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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3-10절:  참된 경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을 떠나 다른 교훈이 나뉘게 될까? 


새벽예배 시간에 마가복음 10장을 나가는데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말씀에 대한 힌트를 살펴 볼 수 있다. 


마가복음 8장엔 그 유명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고백 사건이 나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황제의 이름을 딴 황제의 신전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도시이다. 그 곳 한 복판에 선 예수와 및 제자들의 행색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남루한 그런 촌사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예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신다. 


신앙 고백은 우리가 행복할 때, 우리가 성공했을 때에, 우리가 은혜 받을 때에 물으시는 물음이 아니다. 

내 인생에 의문이 다가올 때에, 내 신앙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 내 신앙과 삶의 현장이 너무 극명하게 갈등하고 혼란 할 적에 주님의 그 한 복판에서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우리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오랜 기간 이단과의 깊은 갈등과 핍박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나온 고통 속에서의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 후에 주님은 비로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핍박하며,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얘기를 할 때마다 제자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  

처음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항변했다. 

항변했다는 것은 꾸짖었다는 것이다. 

십자가 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두 번째 말씀을 하실 때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흘려 넘긴다. 

그러면서 바로 길거리에서 "누가 더 크냐?"하면서 제자들끼리 다투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주님은 더 분명히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예 반응하지 않는다. 무시하고 침묵한다. 

그러면서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께 슬그머니 와서 "주의 영광이 임할 때에 하나는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있게 해달라고" 청탁한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그리고 그것을 계속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거기가면 영광스런 자리가 기다리고 있고,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자기들은 모두 공신이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같은 길을 가면서 정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저희들이 쓴 "백투더 클래식" 첫 글에 보면 이종태 목사님이 쓴 '큐리오시티'란 글이 나온다. 

거기엔 말씀을 대하는 두가지 태도를 '면학심'(studiositas)과 호기심(curiositas)는 말로 구분해서 말한다. 

호기심과 면학심은 둘 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호기심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자기 만족과 교만함을 위한 갈망"이고 

면학심은 자기가 아는 것을 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호기심이 자기를 향한 사랑에 근거한 마음이라면 면학심은 지식에 대한, 말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다. 

어거스틴 이후로 중세 때까지 사람들은 면학심은 중요한 덕으로 칭송한 반면 이 호기심은 탐심이라 하면서 죄로 여겼다. 


3절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은 무엇인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 내 삶에 소화시키게 하는 것, 이것이 경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주님의 생각을 끼워맞춘다.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누가 더 커요? 나좀 주님 옆자리 앉게 해 주세요 하던 제자들처럼 자기 목적으로 인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갇혀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는 주님의 말씀 보다 자기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이므로 교만한 것이요, 교만한 자는 결국 주님의 어떤 말씀도 받아 들이지 못함으로 역설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교만하고 무지한 자의 옆은 항상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 투성이다. 

이런 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 같으나 경건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고, 교만해지고 인정받으려 하고, 성공하려 하는 것이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경건은 자족하는 것이다. 

자족은 내게 알려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경외, 두려워 하며 그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이 경건이다. 

경건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발생하는 내 희생, 내 연약함, 내 무기력함, 내 낮아짐을 족한 줄로 여기는 것이다. 


꼭 믿음 생활 잘해서 축복받는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죽도록 헌신했지만 가나안 땅을 앞에 바라두고 여호수아에게 자리를 물려 주어야 했고, 바울은 죽도록 헌신했지만 감옥 안에서 외롭게 죽어야 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들의 핀 국화처럼, 하늘의 새들처럼 살 수 있다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솔로몬의 궁전에서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목적이지 천국이면 되는 것이지, 꼭 일등석 타고 천국갈 필요가 없다. 

목적지가 천국이면 족한 것이다. 


부하려 하는 자, 성공하려 하는 자, 자기 만족을 다 가지려 하는 자, 9절에 보니까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 끝은 파멸과 멸망이다. 

그리고 그 탐심의 가장 근원이 결국 돈 문제, 일만 악의 뿌리, 돈에 대한 욕심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