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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행 27:9-26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고발을 당하고 사형을 시킬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유대를 통치하던 아그립바 왕은 로마로부터 파견된 총독 베스도에게 이를 알리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였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판결을 내릴 수 있었지만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기 때문에 로마 본토로 들어가 가이사에게 재판 받을 것을 상소하게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과 다른 여러 죄수들과 함께 로마를 향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역사적 배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소당한 것은 로마의 법으로 볼 때에는 사형을 당할 만한 어떠한 죄도 적용할 수 없는 신앙적인, 종교적인 이유로의 고소였기 때문에 구태여 상소를 하지 않아도 처형당할 수 없는 그런 재판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이 26장 마지막 31-32절에 나옵니다. 


[행 26:31-행 26:32]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로마로 가려 합니까? 그의 목적은 재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에게 하였듯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의 신분은 죄수로서, 피의자로서 가지만 사도바울은 그러한 세상적인 신분에 위축되거나 매이지 않고 오직 당당히 자기 앞에 있는 재판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복음에 매인 자는 세상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매여 세상에 자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매여서 복음에 자유한 자가 됩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따라 그들의 기분도, 신앙도 좌지 우지 됩니다. 복음에 매여 있지 않고 세상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매여 있는 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기쁨 중에 주를 높일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주를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 주를 나타내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7절에 보니까 배가 더디가 여러날 만에 간신히...

8절에도 보니까..간신히...

9절에도 보니까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뒤의 37절에 보니까 27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에 탑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항해를 합니다. 

승객을 수송하는 선장과 뱃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죄수를 후송하는 백부장과 군인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바울을 포함한 죄수들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 항해는 그들 모두에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쉬운 사람이 없습니다. 

한 때 편했다가도 금방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난하다고 더 힘들고 부유하다고 덜 힘든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가지면 편한 것 같지만 전도서를 나누면서 보았듯이 솔로몬 같은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인생을 고통으로, 허무한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속 깊숙한 슬픔들을 어떤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어떤 이들은 숨겨 놓고 살 뿐입니다.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 땅에는 참 희망이 없다는 것이요, 참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호락 호락 하지 않은 항해 속에서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10절과 12절을 읽어보면 바울의 관점과 선장과 선주의 관점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배 안에서의 삶은 단지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입니다. 목적은 로마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과 선주는 이 배의 주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배가 곧 삶이고, 목적입니다. 

바울이 중시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중요합니다. 생명은 곧 복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선장과 선주가 중시하는 것은 배 안에서의 삶입니다. 편안함입니다. 그들은 불편함 때문에 생명을 내어 놓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항해하고자 하는 이유는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세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살아갑니다 

더 편하기 위해 배우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거나 요즘을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이를 일부러 않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위해 불편함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불편함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핍박도 당했고, 매도 맞았고, 고소도 당했고,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인격적인 모욕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이 그의 목적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장과 선주처럼 마치 배가 목적인양, 불편함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맺지 못합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불평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


이 본문에 있어서 바울과 더불어 또 다른 주인공은 백부장 율리오입니다. 

생명을 위한 삶인가? 불편함이 덜기 위한 삶인가? 

율리오는 바울에게 호의적이고 친절을 베푼 사람이었지만 11절에 보니까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라고 말합니다. 

아니 항해하니까 당연히 선장의 말을 믿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9절-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라는 상황에서 바울은 생명을 위해 불편함을 무릎 쓸 것을 택한 것이고, 선장과 선주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건 것입니다. 


  • 13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의 뜻을 이룬 줄 알고... 

희한하게도 영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했을 때에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술 술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사탄의 길이, 사망의 길이 처음에는 이렇게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를 버리고 다시스로 향할 적에 "마참 다시르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듯이" 잘못된 결정 뒤에 찾아오는 일시적인 형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탄함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얼마 안되어 본색이 드러납니다. 유라굴로라는 북풍과 동풍이 만나 배를 휘돌게 만드는 거대한 광풍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광풍이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콘트롤할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는 것.." 자기가 제어할 수도,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저 휘몰아치는 것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15절에도 "쫓겨 가다가" 

16절 "그냥 쫓겨가더니..." 

자신이 평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 그 길로 인해 쫓겨 가다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바다에 풀어버리고 내버리게 됩니다. 


편안함을 위해 붙잡았던 모든 것들을 이제 생명을 위해 다 내던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규수에 일어난 지진...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무너지고....한 밤중에 일어난 재난....


편안할 때, 집, 차, 핸드폰, 컴퓨터...재난 때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지 않는가? 다 내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이런 광풍이 사흘째 부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20절)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


그런데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무런 구원의 여망이 없을 때에 다시금 기회를 주시고, 소망을 주는 것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늦을 때가 없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얼마나 뼈아픈 지적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복음이 아니라 심판이지만 복음을 심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안심하라...

언뜻보면 그냥 안심시키기 위한 소리 같지만 안심하라 말 앞에 무엇이라 합니까? 

너희를 "권하노니" 이젠 안심하라. 생명에는 손상이 없고, 오직 배 뿐이리라. 


권한다는 것은 독려하는 것이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냐 배이냐라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배가 중요한 것인가? 생명이 중요한 것인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고 돼지들이 몰살되었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 - 여기서 나가라... 돼지 잃은 것 때문에 불평...

사도 바울 -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 점보고 마술하던 자들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신상을 불태우니까 신상을 통해 장사하던 자들이 오히려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모습 


27-44절) 배를 버리고 생명을 선택케 하는 과정 

이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 

33-36절) 음식을 먹으라. 

왜 그들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가? 

그거 먹어버리면 정말 죽을까봐. 기진이 맥진하면서도, 다른 것은 다 버리면서도, 음식만큼은 굶어주릴 지경이 되어도 먹지 못하고....


14일간이나 주리고 있는 인간들. 얼마나 어리석은가? 

음식먹기를 권하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히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35절)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이것은 성찬의 말을 그대로... 무엇인가? 이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참 생명을 붙잡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을 먹으니 배가 가벼워지고... 그리고 이젠 그 배의 조각들을 의지해서 전부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과 가장 대비되는 구약의 본문. 

바로 요나서 1장의 요나가 만난 광풍. 

그는 왜 광풍을 만났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향하다가 배에 있는 모든 자들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한 사명자의 불순종이 배에 있는 모든 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지요. 

그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까?  

생명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판단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옳지 않다고 여기며 스스로 불순종의 길을 갑니다. 

그러다가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니느웨로 가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을 제외한 모두가 생명이 아닌 편안함을, 배를 선택했을 때에, 바울은 생명을, 복음을 선택하여 불편함을 무릎씁니다. 

생명을 택한 한 사람을 통해 배에 있는 모든 자가 배를 버리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곳을 위해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위해 배를 버릴 때도 있습니다. 

값비싼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부름 받은 자입니다. 이 생명을 전하기 위해, 누리기 위해 부름받은 자입니다. 

때로 우리가 탄 배, 인생이 유라굴라와 같은 광풍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사명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사명 주신자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하시면서 우리에게 안심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편안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무릎쓰고라도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