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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1-2절 

종과 주인과의 관계


5장에서 바울은 디모데 및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의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교회에도 가정과 같이 어른을 공경함과 존경함이 밑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과부와 장로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디모데에게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며 교회를 잘 치리할 것을 말씀 합니다. 

지금까지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제 6장으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시선을 교회와 맞닿아 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사회에서의 삶과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또 그 안에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타 다른 서신서에서도 성도들이 교회 안의 삶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대단히 민감하게,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집사나 감독의 직분을 줄 때에도 교회 안의 신앙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에서는, 가정에서는 어떠한가가 직분자의 더 우선시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 사회에 바탕을 둔, 사회에 터 박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피난처인 동시에 전시장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킬 의무도 있지만 교회 안의 성도들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사명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산 꼭대기에 짓게 한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배를 볼 수 있도록 지은 것입니다. 

각 층마다 창을 둔 것도 방주 안의 사람들도, 방주 밖의 사람들도 서로 바라볼 수 있도록 지은 것입니다. 

신앙있다고 세상과 문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며 소통하는 것이고 세상은 세상 끝까지 교회를 바라보며 비판하고 때론 칭찬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의 말씀은 종들에 대해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또한 이스라엘 자체가 대대로 내려온 종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신분적으로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유대교도 이러한 노예 제도에 대해서 희년이나 안식년 제도를 통해서 이들을 구제해주고 해방시켜 주는 율법이 있었지만 이러한 노예제도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보면 당시의 이런 신분제도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노예보다도 가치없게 여겨지던 여인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했고, 오늘 새벽에도 나누었지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취급당했던 아이들을 가리켜 그를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신앙을 보이시면서 바리새인들과 기성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을 부끄럽게 했고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일약 사도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높은 부와 명예를 지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단어로 정의했고 그 사랑 안에는 남녀노소,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차등이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로마나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에서 볼 때에 이런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위험성을 지닌 위험한 집단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전 이미 가톨릭이 우리나라에서 배격당한 가장 큰 이유도 이러한 신분제도가 어지럽혀 진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어찌 주인이 종과, 양반이 상놈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제도나 시스템이 꽉 조여져 있을 때엔 엄두도 못할 생각과 행동들이 신앙 안에서 자유를 얻은 종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의 주인을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겉으로 따르더라도 속으로는 이미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제도적으로 억지로 복종하기 시작합니다. 


1. 믿지 않는 상전을 공경하라. 

그런데 이렇게 신앙 안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당시의 종들에게 바울은 전혀 새로운 시각의 주문을 합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자기의 주인들을 범사에,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항상", 마땅히는 "당연스럽게"  "공경할 자로 알라"- 그들을 공경받아야 할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경하라는 것은 마치 어른을, 부모를 공경하듯이 공경하라는 것이지요. 

믿지 않는 주인을 부모와 집안 어른처럼 공경하라는 것은 선뜩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 같습니다.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라는 수동적이고 비겁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어떻게 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불순종으로 결국 누구의 이름이 훼손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회적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불손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듯이 예수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예수믿는 자들에게 흔히 하는 비난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들이...", "교회 다닌 다는 것들이..." 

자기들은 안믿고 마음대로 살면서 믿는 자들이 조금 실수고 그들 눈에 어긋나면 너무 쉽게 이런 비난들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무슨 소리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억울합니까? 

에베소서 6장 5절부터 보면 

더욱 적극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엡 6:5-엡 6: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은 신앙적인 용어로 바꾸면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만 하지 말고 철저히 그 마음까지 순종하라는 것이지요. 

왜요? 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나에게 이런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순종할 때에 누가 갚으시리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갚으실 줄을 알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2. 믿는 상전을 더 잘 섬겨라. 

2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믿는 상전을 둔 종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좀 전 까지 한 예배당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주 안에 우린 하나..."하며 찬양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일터로 왔는데 주인이 주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사회적인 관계로 돌아가려니 헤깔리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직장도 교회처럼 은혜롭게 일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주인 노릇하면 교회가서 저사람 일터에서는 나를 종 부리듯 한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하고 완악해서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더 막대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기고만장하고 더 나아가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사탄처럼 위협하고 협박하면 순종하는데 그리스도처럼 자녀가 되고, 친구가 되자 하면 자녀나 친구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상전이야 싫어도 할 수 없지 참지만 믿는 상전은 오히려 종이 감시자가 되어 자기에게 함부로 하면 신앙의 위선자라고 뒤집어 씌웁니다. 

바울은 이런 죄인의 연약한 심성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믿는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라. 

왜 그렇습니까? 안믿는 상전들은 우리가 그를 잘 대해주어도 당연하게 여기며 악을 행해도 할 말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참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주인을 잘 섬기면 섬기는 대상이 , 나의 섬김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가 바고 믿는 자요,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사회 안의 그리스도인  

물론 우린 믿는 자로서 부당한 사회적인 악에 맞서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적으로 순응을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신앙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혁명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악한 사회에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원칙으로 세상의 원칙을 극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한 자에게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합니다. 

내가 하면 주가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4. 작은 사회인 교회 

이 말씀은 성도의 교회 밖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 안의 삶에도 적용이 됩니다. 교회 역시 여러 사람이 모인 사회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이 드신 분이, 혹은 중직자가 신앙도 깊어서 육체적 어른이 신앙적 어른이 될 적에 교회는 가장 건강하고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신앙의 나이가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말합니다. 은혜 받고 온전해지는 것은 육신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보다 믿음 없는 자가 나를 리더할 수도 있고 믿음 없는 목사가 성도들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손쉽게 나올 수 있는 실수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신앙적으로 공격하고 맞서는 것입니다. 

"그건 신앙적으로 틀립니다. 그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질서를 잃어버립니다. 관계가 깨어집니다. 

교회는 정답이 승리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승리하는 곳입니다. 은혜가 승리하는 곳입니다.


모세- 왜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따라갈까? 

그들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교회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곳으로 나아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요, 옳은 것을 가지고 싸우기 보다 기도하며 인내하면 그것이 정말 옳다면 주님께서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는 자를 푸대접하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새신자에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가까운 사람, 믿음 있는 자들도 외롭고 도움이 필요하고 격려 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의 경험을 통해서 성도님들이 

"목사님,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나 신경쓰세요.."

하는 말을 들을 때가 바로 그에게 다가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면 내가 믿고 신경쓰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힘든 당할 수가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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