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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후 

마가복음 16:9-18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대한민국 1인당 국민 부채가 961만원이라고 합니다. 한 가정당이 아니라 1인당이니까 4인 가족이면 거의 3800만원 입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10명중 8명이 등록금으로 말미암아 빚이 있으며 그 평균액은 1인당 1125만원이랍니다. 사회에 걸어가는 첫 발을 빚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때 빚없이 결혼한다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빚없이 집 장만 한 사람은 인생의 짐을 벗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직장인은 집값 내느라고 아둥바둥 합니다. 

여러분은 빚 없으십니까? 


미국와서 본의아니게 교통 티켓을 몇번 띠었습니다. 

한번은 티켓이 700불이 넘게 나와서 근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Court에 가면 좀 차감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두시간이 넘는 곳을 새벽부터 운전해가지고 가서 또 몇시간 기다리다가 판사를 만났는데 돈은 하나도 차감받지 못하고 겨우 부탁해서 돈이 없으니까 달달히 얼마씩 내겠습니다 하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빚을 안고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탕감해준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감수하고 탕감받으려 합니다. 요즘 시대에 빚없이 살아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빚 중에서 가장 큰 빚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의 빚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 3:23)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성경에 이르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것 같은 사람도 죄에서 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던 노아도, 다윗도, 모세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죄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빚, 죄의 값은 사망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 부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죄로 부터 완전히 해방되도록, 탕감해준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요, 사탄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권세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다시오신 사건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요, 십자가와 부활만이 살길이고 참길이고 바른 길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서가 씌여진 것이고, 부활을 증거하다가 또 부활을 바라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선교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천지가 개벽했나요? 지금 영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힘을 잃고 하늘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가 열렸는지 모르지만 부활의 바로 그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는 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주는 새벽예배 때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복음서에서 나와있는 부활 이후의 사건들을 좀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부활을 가장 기다리며 걱정했던 것은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 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정말 무슨 사건이 터지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공의롭고 정의로운 것인지가 아니라 자기의 자리만을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거짓으로, 뇌물로서, 자기자신만을 보호하려는 것.... 타락한 죄인들의 특성...


자 어떻게든 무덤이라도 보러갔던 막달라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빈무덤과 천사들의 소리를 듣고, 요한복음에서는 직접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나오지요. 열두사도들에게 달려가 이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눅 24: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2. 그 다음의 행적은 엠마오로 가는 글로바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제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4:13-35) 

  

하나는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비한 것은 엠마오가 어딘지 아직도 명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25 리 떨어진 마을로 그 위치가 서쪽으로 추정된다는 것... 

자연히 제자들은 서쪽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저녁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향하여 기울어지는 황혼의 해를 보면서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의 쓸쓸한 모습은 인생의 허무함을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의 소망 없이 오늘 인생의 운명을 따라 인생의 황혼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나그네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즉시로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고 있고 해 지는 쪽에서 해 뜨는 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때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그 제자들은 서로에게 친구가 되었지만 그들의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15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고 대답해보아도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나의 길동무가 되어 주실 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나의 마음의 왕좌에 모실 때 거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문제 있는 자들을 향하여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외치고 계십니다주님은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좋은 친구가 되시어서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셋째는그들의 눈이 닫혀서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생의 비극 중에 하나는 정말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닫혀 진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우리는 이제 새로운 눈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누가복음을 보면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할때 예수님도 급히 그 자리에 동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 때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말씀을 하나하나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을 보면 20장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나타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보왔다고 하는데도 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렇니까...예수님이 또 나타나서 손의 못자국와 옆구리의 창자욱을 보이시면서 도마를 믿게 하십니다. 


4. 더 파격적인 일....이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이렇게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이시고 부활의 의미를 들었으면 자연스런 반응은 어떻해야 하겠습니까? 

주님, 내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뭐 이런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몇 번씩이나 찾아온 예수님을 뒤로하고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호숫가를 향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것은 단지 하루 소풍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의 본업인 어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난 제자들이 이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는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이런 반응들이 나오는 것일까? 

자 우리가 읽은 본문 마가복음 16장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9절부터 18절까지 중요한 단락의 마지막이 어떤 구절로 끝납니까?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엠마오는 우리가 의심할 때마다 향하게 되는 장소...

디베랴 바닷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할 때마다 향하는 장소

문을 걸어잠그는 것은 상처받은 우리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숨고 싶어서 들어가는 장소....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부활과 상관없이 부활의 때에도 항상 엠마오를 향한다.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문을 걸어잠그고 숨는다. 


이에 비해서 막달라 마리아... 

자, 예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거짓증거를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가? 그 장면을 같이 본 막달라 마리아...어떻게든 로마병사와 종교지도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믿지 못할 여인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다. 

문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폄하가 계속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다른 마리아와 혼동할 때가 많지요.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합니다(요한 8,1-11). 또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 12:1-8)과 동일인으로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1절은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 11장)로 혼동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여인일 뿐이었습니다(눅 8:2).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류가 이 여인을 그릇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1년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언급되는 “죄 많은 여인”을 지칭하며, ‘죄인’을 이르는 헬라어 ‘harmartolos’를 ‘창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porin’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9년에야 이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그녀는 순결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성모 마리아와 반대되는, 유혹적이며 죄인이지만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여성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며,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녀의 역할은 사라져 갔습니다. 


"가장 먼저"라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사실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소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꾸며낸 일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를 첫 번째 증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제가 설교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시 


 "마리아의 고백"


까닭을 묻는 이에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답한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편애하시고 또한 그녀에게 나타나서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러셨을까?"하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어요(막15:40).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고요(막15:47).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답니다(마태 27:61외).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막16:1-2).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한20:11)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이 최초로 나타나신 그곳, 그곳에 나는 또 약속처럼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요한20:13-18)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순간,

이어 철저한 실패자로 종을 친 그 비통의 순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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