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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라 (요 4:5-26) 


지난 주에는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본문으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결국 자신의 허전함과 도움을 아뢸 적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지난 시간 나누었던 본문의 연장선이면서도 또한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면서도 남성이고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인이면서 또한 여성이고 남의 이목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을 주님이 만나러 오셨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3절~4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하지요? 

유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예수님 태어나신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 지방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어릴적부터 쭉 자라신 지방이고, 또한 제자들을 삼고 복음을 전한 나사렛이 있고 가버나움이 있는 북쪽 지방입니다. 

이 남쪽유대와 북쪽 갈릴리 지방의 가운데 중부지방이 바로 사마리아 지방입니다.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북왕국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그들과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 성전마저도 지금은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북쪽 갈릴리 사람이 남쪽 유대 지방을 가거나 유대지방 사람들이 북쪽 갈릴리 지방을 갈 때에는 중부지방인 사마리아지방을 지나지 않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멀리 베레아 지방을 통과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그냥 지난 것도 아니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표현합니다. 영어로는 "HAD TO" 어쩌다가 사마리아를 지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지방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꼭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나머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그 사건들에는 다 각각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 가나라는 동네에서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시어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이 예수의 첫번째 사역으로 나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 그들을 찾으러 오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포도주를 통하여, 즉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쪽 유다로 오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도록, 연합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이후에 마치 신방을 꾸미듯이 하나님의 집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 말씀하시죠. 

무슨 소리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사건이 요한 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오늘 나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즉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정통 유대인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참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될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될지, 유대인들이 왜 신앙생활에서 실패했는지를 말씀하시고 오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구원 사역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어떤 곳입니까? 좀전에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해서 함께 예배드릴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그래서 성전에 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없고 그들끼리만 모여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했던 자들이 모인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깨끗이 하시면서 분열되어 있던 모든 자들이 예수님이 세운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유대인의 잘못과 한계를 지적하시고 이젠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와서 이젠 진짜 예배드릴 때가 왔다. 

누구 누구 빼지 말고 함께 다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자는 것이지요. 


4장 9절)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더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들은 천년 이상을 상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뿌리깊은 금단의 땅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가서 여인에게, 대낮에 다가가서 말을 겁니다. 

니고데모는 어땠지요? 누가 볼까봐, 밤에 몰래 찾아가 예수님께 자신의 영적인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 그에 비해 예수님은 아무도 가지 않던 땅에 그것도 대낮에 다가가서 여인과 긴 시간 대화를 하며 그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는 누가 말을 겁니까? 니고데모가 먼저 말을 꺼내지요? 한 마디 꺼내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못했다"하시면서 말씀을 돌리지도 않고 바로 그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굉장히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 

강한 자에게는 더 강하게 말씀하시고 의례적인 과정도 생략하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마라아 여인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오니까 먼저 말을 건내십니다. 그것도 물을 좀 달라 하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러 오셨는데 첫 마디가 나좀 도와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막 대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는 가차없이 직접적으로 훈계하시면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먼저 찾아가시고, 기다리시고, 그리고 말을 거십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바위 뒤에 숨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할 자는 아담인데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피하고 숨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죄지은 아담을 찾아가시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시면서 그를 부르십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하시면서 잠을 깨우시고, 광야에서 아무 낙이 없이 홀로 양을 치는 모세에게 "모세야 네 신을 벗어라?" 하시면서 그의 인생을 맡기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 오십니다. 아무리 내 처지가 어렵고 힘들고 낙망해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고, 자고, 피합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말을 걸어 오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담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듭니다. 

김연아 선수...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 이젠 심판 뿐만 아니라 아얘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를 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러시아에서 열리는 경기라 홈 텃세도 있었고, 심판들의 판정도 나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올림픽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전세계가 함께 모여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자는 것이지요.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만들자' 입니다.  

아주 좁게 말하면 우리 친목을 위해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하자해서 사람들이 다 모이게 합니다. 모여서 경기하는 것은 그냥 모이기 위한 구실이고 정작 목적은 친목도모이지요. 

그런데 경기하다가 서로 적이 되면 아얘 안모이니만 못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애 반해서 김연아 선수는 얼마나 의젓하게 대처합니까? 본인은 4년을 준비해서 엄청난 땀과 피로서 고생하며 이 날을 준비하느라 억울할 만도 한데, 또 은퇴 무대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난 괜찮다. 참가해서 기쁘고 실수 안하고 내가 준비한 것 다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다. 얼마나 대인배입니까? 

올림픽의 정신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산 가족 상봉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제 분단된지 60년이 훨 지난 시간동안 그저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걷지도 못하는 80대 90대 어르신들이 휠채어를 타고 버스를 타고 먼 여정을 떠납니다. 신청자가 12만명인데 한번이라도 상봉한 사람들은 2만명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80대 이상이지요. 이제 그 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누가 북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겠습니까? 마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처럼 서로 으르렁 거리고 안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혹이라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할까봐, 그 자존심이 무너질까봐, 제자들도 멀리 보내고 먼저 와서 기다리시면서, 그녀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키고 너도 날 도울 수 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 

- 날마다 먹어도 먹어도 갈증나는 것을 길으러 오늘도 뜨거운 뙤약볕에 홀로 물을 길으러 오는 죄인의 모습.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의 인생, 날마나 끝이 없는 하루 하루의 갈증을 채우기 위한 삶

-> 예수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자기 인생의 고단함에 대한 한탄, 간구...그러나 니고데모와 같이 그 생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지요. 


그러자 예수의 직접적인 질문: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네가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냐? 넌 무엇에 기대어 사느냐? 너의 주인은 무엇인가? 

"난 남편이 없나이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거짓일 수도 있고 진실한 고백일 수도 있다. 다섯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내게 안식을 주지 못하고 나의 참 주인이 되어주질 못했다. 

그렇지만 삶의 갈증을 채울 수가 없어서 여전히 또 남편을 두고 살고 있다. 

영적으로는 내가 기대어 살고 있는 우상- 넌 무얼 기대고 사는가? 무엇에 의지해서 사는가?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라는 선포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고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몰래 다니던 여인이 예수를 만자지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자가 됩니다. 이젠 사람을 피해다니지 않고 증거하는 자, 찾아다니는 자가 됩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능력

아, 난 예수님은 믿는데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는 안 다닐래요. 집에서 고상하게 혼자 설교 듣고 성경읽고 기도할래요. 사람들이 무서워요...

예수 만나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열매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빋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5-7, 12) 


사마리아 성읍 전체에 부흐으이 불길이 솟아 오름. 

(행 8:15-17)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예수의 다가가심,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빌립의 전파, 베드로와 요한의 성령세례 ... 이런 단계를 거쳐서 사마리아 온 마을에 성령의 세례가 부어짐. 


(엡 2:14-16)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은 담을 허물러 오셨다. 우리 인생에 사마리아의 지역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돌아다니는 삶 밖에 살 수 없다. 나의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나의 사마리아는 어디인가?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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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5 23:09

    우리를 먼저 찾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마리아여인이라 생각이 되어서 너무나 감사해요 말씀에 은혜가 넘칩니다 ~!

  2.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6 10:11 신고

    부족한 말씀,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3. 사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7 18:58

    요4장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대표죠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를 보면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 예배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 아는 것으로 예배 드림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죠

  4. 사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7 19:03

    내가 그라심은
    요4:19여자가 선지자로 알아보니 하신 말씀으로 깨달음 인정하시는 예수님
    여자는 다시
    요4:25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심 내가 그로라

    •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2.28 16:07 신고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말씀의 비밀은 읽을 때마나 늘 새로운 의미, 샘솟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일것입니다.
      부족한 글 속에서 사랑 님의 지식 위에 한 가지라도 보탬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