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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1-5) 


논문 쓰기 전에 종합시험이라는 것을 보는데 세명의 교수한테 각각 시험을 보고 테스트를 하여 합격을 하고 또 세 교수가 함께 모여 질문을 하면서 다시 구술로 시험을 보면서 합격을 시켜야 논문을 쓸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논문에서 다루는 학자가 유대인 학자였기 때문에 그 학자를 다루기 위해,  세 명의 교수 중 한명이 유대인 여자 교수였습니다. 그 교수는 아직까지도 철저히 유대교를 믿는 비 그리스도인 여자 교수였습니다.

그 교수에게 제가 연구하는 학자에 대해서 페이퍼를 제출하고 시험을 본 것은 우수하게 합격이 되었는데 문제는 세명이 함께 모여 구술 시험을 볼 때 터졌습니다. 

그 유대학자의 이론을 가지고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다루는데 그 여자교수가 갑자기 자기는 요한복음의 내용에 동의할 수도 없고 예수도 믿지 않는다. 이 내용은 자기들 유대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면서, 막 화를 내다가 잠시 나를 밖에 나가게 한 다음에 교수들끼리도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가까스로 지도교수가 마무리를 해서 논문을 쓰게는 되었지만 그 여자교수는 논문 심사에서 제외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나면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 [사 53:2-6]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을 읽으면 누구를 떠올리게 됩니까? 

당연히 우리 성도님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구약의 예수에 대한 예언 중에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예수님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도 그렇고 아직도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예수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저 이미 이 땅에 왔거나, 아니면 앞으로 올 어떤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렇게 성경에서 나와있는 증거나 역사적으로도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도 아직도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땅, 이스라엘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인구중 그리스도인 비율은 3%가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땅끝, 복음 전도의 마지막 땅은 다시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그 유명한 사도바울의 회심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메시아관, 그들이 왜 예수를 믿지 못하는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제자들과 사도 바울의 사건이 의미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자,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을까요? 우스운 질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신앙의 핵심은 유일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 로마와 같은 문화는 다신교신앙이었지요? 제우스, 포세이돈, 프로메테우스, 비너스 등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구약 시대의 애굽이나 바벨론 등의 이방민족들도 바알과 아세라 뿐만 아니라 다곤신 에스라돗 등 수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오직 유대민족만이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 참 하나님, 참 신은 하나님 한 분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선택하셨는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하시도록 택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말씀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주일날마다 나누고 있는 사무엘상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니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리고 이방민족의 지배를 받는 열악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또다른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이스라엘이 다시금 열방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만국이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때가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유일신사상, 이스라엘을 택한 선택사상,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그들의 메시야 사상이 바로 유대인들이 믿었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요한복음 4장에 가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에 반응은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19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25절: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오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선지자가 없던 시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선지자 보다 더욱 기다림의 대상은 바로 메시야.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임을 증거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메시야, 그리스도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말이고 그것의 헬라어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뜻이 무엇입니까? 기름부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기름부음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까? 바로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만 기름부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삼중직 가운데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만 있고 선지자와 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라고 있는 사람은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느혜미야, 에스라 때에 지은 스룹바벨 성전도 아닌 헤롯성전에서 로마의 편에서 시중들던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먼저는 선지자로서 오는 하나님의 사자, 혹은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다윗의 때와 같은 번영을 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 7:37-요 7:44]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 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왜? 손을 대지 못합니까? 메시야일수도 있구나 생각했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사역 초반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즉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나 왕이신가를 기대했습니다. 


[눅 3:15-눅 3:16]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일찍이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내 뒤에 오는 이가 메시야다 라고 또한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기대는 그가 메시야이다, 그의 제자들도 사마리아 여인들처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확신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능력이 많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까진 그들의 기대대로 맞았는데 

그가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풍랑을 잠잠케 하고, 또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기대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기대한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란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아들이 있고 그 아들도 하나님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이방의 신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제 1 계명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아닌 하나님 아들이 또한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 아들이라 할지라도 유일신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입니다. 


  • [마 16:13-17]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구절을 다루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인자 "Son of Man"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단 7:13-단 7: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겔 2: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에스겔: 선지자 - 93회 - 이스라엘에게 보낼 선지자의 모습 


인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하나님이 보내셨지만 신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할 때의 그 인자는 구약 성서에서 예언한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냐? 라고 물을 때에 사람들이 그 인자를 멀게는 엘리야나 예레미야같은 선지자, 가깝게는 세례요한이라고 대답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후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을 때에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주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이신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 강조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야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고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은 감히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백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감히 네게 상상할 수 없는 고백을 한 것은 하나님이 네게 고백케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의 사명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사야가 오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로마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끄는 강대국이 되어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이스라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이 고백되자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죽는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 할 것이다." 


인간인 메시야가 와도 당연히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세계를 주름잡아야 하는데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에 왔는데 예루살렘에 가서 가장 악질인 죄인이 질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보다 더더욱 믿기 힘든, 아니 믿을 수 없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아무리 죽는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그것을 문자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누가 대통령이 되려고 나오면서 나를 바치겠다, 순교하겠다 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비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였지, 실제 예수가 십자가를 진다는 생각은 절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너무도 무력하게, 조롱당하고, 채찍에 맞으며, 로마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철저하게 버림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


  • 실재로 예수님이 부활해서 승천하는 그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이스라엘의 회복하는 때를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그러니까 오늘 읽은 본문으로 가서 왜 바울은 예수를 핍박했을까요? 

- 바울의 관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 

- 추상적이고 무시간적이며 비역사적인 구원의 체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죽었을 때 천국가는 것에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고 믿었던 그 구원. 그들의 승리... 

종말론 - 죽음, 심판, 천국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가 만물이 단번에 정리될 위대한 절정의 순간. 그런데 사울에게 이스라엘 회복의 조건은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토라를 지켜 참 이스라엘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토라를 위한 열심 - 열렬한 기도와 공부를 포함하지만 결국은 폭력을 통해서라도 다른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토라를 지키게 해서 이 날을 앞당기려는 의도... 그런 사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변절한 유대인들이며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무리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죽여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일찍 오리라고 믿었던 그 예수를 다메섹 도성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 예수가 바울에게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날 일을 세번씩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 22장, 26장) 


거의 비슷한 내용이지만 26장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를 뒷발질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를 몰 때에 휘두르는 채- 그런데 그 채가 싫어서 뒷발질 하면 무슨 일이 나타날까? 

더 무서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사울이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소의 뒷발질로 표현 된 것이지요. 


아무튼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던 예수요,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함으로 온 인류를 회복한 메시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의 고통을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는 표현으로 그의 심적 고통과 갈등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가서 안수를 받고 눈을 떳으며 갈라디아서 1장 17-18절 말씀을 보면 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 동안을 가서 마치 제자들이 예수와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것처럼 홀로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유대인들과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저 나를 회복시키시는 분 쯤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구박과 설움을 일순간에 역전시켜 우리 아빠가 이런 분이야 하면서 일어설 날을 꿈꾸지 않습니까? 

 

 그런 기대를 꺾는 어떤 다른 말씀이나 신앙의 모습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듯 무시하고 외면하고 공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고, 희생하고, 사랑하라 하는데 여전히 나만 잘되면 괜찮은 이기적인 신앙인이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에 대한 잘못된 기대는 자기 신앙만 병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인들을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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