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2019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꿈을 믿은 여인 (누가복음 1장 38-45절) 


  • 여러분, 태몽을 믿으십니까? 

예전에 장모님께서 한솔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가 한국을 방문했길래 밥 사준다고 식당을 데려가서 무슨 전골요리를 시켜 주었는데 제가 전골 국물을 떠 먹다가 갑자기 전골 그릇 안에서 금목걸이를 건졌다는 꿈을 꾸었다고 알려 주면서 무슨 좋을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야, 그거 태몽하니냐?" 하면서 아내에게 말했지요. 

근데 정말 아이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교회 다니는 사람이 태몽인가? 무슨 목사와 사모님 사이에 태몽이야기인가? 할지 모르지만 한별이 때도, 지금 한나 때도 이른바 태몽을 꾸었습니다. 

한 조사기관의 연구서를 보면 아이를 낳은 산모 500명을 놓고 조사를 해 보니 아이를 낳은 500명의 산모 중 무려 70퍼센트가 넘는 산모가 주위에 태몽을 꾼 사람이 있다는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심리학이나 과학적으로서만은 도대체 해석이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태몽을 믿는 나라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 각 나라의 설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를 읽어보면 멀리 떨어져서 도대체 교류가 전혀 없을 것 같은 나라 사이에서 너무도 유사한 전설이나 설화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며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콩쥐팥쥐나 신데렐라 이야기같은 이야기는 많은 나라에서 각기 다른 제목으로 조금씩 변형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흡사한 내용의 설화들이 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이야기도 기독교 국가 밖에 홍수의 이야기나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하나의 설화처럼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인 설화 연구가들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근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른바 원형이 되는 이야기, 원형이 되는 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서 이미 주어진 원래이 story가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이 발달되면서 기독교도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기독교를 미신과는 다른 것으로 엄밀히 구분하면서 기독교 안에서 꿈이나 환상을 이야기 하는것을 금기시 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꿈을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서 인정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계시는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새로운 예언이나 꿈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 이후나 이전에도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 있습니다. 

찬양 가사로도 유명한 요엘서 2장 28절부터 말씀은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하고 말씀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장에서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사도베드로는 이 말씀을 받아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때 뿐만 아니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 할 때에 환상이 임하여 그를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도록 강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받은 환상으로 계시록을 남기지요. 

어찌보면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요셉에게 주신 꿈으로 시작해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꿈으로 끝나는 꿈으로 가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 예언, 꿈, 환상 등은 세상의 꿈과 환상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어긋날 수 없습니다. 이미 주어진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과 환상들도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분별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실현되는 것이었고 만물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그렇지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이 말씀 대신에 꿈을 넣어 한 번 말을 바꾸어 봅시다. 

하나님이 꿈을 꾸시면 곧 만물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꿈은 곧 실현이고 창조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꿈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꿈을 인간에게도 주어서 인간이 만물에게 명하면 그것이 이름이 되고 순종했는데 죄로 말미암아 말의 권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꾸면 말씀이 되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인간은 꿈을 꾸어도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지 않고 말을 하여도 서로가 신뢰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말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만물도 인간의 말을 듣지를 않지요. 

아무리 꿈을 꾸어도 실현되지 않으니까 이젠 꿈을 꾸는 것 자체를 잊어버립니다. 꿈꾸려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이 꿈에서부터 시작되어 말씀으로 나타나고 이 말씀이 만물이 되고 육신이 되었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안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 만물 속에서 갇혀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꿈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에게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온 이 하나님의 꿈을 외면하고 삽니다. 그 꿈을 살피지 않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만물에게 종살이 하듯 삽니다. 

그런데 이 말씀, 하나님의 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비로서 그 꿈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과 똑같은 꿈을 꾸며,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의사였던 누가가 쓴 성경입니다. 누가는 의사이기 때문에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의 내용이지요. 

누가복음 1장 1절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시작합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세히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누가는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 많은 사람들이 처음 목격자들로부터 듣고 그대로 저술하려고 썼지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려" 

다른 누구보다 의사로서 그 모든 목격자들의 진술을 근원부터 살펴서 데오빌로 각하라는 높은 분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그런데 그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누가가 지체 높은 양반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첫 시작은 

다른 복음서나 성경보다 오히려 훨씬 더 신비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승천과 곧 이은 성령의 강림을 묘사합니다. 

누가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선지자가 차례에 맞추어 분향을 하러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약속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가랴가 살던 때는 언제입니까?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거의 400여년 동안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도 거의 끊어졌던 신앙의 암흑기 였습니다. 

예언도 없었고, 신앙은 거의 형식만 남아있던 때였습니다. 

예배는 드리고 기도는 해도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리라는 기대도 응답에 대한 소망도 거의 없는 그런 예배 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줄 것이고 그 아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가랴의 반응이 어떱니까? 

하나님의 천사 가브라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하면서 자기의 환경과 여건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환경을 갖다 대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꿈이 현실이 될 때까지 말하지 못하는, 즉 꿈꾸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만남이 오늘 읽은 마리아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요셉과 정혼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결혼 전에 집안 끼리 미리 정혼을 하고 기일이 지나면 신랑이 혼수를 들고 신부 집에 와서 잔치를  열어 신랑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 정혼의 기간 동안 신부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결혼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하면서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하고 하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법으로 결혼하지 아니한 여인이 아이를 갖게 되면 곧 처형입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정혼한 상태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마리아 뿐만 아니라 신랑될 사람의 인생도 큰 일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 벼락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도저히 은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산 다는 것,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큰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꿈을 꾼 요셉에게 그 형제들마저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우리가 그를 죽여 그의 꿈이 어찌 되는가 시험하여 보자"하면서 그를 죽이고자까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으로 인해 노예로 팔려 갔다가 감옥에 들어가야 했고 또 다른 꿈의 사람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은 세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이요, 하늘의 가치관과 하늘의 습관과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세상이 비록 그들을 몰라주고 비아냥거리고 핍박해도 결국은 우리에게 주신 꿈으로, 말씀으로, 그것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난 주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고백인지...모세를 보아도, 그리고 바로 앞의 사가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좋다던 그들도 하나님이 비전을 보여 주셨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자기 상황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부정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한 자입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보고 온 열 명의 정탐꾼은 "저 땅이 좋아보이기는 하는데 저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메꾸기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저들은 자기 자신만 보고 상대방만 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이 45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물론 하루 하루 살아가면 자꾸 비전을 놓쳐 버립니다. 꿈을 잃어버립니다. 

현실의 장벽에 막혀 버립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회이고 신앙의 공동체 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 앞서 그 꿈을 받은 자입니다. 비록 남편 사가랴는 불신으로 인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말씀의 능력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선배요, 먼저 경험한 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마리아는 고백했지만 하나님은 마리아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엘리사벳에게 보냅니다. 


둘 다 애를 낳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둘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견뎌야 할 환경과 남들의 시선이 말도 못합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예배하러 들어가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애를 가져도 자랑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청첩산중입니다. 요셉의 집안에게는 어떻게 말할 것이며, 자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만나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게 하십니다. 서로 축복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의 꿈을 쫓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곳입니다. 말씀과 사랑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곳입니다. 네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라고 보장해 주는 곳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은혜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확신합니다. 


말씀을 받았으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병든 믿음, 죽은 믿음은 항상 두 마음을 가집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망설이는 사람은 결국 넘어집니다. 무너집니다. 

열매맺지 못합니다.

애굽으로 갈까 망설이는 사람은 결국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던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지다. 

신앙은 불신앙이 망치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은 신앙이 망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신앙이 날 어렵게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해 믿음을 굳건히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컫으리로다." (47-48) 


남들이 날 어떻게 보든 마리아는 흔들리지 않고 다시 집으로 향합니다. 집을 나올 때의 발걸음은 두려움이었는데 돌아가는 발걸음은 견고함이었고 평안함이었습니다. 

교회를 나갈 때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흔들린 마음, 두려웠던 마음, 염려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안정되고 평안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처형의 간증. 

아버님의 지인, 옛 성도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꿈 속에서 만난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웃을지 몰라도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복된 소식이요, 확실한 주님의 약속이요 보장인 것입니다. 

신앙은 꿈 꾸는 것입니다. 

허무 맹랑한 꿈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주시는 꿈. 

그 꿈이 이루기 까지는 세상을 견뎌야 합니다. 씨앗이 자라야 합니다. 열매맺을 때까지 물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은 씨를 뿌리는 것이요, 말씀 가운데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곧 잉태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 교회는 이 말씀이, 꿈이 태어날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가꾸고 보호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꿈을 꿉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받읍시다.

아브라함은 아무 열매 없이 75세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삭을 낳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80평생 의미없이 광야에 도피해 살다가 하나님의 꿈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목동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꿈이 있으면 죽음도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 가운데 세상에서도 천국 가운데 살고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을 삽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꿈으로 미국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예배는 꿈꾸는 자들이 모인 처소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는, 새로운 꿈을 소망하는 꿈꾸는 로고스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