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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이 되는 신앙 (빌립보서 3장 17절- 4장 1절)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 어렸을 때랑 비교해서 가장 달랐던 점. 

초등학교 숙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책읽기 - "Reading Log"라는 자기가 읽는 도서를 반드시 기록하게 해서 점수로도 많이 반영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필독서를 보면 동화나 소설책, 역사책, 과학책....여러가지가 있는데 희한하게 위인전에 대한 도서목록은 거의 없습니다. 

있어도 옛날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미국 대통령, 혹은 스티브 잡스같은 유명한 사업가, 심지어 스티븐 커리 같은 스포츠 스타의 삶을 읽게 합니다. . 

우리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때의 필독서는 위인전이었다. 꿈을 키우고 모델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위인전이 거의 사라진 시대입니다. 

한 문학 비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역사적 문학 비평의 결과로서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위인전은 과장되고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업적이 있어도 한 인물을 사실적으로 세히 살펴보면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고 많은 비판과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인전은 아이들에게 인생의 한 면만을 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링컨이 노예해방을 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케네디는 바람둥이 였다는 등 그들의 업적을 가리는 많은 일들을 발견해내가며 그들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고 역사적인 예수를 주장하는듯 하면서 예수도 결혼했다...누구누구랑 연인의 관계에 있었다. 정치적인 혁명가였다 등등의 인간세상의 평범한 예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은 흔히 말하는 위인들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을 더욱 따르는 시대를 넘어 이제 헤리포터를 읽으면서 마법사가 되는 것을 예수를 닮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뉴스는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었습니다. 

일본의 닌텐도 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게임이 단 5일 만에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사용자수를 초과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주일만에 백만명이 다운받아 이 게임을 한다고 합니다. 

이 게임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다가 포켓몬이라는 만화의 케릭터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켜지고 실제 자기 주변의 카메라 화면에 그 케릭터가 돌아다니면 그것을 잡으러 다니는 게임이다. 이른바 "증강현실"이라는 기술인데 실제 현실에 가상의 케릭터가 등장하여 체험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백만명이 사용하게 된 것이 왜 대단하냐면 이 게임은 구글에서 사용하는 실재 지도를 실행시켜야 진행이 되는 게임인데 우리나라는 국가 보안상 이 구글맵 서비스가 되지 않는데 속초라든지 몇개의 지역만 이 구글맵 사용이 가능해서 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초를 가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만명이 이 게임을 다운받아 속초는 전 교통수단이 매진이 될 정도로 전국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손으로 캐릭터를 잡으러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게임을 하다가 부딪히고, 넘어지고, 사고가 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점점 더 실제의 세계보다는 TV속의 세계, 가상의 세계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실재로 많은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 심지어 50대, 60대 사람들까지도 게임 때문에 휴가내고 속초로 떠나는 일들이 뉴스에 나옵니다. 이제 이러한 가장 현실, 증강현실은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끌어당기는 사회적인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현실보다 가상현실, 증강현실의 세계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왜 그럴까? 현실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불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람은 들여다보면 들여다 볼수록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선생도, 대통령도, 목사도, 심지어 예수도 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현실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비현실 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자기 삶에 모델이 없다는 것은 푯대를 잃은 것 만큼이나 불행하고 불안한 삶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 하더라도 운전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거나 아니면 비극을 낳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모델이 있으십니까? 


  •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어느 누가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같이 죄인인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본받으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는 자기 삶에 자신이 있어서...이젠 결점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지어 바울은 이곳 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자신을 본받으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4: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전1: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자칫 이러한 말은 우리 기독교가 강조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 설교하면서 제가 이렇게 이렇게 사니 저를 본받으세요 한다면 "저 목사는 맨날 자기 자랑만 하네..."하면서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바울은 사방에 적들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유대인들에게도,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조차도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본받으라"한다면 얼마나 공격의 표적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입니다. 


그럼 그는 그 자신의 신앙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 했을까요? 

(딤전 1:15b)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가 주님 앞에 죄인이요, 교회를 핍박하던 자로 믿는 자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자신의 연약하고 죄악된 품성을 누구보다도 더 깊게 고백한 사람입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Join with others in folowing my example, brothers, take note of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pattern we gave you." 


이 말은 나라는 개인을 본받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제시한 패턴, 즉 삶의 태도나 자세와 같은 삶의 패턴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니까 난 이제 신앙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고, 죄가 없고, 완전하니까 나를 따르고 본받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난 여전히 연약하고, 죄인이고, 부족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방식, 그러한 삶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의 패턴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이 전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푯대, 3장 10-11절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함께 같이 읽어 볼까요? 

[빌 3:10-빌 3: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그의 전 신학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예수의 삶은 바로 두가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가 따르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모습도 십자가와 부활이요,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의 삶의 example도 역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많이 들었던 기독교의 진리, 예수의 복음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외치지만 결국은 그 반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으면 바울은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십자가의 원수로 가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지금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신은 배요...그들의 마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결국 그들은 멸망당할 것이요, 그들이 영광스러워 하는 것들 때문에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Their god is their stomach. 

결국 그들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그들을 출애굽 시켜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들로 인해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이라면 하나님이던 우상이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푼 뒤 자기를 따라오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한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 하늘의 말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라 했을 때에 그들은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렵다. 누가 이 말을 이해하느냐" 하면서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오직 떡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를 믿었느냐? 

자기들에게 복주시는 예수님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복? 하늘의 복에는 관심이 없고 땅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병이 낫고,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억울한 자가 풀리는 그러한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핍박을 받으니까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떡을 찾아 다시 유대교로, 로마로, 이방으로 흩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하늘의 백성들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시민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땅의 시민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의 성인에 대한 기도를 반대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렇지만 전 가톨릭에서 하는 성인들에 대한 추대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신교에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앙안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을 적게는 몇십년, 많게는 몇백년씩 추적하고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그들을 교회의 어른으로, 거룩한 자로 추대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교황의 권위가 더 높은 것 같지만 실제 신앙생활에 가톨릭 교인들에게 더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 성인들의 신앙입니다. 

이들의 발자취는 교회의 크기나 어떤 성과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정말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삶이 사람들의 신앙에 좋은 영향을 주었고, 또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줄 것인가가 그들의 기준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의 영성을 본받으려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인들에 하는 기도를 지적하며 결국 그것도 우상숭배다. 우리에게 모델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하며 성인들에 대한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입니다. 

성인을 위한 작업을 하다보면 정말 과장되고 왜곡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사람이 취하는 것 같은 잘못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개신교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더 닮게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고있느냐 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더 멀어진 것만 같습니다. 


저들은 성인들의 이름을 대면 누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누구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누구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새기고 하는 것들이 암송하듯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 누구 목사 하면 교회 이름만 떠오르지 그들의 삶과 신학과 영성이 별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 교회가 정말 예수님을 나타내면 모르겠는데 큰 교회, 숫자 많은 교회, 유명인사 많이 다니는 교회,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이런 세상적인 기준들로만 넘쳐납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패턴, 삶의 자세,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아 부활을 소망하는 삶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거나 십자가가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의 사건은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내가 잘못해서, 내 죗값으로 받는 고난은 내 죄값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지 않아야 할 고통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기대조차 없이 그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은 여러분의 배입니까? 그리스도이십니까? 

여러분의 모델은 누구이십니까? 유명한 배우입니까? 헤리포터나 포켓몬과 같은 가상속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분명한 푯대가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또 다른 사람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모델

선한 목자 되신 주님 

[요 10:11-요 10: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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