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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무엘상 16장 14-23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신약 성경의 복음의 핵심 사건이라면 구약의 구원의 핵심사건은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노예된 백성이 어떻게 죄로 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 출애굽이 구원의 사건, 즉 우리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중생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 중생은 신앙생활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신앙생활의 시작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출애굽을 통해서 광야생활로 들어간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훈련시키십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 출애굽이 믿음으로 주를 고백하는 세례의 사건이라면 그것을 통해 시작된 광야의 사건은 이른바 성결의 과정이요, 성화의 과정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성화, 성결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세상적인 나, 정욕적인 나, 이기적인 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나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만나를 먹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으로...

반석의 물을 먹음으로 -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일어났어도 신약시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는 구원의 사건을 기뻐했을 지언정 이 땅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으로 제자들은 문을 걸어잠그거나 뿔뿔히 흩어져 고기 잡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에게 더 큰 삶의 어려움인 광야 생활이 주어지듯 예수는 부활했지만 제자들의 삶엔 오히려 두려움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언제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가? 

그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함으로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들의 삶의 능력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곧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사도행전과 이후의 신약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를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생활이 무엇이냐? 바로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생활 하는 곳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여 성화를 이루어져 가는 것이 교회 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인 곳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이 모여 주의 자녀답게 사는 연습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가 성결을 이루어 가는 곳,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곳, 성령의 충만함을 향해 가도록 훈련받는 곳이라기 보다는 구원받기 위한, 구원을 위한 문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열린예배, 구도자를 위한 예배- 이런 예배를 통해서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점점 사람 중심의,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로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을 모아두고 안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변론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설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포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복음은 있는데 변화가 없다. 고백은 있는데 삶은 엉망이다. 말씀으로 성화, 성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훈련받아야 할 교회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가르치는데만 급급한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화, 성결, 성령 충만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바르고, 깨끗하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중심이 바르고, 행동이 다르고, 삶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모델을 오늘 읽은 다윗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바울은 다윗을 가르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혹은 요즘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자가 되었을까?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 사울을 버렸습니까? 

기름 부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택했다는 것이고 홍해를 건넌 것이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 받은 자가 다시 버림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학에서 첨예하게 논쟁되어 온 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요 10: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의 구절과 

(히 6:4-6)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등의 구절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 하다가 이단으로 빠지거나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거짓 신앙,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이나 당사자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시기에 분명한 답은 하나님이 아실 것이지만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표현이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모든 조건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구원받는 자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구원받은 자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고, 멀어지더라도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사실을 알려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또한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하냐면 신앙 생활 하다가 우리가 고의던 고의가 아니던 죄를 짓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냐면 이제 나는 자격이 없다. 버림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다. 신앙의 어두운 밤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돌이키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시고 또 돌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맞아주십니다. 

구약의 악한 왕들도 심판을 약속하시지만 그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사람의 완악함이,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할 수가 있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하고,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되돌아올 줄 모를 때에, 천상천하에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할 자유를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지로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아말렉을 진멸하여 남은 것을 다 불태우라고 하셨지만 순종치 아니하고, 자신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예배를 드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거듭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데도 절대 회개하지 않고 거짓과 변명만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 위에 오르기까지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요나단을 통해, 그리고 다윗을 통해 끊임없이 사울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사울은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몇번 다윗 앞에서 후회하는 척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윗으로 시선을 옮겨봅시다. 

사울이 하나님을 등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왕을 예비하십니다. 

16장 1절 후반절에 "내가 그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굳은 일 도맡아 하는 막둥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의 무엇을 보고 그를 왕으로 택하셨을까? 

바로 양을 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양을 돌보는 그의 모습이 특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대화에서 목동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목동이라는 것 자체를 천한 일로 여겼습니다. 집 안에 있지 못하고 계속 집 밖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동을 하면 집 밖 사람으로 대우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청하여 아들을 불러 오라고 했는데 다윗을 부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식구가리 보다는 언제나 집 밖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로 믿을 수 있는 종들이 목동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목동을 하는 것만 해도 억울한 일인데 다윗은 그 일을 소흘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이 양들을 지키고 있는데 사자나 곰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자와 곰과 맞서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집에 와서 사자와 곰이 나타나서 도망왔다면 아버지도 "넌 괜찮냐, 다치지 않았냐?" 하지 왜 양을 버리고 왔느냐라고 말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종이라 하더라도 양을 버리고 온 종을 나무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자와 곰 앞에서 양을 지켰습니다. 지키기 위해서 돌팔매를 연습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도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양을 놓고 오니 억울하고 분합니다. 아버지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돌팔매를 갈고 닦습니다. 그런데 양을 지키기 위해 갈고 닦은 돌팔매가 나중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무기가 됩니다. 

양을 아끼는 마음이 자기에게로 피해온 소외된 자들을 지켜 결국 이스라엘의 주축을 이루는 토대로 그들을 세웁니다. 

결국 목동인 다윗을 통해 하나님은 왕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 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별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로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집안 사람인지를 따집니다. 

심지어 사무엘 조차도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무엘 조차 사울처럼 키 크고 준수한 사람을 왕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이제 중심을 보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습니다. 


오늘 제 마음에 꽂힌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울이 악령이 드니까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하는 자가 바로 "수금타는 자"입니다. 

다윗은 수금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불려왔습니다. 

양들을 돌보며 수금을 탄다고 하니까 그저 그림책 보듯이 낭만적으로 한가하게 들판에 앉아 노래하는 다윗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양을 돌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안듣기로 소문난 양을 끌고 가는 일도 어려운 일이고 양을 데려간 이후에도 눈길을 떼면 안됩니다. 

또 다윗이 말했듯이 사자나 곰이 오면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돌팔매도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수금타는 자가 됩니다. 

그냥 유행가 부르듯 아무 노래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은 그가 수금을 타며 지은 시입니다. 

성가곡들 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입니다. 


형들은 다 아버지에게 대접받고 멋진 군복도 입고 나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인정받는 일들을 하는데 다윗은 가정에서도 집 밖 사람으로 여기면서 소외된 삶을 삽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심부름꾼이요, 형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천덕꾸러기 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합니다. 그것이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기쁘게 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즐겁게 일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양들의 목자이듯, 그는 자신을 지키는 자신의 목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실 분이라는 믿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일, 자기에게 맡기워진 일을 다윗은 사랑했고 충성을 다했고 기쁘게 일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는 목동의 일을 하면서 그냥 떼우듯이 일하지 않았습니다. 

양을 돌보기 위해서 돌팔매의 전문가가 되었고, 찬양을 하면서 찬양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양을 돌보는 전문가에서 시작해서 돌팔매의 전문가, 찬양의 전문가, 나중엔 나라 목회의 전문가, 왕이 되었습니다. 


숙제 하듯 어렵게 일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일을 정말 사랑하고 더 잘하고 싶고, 더 오래 하는 사람이 전문가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 삶을 통해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일을 잘 하기 위해 남는 시간 동안 연습하고, 가꾸고, 훈련하고, 그 일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목동일 때부터 그를 왕으로 점찍으셨습다. 목동인 다윗을 처음부터 왕이라고 기름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왕궁으로 보내어 사울을 섬기게 합니다. 

그를 위해 수금 타는 자로서, 무기 드는 자로서, 군대 장관으로서 서서히 그를 왕으로 만들어가십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그는 사랑했고 충성했고 정직했습니다. 

이 일은 마음에 안들어, 이 일은 적성에 안 맞어, 자신의 마음에 따라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은 곧 사명이었고, 십자가였고, 그는 그 십자가를, 사명을 기꺼히 지었고 사랑했고 책임졌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청지기 들에게 주고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맡긴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긴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 종은 남들은 다섯 달란트 주고 두 달란트 주었는데 자신에게는 한달란트만 주어서 뿔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이것같고 무엇하냐 하고 불평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선 다섯 달란트나 한 달란트나 적은 일입니다. 적은 일을 통해 큰 일을 맡기십니다. 

그저 자기에게 맡기운 것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흔히들 작은 교회에서 무엇을 할려고 하면 우린 큰 교회도 아닌데, 재정이 좀 모이면 하지..하고 스스로 소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큰 교회는 더 세련되고 더 완벽하게 일하는데 작은 교회는 더 대충, 더 소극적으로 일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따라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한국의 공교육이 위기다 위기다 하면서 여러가지 대안 학교들이 등장합니다. 

공교육이 제시하지 못하는 인성 교육, 인문 교육, 자연 교육, 예절 교육, 교양 교육 등 각 대안 학교 마다 각자의 색깔, 각자의 목적과 특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저는 우리 로고스 교회가 단지 시스템이 잘 갖추어 있는 교회들을 따라가느라 헉헉대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특성있고 대안적인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쏠티와 함께 라는 음반

작은 교회 주일학교를 통해 시작된 노래와 율동이 지금까지 계속될 정도로...


이왕하는 성가대, 정말 잘 교육하고 하나님께 영광이요,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찬양의 전문가들로 훈련시키고 싶고

영성학교를 통해서 다른 교회에서 맛볼 수 없는 영성의 깊은 훈련과 교육을 행하고 싶습니다. 


작아서 대충하고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기쁘게 헌신하고, 즐겁게 열매맺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 그런 목회를 꿈꿉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