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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요 1: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1. 만남 

아버지는 요한, 형제는 안드레 

가버나움으로 옮겨 아내와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형제인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께로 나옴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는 장면. 


이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눅 5:1-11) 

1절: 무리는 해변가에서 말씀을 듣는데 어부들은 대신 그물을 씻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해 예수를 소개 받았지만 정작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베드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우선순위는 항상 고기 잡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아내와 장모를 돌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오셔서 자기 배에 오르셨다. 

자기 인생에 들어오셔서 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저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먹고 살기 괜찮은 사람들만 듣는 말씀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언제나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너의 하루 하루를 책임지시는 주권자가 누구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전쟁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 되었지만 정작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베드로는 광야에서의, 가나안에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천국의 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 얘기이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하늘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리고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하루 하루 걱정스레 살던 베드로에게, 이것 때문에 따르지 않던 진리의 말씀을, 결국 진리의 말씀이 그의 삶의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깊은 데- 그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얕은 삶이었다. 얕은 신앙이었다. 


그 앞에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한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멀리했던 진리의 삶, 신앙의 삶이 결국 하루 하루를 이기게 하는 능력임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2. 환경이냐, 예수냐 (마 14:22-33)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 예수는 그들을 건너편으로 가라 말씀하신다. 

그 사이에 있는 사건,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로리까? 이젠 말씀을 쫓는 자가 된다. 

큰 기적 이후에 그들은 예수 없이 험한 폭풍우를 만난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3. 믿음과 상식 

(마 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은 자란다. 

이제 내 삶의 주인, 환경을 넘어선 믿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살아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아닌 상식에 기초한 믿음이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이다. 자기에 근거한 믿음은 감정만큼이나 요동치고 위험하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서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대적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 그것은 사탄이다. 그것이 상식이든, 사랑이든, 예수의 길을 대적하는 자, 바로 사탄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이 후부터 베드로의 삶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하는 여정이다. 상식과 신념에 근거한 믿음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인가? 

변화산상에서 그는 "여기가 좋사오니....," 


그 절정에 마지막 만찬 사건이 있다. 

(마 26: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에 대해 주님의 대답은 싸늘하다. 

(마 26: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설명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덧붙여진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 26:36)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다. 

무엇으로부터의 시험인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이요, 공격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 외에는 없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없다. 


왜 상식에 근거한 신앙, 자기 확신, 신념에 근거한 신앙이 무너지는가?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무너뜨려서 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잘못된 선택,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게 한다. 


4. 결국은 사랑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회개를 일으키는 것도, 무너진 나를 일으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배신자인 내가 다시금 주님께 염치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엔 계산이 없다. 

거기엔 불사름만 있다. 타오름만 있다. 일어남만 있다. 


5. 최후 

쿼바디스의 명장면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치는 베드로 

그 때 만난 예수님 

"쿼바디스 도미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의 말씀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죽기까지 말씀을 버리지 않는 자가 된다. 

다시는 배신하지 않는 자가 된다. 



베드로는 다혈질에 속한 사람이다. 미국 레슬리 플린(Leslie B. Flynn) 목사는 베드로에 대해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갈릴리 호수는 잔잔하고 평온하다가도 순식간에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알 수 없는 바다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갈릴리 호수 못지않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를 처음 본 예수는 그에게 게바라 새 이름을 주신다. 요동치는 그에게 절대로 요동치지 않는 성품, 바로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베드로의 신앙을 연단하시고 그리고 다듬어 가셔서 결국 성숙케 하셨다. 


공회원들이 무서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담대히 말하고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말에 “사람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나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행4:18-21). 

  되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그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권면하는 자가 된다. (벧전5:5). 

  산중에서도 기도하다가 잠자다가 정신 못 차려서 예수님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던 그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권면한다. (벧전5:8). 

  늘 준비성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다가 실패한 그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본받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되”라고 권면한다 (벧전3;15).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실수가 많은 사람, 실수가 없기에 조심하는 사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어떤이는 고백했다가 툇짜 맞을까봐 그저 그런 관계로 쭉,,,

어떤이는 툊짜 맞더라도 용감히 고백. 

베드로는 언제나 앞장섰던 자. 그래서 실수도 많았던 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다. 점점 움츠려들고 조심하고 가만히 있어서 본전만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본전을 유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모험이 없는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먼저였다. 그래서 칭찬도 제일 많이, 꾸지럼도 제일 많이 받았다. 

요동치는 그의 성격을 과감없이 예수님께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처음부터, 아주 처음 부터 베드로라 부르셨다. 시작부터 예수님은 그를 다듬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몬은 게바, 즉 베드로, 반석이 되어 죽는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신앙, 결국 다듬어져 말씀을 이루는 신앙. 

그가 바로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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