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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5-11절)


 (빌립보서 2:5-11)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지나실 때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어떤 이는 세례요한, 어떤이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하고 하니 또 다시 묻습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절)이라고 예수를 나타냅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이른바 교회의 중심 질문, 신학적 용어로 기독론입니다. 


예수는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을 생각하는 모습은 형형색색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얘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 5-11절은 바울의 기독론으로 불리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바울이 선포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신약성경을 통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바울의 기독론,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바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

 

이 구절이 왜 중요한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죄가 들어왔는가, 그 죄의 근원을 차단하는 데서부터 예수의 사역은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금식을 하며 사단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여 뱀의 유혹에 말려드는 아담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세번의 사단의 시험은 결국 선악과로 말미암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한 것을 통하여 인간의 죄악의 통로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말미암는 죄의 통로를 말씀으로 인해 승리하는 예수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은 아담을 유혹하며 "너희 눈이 밝어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하는 뱀의 간사한 유혹을 생각나게 합니다. 

->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가? NO) 

아담 이후로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가져다 놓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고 죄된 생각이고 세상의 생각입니다. 


드라마같은 데서 많이 보는 장면, 가정이 있는 여인을 제비같은 남자가 유혹할 때 쓰는 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

무슨 소리입니까? 가정 같은 거, 남편 같은 거 다른 관계, 사회, 윤리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본능, 감정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가정이 파괴되고 자식들의 인생이 망쳐지고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뒷감당 안되는 일들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 이것이 사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위 일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니, 왜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마음을 갖는가? 헤깔려 하지 마시고 그 의도, 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는가>? 이 죄에서부터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는 그 근본 마음의 시작,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6절) 

-> 아담의 범죄함으로 온 인류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참 하나님이 스스로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 인격-> 자기를 죽여 인류를 살리는 삶. 영성

-> 그 방법은 겸손과 섬김과 희생 

  • 탄생, 생애, 죽음: 하늘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 나심. 의지할 처소 없이 제자들과 가난한 자, 병든자, 귀신 들린 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다니시면 사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 
  • 이 삶에 일관성있게 흐르는 삶의 태도: 자기 부인-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는 것.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니라 만드는 것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자기를 비울 수 있을까? 자기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 있을까? 

     불교: 무아, 자기 비움, 해탈....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가벼움을 참을 수 없어 합니까?  

     정말 무겁고 진중하고 넓은 사람은 무시당해도 괴념치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 많고, 열등감 많은 사람이 자존심 상하면 와르르 무너집니다. 

     자기 목적이 분명하고 자기 삶의 방향이 뚜렷한 사람은 남들이 뭐라 해도 묵묵히 나갑니다.

     신앙생활은 예수가 복 주어서 남들 위에 우뚝 서서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만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나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단어: 동양에서는 사람 인자는 "사이" -> 관계성을 중시, 누군가 있어서 받쳐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유럽) :Humus, 흙, 먼지-> 덧없음. 허무, 솔로몬의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로만 가득찬 개인주의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 ish- 불덩이, 욕망-> 인간은 곧 욕망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을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항상 무언가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우라는 것,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 무아, 해탈은 인간의 정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도의 목적: 비우라, 잊으라, 벗어나라... 무아, NOTHINGNESS.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5절) -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영어로 보면 너희의 삶의 태도가 예수의 삶의 태도와 같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비워 겸손하게, 섬기며, 희생하였듯이 너희도 적극적으로 그의 삶을 닮을 소망을 품고 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남을 닮으려고 하기 보다는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왕, 장군, 정치가,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남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항상 패배자가 있고, 갈등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남과 싸우지 말고 나와 싸우라고 합니다. 이 싸움은 남을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있는 곳은 평화롭고, 유익하며,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도 로마 군사들과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의 싸움은 십자가 상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삶이셨습니다.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8절) 

무엇에 복종하셨습니까? 아담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소견에, 자기 감정에, 자기 마음 가는대로 복종하지만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습니다.  

복종의 정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적 사람의 정의가 욕망하는 것- 다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다른 말로 이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결국 무언가에 복종하는 삶이라면 무엇에 복종하는가가 사람의 삶을 좌우합니다. 


한나 아른트 <<악의 평범성>>

아돌프 아히히만: 아우비츠 수용서의 홀로코스트 참사의 실무 책임자의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참관

많은 사람들은 그가 완전한 악인이며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생각하며 기대했는데 재판 과정에서 살펴본 그의 모습은 그가 나름대로 굉장히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고 신앙심까지 신실한 평범한 가장이며 중년 남성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써내려간 글.


그녀의 글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서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아히히만이 재판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한 말은 "저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는 소리...

마치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로마의 군사들처럼... 

어떻게 지식인들이, 전문인들이 그렇게 참담히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살해하고 시험하고 할 수 있을까? 나치라는 권위에 복종하면서 모든 분별력을 상실...난 복종할 뿐이다...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가장 큰 살인자였다는 사실...누구도 그런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뱀이 유혹하여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바라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인간 안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 

        -> 그런데 그 욕망의 타겟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떼어 놓는 것.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금지 시키는 것

        ->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자유하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떼어놓음이 모든 인류의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복종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 그 안에 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탄은 이것이 어떻게 말이 되냐며 끊임없이 우리를 혼란 시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억압이고 부자유고 그리스도인은 억압과 부자유 속에서 산다고 유혹합니다. 

   -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종의 대상인 말씀만이 그 삶을 움직였습니다.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 어느 정도까지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어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는 것이고 그 결과가 곧 십자가입니다. 

 그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그냥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함의 결과로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십자가가 아닙니다.  

   

  • 이스라엘의 대적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은 완전히 멸하라 하신 민족 - 아말렉 족속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 애굽에서 나올 때에- 세상에서 나올 때에 반드시 쳐야 할 것- 아말렉 그러나 사울왕은 아말렉을 물리친 다음에 볼품없는 것은 다 진멸했지만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어린양과 기름진 것은 남겨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변명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요,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단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육신의 정욕의 사람이요, 그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싸움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과 육적인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아말렉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눈으로 보이는 아말렉의 적도 있지만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인간의 정욕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거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림을 당합니다.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높아진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고지론과 미답지론에 대한 한국교회 신학적인 갈등

* 고지대론: 효과적인 복음전파와 크리스찬의 영향력을 위해서 높은 자리를 점령하라. 세상에서 성공하여 복음을 위해 사용하라.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느혜미아, 에스더... 

* 미답지론: 크리스찬은 남이 하지 않는 것,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바울, 예수, 열두제자.... 아브라함. 

-> 성경은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어쩌면 신학적인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 일부러 높은 곳을 피하고 궂이 낮은 자리만을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답은 자기가 그 길을 정하지 말고 말씀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았던 요셉도 다윗도 다니엘도 느혜미아도 세상적인 영향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교만하지 않고 감사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높이지도 않는데 스스로 높이다 보니까 교만해지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열 두 제자들도, 아브라함도 일부로 힘들 길,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찌보면 미련한 짓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면서 억지로 힘든 일만 골라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가다 보니까 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나타나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복주시는 분? 

 여러분, 이 고백 뒤에는 항상 주인공이 '나'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높여도 내가 주인공이 되면 그 분은 결국 내 밑에 있는 심부름꾼 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그리고 바울도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신 분,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라는 것, 진실한 고백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주님 앞의 순종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진정한 내가 보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갇혀 있는 자신 밖으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알았던, 자기가 왕 되었던 삶에서 주를 바라보면서 밖으로 나오면 주님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하나님 주신 모든 자연이 보이고, 세상도 보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기 안목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에 있으면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안에 있어 세상의 것을 다 가져다 주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말씀 따라 주님 따라 내 밖으로 나오면 행복이 보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도, 왕이 되려고도 하지 말고, 말씀에 복종하면서, 스스로 자원하는 종이 되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로만 사는 삶, 예수를 따르는 삶, 예수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