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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중심으로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므비보셋의 본명은 역대상 9장 40절에 의하면 '므룻바알'로서 그 의미는 '바알과 대적하는 용사'라는 의미입니다.

초창기의 사울과 그리고 인생 전반에 있어서 요나단이 용사였던 것처럼 므룻바알도 그런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는 다름아닌 바알, 마귀와 싸우는 영적인 용사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은 성경에서 크게 세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에 궁에 있던 그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과 자신의 아버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사울의 신하들이나 므비보셋 입장에서는 당장 닥친 큰 두려움은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이 들이닥쳐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과 또 하나의 두려움은 그동안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치던 다윗이 이 때에 들이닥쳐 자신들을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두가지 두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궁에 남아있던 모든 신하와 하인들은 그 큰 두려움 속에서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므비보셋을 돌보던 유모는 므비보셋을 업고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사무엘하 4장에 보면 양 발목이 다 부러져 피난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 로드발이라는 마을에 숨어 살아야 했다고 증거합니다 .

로드발이라는 마을의 의미는 "목장이 없는 황무지"라는 의미입니다.

 

전사였던 므룻바알의 이름이 므비보셋 - "부끄러움"이라는 바꾸어진 것도 이 때일 것입니다.

그는 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고아로, 그리고 불구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절뚝발이- 예전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족이 이스라엘을 비아냥 거리며 맹인과 절뚝발이로 표현했듯이- 는 홀로 설 수 없는 죄인의 실존적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이 후에 므비보셋의 삶이 어떠했을지 성경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그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그야말로 영적, 육적 불구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므비보셋은 태어날 때에는 왕가의 장손으로 왕의 혈통을 지니고, 바알과 맞서는 장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왕궁에서의 기억은 사라지고,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고 자기는 다리가 불구가 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누군가 너의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는 사울이 어떤 자였는지, 자기가 왕의 가문이었다는 것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불구자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 어찌보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가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오직 세상에서 불구가 되어 하루 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므비보셋과도 같은 삶이 아닐까요?
  •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은 이유도, 사울이 죽자 사울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한 것도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적대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탓할 수 밖에 없는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왕이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자기는 패족한 왕족의 자녀로 현 왕의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사울의 손자라는 것마져 숨기고 세상에 나가서 떳떳하지 못하게 숨어사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2. 두 번째 등장은 사무엘하 9장에 등장합니다.

  •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법궤를 들여와 말씀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블레셋과 모압과 암몬 등 이방민족들을 몰아내면서 국경을 정비하며 또한 군대장관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서기관, 행정관들을 세워서 행정적인 정비를 다한 후에 이제 사울의 집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힘들 때에 도와주며 네가 왕이 되면 나와 내 집을 좀 지켜다오하는 약속을 기억하고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부른 것이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입니다.

 

  • 로드발에 은둔하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에게 어느날 다윗의 신하들이 찾아와서 왕이 당신을 찾는다고 전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 숨어서, 은둔하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하면서 자포자기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 다윗의 궁으로 다윗의 신하들을 따라 나섭니다.

  • 다윗 앞에 고개를 떨고 서 있는 므비보셋의 장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형장 앞에서의 사형수 같은 한 인간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절하고 있는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은총을 베풀리라.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삼하 9:7)

 

죽을 줄 알았던 므비보셋에게 다가온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 이사야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운 상황 속에서 떨고 있을 때에, 가장 최악의 상황 앞에 놓여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려준 가장 첫 마디는 "두려워말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소망의 말 한마디는 "두려워 말라"라는 그 분의 음성입니다.

늘 최악의 상황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던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다윗의 말, "이제 마음 푹 놓게, 염려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일세."

 

우리는 벌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 받으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심지어 매일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도, 심지어 평생을 같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혹시 저 사람이 날 미워하진 않을까? 날 버리지는 않을까?

왜 세상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우울증과 불면증은 더욱 극심해지고 먹는 약의 종류는 더욱 많아져만 갑니까?

그 근본 중심은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그 궁극적 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도와줄께. 내가 책임질께.. 내 앞에서 편안해라!

내 두려운 인생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요, 진리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다윗이 어떤 은혜를 줍니까?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삼하 9:7)

 

자기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회복의 역사를 약속해 줄 뿐만 아니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나 하루 아침에 개같은 내인생에서 왕의 자녀로서의 꿈같은 은혜를 얻게 됩니다.

 

  • 이에 반해 시바는 또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는 아들이 열다섯이고 종이 스무 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재산과 땅도 굉장히 많았던 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울의 종이었지만 사울이 죽고 그 집안이 다 패족하게 되자 수완을 발휘해서 그것을 차지 한 것입니다.

자기 권리가 아닌 것인데 자기 것인양 맘껏 누리며 살았던 것이지요.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이 "자신을 개같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길 때"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는 사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

 

그런데 어느날 다윗이라는 의로운 재판관, 왕이 나타나서 자기가 무시하고 있던 패족의 자손 불구자 므비보셋을 불러 오게 합니다. 그리고 뭐라 말합니까?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말합니다.

사울이 없으니까 이제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맘껏 누리고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인생은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다 주인이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

내가 가진 것, 내 소유, 내 자녀, 나 자신의 모든 것 까지도 결국 하나님꼐서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움켜 쥐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훅 불면 날라갈 것들을 잡고 의지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이 명령하자 시바는 한 마디 변명도 못합니다.

"종에게 명령한데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항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때에 불의를 행한 자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3. 16장 1-4절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을 하여 다윗이 급하게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피난길에 오르는데 시바가 다시 등장합니다. 므비보셋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시바의 입을 통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심정이 참담하여 피곤한 피난길을 오르는데 시바가 나귀 두 마리에 떡 이백개, 건포도 백송이, 과일 백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다윗에게 바칩니다.

 

다윗은 시바의 호의를 보며 "네가 무슨 의도로 가지고 왔느냐?" 묻습니다. 므비보셋이 보이질 않고 시바가 가지고 온 것이 의아한 것입니다. 사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의도를 물은 것입니다.

의도를 물었는데 시바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피곤한 자들이 마시게 하십시오."

한 마디로 "그냥 묻지 말고 먹고 가지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재차 묻습니다. "아니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니까 시바가 "므비보셋이 다윗이 도망 가니까 이제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고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압살롬이 반역이 일어났는데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이제 다 네것이다"하며 모든 재산을 다시 시바가 갖도록 명을 내립니다.

 

3. 19장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19장에서 다시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삼하 19:24-30]

(삼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삼하 19: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삼하 19: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삼하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삼하 19: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삼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구절은 굉장히 신중하게 묵상해야 할 구절입니다.

다윗의 귀환 때에 "왜 나와 함께 가지아니하였느냐" 하는 추궁에 므비보셋은 나는 가려고 했는데 시바가 나를 속이고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가면서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앞에서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도 나를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나의 억울함을 말하리오까?합니다.

 

분명 시바와 므비보셋,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당연히 시바가 므비보셋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주인과 왕에게 범죄하고 누명을 씌운 시바를 심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하듯이 므비보셋을 복권시키는 것이 올바른 퍈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반응은 시바와 밭을 나누게 하면서 그 둘 사이를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너를 내 아들로서 대하는데 너는 왜 밤낮 네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있느냐?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 그동안 므비보셋은 다윗으로부터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받고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랑받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자랐던 므비보셋은 그러면 과거의 상처와 불안과 부끄러움에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그가 지녀왔던 다윗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피해의식은 다윗의 사랑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다윗은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것이 나에게 잘 해 주는 이유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 하는 쇼일 뿐이고 하는 등 다윗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았을까?

그는 과연 다윗에게 진정 고마워하고 다윗의 호의를 기뻐했을까?

 

마음이 병든 사람은 사랑을 받아도, 다윗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도,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도 쉽사리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을 주어도, 과거의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평생을 목회를 하는 것을 곁에서 바라보고, 또 지금 제 스스로가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 사랑받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중심을 오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를 감시하다가 잘못하면 벌 주시는 분으로, 늘 나에게 부담 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교회를,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을 씻기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한없는 사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상처를 노출하는 사람들을 향한 처방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 19장에 나와 있는 다윗의 마지막 판결은 언뜻 보아서 납득하기 힘든 판결을 내립니다. 시바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고 므비보셋의 충정이 증명이 되었으면 의로운 재판관이라면 당연히 시바를 벌하고 므비보셋을 당연히 회복 시켜 주어야 하는데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하면서 둘이 반씩 재산을 나누라고 한 것입니다.

 

시바는 벌받아 마땅한 자가 아닙니까? 두 번씩이나 주인의 재산을 자기 맘대로 처리하여 욕심을 부렸던 악한이고 기회 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므비보셋과 시바를 이젠 동등히 반반씩 은혜를 나누라고 하는 것일까?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자이지만 마치 시바처럼 이것을 자기가 낭비를 합니다. 낭비를 한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자기를 위하여 썼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인이 이것을 알고 이제 심판을 하겠다고 합니다. 직분을 빼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청지기가 어떻게 하냐면 자기가 맡은 것을 가지고 빚진 자들을 불러 일일이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기가 그럴 권리가 없는데 이제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분명 시바가 다윗을 도운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므비보셋의 것을 가지고 다윗을 돕습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다윗을 도운 것이지요. 그것도 선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뜻하지 않은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도움이 다윗이 가장 힘이 들때,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시바는 기회주의자고, 악한 심성을 가진 자이고, 굉장히 정치적인 사기꾼이지만 다윗을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 재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됩니다.

 

므비보셋도 은혜가 필요한 자이고 마찬가지로 시바도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설사 잘못된 동기가 있어도 내팽기치지 않습니다.

마치 거짓말장이 야곱처럼 시바는 불의했지만 다윗에게서 은혜를 구했습니다. 은혜를 위해 비록 자격이 없고 권리가 없지만 값을 치룹니다. 선을 행합니다.

 

결국 그토록 원한 자유와 재산을 얻습니다. 온전치 못한 자가 반쪽이지만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럼 므비보셋은 절반을 잃은 것입니까?

므비보셋이 말합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난 밭이 없어도, 종이 없어도 당신만 옆에 있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잃어도 당신만 있으면 난 황송하고 감격한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가장 귀한 지를 깨달은 자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4. 다윗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다윗이 백성을 향하는 첫번째 원칙은 다름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그의 정의와 공의는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통치하고 관리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을 때도 그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므비보셋의 의심나는 행동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없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말은 므비보셋을 향한 첫 마디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어주고 힘이 되어 줄께요."

 

저는 성도들이 저와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어딜 가든 성도들을 상대하는, 관계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화평케 하는 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관관계는 점점 매말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함들고,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을 가립니다.

 

주님은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제발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앞에 나온 므비보셋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