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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by 소리벼리 2021. 3. 27.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뜻 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수로보니게 여인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다룬 마태복음에서는 뭉뚱거리면서 그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이방땅으로서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제력으로도, 지식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예수가 그 동네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녀가 예수를 찾는 장면이 더욱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그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질렀다고 기록합니다. 

어느정도 지체 있는 귀부인이 자기 딸을 위해 애가 닳아 예수에게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계속 부르짖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모르쇠로 일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섰습니다. "예수님! 여자가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으니 대충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돌려 보내주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더욱 소리를 높여 지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끈질기게 애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수를 꽂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 이스라엘 전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 했지요. 그래도 자기들끼리 이야기이지 사람을 대 놓고 이렇게 개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끼리는 싸우자는 소리고 여인에게 했다는 것은 정말로 해서는 안되는 자존심을 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저 자기 딸을 고치러 온 한 연약한 이방여인에게 "개"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쾌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게 여인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이순간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자기는 그런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지금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온 목적: 딸을 고치려고.. 그 딸을 고치실 수 있는 분

 

cf) 마가복음 7장 1-9절 : 예수를 보러 왔다가 비판만 하고 가는 사람들 

나아만 장군- 

(왕하 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그러니까 자기의 자존심, 지금 딸 앞에서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 읽혀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고 여자를 칭찬하시며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침묵/ 혹은 외면이고 두 번째는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1. 침묵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하소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한 번 부른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라고 했겠습니까?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답답하고 두려운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혹시 불공평하신 것은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 고쳐주시고 이방인에게는 침묵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한 불쌍한 이방 여자가 와서 요구를 했을 때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없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은 이 여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우리의 일상 속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이 여인처럼 답답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가? 자칫 시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침묵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습니다.

1)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향해 있는가? 정말로 나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내가 내가 침묵할 때 넌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끝까지 내게서 구원을 얻으려 하는가? 넌 나의 때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수 있는가?... 

2) 하나님의 때 - 요셉: 술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다음 2년간의 침묵기간. 

 

지금 마음에 안달이 나 있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첫 번째 침묵으로 그녀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다가 침묵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낙심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실 때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분이 먼저 우리의 상황과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분은 침묵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확실히 하고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 (막 7: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통해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가? 

이 여인의 모든 간구의 목표는 딸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음식을 구하고, 돈을 구하고, 치료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기도 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만을 구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구하는 것과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이방인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있고 뼈 속까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고, 그녀의 생각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채, 오직 딸만을 위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이지 그 이상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 7:8)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니까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떠남. 

신앙이 없는 자에게 복이 들어가면 오히려 타락과 죽음.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지금 국가라는 벽, 종교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합니다. 그 믿음은 국가와 종교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사람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처럼 혈연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닙니다. 허다한 잡족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 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신앙인들에게 준 것이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모시고,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넌 나의 자녀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계속해서 이방인으로서 살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여인이 대답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난 개입니다. 난 이방인입니다. 내 종교와 내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딸을 고칠 수가 없고 내게 어떤 구원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당신이 내 주인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것 바라지 않습니다. 난 이방인이고 아직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주인으로 이제 주님만 믿으니까 나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지요. 

이제 국가와 종교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지체없이 그녀를 칭찬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자들에게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시는 것이지요. 

 

겸손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겸손함은 곧 간절함입니다. 성품이 아니라 간절함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그 큰 벽, 그 짐을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간절함은 침묵을 극복합니다. 인내로서 영적인 성숙을 이룹니다. 

침묵할 때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왜?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함은 자존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큰 자는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존심을 내세웁니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문등병을 치료하라고 할 때... 요단강에 가서 목욕해랴... "날 뭘로 보고... 우리 나라에는 그만한 강이 없는가?" 

"뭘로 보긴, 문등병자로 보지...문등병 치료하러 왔지 장군 훈장 받으러 온 거 아니잖은가?" 

목적이 분명하고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헛된 데 자존심 세워 그르치지 않습니다.  

 

죽을 병에 걸려서 그 병에 대한 가장 유능한 의사의 소문을 듣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 시설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 변변치 못합니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모습이 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같습니다. 좀 비슷해야 기다리면서 자랑도 하고 수다도 떠는데 도무지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꾹 참고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의 말투가 거스릅니다. 나를 다른 환자들이랑 좀 다르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 형편없는 환자들처럼 막 대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 병원에 갔다고 욕을 하고 나오겠습니까? 

 

정말 저 의사가 자기 병을 고쳐줄 의사라고 믿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교회 나온 목적이 사람 대접 받고 싶어서 나온 것입니까? 

좋은 시설 보고 싶어서 입니까? 

자기랑 수준맞고 관심사가 같은 사람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 분께 예배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께서 허락한 공동체에서 자라나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생활 하면서도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많이 참습니까? 

돈 때문에는 그런 것 다 참아가면서 구원을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는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수준을 찾습니까? 자기 수준 찾으면서 정말 회개의 심령을 가질 수 있습니까? 

갈급하십니까? 간절함이 있습니까? 자기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있습니까? 

그럼 다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며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보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혹시라도 그분이 침묵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아무리 상하고 내 인격이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그 분께서 버리라 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됩니다. 그래야 천국의 복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시험하려고 우리에게 신앙적인 불편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참 자녀를 삼아 주시려 하기 때문에 때로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도 하십니다. 저도 주의 종으로서 언제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 자유를 주시고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묵상질문) 

1. 자존심으로 인해 시험에 든 경험을 이야기해보자.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보러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시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