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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38-50

제목: 배타성과 엄격성 


 

두 가지 포인트

요한 - 예수님의 수제자, 우뢰의 아들, 사랑을 깨닫기 전, 예수를 가장 열심히 따르는 제자. 

지금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다. 

(막 9: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에서 8장과 9장은 예수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

8장 마지막 부분에 예수는 베드로에 의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되어 진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받아 십자가의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처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길로 제자들을 초대한다. 

십자가의 길, 좁은 길, 좁은 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과 그 분과 그 분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 믿는 자,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두 가지 사실은 그 때의 제자들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지 우리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전능하신, 무한하신, 그 분이 가는 길, 그 분을 따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 만큼이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여전히 예수를 선생님으로 부른다.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예수를 맛보고도 요한은 여전히 예수를 선생이라 부른다. 

성령의 내주하심 없이는 아무리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해도 여전히 자기의 시각에 갇혀사는 것, 그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이다. 


요한이 한 사람을 예수께 고자질한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의 이 말에는 두가지 큰 오류가 있다. 

첫째, 제자는 예수가 선택한 자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모두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따른 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예수에게 오병이어와 같은 풍부한 양식을 위해 예수를 따른다. 어떤 자들은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한 자리 하기 위해서 예수를 따른다. 그런 다양한 이유를 가진 자들이 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는, 적어도 열두명의 제자, 열 두 명의 사도는 예수가 선택한 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 정체성이다. 그 분이 날 먼저 사랑했고, 그 분이 날 선택했고, 난 단지 깨닫고 반응했을 뿐이다. 

내가 그분을 선택했다고 하는 순간, 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과 같다. 나는 항상 상대적이고 불완전하고 우유부단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 순간, 모든 구원의 의가 나로부터 나온다. 결국 내가 믿은 것이고,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가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죄인도 스스로 구원할 자가 없다. 


두번째, 백번 양보해도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이지, 예수와 및 그 제자들을 따르는 무리는 아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넘어서 우리교회에만 나오고,  우리 교단만 참이고 하면...이것은 스스로 만든 제도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요한은 두 번씩이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라는 말을 쓴다. 

그 사람이 누군지 그저 어떤 자라고 한다. 익명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를 따르지 않음으로 그를 금한 것이다. "우리"에 갇혀 있는 자들 그 밖에 사람들은 다 어떤 자일 뿐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라는 공동체 밖에 사람들은 다 "어떤 자"이다. 


주님은 한 영혼 한영혼 이름을 부르시고 일대 일의 인격으로 부르신다.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찾아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부어 주시고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한 사람을 앞에 두고 가장 최고의 설교를 하신다. 


그런데 요한한테 중요한 것은 그가 내편인가, 아닌가만 중요한 것이다. 


누가 큰자인가 만을 외치는 제자들처럼 이처럼 9장은 고백은 있지만 아직도 연약함에서, 미련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낱낱히 보여준다. 


예수는 말한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곧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그를 금하지 말고 같은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과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을 주님께서 하신 적이 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을 쫓아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자는 바람에 날려 요동하는 자처럼 마지막 날에 넘어질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열심을 내고 권능을 가지고 사역해도 말씀에 붙잡혀 있고 순종하지 않으면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또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는 자를 금하지 말라고 하신다. 

헷갈리는가? 


그들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걸고 사역하는 자들이 즉시로 비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재상태의 답보이다. 

그들이 옳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고 행하는 자들이 적어도 지금 상태에서 주님의 반대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그들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너무 배타적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의 공동체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에 걸러질 것이지 지금 미리 판단해서 함부로 실족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혹시 같은 편끼리 실족하게 되면 그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잃은 것이기에 그보다 큰 범죄가 없다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자는 연자맷돌을 매달고 죽는게 낫다라는 표현까지 쓰신다. 그 표현은 죽는 표현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그 만큼 한 영혼이 중하다는 표현이다. 


중학교 때 처음 영어를 배우고 나서 단어 공부를 하다가...Music...-무식

일학기가 끝날때까지 다들 그것을 웃기만 했지 누구도 그것을 교정해 주지 않았다. 난 정말 뮤직이 무식인줄 알았다. 

그 전까지 집안일이 나뉘어져 있었다. 동생은 잔심부름, 형은 쌀씻고 밥하고, 난 청소기로 밀고...

그런데 어느날 동생한테 시켜야 할 일을 내게 시킬 때가 있으면 실수...

커텐치라- 커텐을 왜 치라고 할까...모르지만 순종하자. 커텐을 치고 오면 ...

세탁기를 돌려라 해서 세탁기를 옆으로 돌려놓으면 ...


아니 시킨대로 행했는데 왜 혼낼까? 내가 뭘 잘못했는가? 

문자적인 말 넘어에 있는 의도를 잘 알아야 하는구나... 

행동에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구나...


한솔엄마 전에 사귀던 첫 상대- 결혼은 반드시 그 교회 사람, 적어도 그 교단 사람하고만 해야하는 교단, 

여자는 집사도 안되고, 직분을 줄 수 없다. 그런데 난 어머니가 목사. 


그런데 그것이 진리인줄 믿고 사는 사람들...


가톨릭은 예수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구원이 없는가?....

수학여행도 절에 간다고 하면 안보내고...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무덤에 앉아서 절 대신 기도...그 때에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불확실하다. 신도 불확실하다. 과학도 불확실하다. 이성도 불확실하다. 

모든 불확실한 것 중 단한가지 확실한 것.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고 있는 나 "의 확실성- 이른바 근대(Modernity)의 출현

이 프레이즈 위에 모든 것의 가치 평가는 오직 생각하는 나

그 전에는 풍경화, 모든 예술 작품에서 개인, 나에 대한 표현이 없었다

그런데 이후에는 인물화, 똑같은 풍경도 바라보는 나에 따라서 전혀 다른 대상, 추상화...똑같은 물체를 보지만 전혀 다른 표현으로 바뀜. 


자기 중심적으로 생활함에 따라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 나에게 유익한가? 나에게 친숙한가? 내가 이해할 만 한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무의미.

모든 카테고리의 중심이 "나


그런데 그렇게 신앙생활 하다보면 결국 내가 이해하고, 내가 경험하고, 나에게 친숙한 것만 은혜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내가 친숙한 것만 받아들이다 보면 새로움이 없다. 자람이 없다.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시대에 가장 신앙의 현상-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놀람이 사라지고 신비에 대한 무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내가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의 신앙만이 존재한다. 


근본주의가 왜 나쁘냐고 하는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킨다고 하면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에 나와 있는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지킬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그 사회에서의 부정의 개념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의 부정의 개념이 전혀 다른데 굽이 갈라진 모양에 따라서, 피흘림이 없이, 식물들은 또한 계절별로...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것, 안식일에 대한 철저한 준수...유월절을 지키고 그 때에는 무교병만을 먹고, 

율법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현재 시대 단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할 그런 계명들을 자기들이 몇가지 더 지킨다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그것을 합리화....


점점 더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 반대로 무조건 포용해야 하는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와도 사이좋게 지내고, 죄인들과도 구별짓지 말고, 흔히 말해 동성연애자들도 교회 안에서 품어주며...


그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예수님 당시 죄인으로 가장 지목받았던 자들. - 문등병자들, 세리들, 창기들....짐승보다 못한 대우.

예수님이 그들을 다 포용하셨지 않는가? 

(롬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 55: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의 포용에는 한계가 없다. 

한 흑인 크리스천...타지역을 돌아다니다가...예배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백인 교회...

흑인은 들어가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한 번도 주일을 어긴 적이 없는 자였는데... 

예배당 문밖에 서서 안절부절 하며 예배드릴 방도를 찾고 있는데, "너도 못들어가고 있냐? 나도 못들어 가고 있단다..." 하며 그와 함께 하신 주님. 


모든 사람을 포용하면 그럼 똑같이 더러워지지 않는가? 어찌 빛이 어둠과 함께 거닐 수가 있는가? 

어떻게 거룩을 지키는가?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려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뺴버리라." 

무서운 말씀. 

네 이웃과 주위는 포용하되 나 자신 만큼은 하나님 주신 말씀, 계명 안에서 엄격하게 지키라는 것. 


계명이 무엇인가? 남에게,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말씀을 읽다가 나에게 준 말씀이다. 

오직 내가 깨달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잣대로 엄격하게 자신을 훈련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소금의 맛을 잃지 말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장 흔한 쉬운 말로 하면 남은 포용하고 나에게는 엄격하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대개 그 반대로 사니까?...나는 다 이해해줘야 하고 남은 나와 다르면 정죄하니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내 눈에 두고 남을 판단하지 않고 내 중심에 새겨 나 자신을 훈련하고 거룩케하며 상대방과는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소금은 그냥 홀로 있으면 아무도 먹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낼 적에 소금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우리끼리는 괜찮다. 어려움이 있어도 말씀 보면서 이길 수 있다. 같이 있으면 즐겁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보면 속이 상한다. 

저들을 누가 도와 줄까 생각한다. 그런데 하질 못한다. 그 곳에 낄 생각을 하면 두렵고, 무섭고, 불결하다. 

밖에 나가 전도하자면 나가질 못한다. 누구 한사람 믿지 않는 영혼 만나질 못한다. 

섞이질 못한다. 그냥 굳어버린,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소금을 뿌린 생선은 썩지 않고 오래 갑니다. 참 믿음을 가진 성도가 세상에 섞여 있으면 썩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섞여야 합니다. 소금물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또한 맛이 없습니다. 

소금이 그대로 있으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합니다. 이곳 저곳에 섞여 있어야 맛있는 세상이 되고 맛있는 교회가 됩니다. 


밖으로 포용하고 안으로 엄격한 소금같은 교회, 소금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소금의 열매는 바로 화목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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