도와줘야 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도와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의지하는 남편이 없어졌을 때에,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냐? 

믿음 좋은 선지 생도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여인이 말합니다. 

"기름 한 그릇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살 길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방법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엘리사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남긴 것이 있다. 너에게 찾을 것이 있다.” 고 하십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기름 한 그릇, 기름 한 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름 한 병이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 기름 한 병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남편과 남편의 믿음만을 의지하던 여인에게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남편의 신앙, 남편의 믿음이 아닌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내 남편도 죽고, 빚은 넘치고, 두 아들마저도 빼앗길 처지이지만….그래도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도움이시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당신이 주신 성령이 남아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건,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이라면 내게 도울 수 있다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 안에는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큰 믿음을 가지진 못했어도, 확실한 체험을 가지진 못했어도, 때로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끈덕지게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 내게 작은 기름 한 병 남아 있습니다.”라고 깨닫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 있다는 여인의 대답에 엘리사는 또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채워지길 원하는 은혜의 공간입니다. 빈 그릇은 내 영의 갈급함의 공간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분량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더 이상 빠지면 광신에 빠지고, 친구도 잃게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니까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같습니다.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엘리사는 집안의 모든 빈그릇을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합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웃의 빈그릇을 긁어 모으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치는 은혜를 주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부어 줄 테니 네 주위의 갈급한 심령, 네 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심령, 모든 공허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긁어모으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에, 엘리사의 이 요구는 황당한 요구입니다. 

지금 빚쟁이가 독촉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웃에 나가서 또 빈그릇을 빌려 오라니,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빌려 오라니, 이웃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 그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을 듣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이 모라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그릇을 가져 옵니다. 

4절)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어디로 들어갑니까? 

네 집안의 골방,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세상의 것 생각지 말고, 빚쟁이도 생각지 말고, 죽은 남편도 생각지 말고 오직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져온 빈그릇,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의 모든 빈 그릇, 빈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까지, 문을 닫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81:1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다. 그러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절망과 원망과 염려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것이 크던 작던 여러분 안에는 작은 기름 한 병들이 있습니다. 그 기름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름을 앞에 두고 더욱 갈급한 심령으로 빈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갈급함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왜 은혜가 충만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아닌 다른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가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맡긴 것이 있다 하십니다. 네게 믿음이 있고 네게 성령이 있고 네게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갈급한 영혼들을 위해 골방에 들어가 기름을 채루라고 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