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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모래와 반석

본문 : 마 7: 24 - 27


1. 대학 다닐 때에 당구를 처음으로 치게 되었는데 2학년 때인가 한 교수님과 함께 당구를 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래 간만에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당구장을 따라 오신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잘 치시던 분.... 1000이 넘는 분

그 분의 말씀... 일본인에게서 당구를 배웠다. 

일본사람과 한국 사람이 당구를 치면 거의 예외 없이 한국 사람이 더 빨리 배운다. 한국 사람이 100을 치면 일본 사람은 50에서 낑낑대고 한국 사람이 200을 치면 일본사람은 그때서야 겨우 100을 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의 예외 없이 500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치게 된다. 한국 사람은 급해서 처음 배울 때 기초를 배우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배우는 법을 터득한 다음에는 대충 감으로 한다. 그런데 그 감이 너무 좋아서 일본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초에 치중을 해서 실력이 빠르게 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실력에 다다르면 탄력이 붙게 되어서 300이 넘어가면 한국사람 보다 더 빠르게 된다. 


2. 대학교 1학년 때에 클래식 기타반에 들어간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기타를 쳤던 터라 또래 어느 친구들보다 자신이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동아리에서는 내가 기타를 언제부터 쳤던지 얼마나 치는지는 알 생각도 않고 들어가서 1주일 동안을 내내 1번줄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기는 법만을 가르치고 그것만을 치게 했다. 나는 그렇게 치는 것이 너무 시시해서 1주일 만에 클래식 기타반을 나오고 말았는데 1년 지나서 보니까 같이 들어간 사람들의 실력이 나보다 훨씬 잘치는 것을 보고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그 동아리의 원칙이 맞았던 것이다. 기초를 배우는 데에 있어서 그 이전의 경험이나 실력은 물어보아서도 안되고 철저히 무시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기초를 쌓는 비결이다. 아무리 혼자 연습해도 내가 치는 소리랑 기초부터 배워서 내는 소리랑 질적인 차이가 있다. 


3. 우리나라 중고등학교까지의 교육 수준 세계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교육의 강도. 수준도 높다. 세계의 평가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학의 수준은 저질이다. 우수한 중고등학생들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의아해질 정도로 대학의 수준들은 세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감이나 요령으로 누구보다 바르게 도달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민족이 전제적으로 기초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경제나 정치, 심지어 교육, 그리고 목회마저도 요령과 감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던 정신은 원칙이 아니라 요령과 감이다. 사람들 사이에 팽배한 사상은 “꿩 잡는 게 매다”, “모로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식의 원칙을 무시한 요령주의이다. 


미국인의 삶- 무슨 취미를 하건 처음에 시작을 신중하게 하고 철처히 준비한다. 자전거를 해도, 헬스클럽을 다녀도 유니폼부터 마친다. 아이 때부터 안전벨트, 헬멧 어른까지 이어지게 한다. 처음엔 왜 저리 요란스럽게 까다롭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폼만? 그런데 그렇게 시작하니까 잘 그만두지 않는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구를 치던 기타를 치던 공부를 하던 사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목회를 하던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기초를 탄탄히 하고 기본을 다져나가야 한다. 원리와 원칙을 중시하고 감이나 요령을 버려야한다. 


우리나라는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초와 기본, 원리와 원칙을 중시하지 않았다. 감이나 요령으로 성장해왔다. 감정 중심, 요령 중심, 로비나 뇌물 문화 중심. 혈연 지연 중심. 그것이 처음에는 일을 수월하게 하고 능률있는 것 같지만 결국 발등을 찍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서든 수적으로 부흥하면 목회자의 모든 역량이 옳게, 그리고 높게 평가되었다. 오히려 원칙대로 목회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고지식하다고 비난받았다. 


작은 판자집을 지을 때는 설계도가 필요 없다. 대충 눈 짐작으로 어림잡아서 뚝딱뚝딱 만들면 금방 비 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절대고 그냥 지을 수 없다. 어림잡아서 짓다가는 금방 균열이 가고 무너지게 된다. 설계도를 작성하고 토대부터 오랜 기간 예정된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야 한다. 나라도 개인의 인생도,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잘 설계하고 계획하고 그 계획에 맞게 이끌어가야 좋은 것이 탄생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의 설계도, 인생의 설계도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설계도는 완전한 것이다. 빈틈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설계도에 따라 건축물을 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남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리는 장이다. 제자들을 산 위로 불러 모아 자신을 부인하고 산위까지 올라 올바로 신앙생활 하려는 제자들에게 모든 말씀을 다 하신 후에 결론으로 당부하고 있는 장이 바로 7장이다. 

13절부터 결론의 메시지를 주는데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제일이고 나 자신이 먼저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첫 번째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15절부터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해 보았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옳은 열매 좋은 열매를 맺혀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열매는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우리 성품의 열매이고 인격의 열매이고 영혼의 열매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의 비교이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고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은 듣지 않는 자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아니라 듣고도 행치 않는 자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라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았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빠르다. 그리고 쉽다. 그러나 인생에는 반드시 바람 불고 비가 창수가 오는 때가 있다. 인생의 승부는 바로 그 고난의 순간에 나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는 고난을 만나면 무너진다. 마음에서 원망이 생기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섭섭한 생각이 든다. 교인들이 싫어지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어지고 말씀도 안 읽히고 설교도 듣기 싫게 된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니다. 맨날 하는 듯 하다가 포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 하면 또 도루묵이다. 


설교 말씀 듣고 간증을 들으면 나도 믿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감정이 움직인다고 내 믿음이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 완성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약 1: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나에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애쓰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도 넘어짐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없고 끝까지 자신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고 더욱 말씀을 붙잡는다. 세상의 여건과 환경이 나쁠 때 더 실력발휘를 하고 더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다. 

가톨릭은 이 반석이 곧 그리스도임으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교황권이 성립되는 것이다. 교황이 곧 교회이고 그래서 교황 무오설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이 반석을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라 해석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가 곧 교회라는 것이다. 


주를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것은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내가 주님의 종이 되겠다는 소리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주인의 말이 긴지 아닌지 판단해서 자기 생각에 옳은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요령대로 자기 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과 기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어떤 목사님께서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불가사의한 것 세 가지를 말한 것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은 보지 않는 것, 성경을 안보면서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 성경에는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하지 않았나?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인정하도록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네가 날 사랑 하냐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마음으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자신을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정직한 신앙 아닌가? 


대학생 때 줄곧 과외를 했었는데 제일 힘든 아이. 

자신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좀 부족해서 성적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학생. 그런데 공부를 가르치다가 좀 어려운 게 나와서 제가 이거 알겠니? 하고 물으면 다 안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문제를 내 주면 다 틀린다. 너 안다면서 왜 또 틀려 그러면 실수라고 대답한다. 성적이 오를 수가 없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누가 공부 잘하는 학생인가? 자기가 다 아는 것 같은 것도 혹시나 모르는 게 있나 유심히 보는 자이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본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자기가 조금만 아는 게 나와도 그건 전체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좀 아는 게 나온다 싶으면 그 때부터 주의가 산만해지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딴 생각하고 잔소리로 듣는 겁니다. 


우리가 설교를 대할 때도 말씀을 읽을 때도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혹시나 내가 그냥 넘기는 게 있지 않나 유심히 봐야 한다. 열심히 반복해서 봐야 한다. 한 말씀 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뚫어져라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글자로 보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말씀으로 믿는다. 녹음기처럼 똑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내 사정과 심령에 똑 같은 말씀도 다르게 역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모르는 것을 지적해주면 그래도 안다고 믿는다. 아는 데 잠시 까먹었다고 얘기한다. 까먹으면 모르는 것이다. 시험문제 틀리면 틀린 거지 아는 데 틀렸다고 변명해봤자 누가 점수를 주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매뉴얼이다. 우리가 다치고 아프고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우리를 고칠 수 있는 해답이 이 책에 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을 잘 듣는 것도 유익한 것이지만 거기서 그치면 결국 듣는 믿음일 뿐이다. 나 스스로가 내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말씀을 열어야 한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난 목자로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헬퍼일 뿐이다. 

한국교회가 왜 위기에 처했나? 성도들이 스스로 읽고 서도록 힘쓴 것이 아니라 목회자만 의지하고 목회자 말만 듣도록 훈련하다가 목회자가 넘어지니까 와장창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는가? 

성경 위에 교황이 있고, 성경 위에 전통이 있으니까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서 다시 돌아가고자 개혁을 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외침으로 잠자는 성도들을 깨운 것이다. 


  1. 2007년 1월 아침 출근시간 대의 위싱턴 디시 한 지하철역 구내다 청바지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한 청년이 <무반주 바이얼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연주한다 43분간 콘서트는 계속되었으나 아무도 관심있게 지켜보거나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무려 1,097명의 인파가 스쳐지났지만 그 누구도 거리의 악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얼린을 연주한 평범하게 생긴 그 청년은 죠슈아 벨 그날 벨은 워싱턴 포스트지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실시하는 현장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인 죠슈아 벨의 연주였지만 거장의 뛰어난 연주를 듣고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는 이도, 카메라 후레쉬도 터지지 않았다?
  2.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 허름한 거리를 걷던 엘리자베스 깁슨은 지저분한 길가 쓰레기 더미에 처박힌 그림을 발견한다 액자는 싸구려였으나?어쩐지 그림이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결국 깁슨은 그림을 집으로 들고와 벽에 걸었고 몇년이 흐른 뒤 그림의 진짜가치를 알게된다젨 그것은 유명한 멕시코 화가 루피노 타마요가 그린 <세 사람>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도난당했다가 버려진 것인데 소더비 경매장에서 1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 깁슨이 그 거리를 지난 20분 뒤 쓰레기 수거차가 지나갔으니 자칫 폐기물이 될뻔한 명화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 성경은 오직 성직자들만 읽고 나눌 수 있는 책. 예배 시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성경을 읽어주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1500여년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금지되던 성경이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공개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 TV나 인터넷 어디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특혜이고 기회인가? 

말씀을 읽자. 그리고 살자. 

그곳에 보화가 있고 비밀이 있고 영원한 기쁨이 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