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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 (출애굽기 15장 22-27절) 


전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 그러니까 제가 6살때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형과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도 많이 다니고 주일학교도 물론 열심히 다녔으며 어른들 참여하는 부흥회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제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였습니다. 

천로역정을 하다가 마지막이 '세개의 못'이라는 찬양을 부르며 각자 자기의 죄를 적은 메모지를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으며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못박혔다는 것을 묵상하고 들어와서 기도회를 하였는데 그 때 갑자기 회개의 기도가 터지면서 중 2학년짜리 소년이 눈물 콧물 다흘리며 방언도 나오고 예수를 진심으로 영접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죄"라는 말을 항상 들어오던 터라 거짓말을 한다든지, 살아가며 실수하면 늘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회개하며 이제 이 죄가 다 씼어졌다고 생각하니 정말 씼은듯이 홀가분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제 내가 새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충만했고, 감사했고, 기뻤습니다. 

정말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수련회를 갔다와서 며칠 되지 않으면 또 옛날에 짓던 죄를 반복해서 짓고, 변한 줄 알았는데 물론 조금은 변했지만 만족할 만큼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기지도 않았고, 그런 것을 느낄 수록 또 다시 죄에 대한 무게가 더해졌습니다. 

해마다 수련회를 가고 부흥회에 참여했고, 어릴 때부터, 방언, 예언, 입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낯설치 않게 집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만 그 은혜가, 은혜의 충격이 계속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목회를 옆에서 지켜보며, 또 제가 목회를 경험하면서도 눈물, 콧물, 다 쏟으며 회개하며 은혜받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화될 것 같았지만 그리 변화되지 못하고, 그 다음 주면 또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실망도 많이하고, 포기도 많이 하고, 은혜에 대한 신뢰도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바로 전장 14장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다룹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해석을 빌자면 영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고전 10:1-2절)  

출애굽 사건은 세상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이고 그것은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이제 뒤돌아 서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이 세례는 우리 개신교 신학적 용어로 중생의 순간입니다. 세례는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이에서 그들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기 때문입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고, 또한 그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별하시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넌 것이요, 또한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세례의 사건은 그 분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고백이요, 이것은 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홍해 사건을 다룬 14장의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강한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15장에 들어가면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로 및 애굽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로 시로 찬양을 합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이제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이제 인도하시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걱정으로, 원망으로, 고통으로 변하는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입니다. 

작심3일이듯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제 그 분을 믿기고 세례 받고 결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3일만에 좌절과 고통과 원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처음에 성경을 읽을 때는 무슨 백성이 이리도 우유부단 할 수 있을까하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언제고 고작 3일 지나서 인생의 쓴물을 보았다고 있는대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까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만 3일만에 은혜를, 믿음을 까먹는 것이 아니라 저 또한 그렇고 많은 성도님들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그대로 있지만 그 하나님과 내 삶이 무관하게 느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 믿음, 쓸데 없는 믿음, 종교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어도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 되심을 누리지 못하고 로고스의 말씀은 믿어도 나에게 주신 레마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 믿음을 무가치하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일상의 어려움, 무엇을 먹을까..삶에 대한 무게...


그런데 백성 편에서 볼 때에 그들의 불평은 한 편 이해할 만하기도 합니다. 물이 없이 사막을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사막, 물론 구름기둥이 함께 하고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한다 하더라도 그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장정만 60만 추정 이동 인구 200만이나 대는 대규모 사람들이 가축과 함께 마실 물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겠습니까? 며칠 만에 발견한 물인데 써서 먹을 수가 없으니까 바로 모세를 향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연약함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바로 3일 전에 목격했던, 체험했던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의 통치자 하나님이 물이 없자 바로 무력하고 자기랑 상관없는 하나님, 당장 무엇을 마실까 염려해야 하는 하나님으로 전락해버립니다. 


누구라도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도 아닌 3일을 물이 없이 지내야 했다. 

그것도 단지 가만히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사막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3일 만에 만난 물이 먹을 수 없는 쓴물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눈으로 본 하나님이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당장의 삶의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너무도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은 무엇인가?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 대다수가 선택하게 되는 자연스런 결과. 

당신이 하나님이면 뭐 하냐 당장 먹을 것이 없다. 난 영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달치 생활비가 더 급하다. 

일상의 어려움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탓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한 선택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 신앙인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가 신앙생활 중에 이런 쓴 물을 만났을 때에 기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반응인 원망과 불평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선택하고 신앙을 포기한다. 현실 앞에 믿음은 어쩔 수 없다고 하나님도 어쩔 수 없고, 다 이해하실 것이라고 변명과 합리화도 합니다. 


그런데 오직 모세는 그러한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켜 그 나무를 물에 넣게 합니다. 그 나무를 넣지 물이 달게 됩니다. 


(출 15: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스라엘 역사- 실재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 하나가 마치 시처럼 영화처럼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장면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나중에 그 장면이 무슨 암시를 주고 의미를 주는지를 관객과 함께 나눕니다. 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하나님이 주관하신 신앙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한 나무"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기독교 주석가와 신학자들은 이 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낸다고 지적합니다. (유대교 주석가들은 단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구물로서...) 그런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에게 이 나무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삶의 어떤 고난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는 은혜로서 다가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행위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어떤 고난도 십자가와 앞에서 이해될 수 있는 체휼하심이 되게 하시길 위해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예수없이,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 하는 자들에게 신앙의 여정은 마라, 쓴물입니다. 

힘들기만 하고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할 때는 찬양하고 즐거워하지만 쓴물을 맛볼 때면 언제그랬냐는 식으로 험한 말들을 합니다. 


(출 15: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거기서: 어디서? 예수 없이 살아갔던 신앙인들에게, 십자가 없이 하나님을 부렸던 그런 사람들에게

오직 믿음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알게 하신 뒤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 가장 먼저 주신 법도와 율례


(출 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들을 것이냐? 신앙 생활은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들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다름아닌 우상숭배다. 미국 사람들. 교회 나가지 않아도, 순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 난 다 안다. 신앙생활은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 의: 관계가 바른 것. 하나님과의 관계, 
  • 귀를 기울이는 것은 - 집중해서 듣는 것,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경청- 존경하며 바라보는 것.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유언을 듣듯이 내 모든 신경을 모아서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 그리고 지키는 것. 
  •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냥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가 전능하다는 것을 아는 믿음에서 이제 개인적으로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게 하는 것, 일대 일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객관적인 하나님에서 주관적인 나의 여호와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이다. 


그럴 때 일어나는 것- 치료하는 여호와다. 여호와 "라파" 

왜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애굽의 가치관, 세상적인 가치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니까?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계속적으로 마라, 쓴물로서 다가오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나뭇가지는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것. 

날마다 말씀 속에서 그 분의 음성을 경청하고 따르며 행하는 것. 


그럴 때에 인도되는 곳 - 엘림

엘림의 뜻- 큰나무.  엘림이 곧 나무다. 작은 나무 가지로 은혜의 맛을 보았다면 이제 큰 나무 아래 머물면서 함께 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제자가 된다.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 


무엇입니까? 12와 70은 성경에서 주님의 백성, 제자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12제자... 그리고 7교회, 70인의 문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랐던, 예수님과 함께 동거했던, 동행했던....그 분의 제자들. 


복있는 사람은... 

(시 1: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하나님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러면 또 묻습니다. 

제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듣고 순종하며 따르겠습니까? 


내 길, 내 방법, 내 목적을 버리고 그 분의 길, 그 분이 정하신 통로, 그 분이 정하신 목적, 사명을 향해 나가시겠습니까? 


  • 엘림을 지나서 하나님께서 곧바로 하신 일은 만나를 내리시는 일.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날마다 새벽마다 그 말씀 가지고 나아가는 것. 그 말씀 듣지 못하면 하루를 살아갈 수 없없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4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말씀으로 그들을 영육간으로 먹이신다.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던 하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의 삶에 동해하시는 하나님, 영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문제까지도 감당하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매일 같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일상을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믿어도 매일 같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넘어진다. 불평한다. 믿음을 버린다. 탓을 하고 원망을 한다.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생은 얻었는데 오늘은 항상 실패한다. 그런 자에게 영생은 점점 더 먼 문제가 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나를 믿는다 해놓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자다."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다. 그 믿음은 헛 믿음으요, 아무 능력이 없는 거짓 믿음이요, 쓴물 믿음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