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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바돌로메) 요 1:43-51


 

나다나엘이 주님의 열두 제자인가? 왜냐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 누가, 마가과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요21: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한다.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은 바돌로메와 나다나엘을 한 인물로 본다. 

바돌로메는 돌로메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이다.

1.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 아주 극소수의 귀족들만 서재가 있었으므로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발립과 나다나엘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빌립이 그리스 학문을 배경으로 탐구하고 훈련 받은 사람이라면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인답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였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간사한 것이라는 것은 계산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에 익숙했던 나다나엘은 빌립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했지만 그 방법과 동기에 있어서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다윗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철저히 고독한 공간에서 말씀과의 대면을 사모했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다.


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다나엘은 조용히 묵상하는 자였으나 회의론자였다. 

성경을 묵상했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 전체는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더러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곳은 “이방의 갈릴리”(시 9:1~2)라 불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흑암 가운데 거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나 

(마 2: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요 7: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상반되는 두 구절 - 그러나 현재 구약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말씀들...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말씀, 

어쩌면 전통적이거나 관습적, 편견으로 자리잡은 것들.... 

그래서 이 말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적 표현이었다. 나다나엘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 전통과 편견들 중에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소망을 품을 것인가? 포기하고 절망할 것인가?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다. 


3.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1:47) 

(롬 9: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롬 9: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참 이스라엘에 속한 나다나엘의 마음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위선이 없었고, 속됨이 없었다. 그는 진실히 하나님을 사모했고, 메시야를 기다렸다. 


간사함- 헤롯왕, 예루살렘에 속한 제사장들.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행한 것은 메시야를 찾아 죽이고자 한 것. 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메시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성공,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그것을 위해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것도 예루살렘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요, 그들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참 하나님, 참 메시야를 갈구했다. 


차분하고 내면중심적이지만 좀 부정적인, 회의적인 자에게 주님이 부르신 방법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속을 치유하신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 어느제자도 이토록 따뜻하게 주님이 부르신 자가 있는가? 


그러면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보았다. 

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를 부른 것은 빌립이 아니라 나다. 

내가 너를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나다나엘은 

(요 1: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어느 누구보다 먼저 주님이 하나님이 아들이심과 왕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통해 고대하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50-5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의 순교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짔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1.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이다. 자기의 약점을 끝 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개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자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열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자. 그때 부터 교정은 시작된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준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온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는가? 보통 ‘네 이미 잘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이다. 
(예)사랑을 고백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불평을 하면 더욱 한심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고백이라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시인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나다나엘은 고백의 중요성과 영감있는 아름다운 고백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진실하고 조용히 주님을 따라가며 생애를 주님 위해 바친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수 있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꼐신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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