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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참 믿음을 향한 여정


도마에 대한 기사는 주로 요한복음에 집중되어 있고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단지 열 두 제자로서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째로(마 10:3), 마가과 누가복음에서는 여덟번째로 (막 3:18/ 눅 6:15), 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번째로 기록되어 있다(행 1:13). 


도마의 이름의 뜻은 쌍동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쌍동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도마를 소개하면서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디두모라는 말도 쌍동이라는 의미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도마에 대한 사실은 여기까지이지만 요한 복음은 도마에 대해 알 수 있는 몇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 나사로를 향해 유대로 가자! (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 10장,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 10:30) ->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사 거기서 복음을 전함. 


(요 11: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 8절: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이 가려고 하지 않음.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16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사건은 부활에 대한 첫 증거,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표이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며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심을 보여 주고 예수 또한 부활할 것임을 알려주는 사건. 

그런데 그 사건을 이루려면 다시 자신들을 돌로 치려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한다. 


부활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대로 가기를 두려워할 때에 도마는 앞장 서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한다. 

이 때가 도마가 이름 외에 첫 등장하는 기사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와 함께 죽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다. 

베드로가, 요한이, 안드레가, 야고보조차조 망설일 때에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용기는 믿음에 근거한 용기가 아니었다. 맹목적인 용기였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나사로를 향하는데 도마는 용기있게 그 현장에 제자들 인도한다. 


나사로 사건의 결말 

(요 11: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2. 그 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5절) 

그곳을 피해 있다가 유월절 엿세 전에 다시 나사로가 살아난 베다니를 방문 (12장 - 마리아의 향유 사건) 

13장) 최후의 만찬, 발을 씻기심 

드라마틱 하게 십자가를 향해 절정에 이르는 장면 

겉으로는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여 환호성을 받지만 예수는 반대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렇게 14장이 시작하면서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라며 시작 이제 몇 시간 있으면 로마 병정들에게 잡히실 그 절박하고 급박한 때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죽는다고 하지 않고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4절에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니까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질문은 너무도 급박한 순간에 나누는 도마의 혼란스런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죽음도 능히 이기실 분이라는 것, 주님은 이미 죽음 마져도 극복하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도마와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이 단지 죽음의 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가장 근접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 도마인지 모른다. 

다른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최후의 만찬에 서로 나는 아니지요, 나는 절대로 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할 그 때에 도마는 도대체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이 무슨 길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생갈 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문을 주님께 묻는다. "내가 모릅니다. 어떻게 압니까?"


어찌보면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도마에게 참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다. 

구도자의 길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우리의 무지에서 부터 출발해서 주님께 묻는데서부터 시작한다. 

믿음은 맹목적 수용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릴적부터 질문하는 것에 대해 열려 있지 않다. 

부모가 말하면 말대꾸 하지 말라 한다.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라는 말이 지배한다. 

괜히 질문했다 남들보다 무식하다는 소식을 들을까봐 자신의 무지를 숨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겸손을 가장한 무지의 결과이다. 


그런 교육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스승은 단상에 올라 가 있고 학생은 밑에서 스승을 보면서 무조건 수용을 강요받는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기도를 통해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일방적으로 주님께 간구하고 일방적으로 끝맺어 버린다. 

수업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기도는 일방적으로 말해버리고 끝내버린다. 참 대화와 참 교제가 없다. 


참 교육은 쌍방향 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대화를 통해, 교제를 통해, 삶을 통해 자란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그냥 자라지 않는다. 

물을 주고 햇볕을 주고 거름을 주고 보살펴야 한다. 이른바 관계가 맺어져야 열매가 맺는 것이다. 


도마가 난 그 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하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복음 14장 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학자였다. 신학자였고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무지를 주님 앞에서 드러낸다. 

"네가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이런 것도 모르느냐?" 그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한 후에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음을 드러나게 한 후에 

"너희는 여태껏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지만 이제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하며 참 예배에 대해 알려 주신다. 


내가 안다고 하는 순간 교만이 찾아오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믿음이 아닌 맹신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참 믿음을 원하신다. 


3. 보지 않고 믿는 믿는 자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 24-29)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문을 닫고 모여 있었다. 누구도 주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은 듯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시며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런데 그 현장에 도마가 없었다. 

그 시간 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냐하면 나사로의 사건에서, 마지막 만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는 현장에서 도마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 주님의 길에 근접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도마는 누구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고 찾아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님이 가신 길을 자기도 찾아 헤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만 주님을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만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셨다. 

어쩌면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에 도마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을꺼야....

다른 제자들과 전혀 다른 생각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도마가 의심한 것은 오신 주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여태껏 주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던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 제자들에게 먼저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고 무너졌다고도 한다. 

주님은 이제 교회에 계시지 않고 교회 밖에 계신다는 말들도 한다. 

교회 밖의 다른 길을 찾아 헤메는 구도자들이 늘어만 간다. 


제자들의 무지를 의심하며 함께 있지 않았던 구도자 도마처럼 교회 밖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무지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제자들의 무지는 주님의 계획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여시고 깨닫게 하시면 우리의 무지는 씻은 듯 해결된다. 


문제는 약속된 처소에 내가 머물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은혜가 되는 구절은 26절 

"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무너졌던 제자들에 대한 믿음, 그 실패했던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 예수를 기다린 것이다. 


주님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 오신다! 

타락하고, 무너지고, 조롱받고, 외면당해도, 주님이 오셔서 교회를 회복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부활의 기쁨에 참여케 하신다. 

그 때에 돌아온 도마에게 주님은 이전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예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똑같은 말씀과 도마  한 사람을 위하여 주님의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손대게 하신다. 


비로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기 전, 너희 믿음을 위하여 내가 기뻐하노라 하신 주님이 부활하신 몸을 이끌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하신다. 


몇 주일 동안 최근 미국과 한국에 계속적으로 펴져가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마져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실망하고 절망했다. 

이러한 세대에 교회를 떠나 말씀을 떠나 어떻게 접근을 하나라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도마의 신앙을 통해서 제자들을 떠나 주님의 길을 가고자 했던 구도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통해 다시금 사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소망을 보게 되었다. 주님이 오실 때에 그들도 버리지 않고 다시금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해 주시리라! 


다른 복음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신앙고백의 모델로 삼고 있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도마의 신앙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를 더욱 부곽시킨다. 

도마의 고백 후 바로 나온 구절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21)로 끝을 맺는다. 


다른 복음서가 도마를 여섯번째, 혹은 일곱번째 제자로 소개하는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도마를 베드로 다음의 두번째 제자로 등장시킨다. 


도마를 공부하기 전 도마는 그저 의심많은 제자 도마였다. 

빌립과 같은 회의론자, 염세주의자였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도마는 회의론자라기 보다는 구도자였다. 

진리를 향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였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는 자였다. 


한 목사님이 미국에서 역사가 두번째로 오래된 교회의 담임으로 청빙받아 가게 되었다. 

역사가 오랜 교회답게 교인 수에 비해서 대다수가 장로님 권사님이셨다. 

평균 신앙 연력이 30년은 기본이고 50년이상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해도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무엇을 말해도 다 아는 듯한 표정이 목사님을 자신감 없게 만들었다. 말끝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이 한마디 말할 때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었다. 


한 번 그 교회 수석 장로님과 개인적으로 식사할 시간이 되어서 솔직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 장로님 말씀이 

"목사님, 저두 제가 많이 아는 것 같았습니다. 들을 땐 왠만하면 다 아는 것처럼 느꼈으니까요. 그런데 한 번 말씀을 읽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게 다름 아닌 나구나. 내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살았구나.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이건 정말 입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모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도 설교의 부담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있게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고 성도들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소망하게 되었다고 저에게 직접 간증해 주셨다. 


참 진리를 향한 구도자가 되자.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진리를 구하자! 

그러면 정말 참 믿음 안에 거하는 은혜를 맛보게 하실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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