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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요 21:18-19) 


요한복음에는 부활 이후의 특별한 일,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명을 주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하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하시는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 될 때 마다 되돌아 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맡기신 일,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일, 

다름 아닌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양들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지상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도 간단히 말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목되는 말씀은 19절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는데 이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려고 하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로 따라 올라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도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로 따라 오라는 소리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전에 따르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따르라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 1-11절에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게네사렛이라는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만히 보니 한편에 밤새껏 고기잡으러 갔다가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십니다. 

그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을 외면하며 단지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은 어쩌면 사치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그런 베드로의 배에 올라 다시금 말씀을 전하십니다. 

자기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니 그 말씀을 안들을 수가 없습니다. 

밤새껏 일하고 온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곤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보다 빨리 집에 가서 쉬는 것이 내일을 위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머리 속에는 말씀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오늘 고기를 못 잡았으니 어떻게 하지, 내일은 어떻게 사나하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예수님이 갑자기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피곤한 베드로이기에 이 말씀은 정말 화딱지 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말을 듣고 억지로지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어쩌면 이 순종이 베드로의 나머지 삶을 이끈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 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자기가 말씀을 들으면서 짜증내면서 이 말씀이 도대체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내일을 위해선 빨리 쉬어야 하는데 하던 베드로에게 이 사건은 주님이 말씀을 외면하고 업신여기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면서 비로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5:11)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따라 다녔는데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 동안 따른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8장 1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구절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요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면서 이제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테지만 조금 지나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떠난다는 소리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날 배반할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을 크게 젊을 때의 삶과 늙어서의 삶으로 표현 합니다. 

젊어서의 삶의 특징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다는 것이고 

늙어서의 특징은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띠 띠운다는 말은 영어성경의 표현을 보니까 옷을 입는 것입니다. 

즉 젊어서는 스스로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옷을 입는 것은 성경에서 무엇을 가리킵니까? 

자기 열심, 자기 행위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늙어서는 어떻습니까? 

남이 옷 입히고 남이 인도하는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리키는 남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신앙이 성숙되면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고, 보살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러나 결국은 주님이 승천하시면 오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열심, 내 행위대로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싶은데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몇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헤롯왕까지도 삼일 후 부활하신 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제자들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데로 신앙생활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너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이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누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이야기하면 어디서 또 신비주의, 이단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가장 성령의 인도함가운데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함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단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왜 신천지 같은 이단에 빠집니까? 

자기가 성령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내가 보혜사 성령이다, 나의 말을 따르라는 말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정통기독교는 아무리 훌륭한 목사고 지도자고 사람이 성령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권면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선택을 강요하고 절대적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댜. 

그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성가대하고 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보호사심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밤낮 하는 소리가 내뜻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모르겠다는 말만 합니다. 

그리고선 능력있는 주의 종을 찾아가 점 보듯이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퀘이커 예배

17세기 가장 타락한 영국의 교회

성직자들이 성직을 매매

헌금을 강조하고

가톨릭에서부터 영국 국교회, 청교도, 침례교도인 등 온갖 교파들이 난립. 

조지 폭스라는 사람 - 신앙의 열심이 있어서 목사들과 구도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죄의식의 문제, 신앙의 문제를 상담.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뚜렷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다. 

어느 성직자는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 약간의 술과 담배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가 기도가운데 깨닫게 되는 것. 

네 안에 있는 성령을 의지하라. 내가 친히 너를 가르치겠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퀘이커 교도 

거기엔 예식이 없다. 설교도 없고, 음악도 없다. 

오직 예배가 시작되면 아무소리도 없이 침묵하면서 성령의 음성을 귀기울인다. 

왜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까? 

교회와 성직자 들이 타락하니까 이제 사람을 의지 하지 말고 성령을 직접 의지 하도록....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맡기셨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한 두가지는 단 두가지 입니다. 

1. 서로사랑해야. 한 마음으로 화합하라. 

2.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외에 내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머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유물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면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밥먹고 예배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흩으사 믿는 자들이 하나 둘 씩 흩어져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또 다른 제자들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이는 부흥이 아니라 흩어지는 부흥으로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 자기 행위,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결국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무한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제한한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여기까지만 믿어야지. 자기가 기도의 시간, 예배의 참여 다 제한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의지하는 자는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면서 하시는 것 

이름을 바꾼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베드로를 시몬으로 바꾸신다. 

무슨 소리인가? 

이젠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라. 

내가 준 사명 안에서 살아라. 


기도는 무엇인가? 

내 욕망의 표출로서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성령이 내게 옷입히고 그 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실컸 부르짖고 울었다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을 쓰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들렸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단, 내가 깨달은 말씀이 정말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지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질서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성경이 성경을 거스릴 수 없다. 떄가 기한은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단들은 끊임없이 때와 기한을 이야가힌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처소가 많다고 말씀하셨고 믿는 자 누구에게도 하나님이 나라가 열려 있다고 하는데도 십사만 사천명 운운하면서 특정한 어떤 그룹의 우뤌성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주신 말씀은 곧 믿음의 공동체에게 두루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석되어여 왔는지 살펴 보면서 내가 받은 말씀의 근거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목사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어쩌면 우리는 17세기 영국교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타락한 세상을 살고 있다. 

믿을 수 있는 교회, 믿을 수 있는 목사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소리를 한다. 

CBS에서 신천지를 고발한 피디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 말이 있다. 

신천지는 한국교회의 한 돌연변이고 종양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거된다고 해서 한국교회가 정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암덩이가 교회 안에 있다.  이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는 제 2, 제 3의 신천지 같은 종양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러한 세대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난 예수를 사랑하는가? 

난 예수의 사랑을 받았는가? 

난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가?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로, 주로 진실하게 고백했다면 그 다음 할 일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시는 거룩한 소원, 거룩한 생각, 

내 내면의 빛에 귀를 기울이고 제한하지 말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권세, 하나님의 자녀된 삶의 역사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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