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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과 복의 신앙 (창 13장 8-13절) 


흔히들 한국교회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에 '기복신앙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복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복을 소원한다는 것이다.  

왜 복을 소원하는가? 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이 없는 사람이 복을 찾아 다니며 간구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히 복을 밝히는 민족이다.  

옛날 집안의 가구들을 보면 숟가락에도 복, 젓가락에도 복, 베개포에도 복, 이불과 요에도 복, 심지어 변누는 요강에도 복, 대문 손잡이에도 복, 현관에는 복조리개를 걸어놓기도 했다. 

곳곳마다 복을 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새해만 되면 지금도 예수 믿던 믿지 않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세배하며 인사한다.  

왜 그런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복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대한 민국에 처름 기독교가 들어갔을 때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제일의 전도 표제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였다. 

실재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받았다는 것을 간증하고 다니며 전도했다.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  

영어로는 "It was good" 이다. 

처음 시작부터 세상은,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간은 선한 존재, 다시 말하면 날 때 부터 복 받은 존재였다. 

그런데 복으로 가득찼던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복을 잃어버렸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복을 대표하는 곳이 에덴동산이다. 

"에덴"이라는 뜻은 행복과 기쁨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선악과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이, 마음이 선악과에 꽂이자 에덴의 모든 행복과 기쁨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선악과만 먹으면....하다가 결국 에덴에서 나오게 되었다. 

선악과를 사탄을 통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다.  

원래 부터 복이었던 사람이 이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정욕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울은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유능한 장군이었고 용사였고, 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윗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시기하다가 결국 분노하게 된다.  

"저 놈만 없다면..."

이후의 삶은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제거하는데 소모한다.  

한 사람을 시기하다가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  


사탄의 유혹은 무엇인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복을 쫓아 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통제를 떠나면 더 자유하고 재미있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막상 떠나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아버지의 것 중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면 더 재미있고, 즐겁고, 자유한 삶을 살 것 같았는데 막상 떠니니 결국 궁핍이 찾아오고 짐승보다 못한 삶, 노예같은 삶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삶이다. 

자기들끼리 죽이고, 다투고, 시기하고, 저주하고, 탐욕과 욕망, 음탕함과 절망이 가득차다. 그래서 이후의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기복신앙이 되었다. 

잃어버린 복, 빼앗긴 복을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복을 얻기 위해 안달이 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더 벌고, 더 빼앗고, 더 배우고, 더 가지고.....

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가?  복을 달라고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 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만 먹으면, 다윗만 없으면, 애굽의 노예에서만 벗어나면... 가나안에만 들어가면, 복을 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어도,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져도, 소망하던 것을 얻어도 정작 복을 누리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한다.  


우리는 오늘 읽은 아브라함과 롯의 기사를 통해서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참 복인가, 무엇이 참 복된 삶이고 복된 사람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2장은 복을 얻기 위해 우상을 만들었던 가정에서 자랐던 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가 될 때까지 땅도, 자식도, 자신이 생각한 아무 복도 얻지 못했던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창 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1절: 떠나라, 보아라. 가라 ->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주신 것이다. 에덴 동산이 복의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2절: 복의 주체가 나온다. "내가 너로..." 복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복의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주신 복의 내용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을 복 자체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나온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복이 흘러가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롯을 먼저 다룬 후에 다시 한 번 묵상하도록 하자. 

       

       4절을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 아브람이 따라가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롯이 따라가는 대상은 아브람이다. 

       롯이 아브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브람이 가진 복을 롯도 가질 수가 있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롯은 아브람을 통해 아브람이 가진 복을 나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거하는 것이 아브람에게도 롯에게도 자꾸만 불편을 가져다 준다. 

       아브람에게는 롯과 함께 있는 것은 그가 따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과 함께 함으로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롯과 함께 거함으로 과거에 우상섬기는 습관과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가는 자라면 롯은 철저히 복을 추구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다.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다. 영생이다. 

       

       그런데 롯은 구원이고 영생이고 필요없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복만 있으면 된다. 

       아브람에겐 복이 목적이 아니요 말씀이 목적인데 롯에겐 말씀은 복을 얻게 위한 수단이다.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복을 위해 신앙 생활 하는 사람과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자, 말씀은 곧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를 쫓아 신앙생활 하는 자가 함께 있다. 

       처음엔 복 받기 위해선 말씀에 순종하라 하니까 잘 티가 안난다. 

       복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도, 정말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도 다 같이 말씀을 통해서 거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둘은 점점 나뉘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되듯이 복을 쫓는 자와 말씀을 쫓는 자가 교회 안에서도 나뉘게 된다

       언제? 어느 정도의 복을 얻은 후에.... 

       

       (창 13: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은 소유가 많아질 수록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자 한다. 주면 줄수록 더욱 궁금한 것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관심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말씀의 열매가 나타날수록 말씀을 사모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롯의 관심은 여전히 복이다. 가지면 가질 수록 눈에 보이는 복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눈은 자꾸만 밖으로만 향한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욱 욕심 부리는 재벌들 전쟁처럼 롯은 더 화려한 것, 더 많은 것, 더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말씀은 점점 더 부담스럽기만 하다.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다. 다투지 말자. 네가 먼저 선택해라. 

       말씀을 따르는 자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자기 먼저를 내세우지 않는다

       

       롯의 선택을 보자 

      (창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가 취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짝퉁 동산이다. 

      보이기만 비슷한 것이다. 복인것 같지만 정말 참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절부터 아브람에게 주신 땅을 보자. 

      바라보라. 이르리라. 주리라. 다 미래에 대한 말씀이다.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는 약속이 있고 보장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다.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마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약속으로 아브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이 씨앗은 생명이 있다. 짝퉁이 아니다. 진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한번 주고 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되는 on-going한 관계이다. 

      보고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순종하면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교제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아브람을 만들어 가신다. 그가 복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애굽으로 갔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다. 사래는 친척 누이였다. 

      그 꾀로 인해 16절에 보면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낙타를 얻었다. 이것이 그들이 얻은 풍부함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17절에 보면 그들의 풍부함은 곧 재앙이었다. 

      그러니까 복은 소유가 아니다. 많이 가졌다고 복이 아니다. 가진 것이 재앙일 수 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시 1편) 

      

      나중에 가면 또 하나의 실수를 한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것도 아브람의 꾀였다. 꾀는 언제나 재앙을 낳는다. 그 꾀를 다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리신다. 

      꾀로 말미암지 않고 약속으로 주어진 복이다. 참 복이다. 

      

      이삭을 주신 후 다시 한 번 마지막 시험을 주신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따를래, 복을 따를래...

      롯과 함께 시험했던 마지막 시험을 하신다. 

      

      모리아산의 시험에서 아브람은 다시 한번 복을 택하지 않고 말씀을 택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복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복이 되었다.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곳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 

      

     (창 22: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는 말씀을 따라 살다가 복이 된다. 복이 되어 죽는다

     롯은 복이 되지 못한자가 결국 복의 땅을 얼마나 더럽히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그들이 복이 되지 못함으로 그 땅을 저주받게 만든다. 

     롯도 에덴 동산 같은 풍성한 땅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땅은 음란의 대명사, 타락의 대명사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 

     그 땅을 도망나와서도 두 딸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다. 결국 죄악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희한하게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엘, 그리고 이 롯도 이러한 자들을 그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복을 쫓아 산다. 

     좋은 학군을 위해 이사하고,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하려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하고, 좋은 교회에 가서 은혜를 얻으려 한다. 

     워렌 버핏이라는 미국의 대재벌은 2000년도부터 하루를 택해 자신과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경매를 통해 제공한다. 

     2000년도에 그와 점심식사하기 위해 경매에 당첨된 사람은 2만 5천달러였고 그 금액은 매년 증가해서 2012년엔 346만달러 (약 37억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은 성공하기를, 복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쫓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에게 "너희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너희는 복이다. 복덩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복되게 살라는 것은 복답게 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서 아직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내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말씀 안에 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복되면 내가 있는 가정이 복된 가정인 것이고 나를 부모로 둔 자녀들이 복된 것이고 나를 자녀로 둔 부모가 복된 것이다. 

     나를 성도로 둔 교회가 복된 것이고 나를 목사로 둔 교회도 복된 것이다. 나를 직원으로 둔 직장이 복된 곳이고 나를 남편으로 둔, 아내로 둔 사람이 복된 것이다. 

     복은 내가 가지지 못해서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아직 복이 아니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면서 써내려갔던 시가 있다. 부끄럽지만 이 시를 나누면서 설교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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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삶은 결국 죽은 것이요

삶이 아닌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이요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요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하다 죽으라는 것이다. 

 

사랑하면 아픈 까닭은 

사랑이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사랑하면 주어야 하고 

사랑하면 죽어야 하는데

사랑하며 가질려고 하고 살려고만 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래서 아픈 사랑은 결국 

내 죄로 인한, 어두움으로 인한, 연약함으로 인한 아픔인 것이다. 

 

목회라는 것은 결국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지 않는 목회는 결국 삯꾼목회요

바리새인 목회요

죽은 목회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목회는 사랑이지만 아프다. 

아직 미완성인 교회이기에 

아직 미완성인 사람들이기에 아프다. 

 

그래도  

강대상 앞에 앉을 때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계속적으로 나에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날 사랑하는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치라"는 것이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내 목회의 소명

하나님의 당부이시다. 

 

그래서 

목회는 사랑이다. 

아프지만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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