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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 1장 3-8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가장 늦게 씌여진 서신문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기 바로 직전에 쓴 것으로 바울 역시 자기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디모데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유언처럼 남긴 서신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주일날 나누고 있는 빌립보서도 똑같이 감옥에서 쓴 서신문이지만 빌립보서에는 아직도 기쁨이, 소망이 충만하지만 디모데후서는 좀 더 무겁고 진중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디모데후서는 그 어떤 서신문보다 비장하고 간절합니다. 

자기의 임박한 죽음을 느끼고 있는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가장 보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절에 보니까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고 절망스럽더라도 디모데만 보면 힘이 나고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디모데만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의 믿음의 내역까지도 칭찬을 합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그의 증조모부터 그의 어머니를 통해 이어져 온 믿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동안 바울의 든든한 신앙의 선배이자 후원자였던 바나바와 다투고 2차 여행을 준비하면서 시작됩니다. 

왜 바울이 바나바와 다투게 됩니까? 


마가는 이미 1차 전도여행에서 힘이 들다고 중간에서 떠난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데려가 보아야 힘든 전도의 여정길에서 도움이 되기 보다는 짐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생질인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를 데려다가 일꾼을 만들려고 합니다. 


  •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면 이 일로 인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잘못한 것이냐? 하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바나바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리 바나바가 잘못을 했어도 어떻게 바울이 그럴 수 있냐합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도 여전히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을 때에 그를 믿어 열두제자들에게 소개 시켜준 자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은인 중의 은인 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바나바에게 버럭 대들면서 다툰다는 것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을 드는 사람은 바나바가 공적인 일을 앞에 두고 자기의 조카를 챙기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마가가 그의 조카가 아니었더라도 바울과 다투면서까지 그를 데리고 갔겠냐는 것입니다. 

이후에 바나바가 사도행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도 성경이 바울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은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하면서 결국 마가의 믿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마가는 누구였습니까? 비록 잡혀가는 예수님을 홋이불을 버려두고 도망했던,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했던 1차 전도여행에서 힘든 여건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던 자였지만 결국 그의 집에서 성령의 사건이 임했으며, 그에 의해서 첫번째 복음서 마가복음이 씌여 졌으며, 그는 나중에 베드로사도의 아끼는 제자가 되어 베드로를 대신하여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믿어주었던 바나바와 떨어진다는 것이 바울에게도 얼마나 큰 부담이고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때 실라와 더불어 새로운 동역자로 만난 것이 바로 디모데입니다. 


[행 16:1-행 16:2]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절에 보면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나는 밤이고 낮이고 너를 내 기도 중에서 생각하면서 내 진심을 다해 내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냥 너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청결한 양심으로 내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하나님께 너를 두고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합니다. 왜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할까?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데 바울은 자기의 조상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의 신앙의 내력을 말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네게도 있음을 확신한다. 


아니 믿음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디모데의 믿음만 칭찬하면 됐지 구태여 그의 외할머니부터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칭찬합니다. 


자칫 이런 말을 잘못 오해하면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그의 가족이 예수를 잘 믿지 못하면 거짓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왜 바울이 그토록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의 기도를 이야기 할 때도, 디모데의 믿음을 칭찬 할 때에도 그런 신앙의 내력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그만큼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이 구절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는 믿었으나 세상으로 나간 자, 자신을 배반하고 모욕을 준 자들에 대한 강한 회한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생명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방과 배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에게는 

나도 너도 우리는 신앙의 내력이 있는, 변치 않는,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마지막 때까지 믿을 수 있는 동역자임을 아프게, 통렬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울이 힘들고 아프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할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네 눈물을 생각하여


[딤후 1:6 - 8]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죽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은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는 것이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신앙인이 갖게 되는 소망? 착각? 


믿는 자로서 잘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고 싶다. 

내가 잘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


물론 우리는 잘 될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이 어려울 때, 힘들 때, 아플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환경과 관계 없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영광 받으시는 분입니다. 


기독교인이 사업에 실패하면 신앙에 실패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패하도 넘어지지 않는 것,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 그것이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십자가 이후의 부활 신앙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순교의 역사입니다. 


처음엔 아무런 열매 없이 죽어간, 정말 의미 없어 보이고, 아무런 열매 없어 보이는 그런 십자가 인생들이 모여서 

한국이, 중국이, 동남아가 하나님이 나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울은 지금 자신으로 인해 낙망할지 모르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라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날 떠나도 넌 순전한 믿음을 지키라고, 너만은 나의 믿음을 알아주고, 너 만은 나의 신앙을 따르라고 지금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디모데를 바라보는 바울의 기쁨과 더불어 그가 처한 고통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보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


그 믿음 좋은 바울도 고난의 극에 달했을 때에 모두가 날 버렸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비록 바울을 조롱하고 비방하고 떠났어도 모두가 바울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베두로후서에서도 베드로는 바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끝까지 바울을 챙겼던, 따랐던 많은 동료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 때에 나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그런 바울의 솔직한 편지는 솔직하기 때문에 더욱 큰 감동을 줍니다. 


  • 바울의 삶에서 등장하는 마가와 디모데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끝까지, 한결같이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동력자로, 영적인 아들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마가는 잠시 잠깐의 고난을 피해 예수를 버리고, 바울을 버리고, 디모데를 보리고 간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 둘의 똑같이 쓰임받는 자가 됩니다. 디모데라고 더 크게 일하지 않고, 마가라고 부끄러움만 당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성령의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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