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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근원 (빌 1장 1-11절) 


바울의 여러 서신서들 중에서 특별히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특별히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배경은 사도행전 16장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더불어 1차 전도여행을 갖다오고 이제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고하고 2차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서 이제 실라와 새롭게 만난 디모데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하려 합니다. 원래 2차 전도여행을 1차 때 방문했던 도시와 교회들을 다시금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을 세울 때에 빌립보 지역은 바울의 대상지에 들어있지 않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갔던 교회를 다시금 돌아보려 하는데 7절에 보니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합니다. 성령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때에 한 밤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10절에는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입니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공인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갔다와서는 보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역자를 구하고 다 떠나려 하는데 성령께서 허락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사람을 시켜서 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 속에 평안이 없다거나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울은 멈춰 섭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요,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요"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함이 없을 때에 그는 멈춰섰던 것입니다. 

그 때에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 사람의 요청을 듣게 됩니다. 요셉이나 마리아에게 처럼 가브리엘 천사 정도가 나타나서 예언한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지 불식간에 일어나는 공상이라 여길 수 있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 볼 때에 만약 나라면....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 큰 사역을 앞두고 내가 계획해 놓은 일정이 있는데 좀 마음이 불안하고 편하지 않을 때에, 마게도냐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자기가 세운 일정은 안전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계획인데, 환상을 통해 보게 되는 내용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새로운 땅을 향한 계획입니다. 내가 건강이 않좋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바울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백하며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증거합니다. 


바울이라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소리를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려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핑계입니다. 변명입니다. 모세라고 바울이라고 성령의 음성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불확실하게, 불분명하게, 자신의 생각과 혼동스럽게 불편한 마음으로, 공상처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음성의 확실함이 아니라 순종의 확실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 된 (빌 1:1)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계획과 내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할 수가 없습니다. 민감함은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분의 확실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게도냐에 첫번째로 방문하게 되는 도시가 바로 이번 주부터 우리가 나눌 빌립보입니다. 

이 빌립보에 도착해서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입니다. 거기서 그는 귀신들려서 점치는 한 여인을 고쳐 주었는데 그 여인으로 말미암아 돈을 벌던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에 들리건 말건, 그 소리가 귀신의 소리건 말건, 세상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돈이 되면 좋은 것이고, 돈이 안되면 나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해 주어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울을 감옥에 보내게 됩니다. 


[행 16:22-행 16:24]

(행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부자유, 억압)...

 ->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형벌

 왜? 위축되게 하려고, 절망시키려고, 낙담시키려고,,,,

 

 그런데 이 때에 바울과 실라의 반응 

 25절)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그냥 큰 결심을 하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담담히, 특별할 것도 없이, 매일 하던 대로 하던 일을 기록하는 양 기술합니다. 

 우리 같으면 이같은 상황을 간증할 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속으로는 심령에 파도가 일고...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상황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했다....결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종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가 이제 죄수들이 풀려나와 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벌벌 떠는 간수의 앞에 섭니다. 

그들을 때리고 지키고, 발에 차꼬를 채웠던 간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행 16:30)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누가 자유한 자이고 누가 구원을 베풉니까? 

이들의 간구에 바울은 그 유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 

감옥속에서도 자유한 삶, 

참 자유한 삶,

주 예수를 믿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종된 자가 되는 삶입니다. 


이렇게 빌립보 교회는 감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자 빌릴보 교회는 당시의 목회자였던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 시중들게 합니다. 먼길을 오느라 중병에 걸려 예바브로디도가 거의 죽게 되었다 다시 살아나게 되었을 때에 그를 돌려 보내면서 보낸 편지가 바로 이 빌립보서 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그 속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와 찬양을 통해 그 감옥데 갇혀 있던 모든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구원을 베풀었듯이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바울은 똑같이 문제 많은 빌립보 교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감옥

성경에서는 감옥을 복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감옥은 어디입니까? 죄인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형벌의 장소입니다. 

거기는 자유가 없습니다. 늘 감시자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거기엔 변화가 없습니다. 늘 똑같은 일상의 연속입니다. 

일을 해도 보상이 없습니다. 주어진 것만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이나 철학자드링 현대인의 살아가는 세계 자체를 감옥데 비유합니다. 

누군가 날 감시해서 통제하는 곳.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에는 형별이 가해지는 곳. 

벗어날 수 없는 곳.....

그런데 성경은 또한 그 감옥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기술합니다. 


요셉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다니엘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감옥안에서 감옥 밖의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그에게 참 감옥은 감옥안에 있는 바울이 아니라 감옥 밖의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옥같은 곳에 거할 지라도 그 곳에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으면 그곳이 구원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 기쁨

빌립보서의 주제는 놀랍게도 "기쁨"입니다. 지금 감옥 안에서 바울은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참 기쁨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합니다. 

4장의 짧은 성경이지만 빌립보서에는 90번 이상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지금 기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밖으로는 로마의 핍박이 거세지고 있고, 그 교회의 초대 목사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고, 현재의 담임목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목사를 위로하고 심방하러 가다가 역시 중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교회 안으로는 교회 안의 열심내는 두 여인 유두고와 순두게에 의해서 교회가 크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편할 날이 없고, 걱정거리만 있고, 리더십은 공백상태였고, 핍박은 거세졌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서 낙망하고 쓰러져있었을 것 같은 바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온통 기쁨에 관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옥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옥같은 현실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1. 너희가 첫날 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3. 너희가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4.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옥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심장,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이것이 결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바꾸면 행복해지고 기뻐할 수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환경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생각을 합니다. 이 환경만 좀 변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환경이 좋아지고 사람들이 부유해지면서 할 수 있으면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심지어 좋은 교회를 찾아서 떠나고 바꾸고 변화를 시도합니다. 요즘은 결혼 이혼도 자유로워져서 배우자도 수시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 남성들의 부러움...) 

물론 집안의 가구만 바꾸어도 기분이 상쾌할 수도 있고, 새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외부적 환경을 바꾸는 이유는 내 마음을 바꾸어 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바뀌는 마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새 것을 사면 금방 낡은 것이 되고, 식상해 지고, 또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 안을 새롬게 만드는 것, 그것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성령의 충만입니다. 


내가 바뀌면 그렇게 실증나던 환경도 사람도 괜찮아 집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4절) "내가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사도바울의 환경은 지금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글을 억지로 쓰는 것도 아닙니다.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뻐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 환경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롭게 되니 그 속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언제 풀려날지,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남들을 돌보고, 남들을 위로하고, 남들을 사랑할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라고 고백하며 감옥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감옥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사랑과 중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우리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합니다.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적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사랑합니다. 나에게 잘해주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여도 사랑합니다. 나의 원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하는 사랑입니다. 

지금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여러가지 교회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조롱하고 따라서 교회와 복음이 실패했다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줍니다. 

또한 유두고와 순두게와 같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문제 투성이인 교회지만 그가 기뻐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문제를 일으킬 지언정 여전히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일으켜도 사도 바울의 마음에 그들이 항상 있는 이유는 그들이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될 것"(7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이 확신은 신념과는 다릅니다. 신념은 그냥 무작정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심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도함으로 확정을 받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와 달라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중보와 함께, 기도와 함께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사랑은 우리 마음대로지만 기도와 함께 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빌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EX) 화가가 되기를 꿈꾸는 두 소년이 있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두 소년은 대학에 진할 형편이 못되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런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둘 다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우선 자기가 도시에 나가 취직을 해 돈을 벌어 그 돈을 대줄 테니 친구더러 먼저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공부를 먼저 마친 친구가 나중에 수입이 생기면 그 돈으로 자기가 공부를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둘 다 원하는 미술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친구도 이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도회지로 나가서 식당 일을 하고, 다른 한 친구는 그 친구가 조달해 주는 돈으로 미술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워낙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을 앞두게 된 이 친구는 그 동안 식당에서 일하며 자기에게 학비를 대준 고마운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으로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를 돕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던 친구가 잠깐 짬을 내어 식당 한쪽 구석에서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이렇게 중보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친구 녀석이 미술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도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식당에서 여러 해 동안 일을 하다보니 손이 굳어져서 앞으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는 꼭 위대한 화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식당 한쪽 구석에서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중보하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순간, 이 화가 친구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눈물이 가슴에서부터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놀라운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친구의 저 손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그 두 손은 위대한 힘 자체였습니다. 비록 고된 식당 일로 거칠어진 손이었지만, 그 손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들고 온 화선지를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두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에 혼이 들어갔습니다. 그림에 친구에 대한 사랑이 들어갔습니다. 바로 이 그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두 손>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던 친구의 기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중보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 알버트를 위해, 그의 미술 공부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중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이 크거나 작거나, 곱거나 거칠거나, 가꾸었거나 가꾸지 않았거나, 매니큐어를 칠했거나 칠하지 않았거나, 중요한 것은 두 손 모아 중보하는 손이라면 그 손은 아름다운 손인 줄로 믿습니다. 바로 기도하는 손이 위대한 손일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보다도, 우리 자신의 삶의 자세입니다. 마음가짐입니다. 영국의 영적 거성 투루나이젠이 젊은 시절에 오랫동안 기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그는 기도를 바꿨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그러자 그 기도는 바로 응답되었다. 그의 언어가 바뀌고,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그러자 주변이 변했고, 그는 점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조금씩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투루나이젠은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진작 기도를 바꾸었어야 했다. 내가 바뀐 이후에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인물로 성장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바뀌어야 내 가족이 바뀌고, 나의 단체가 바뀌고, 내 나라와 세계가 바뀐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그런가? 다 남이 변하기를 바란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대통령을 갈아야, 국회의원을 갈아야 이 나라가 발전할 거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그렇던가? 내가 변해야 한다. 내가 변해야 이 나라가 바로 선다. 개혁(改革)이란 가죽을 바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를 바꾼다는 의미다. 그러니 진정한 개혁은 스스로의 더러워진 피부를 닦아내면 생각보다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셨다. 이는 하나님이 개명만 해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열국의 아비가 되려면 먼저 아브람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가슴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가지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가지고 자녀를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원수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그를 위해 중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감옥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한 바울과 같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친구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했던 알버트 듈러의 친구 같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