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19  이전 다음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복된 자 (창세기 13장 8-18절) 


창세기 - 성경이 다 하나님의 계시이고 읽어도 읽어도 마르지 않는 지혜와 샘을 공급해 주지만 창세기는 우주 만물의 시작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과 시작을 다루고 있다. 읽어도 읽어도 또 다른 은혜와 지혜를 준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닿기 전의 세상을 "혼돈과 공허, 흑암이 깊음"이라는 말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말씀으로 임했을 때에 일어나게 되는 일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었던 삶이 "분리와 가름"을 통해 질서가 생기고 그 질서 안에 만물이 거함으로 안식하게 되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엉망진창이어서 무질서 하고 혼탁하던 내 인생, 일을 해도 열매가 없고, 잠을 자도 쉴 수 없었던 인생에 질서가 생기고 목적이 생기고 방향이 주어지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는 곳,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이 안식이고 평안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거꾸로 사탄이 하는 일은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다시 무너뜨려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과 유혹으로 거짓 평안과 안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류 평화를 이야기 할 때마다,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할 때마다 부르는 노래  비틀즈의 "Imagine" 

내가 학창시절 좋아했고 많이 불렀던 노래 

그 가사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Imagine there's no country, Nothing to kill or die for... (국가가 없다면 죽고 죽이는 것도 없을 텐데...) 

국가가 왜 생겼나. 사람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진 것 


그런데 그 다음 가사  And no religion too... (종교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 ) 사실인 듯 사실 아닌듯 

'타겟은 반전 같지만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종교를 없애자는 것 

그러면 형제애로 가득해서 모든 것을 Sharing 할 수 있는 미래가 올 것 이라는 것.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사탄과의 거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입니다.   

영어로는 "It was good" 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세상은,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간은 선한 존재, 다시 말하면 날 때 부터 복 받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에서 복을 대표하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이라는 뜻은 행복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선악과 때문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지난 시간에 나누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에덴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리라는 말로 하와를 유혹합니다. 

존레논이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먹을 너의 모습,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모습, 하나님 처럼 될 때의 모습.... 

그 유혹을 받자 에덴에 있는 모든 풍요로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이, 마음이 선악과에 꽂이자 에덴의 모든 행복과 기쁨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선악과만 먹으면....하다가 결국 에덴에서 나오게 되었다. 

선악과를 사탄을 통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다.  

원래 부터 복이었던 사람이 이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정욕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울은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유능한 장군이었고 용사였고, 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윗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시기하다가 결국 분노하게 된다.  

"저 놈만 없다면..."

이후의 삶은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제거하는데 소모한다.  

한 사람을 시기하다가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  


사탄의 유혹은 무엇인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복을 쫓아 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통제를 떠나면 더 자유하고 재미있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막상 떠나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아버지의 것 중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면 더 재미있고, 즐겁고, 자유한 삶을 살 것 같았는데 막상 떠니니 결국 궁핍이 찾아오고 짐승보다 못한 삶, 노예같은 삶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삶이다. 

자기들끼리 죽이고, 다투고, 시기하고, 저주하고, 탐욕과 욕망, 음탕함과 절망이 가득차다. 그래서 이후의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기복신앙이 되었다. 

잃어버린 복, 빼앗긴 복을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복을 얻기 위해 안달이 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더 벌고, 더 빼앗고, 더 배우고, 더 가지고.....

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가?  복을 달라고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 복을 달라는 것이다. 


흔히들 한국교회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에 '기복신앙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복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복을 소원한다는 것이다.  

왜 복을 소원하는가? 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이 없는 사람이 복을 찾아 다니며 간구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적이다라고 하니까 복을 이야기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실망하고 거부한다. 

타락한 목사 취급한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복에 대한 말씀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복되다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신앙과 세상에서 말하는 기복 신앙을 구분해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신앙에 갈등이 생기고 기독교가 모순 투성이 같고 실망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이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복을 얻기 위해 우상을 만들었던 가정에서 자랐던 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가 될 때까지 땅도, 자식도, 자신이 생각한 아무 복도 얻지 못했던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창 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1절: 떠나라, 보아라. 가라 ->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주신 것이다. 말씀을 잃어버려 복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다시금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 질서가 임한 것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먼저 떠나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떠나는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 내 자리가 아닌 자리,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집....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중에서 못떠난 것이 있다. 

고향인 갈데아 우르를 떠났고, 아비였던 데라가 죽음으로 데라를 떠났으나 동생의 아들이었던 조카 롯은 떠나지 못했다. 왜? 롯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란도 없고 할아버지 데라도 죽었으니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브람을 따라갔던 것이다. 


4절을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 아브람이 따라가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롯이 따라가는 대상은 아브람이다. 

롯이 아브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브람이 가진 복을 롯도 가질 수가 있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롯은 아브람을 통해 아브람이 가진 복을 나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거하는 것이 아브람에게도 롯에게도 자꾸만 불편을 가져다 준다. 

아브람에게는 롯과 함께 있는 것은 그가 따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과 함께 함으로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롯과 함께 거함으로 과거에 우상섬기는 습관과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가는 자라면 롯은 철저히 복을 추구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다.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다. 영생이다. 

       

그런데 롯은 구원이고 영생이고 필요없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복만 있으면 된다. 

아브람에겐 복이 목적이 아니요 말씀이 목적인데 롯에겐 말씀은 복을 얻게 위한 수단이다.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복을 위해 신앙 생활 하는 사람과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자, 말씀은 곧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를 쫓아 신앙생활 하는 자가 함께 있다. 

처음엔 복 받기 위해선 말씀에 순종하라 하니까 잘 티가 안난다. 

복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도, 정말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도 다 같이 말씀을 통해서 거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둘은 점점 나뉘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되듯이 복을 쫓는 자와 말씀을 쫓는 자가 교회 안에서도 나뉘게 된다

언제? 어느 정도의 복을 얻은 후에.... 

       

(창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은 소유가 많아질 수록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자 한다. 주면 줄수록 더욱 궁금한 것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관심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말씀의 열매가 나타날수록 말씀을 사모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롯의 관심은 여전히 복이다. 가지면 가질 수록 눈에 보이는 복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눈은 자꾸만 밖으로만 향한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욱 욕심 부리는 재벌들 전쟁처럼 롯은 더 화려한 것, 더 많은 것, 더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말씀은 점점 더 부담스럽기만 하다. 

하나님의 복은 둘이 나누어 쓰기에 넉넉하지 못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다. 그런데 왜 넉넉하지 못하였다고 표현하는가? 그것은 복에 눈먼 자들의 탐욕때문이다.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고 나누어 주기에는 더욱 아까운 것이기에 넘치는 복도 롯의 입장에서는 나누기에 너무 아까운 것이다.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다. 다투지 말자. 네가 먼저 선택해라. 

말씀을 따르는 자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자기 먼저를 내세우지 않는다

       

롯의 선택을 보자 

(창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가 취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짝퉁 동산이다. 

보이기만 비슷한 것이다. 복인것 같지만 정말 참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절부터 아브람에게 주신 땅을 보자. 

바라보라. 이르리라. 주리라. 다 미래에 대한 말씀이다.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는 약속이 있고 보장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다.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마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약속으로 아브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이 씨앗은 생명이 있다. 짝퉁이 아니다. 진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한번 주고 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되는 on-going한 관계이다. 

보고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순종하면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교제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아브람을 만들어 가신다. 그가 복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히 복을 밝히는 민족이다.  

옛날 집안의 가구들을 보면 숟가락에도 복, 젓가락에도 복, 베개포에도 복, 이불과 요에도 복, 심지어 변누는 요강에도 복, 대문 손잡이에도 복, 현관에는 복조리개를 걸어놓기도 했다. 

곳곳마다 복을 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새해만 되면 지금도 예수 믿던 믿지 않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세배하며 인사한다.  

왜 그런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복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대한 민국에 처름 기독교가 들어갔을 때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제일의 전도 표제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였다. 


기복신앙은 복을 외부에서 찾는다. 선악과를 억어야, 다윗이 없어져야.... 가나안에 들어가야, 솔로몬 처럼 지혜를 가져야... 복을 내가 가져야 할, 혹은 빼앗아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긴다. 


복의 신앙은 내가 복이 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복이 되어감을 아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롯은 가장 복된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아브람을 떠난다. 아브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을 떠났더니 복된 줄 알았던 땅은 곧 타락과 죄악의 땅이 된다. 롯은 복이 되지 못한자가 결국 복의 땅을 얼마나 더럽히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그들이 복이 되지 못함으로 그 땅을 저주받게 만든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복을 쫓아 산다. 좋은 학군을 위해 이사하고,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하려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하고, 좋은 교회에 가서 은혜를 얻으려 한다.

복된 교회에 있다고 해서 성도가 복된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서도 복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성도에게 복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복을 받았듯이 함께 있으면서 위안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 

그런데 로고스교회의 담임으로서 목사로서의 내 사명은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쫓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에게 "너희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너희는 복이다. 복덩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복되게 살라는 것은 복답게 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서 아직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내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말씀 안에 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복되면 내가 있는 가정이 복된 가정인 것이고 나를 부모로 둔 자녀들이 복된 것이고 나를 자녀로 둔 부모가 복된 것이다. 

나를 성도로 둔 교회가 복된 것이고 나를 목사로 둔 교회도 복된 것이다. 나를 직원으로 둔 직장이 복된 곳이고 나를 남편으로 둔, 아내로 둔 사람이 복된 것이다. 

복은 내가 가지지 못해서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아직 복이 아니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오늘을 복되게 사는 것- 나는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복된 자가 되어서 여러분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주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