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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3-16절 (참 과부를 존대하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른바 초대교회가 세워지면서 과부는 초대 교회 안에서 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아세아로, 유럽으로 확장되면서 교회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를 넘어서 제도적으로 체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리스도 정신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세계 곳곳의 선교 역사를 보아도 복음이 뿌려지는 곳마다 단순히 신앙적인 부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악을 몰아내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봉양하는 사회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른바 이기적인 정욕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사랑운동, 희생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4-45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워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떠나니 자기들보다 더 연약한 자들이 보이고 서로 살려는 운동, 함께 살려는 운동, 이른바 긍휼의 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 긍휼의 초대교회의 문화에 있어서 가장 섬김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이른바 과부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약의 율법에서도 구제에 있어서 가장 강조된 부류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아는 그들에게 직접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혹은 기관이, 양부모가 양육을 해 주어야지 어린 아이들에게 직접 구호를 해 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허다한 잡족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였고, 그들에게 땅과 나라를 주셔서 그들이 강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오히려 나그네, 이방인은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인들이거나 그들과 낫거나 혹은 같은 처지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아, 나그네, 과부 들 중에서 구제의 대상이 당연 과부에게 몰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초대 교회에는 폭동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교당하는 자들이 많은 때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도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오래 살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마다 과부들이 넘쳐났고, 또한 그들이 구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과부는 단순히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과부가 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결혼을 하기 보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생을 교회에 헌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리더십이나 역할이 훨씬 자유롭게 부과되었던 교회에서는 남편을 둔 아내보다 과부들에게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전도사와 같은 기도하고 심방하는 일들이 과부들에게 맡겨지면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혹은 사회적인 배려와 관심의 중심이었던 동시에 교회 사역에 있어서는 활발한 리더들이요, 후원자들이요, 봉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부들에 대한 환대와 리더십이 굳어 지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과부들이 몰려 들어 더이상 교회가 과부들을 감당하는데에 무리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해져서 큰 교회가 작은 여러교회로 전파되기 시작되면서 그만큼 재정도 약화되었는데 과부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진 것입니다. 


거기다가 새롭게 들어온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구제가 너무 히브리파, 즉 이스라엘사람들 위주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과부에 대한 구제와 그로 인한 불평 불만이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세워 이 일을 전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 정도로 과부들의 문제는 초대 교회의 교회의 큰 중심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지요. 


디모데에게 전하는 목회서신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 과부들에 대한 존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적으로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존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3절에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합니다. 

아니 과부면 다 과부지 참 과부가 있고 거짓 과부가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참 과부는 "who are really in need", 즉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을 인정하고 존대해 주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있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자녀나 손녀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또 도움을 청하는 자는 참 과부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 이민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예민하고도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자녀도 재산도 도움 받지 않을 만큼 다 있는대도 미국와 와서 여러가지 혜택을 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정작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저도 점점 사회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4절의 말씀의 의미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줍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영어로 된 표현을 보면 "They should learn to put their religion into practice by caring for their own family and so repaying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for this is pleasing to God." 

무슨 소리입니까? 자녀는 그들의 신앙을 그들 자신의 가족을 돌보고,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에게 보답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자식으로 한 번도 부모에게 보답하는 삶을 산 적이 없고, 그저 받기만 하다 부모님 장례도 지키지 못했던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그나마 이제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장인으로 말미암아 우리 과부되신 장모님도, 또 친 부모님께도 이젠 효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 어르신들께도 아버님을 생각하며 돌아보도록 굳은 결의를 하는 것입니다. 


8절은 더욱 아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 외에 또 한 부류의 참 과부로 인정받기 힘든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 째는 나이가 육십이 덜되고...

이 말은 무엇입니까? 

육십이 덜 된 자들은 스스로 살 능력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라는 것은 가정에 충실한 자인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만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지요. 

즉 한 남편의 아내였던 가정에 충실했던 자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들에게 희생하고 환란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행한 자. 

신앙적으로 합당한 자인가가 참 과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되지 못한 과부는 어떤 자입니까? 

과부로서 행실이 부정하고 게으른 자 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교회에서 이런 일 저런 일에 함께 하며 심방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바르지 못할 경우 집집을 돌아다니며 않좋은 소문의 진상지가 되기도 하고 

성적으로 나쁜 스캔들을 내기도 하고 부정한 일에 연루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게으르다는 것은 본인이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삶을 외부의 도움에 의탁하는 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 즉, 영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데 게을러서 결국 세상의 것을 쫓다가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꾐에 빠지거나 교회의 유익이 되기 보다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폐단의 근원지가 될 수 있는 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쓸데 없는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가? 

영적으로 게으른 자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게으른 자는 시험에 드는 자요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 교회의 헌금

목회자와 교회 운영 외에 중점은 선교와 구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내는 데도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내는 헌금이 선한 일에 쓰이는가? 

호화롭게하는 몇 몇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기 및 가족의 온 삶을 희생하며 복음을 위해 애 쓰는 대다수의 선교사들의 사역마져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 봅니다.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많은 연봉은 대다수 검소하게 사역하시는 목회자들의 삶 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듭니다.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이나 지원을 받는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나 혹은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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