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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장 1-5절) 


기독교를 가리켜 흔히들 계시의 종교,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 드러내신 것, 설명하신 것, 나타내신 것, 이것이 계시이고 인간이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 죄에 처한 인간은 숨고 도망하고, 가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에 아담이 먼저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담에게 다가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먼저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길을 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길은 궁국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가야할 하나님 나라, 천국이기도 하지만 매일 매일의 전쟁터, 영적 싸움터에서 승리하기 위한 길을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말씀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랑처럼 감정적이며, 순간적이며, 우유부단한 사랑이 아니라 진리이며, 변치 않으며, 영원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성경에 있는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계명은 레마, 즉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하는 중에 나의 영혼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대신 그분의 진리 앞에서도 여전히 내 생각, 내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새벽예배 시간에 사사기서를 마쳤는데 사사기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 땅을 잃어버리고 은혜를 잃어버리는 자가 되는지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잃은 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과 행동의 기준이 자기 소견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옳게 보이고, 좋아보이고, 하고 싶은 것들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사건은 우리 소견이 얼마나 유혹에, 죄에 흔들리기 쉬운 어리석고 연약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던 선악과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쳐다보니, 자꾸만 쳐다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먹으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말씀, 계시가 내 소견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자기 소견을 따르다가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자가 이젠 자기 소견 대신에 주님의 길,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막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 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 내 뜻, 내 소견, 내 감정에만 충실히 살아오다가 사망의 문턱에 다다랐던 우리를 위해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나의 소견 대신에 주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른다? 

신앙생활 어느 정도 한 사람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따르기 힘든 말씀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 말하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분을 정말 신뢰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정작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정말 그분이, 그 분의 뜻이, 그분의 길이 내가 가진 뜻과, 길보다 바르고 빠르고 좋다는 것을 매사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의도를 믿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나 이거 믿는데요? 아니요. 믿으면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면 상주신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한다면 이유는 둘 입니다. 

상받기 싫은, 구원받기 싫어서이던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생각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처럼 아들달라고 기도하면서 막상 아들을 주겠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얘기하니까 그것을 믿지 않다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실재로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부터 생겨납니까?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읽고 암기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말씀하듯 복있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없이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 내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알아주시겠지 합니다. 

내가 다 순종하지 못해도 내 중심, 내 마음을 알아주시겠지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자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 소견을 택하는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얘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럽습니다.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면 어떤 감동을 주시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부담스럽고 막상 순종하려 하면 이게 내가 일시적으로 드는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망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분별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슬며시 순종의 길에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 합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 때 처럼 분명히 말씀하시면 난 순종할 것이다. 신앙생활 분명하게 할 것이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지금 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분명히 말씀하시면 신앙생활 지금보다 훨씬 쉬울까? 여러분, 실패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 우리가 오늘 살펴볼 모세입니다. 

(신 34:10)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


그 모세를 첫번째로 대면하신 장면이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3장의 내용입니다. 

그 분의 첫 말씀은 무엇입니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5절) 는 것입니다. 


신을 벗으라는 얘기는 우리가 여러번 다루었듯이 네 권리를 내게 양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룻 4:7)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룻 4: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이스라엘의 전통 에서 "신을 벗으라" ->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 이제 네 소견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장면 전까지 자기 고집대로만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았던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신앙을 위해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히 11: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 11: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가  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이나 양을 치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바로의 왕자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을 위해 고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왕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며 잠시 잠깐의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하기 전 모세는 이미 자신의 광야에서 40년동안 지내면서 세상의 정욕, 탐욕, 욕심을 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네 신을 벗어라. 네 뜻대로 살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포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단의 땅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행 7:22)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했던 모세가 

(출 4:10)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가 될 때까지 그는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또 다시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포기한 것 같은 모세에게 여전히 네 권리를 나에게 넘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더이상 무슨 권리를 넘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출 3: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 3: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네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신 후 명하신 것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말씀이입니다. 이것은 알고보면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부터 늘 바라오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두가 소망하던 그런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에 대한 확실하고 부인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에게 들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내가 너를 쓸테이니 이제 넌 내가 말씀하는 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할렐루야하며 기뻐 뛸 소리입니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을 이루어 줄테니 이제 넌 네 소견을 버리고 내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세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출 3: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한마디로 줄이면 ‘못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할테니까 하는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관대 인도해 냅니까? 묻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내리라 하는데 지금 모세는 어떻게 받아들이냐면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끌어 냅니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며 찬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늘 한결같이 자신이 주어가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되는데...


두 번째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3:12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리라 했는데 모세가 '자기는 못합니다'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말을 받아들이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하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참고 양보하고 모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렇니까 모세가 다시 뭐라고 말합니까? 


  •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3) 


두 번째도 못간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떻게 답변해야 하느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내가 하겠다고 하는데 모세는 끊임없이 그들이 나를 못믿을 것입니다하며 자기를 나타냅니다. 자기 소견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무슨 소리입니까? 그 사람들이 믿던 안믿던 나는 자존자다. 지존이다. 난 한다면 한다. 반드시 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하시면서 장차 바로와 애굽에 나타날 일들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 (출 4:1)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전히 모세가 주장하는 것은 자기 뜻, 자기 소견입니다. 

 

가만히 모세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전부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16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18절)”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1절)”이라고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하겠다고 하시는데 모세의 뜻은 끊임없이 그거 못합니다. 표현은 자기는 못합니다지만 결국 하나님도 그거 안됩니다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의 정체이지요. 


세 번을 설득했는데도 모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삼고초려라고 사람도 세 번은 어떻게 설득하고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꿈쩍하지 않으면 포기하던지 화를 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구원받도록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시고 설득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출 4:2-10까지 네 번째 모세에 대한 설득이 나옵니다.  

네 번째 모세를 설득하면서 하나님은 세가지 기적을 보이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는 기적, 손이 문등병에서 나아지는 이적, 그리고 물이 피가 되었다가 다시 물이 되는 기적..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보이시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모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님이 아무리 그렇게 능력이 있어도 난 여전히 못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하나님이 왜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자신의 능력이나 주위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산하지 말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모세는 비록 음성을 들었어도 따르는 것부터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자신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로 말씀하십니다. 

  • (출 4: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왜 도대체 나를 믿지 못하느냐? 내가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다. 만물의 주관자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그런데 모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 (출 4:13)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질 않습니다. 할 말 없으니까 나 못합니다. 죽어도 못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어도 못보내가 아니라 죽어도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 죽어도 내 뜻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이 정도까지 했는데 저렇게 반응하면 정말 모세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으셨을까요? 돌맹이 하나도 움직여서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그런데도 참고 또 모세에게 다가오십니다. 


(출 4:14-15)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구약의 하나님이 분노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아니 모세가 무엇이라고 이렇게까지 맞추어 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설득해 나갑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노한 음성을 듣고 두려웠는지, 가겠다거나 못가겠다거나 오히려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물러나서 장인 이드로에게 갑니다. 장인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빼고 다만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지 보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들로는 미디안의 제사장 아닙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니까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위한 여지를 남겨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했다고 하지 않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단지 애굽에 갔다 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애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뜻밖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 (출 4:24-26)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아마도 출애굽기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아니 실컷 명령하시고 막상 가려는데 왜 죽이시려 하시는가? 

너무 말안들으니까 막상 간다고 해도 화가 나서 죽이시는걸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를 명하시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출생 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의 공주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다 포기했다고 하지만 막상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지키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지요. 


왜 십보라가 모세가 죽을 위기가 처하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할례를 행합니까? 

자기 자녀들이 할례 받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내인 십보라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고서 여전히 버티고 안하고 있던 것을 모세가 위기에 처하자 당장 그것부터 한 것입니다. 


일곱번에 걸친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언제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 정도 용서하면 됩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라. 


용서를 여기에서 설득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바꾸면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끊잉없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러? 

아니지요. 결국은 모세의 꿈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정신나간 사람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질기게 무시하고 외면하고 고집 부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끊질기게 거부하고 반항하고 줄다리기 하는 외고집장이가 또 있을까요? 그가 과연 이스라엘 민족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 (민 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온유함이라는 그 어원이 "길들여진 말":에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그런 순종의 대명사가 모세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나눈 말씀을 통해 볼 때에 모세를 과연 온유한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께는 하나님께서 몇번이나 찾아가셨습니까? 우리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려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그리로 가면 사망의 길이다. 언뜻 보기에는 바른 길 같지만 결국 사망의 길이라"고 끊임없이 다가오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참 안변한다고 하지요. 모세를 보면 그런것 같습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순종잘했던 모세가 저 정도라면 평범한 우리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겠습니까? 


목회를 하는 저에게 주신 감동도 그것입니다. 사람 안변하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끊질기게 모세에게 다가가십니다. 참고 참고 또 다가가셔서 모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모세를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이렇게 다가가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면서 물으신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성이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범죄합니다.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하게 우리의 모든 생각을 내어 놓고 기도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가장 가까운 방법은 주의 종의 입을 통해서 입니다. 주의 종도 사람이데 어떻게 주의 종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는냐로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에게도 할 수 없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주의 종은 보이도록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어려도, 실수가 많아도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복됩니다. 


더 큰 죄는 무엇입니까? 음성이 있는데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나는...내 사정이.... 내 생각엔... 내 남편이...."하면서 나 나 나 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것은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내 감정, 내 뜻을 버리고 굴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십니다. 결국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소망을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할 때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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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희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09.30 20:28

    너무나 도움되는 말씀입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