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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소명)

(마가복음 2:13-17)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태를 제자로 맡으시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로마 정부 밑에서 세금 징수의 임무를 띠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충성스럽게 바치는 직업이 세리입니다. 한마디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로마의 세법대로라면 세액의 1할 5푼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할, 3할 5푼까지 높게 초과 부과하여 그 차액을 착복했습니다. 세리는 로마 권력의 막강한 비호 아래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관리나 군인들 보다 더 나쁜 민족 반역자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세금을 감해 주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추가해서 세금을 뜯어냄으로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어겠습니까? 나라를 잃고 억압받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같은 동족인 세리가 고혈을 짜듯 많은 세금을 갈취해 가니 그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했고 법정의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세리는 기생, 이방인, 죄수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했고 늘 외면당했습니다. 

한국에 굉장히 부흥한 한 대형 교회의 중창단이 있는데 그 중창단은 그 교회에 위탁된 목사님 자제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우리 자식 좀 잘 훈련시켜 주십시오 하고 맡긴 자녀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2년여 동안 합숙시키고 훈련시키고 날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면서 신앙적으로 훈련시키고, 성적도 상위권에서 떨어지면 안되고, 또 음악적으로도 철저히 훈련시켜서 해외 공연도 보내고, 발표회도 시키는데 한 사람당 일년에 들어가는 비용이 1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부담해서 철저히 훈련된 찬양사역자를 배출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이 중창단에 자기 자녀를 보내기 위해서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중에 술 담배 다하고 학교는 잘 안 다니고 새벽예배나 철야예배는 드려본 적도 없는 그런 친구가 들어온다면 이 중창단 분위기가 어떨까요? 아마도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자기 자녀를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기의 공생애를 함께 하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전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을 위임할 제자를 뽑는데 사람들로부터 취급 받지도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마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제자를 삼으시고 그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의 문화에서는 누군가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매우매우 친하거나 아니면 큰 도움이나 은혜를 입어 그것을 갚기 위해서 자기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레위는 자기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저녁만찬을 준비하고 그분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친한 동료들. 그리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을 것이다. 

15절)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더라. 

그러한 사람들. 자신들의 죄로 인해 사람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데 여기에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며" 바리새인들이 의아함 반, 조롱반, 비아냥 하듯이 다른 제자들에게 묻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이 누굽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건성은 자타가 다 인정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바로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유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 정파 중에서 유대교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그야말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오랜 동안 나라 없이 살아온 유대인들이 민족정신과 종교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셋째,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지금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보면 충격에 충격을 주는 말씀이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와 근거를 예수님이 해체해버렸으니까요. 

그들의 목표는 의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의인이 되는 것에만 몰입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런 의인들을 구원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의인이 아니라 이들이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종의 폭탄선언입니다.

(논문 커미티 중에서 정통 유대인 교수) - 유대인에 대한 차별. 자신들은 예수의 시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당혹스럽게 들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딜레마, 예수님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두 죄인임을 가정하고 인정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양을 부르며 예전에 지은, 혹은 지금도 가끔씩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인은 예전의 죄를 생각하며 뉘우치는 그런 죄인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혐오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능한 한 교양이 있고,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의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이라는 의식입니다. 

추상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적으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세리의 정체성이고, 후자는 바리새인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이중적 자기 인식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삶은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바리새인의 잣대로 끊임없이 정죄하는 허위의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지, 저보다는 낫지 하는 비교의식, 상대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분명 세리들보다는 훨씬 더 낳은 자들, 더 의로운 자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세리들이나 다 똑같은 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들 중 한 명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고 한 명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보다 죄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먼저. 더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위와 그의 친구들은 드러난 죄인들이었고. 바리새인인 서기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정말 ‘의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기에 금식하고 예배하며 죄를 멀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적 행동과 결단과 수련(修練)함으로써 스스로가 ‘죄인’이라 말하지만. 속으로는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 겉과 속은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정의로웠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지 못했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하지만. 사실 그분 앞에 나아가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서성이고 있었던 바리새인을 향한 정직함에 대한 이야기다. 겉으로 드러난 죄와 질병을 치유하는 성령의 세례만이(1장) 예수님이 사역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곪아 썩어가던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것(2장)도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런 그들에게 가장 아쉽고 어려웠던 것은 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 대한 사역이 니고데모에게, 아레마데 요셉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인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씀한 게 아니라 그들을 부르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세리와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만약 모두 세리와 죄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모범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썩 괜찮을 사회가 될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세리보다는 바리새인들이 개인이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그의 생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앙적 인식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 의(義), 또는 업적 의입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런 의를 얻으려고 구도자적인 태도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경건한 삶의 성과를 얻었으며, 그런 업적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가 왜 문제일까요?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합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 왜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죄인은 자기를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내세울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중심으로는 자기가 이룬 업적에 매달릴 뿐입니다.  

마태는 어떤 자였나? 부도덕하고 불의하며 돈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지탄의 대상,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왔던 자. 그는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자기 이익을 위하여 불의를 일삼고, 탐욕이 가득했던 자, 돈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하고 무정한 자?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불러주셨다. 

마태는 이 한번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됩니다. 이 한번의 부르심을 통해 마태는 초대 교회의 유일무이한 열두 사도가 되었고, 신약 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위인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그 하나님께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양치기 목동 다윗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고,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시어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삼으셨으며,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을 부르시어 온 지중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토록 강력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이토록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부르심을 신적 부르심, Divine Calling 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대신해서 번제를 집례했던 사울 왕이 그랬고,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랬고, 모세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그때 모두 자기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렸고, 유대 청년 사울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였고, 모세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병사를 때려눕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자기 열심으로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머무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섞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직업인 세리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나를 따르라


마태의 이름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레위(Levi)라는 이름은 과거 모세와 아론의 지파이름으로 대대로 제사장의 직위.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지파의 이름인데. 지금의 레위(Levi)는 동족을 가장 앞장서서 괴롭혔던 ‘세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레위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돈을 추구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떳떳하지 못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했더니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를 택하시고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마태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자비롭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소외를 당하고, 비루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던 사람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마태는 이전의 세리 직업을 정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제자가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제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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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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