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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18절) 


돌잔치 - 태어나서 한 해를 보내고 첫 번 맞게 되는 생일

가족, 친지, 주위의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정작 본인은 잔치인지 무언지 자기에게 이쁜 옷이 입혀진지도 모르고 사람들의 축하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나자 마자 바로 큰 잔치를 벌이지 않은 것은 그 사이에 죽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해를 보냈다는 것은 이제 진짜 산 사람으로,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는 첫 의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긴 사람이지만 사실 1살 먹은 아이는 사람구실을 할 리가 없습니다. 혼자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자기가 싼 배설물을 혼자 치울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부모의 몫입니다. 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산 사람으로, 클 사람으로 대우를 받으며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이쁘다고 이야기 합니다. 누구도 흠을 잡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잡이를 통하여 첫번째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저 태어나고 살아있는 이유가 기쁨의 이유이고 잔치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5살 생일날에도 이 아이가 홀로 먹지도, 입지도, 옷을 입지도, 배설물을 가리지도 못한다면 그 잔치에 기쁨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고 재앙일 것입니다. 10살, 20살이 되어도 만약 이 아이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는 중생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내 주님으로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인 생일을 맞은 것입니다. 

이른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우리가 받아 들일 때에 거저 얻는 은혜 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그 자체로서 천국의 잔치가 열립니다.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내가 알던 모르던 기쁨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요한복음 2장의 혼인 잔치와도 같은 잔치, 예수님은 이 잔치를 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때에는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 우리의 행실이 어떠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보여주신 일이 예수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그 사실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가 시간이 지나도 그 행실이 변하지 않고 젖먹이와 같이 홀로 설수도 먹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배설물을 치울 수도 없는 자라면, 홀로 주님과 대면하지도 못하고, 말씀을 묵상하지도 못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면, 계속적으로 죄의 열매만은 맺는다면 이 잔치는 불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고통일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이제 애굽의 종이 아닙니다. 이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40년을 방황하면서 그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고통과 불평과 시험만 남았습니다. 출애굽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지만 가나안은 말씀에 순종하므로, 성막을 지음으로, 예배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구원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이 예수 닮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예수닮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성도의 시작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 사건을 그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게 하는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무조건 믿으라. 예수를 영접했냐고 물으면 안 믿어져도 아멘이라고 말해라. 그러면 믿어진다. 

별 소리를 다해 마치 교회의 목적이 구원을 나누어 주고, 교육시키고 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께 기도해서 자기이 욕망과 이기심을 다 채우려 합니다. 

예수닮으려는 사람은 없고 예수 이용하려는 사람만 넘쳐납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저 믿는 순간 죽으면 되지 왜 평생 이 땅에 살아남아서 고생하고 시험에 들고 하게 합니까? 

죽어선 하늘나라 가고 살아선 예수 이용해서 잘 누리라는 것입니까? 

구원받아서 영생을 얻은 자는 이제 이 구원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 닮아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것처럼 나를 통해서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내 동료가 예수 믿도록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 - 십자가를 앞두고 구원의 모델을 보여주는 사건

돌을 치워라 - 나사로야 나오라 -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친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죽은 사람들에게 입히는 수의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옷을 입은 채로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하셨습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 나사로의 사건은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멸망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옛날 냄새나는 누더기 옷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아직까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새 생명을 얻은 우리도 육신의 누더기 옷들을 아직까지도 걸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신분에 걸맞도록 옛 사람에게 속한 누더기 같은 것들을 버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거룩하게 되어 가는 성화과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이 말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라! - 중생하라

구원을 이루라! - 성화하라 


이 구절은 구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원을 얻으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구원을 행하라. 구원받은대로 살아라. 영어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구원을 이루다'는 Working out your salvation입니다. .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을 얻으라'고 하지 않고,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루라'는 말은 본래 '무엇 무엇을 철저하게 마무리짓다', '무엇 무엇을 완성시키다', '무엇 무엇을 발전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주님의 성품을 좇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어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구원받은 것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1)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성령께서 계시며 또한 일하십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두시고, 우리로 행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거룩한 소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소원은 사람이 억지로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생기지 않는 것이 거룩한 소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갑자기 '전도하고 싶다', '새벽기도에 가고 싶다', '어떤 성도를 심방하고 싶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싶다', 등의 소원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소원이 성경 말씀과 반대되는 일이 아니라면, 성령께서 주신 줄 알고 그 소원대로 행하십시오. 순종할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우리의 모습이 거룩한 모습으로 성숙해집니다

 

여러분! 때때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주실 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원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다시 한번 기도해 보되, 말씀과 어긋남이 없을 때에는 주저 없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우리의 성품은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거룩한 모습으로 성숙해질 것입니다. 

자기 감정인가 자기 생각인가? 

그런 의심하기 이전에 일단 순종을 해보자. 

오죽하면 바울은 순종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복종하라고 말할까?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찬양을 하다가, 기도를 드리다가 거룩한 생각, 거룩한 소원이 들어오면 일단 순종해보자. 그러면서 성령께서 나에게 역사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2) 옛 것을 버려라

우리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해서 구원받은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예수님을 믿기 전에 품었던 옛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결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의 흔적, 부패성....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버리기를 노력하지 않으면 죄의 습관들이 항상 나를 붙잡`게 됩니다.  

 

부흥회 때, 버릴 것을 버려라. 

옛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목적지까지 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생하지 않으려면 버릴 것을 빨리 버리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빨리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버려야 할 옛 것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그런데 이 불평하는 태도는 본인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여러분!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기뻐하면서 원망하고 즐거워하면서 불평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불평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기쁨과 불평은 함께 있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을 하면 자연적으로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나쁜 인상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또 불평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심각한 죄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는 애굽에 있다고 원망하였습니다(출2:23). 또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원망하였습니다(출14:11~12). 그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출15:24).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출16:7).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공급해 주셨는데도 고기가 없다고 또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지겹다고 불평을 합니다. 없을 땐 없어서, 있을땐 지겨워서 불평을 합니다.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이 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모세가 있을 때는 왜 하나님은 모세와만 대면하시나 하며 불평하지요? 모세가 없으니까 이젠 모세가 없으니까 모세를 대신하여 다른 신을 만들라고 불평니다. 


사사 건건 불평- 기쁨 없이, 풍족함 없이 불평 불만만 내뱉다가 광야에서 죽음. 자기 뿐만 아니라 모세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함. 

여리고성 무너뜨릴 때 - 아무 소리 내지 말고 7일동안 그저 돌게만, 행동하게만 하심-> 불평을 못하시게 막음-> 가나안의 입구. 

입을 벌렸다 하면 원망이요, 불평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도록 고생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사가 불평입니다. 원망입니다. 환경만 바뀌면 좀더 잘할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뀐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평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항상 제자리 걸음입니다. 십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돌잔치만을 하기 원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반면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어지간한 일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한다할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인내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로 말미암은 문제가 생겨도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믿음이 계속적으로 자라갈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 이것이 바로 빛과 소금입니다.  


만약 여기 있는 분들 중 누군가가 아직도 누군가를 원망을 하며, 자신의 환경에 불평을 하고 계시다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은 옛 성품에서 나온 악 습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성화되기 위해서는 남들을 향해 퍼붓던 원망과 주어진 환경에 대한 불평을 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옛 성품에서부터 나오는 나쁜 옛 것들을 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에베소서 4장 22절부터 2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옛 것을 벗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옛 것을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옛 성품이 솟아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입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24절 말씀을 가만히 보면, '새 사람이 되라'는 'To b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To do'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새사람으로서 새 사람다운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면 하나님 자녀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름 값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름 값하지 못하고 살게 될 때, 세상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이름이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 값하며 살게 될 때, 주님의 이름이 존경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5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세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뒤죽박죽 되어진 레미콘 안의 콘크리트처럼 완전히 짬뽕처럼 섞여져 버린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답게 행동하고,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면 어그러진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드러날 것입니다. 

  

4) 다른 사람들을 섬겨라.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옛 성품에서 나오는 악한 옛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부족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주위에,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6절로부터 8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하면서 섬기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섬김에 대해서 모범을 보인 사람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섬기기를 원합니다. 내 몸이 제물이 되어 다 불에 타버린다 할지라도 좋습니다. 내 몸이 포도주가 되어 제물에 부어져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그것으로 기쁘고 또 기쁩니다" 바울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소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습니다. 어느 날 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 분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섬김의 지혜를 터득한, 섬김의 자부심을 터득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스타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네가 몇 사람을 밟고 이겼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너는 몇 사람을 섬겼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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