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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의지하십니까? (빌립보서 3장 5-11절) 


빌립보서를 계속 강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갇혔을 때에 쓴 편지이고 그 글의 주제는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기쁨의 의미와 이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 그리고 이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감옥이라는 이미지는 자기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기를 짖누르는,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는 현대 사회 자체를 거대한 감옥에 비유했습니다. 

사회의 곳곳의 감시망이, 적당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 안에 들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차별하여 격리하거나, 소외시키거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학교가, 때로는 사회의 직장이, 심지어 가정이나 모든 공동체가 알게 모르게 이러한 기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해가며 이러한 기준을 강요하고 그렇지 못하면 처벌하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외면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전화내용이나 전화 메시지, 이메일이나 심지어 위치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엿들을 수 있고 추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좁은 테두리를 거쳐 스스로 자유하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살다가 어느 순간,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에서건 내 인생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어쩔땐 일상에서 떠나 여행을 떠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자유가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감옥과 같은 상황에 대해서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성경은 처음으로 "형통"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창 39:20-창 39:23]

(창 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창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왕의 죄수: 왕이 누구인가? 세상임금...

그런데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랑을 더하사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그의 손에 맡긴 것을 살펴보지 않았다. 감시 받지 않았다. 자유했다. 감옥 속에서 자유했다. 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결과 범사에 형통했다. 형통했다. 통했다. 누구와? 하나님과 통한 것이다. 감옥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통하므로, 동행하므로 참 자유를 얻게 하셨다. 은혜 아래 거하게 하셨다. 


세상에서 말하는 만사 형통은 내가 번영하고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말한다면 성경에서의 만사 형통은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바다 끝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감옥보다 더 꽉 막힌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에게 형통이 임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미친척 하며 돌아다니다가 아둘람 굴속에서 들어가 지내다가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때 만난 400여명의 피난자, 도망자들이 장차 이스라엘 왕국의 기둥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속에서 찬양하다가 감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은 감옥을 하나님을 대면하는 은밀한 공간으로 표현합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감옥은 하나님을 만나는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요 8:31-32]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는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면 설사 감옥과 같은 공간도 자유의 공간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참 자유,  참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자유하십니까? 주 안에서 기뻐하십니까?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참 자유를, 참 기쁨을 주 안에서 발견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진리 안에서, 예수 안에서 자유하고 기뻐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 밖에서 얻고자 하는, 세상사람들이 그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바울은 "육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육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기쁨을 얻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5절부터의 내용을 봅니다. 


1.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게 무슨의미인가? 할례를 받은 것 까지는 알겠는데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9일쨰 할례를 받으면 안되는가? 더 지나서 할례를 받으면 잘못된 것인가? 아니 할례를 안받으면 안되는가?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의 땅에 복음을 전하다가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총회를 열어 이방인들은 할례에 대해서 자유하게 하는 것을 통과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창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말씀을 정확하게 지켰다.  나는 철저하게 말씀을 지킨 자다.


2.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지파) 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가말리아 문하생)이요, 열심이 특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자라. 


-> 태생(가문)이나, 교육을 받은 것이나,  자기의 삶의 성실함이나, 또한 결과에 있어서도 할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를 타고난데다 교육도 잘받았고, 승승장구하며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종교적으로나, 교육적으로, 그들이 자랑으로 삼고, 자존심으로 삼고,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모든 것을 갖추었고, 추구했고, 자랑하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 자기가 추구하던 것들이 결과적으로 예수를 추구하고, 예수를 알고, 예수를 닮아가는 데에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을 따라 또 다른 업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갈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그러한 육체적인 자랑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와있는 그 분의 족보에는 그 분의 태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그저 평범하고 복잡한 죄인들의 내력을 나타내 줍니까?  

그분의 사역의 대상은 주로 새리, 창녀,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이방인, 문등병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는 갈릴리 촌구석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것을 자랑하던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요,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자랑 때문에 내게 올 수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세상 사람들과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좀더 가지면, 좀 더 높아지면, 좀 더 성공하면 더 즐겁고, 행복하고, 자유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그 위에는 더 높은 권세가 있습니다. 

가지고 더 가져도 그 위에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내 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은 깨어져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나는 그렇게 욕심부리지 않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가지면 만족할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은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종국에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풍요로우신 분,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가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까? 

사탄은 자꾸만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과 독립해서 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님 처럼 늙지도 않는 분이요, 버릴 수도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착각 속에 살다가 영원을 앞 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후회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그것이 세상 속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육체를 통해 대접받으려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service 받으려 합니다. 

내가 이만한 사람이니 VIP대접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고, 이러한 일을 했고, 어디 출신이고, ....이것이 위안거리요 자랑거리요, 인생의 낙입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인정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 일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봉사하며(봉사 받으려 하지 않고 봉사하는 삶을 삽니다. 예배가 곧 봉사이고, 예배를 넘어서 섬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여지껏 의지하던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십자가를 통하여 얻는 부활을 신뢰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을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 지는 것들을 위해 육체라고 표현했던 모든 것들을 내어 놓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위해 인생의 짐들을 내려 놓습니다. 


8절에 보니까 가장 고상한 지식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11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단어는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서양의 알다와 유대인의 알다라는 말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 알다라는 말은 주로 "그노시스"입니다.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깨달음, "무엇 무엇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앎이요, 자기 속에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앎은 헬라어로는 "기노스코"로 표기되고 히브리어로는 "야다"라는 말로 표기 됩니다.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에서 "동침"이라는 말로 번역된 말이 바로 야다, 즉 유대인들이 말하는 앎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체험하는 지식입니다. 

ex) 결혼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같은 말입니까? 다른 말입니까? 

기노스코, 야다는 ~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그를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일대기를 알고, 예수의 말씀을 다 암기해도 살아계신 예수를 체험하지 못했으면 모릅니다. 

그런데 서양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을 구분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가 널 구원하신 것 알지? 

그분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 알지? 

아멘해...그러면 구원받아...

이런식으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암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의 권능,

그분이 즉은 예수가 아니라 다시 살아서 지금 나와 만나는 분,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읽었던 예수가 기도 중에, 찬양 중에, 내 삶 중에, 내 감옥 같은 삶 중에 들어오셔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찬양을 받으시고 내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그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삶 가운대로 들어오신, 내삶을 간섭하시고, 만지시는 주님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을 더 깊게, 더 가까이 만나기를 열망하는 것,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어린아이가 젖을 찾듯이 갈급해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는 것

우리가 잘못해서 벌받으면 그것은 벌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육체를 열망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이 고난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성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육체를 의지하던 그의 열망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했고, 외면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들을 무시하고 외면했던 그 대상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만났던 바울은 핍박자에서 돌연 핍박당하는 자가 됩니다. 

자기를 자랑하면서 살 때는 툭 하면 남들을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힘으로 눌르고 무시하고 하면 되었는데, 이제 예수를 자랑하고 예수를 증거하려 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하고 때리고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면서 살 때는 끽 소리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 자랑하려고 하니까 너처럼 생긴 사람도 성령이 거하느냐? 넌 왜이렇게 말을 못하냐?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병을 달고 사냐? 네 머리가 미쳤구나...

차라리 세상에서 욕먹는 것은 참겠는데 교회 안에서도, 믿는 자들이 비아냥 거립니다. 


이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아는 것.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려고 하니까 별 일을 당하는구나! 

예수 잘 믿으려 하니까 별 사람들이 다 달려드는구나!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를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죄를 미워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함으로 결국 자기도 죄에 대하여 온전히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사는 참된 세례,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하고 사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과연 육체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까요?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보에 올린 한줄 묵상을 같이 봅시다. 

"죽음의 시간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기뻐할 수 있도록 지금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지금,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배우십시오. ㅇ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을 시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러면 죽고 난 후에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합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감옥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욕망의 노예로 많들어 마치 삼손에게 했듯이 참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빼버리고 그들이 우리를 날마다 부리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 있으면 그 감옥도 은혜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연애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의지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가까울 수록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지금 살아계셔서 내 삶에 함께 한다는 그분의 부활을 알고, 그 분의 고난에 참예하여 나역시 부활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를 알기를 열망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경험하기를 갈망하십시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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