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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창 37:18-20) 


비좁은 감방에 두 명의 죄수가 갇혀있다. 감방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고 단지 눈 높이에서 석 자 위에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을 뿐이다. 두 죄수는 그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은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을 응시했다. 그는 날마다 점점 풀이 죽고 비탄에 젖어 분통을 터트리는가 하면 절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죄수가 본 것은 그 창문 너머에 있는 하늘이었다. 언젠가 저 자유로운 하늘을 만끽하며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는 희망이 샘솟았다.  같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창살을 보았고 또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시야의 차이가 이들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낳은 것이다. 


새해가 밝아서 벌써 열흘이 지났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끊임없이 묻던 질문이 있었다. 너 커서 뭐가 될래? 

언젠가 부터 내 인생에서 그것에 대한 질문이 사라졌다. 

더 이상 꿈을 묻지 않고 날마다 기도해도 막연하게 그저 교회 부흥하게 해 주세요. 재정 넉넉하게 해 주세요. 교인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친다.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 로고스 교회를 이 땅 프리몬트에 세운 목적이 그저 우리 성도들이 천국가는 날까지 교회 사라지지 않고, 교인들 아프지 않고, 재정 빵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을까? 

그런데 대부분 성도들이나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제목은 부흥과 재정, 성도들의 안위 문제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정확한 뜻과 목적을 바라보지 못한다. 

물론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그러나 부흥해서 무엇할 것인가? 부흥된 이후에는 무엇할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목표를 잃은 이스라엘 같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은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다. 왜 그런가? 

가나안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5년 후, 10년 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매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이 꿈을 잃어버리면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녀들에게도 꿈을 묻지 않는다. 자녀를 바라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올 해 또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야 할까? 자식을 바라보면서도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 현재,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다. 

흔히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꿈을 가진 사람은 삶의 에너지가 식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방향도 없고 날마다 삶을 체크하지도 않고 그저 날마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다. 

결국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택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야곱을 낳아 이스라엘을 이루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할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 

75세이면서도 자식도 없고, 아버지의 직업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별 볼일 없고, 소망 없이 그저 하루 하루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별 볼일 없는 인생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주신다. 소망을 주신다. 

(창 12:1-2)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하는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해 보자. 이런 강한 생각이 마음 속에 막 들어왔다고 해 보자. 

어떨텐가? 과연 여러분 같으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는가? 

'별 생각이 다 드네.... 내가 또 헛된 생각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보다'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말씀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까? 

목소리가 분명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변명하는가?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처럼 직접 눈으로 보이게끔 역사하시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 합리화다. 자기 변명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들 때에 그는 그것이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모세에게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다 크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들 또한 작고 미세한, 자기 생각과 정확히 분별히 되지 않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강하게 경험한 자들이 있다면 출애굽하여 광야 가운데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일 것이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굴복시키신, 홍해를 가르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신, 하늘에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내리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초현실적인, 초 자연적인 하나님을 모두 경험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좋았는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 말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도 우리는 절대로 저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삶을 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믿음이 생기겠는가? 

 

본론 


성경에서 꿈의 사람 하면 바로 나오는 사람이 우리가 읽은 요셉이다. 

요셉에 대한 보통의 생각들 - 꿈의 사람, 똑바른 아이, 모범생,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한자. 

특별히 우리가 요셉의 생을 떠올릴 적에 대다수가 기억하는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39장에 나오는 장면인데 중요한 대목이니까 다 함께 한 번 찾아볼까요? 

자, 오늘 읽은 본문에서 조금 시간이 지나 장면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한다.  


지금 상황은 요셉이 노예로 잡혀와 이방땅인 애굽에서 노예로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상황이 좋고 내 주위가 평안한 것이 형통이 아니라 외적인 상황은 어떨지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형통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3절에는 형통하는 요셉을 보디발이 바라보며 그를 자기 가정의 총무로 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특별히 4절에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곳을 다스리게 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장면을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범죄하는 장면과 함께 보면 요셉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 수가 있지요.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니까... 

 8절부터 요셉이 뭐라고 말하냐면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절에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의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마치 창 2:16-17절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뱀이 와서 무엇이라며 유혹하냐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며 아담을 혼동케 합니다. 

나머지 다 먹고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인간이 다 되고 하나만 못하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 하나가 나중엔 너무 커 보여서 나머지 자유는 다 보이질 않고 오직 못하는 하나 때문에 부자유한것 같은 삶을 살 때가 많지요., 

사탄이 지금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서 아담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자기가 얼마나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지요.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않았습니다. 금한 것은 오직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 안에서 자유한 삶) 

잘 보아야 할 것이 지금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가리켜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큰 죄악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아담이 실패했던 사탄의 유혹을 완벽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끈질깁니까?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나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사탄은 끊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지요. 

나중에서는 어떻게 그 여인을 피합니까? 


 15절)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 (죄를 짓자 옷을 지어 입는 아담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죄를 지은 것은 보디발의 아내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지금 보디발에게 요셉을 거짓 증거 하는데 

 17절에 보면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아담과 하와의 변명 _ 죄의 특성, 죄의 전가. 하나님 당신 때문에)   

 그런데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증거에 맞서지 않고 묵묵히 그의 죄의 전가를 자신이 감당하여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요셉이 아담의 원죄를 극복하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자기 가족,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리는 장면은 무고히 자기 제자, 가룟유다에 의해 은 30에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꿈을 생각하며 그 꿈의 성취를 애굽의 총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총리가 되어서 형들과 아버지까지 와서 총리인 요셉에게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셉의 꿈의 성취는 애굽의 총리가 된 것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한 것. 성경에서 요셉의 위치, 중요성, 그의 영향력은 그가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처음 부터 모범생이고, 온전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초기의 요셉 

(창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고자질쟁이, 부모의 과잉사랑, 섣부른 발설. 왕따의 기질 


그렇다면 무엇이 요셉을 성숙케 하였는가?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요셉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광야),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드렸던 절대절명의 기도의 순간들, 모세가 궁전을 떠나 광야에서 고독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과잉보호에서 떠나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을 통해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 이생의 자랑의 상실, 진정한 자아와의 대화, 진정한 자아와 하나님과의 대면, “거듭남, 체험, 중생의 순간)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요셉의 성숙의 시간 

육신적으로는 가장 피곤한 시기. 영적으로는 가장 갈급한 시기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시기. 

그러던 그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가면서부터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보호가 없어도, 보디발의 집에 있어서나, 감옥에 있어서도 요셉을 증거하는 성경의 묘사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도다"


그는 연단을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는,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그가 세 번의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릴적 형들과 아버지인 야곱 앞에서 형들의 농사한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내게 절한다는 내용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형들이나 아버지가 그 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심이 없고 자신도 그 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들은 형들과 아버지는 우리가 네게 절을 한다는 소리냐 하면서 화를 내며 급기야 요셉을 팔아넘길 정도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나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요셉은 감옥안에 잡혀온 왕의 관원장들의 꿈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히 해석해 냅니다. 그런데 실수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 꿈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놓쳐 버립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지만 자신을 그 꿈 속에서도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찾지 못합니다.   

마지막 바로의 꿈을 들으면서 요셉은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꿈의 주도자가 되어서 결국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서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더 깊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신다. 비전을 주신다. 삶의 사명을 주신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에너지가 되고 새명줄이 되고, 목적이 되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꿈을 꾸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꿈꾸는 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세력이 있다. 

그저 하루 하루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음을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우는, 그야말로 감옥 속에서 철창살만 바라보도록, 하늘을 가리는 존재들이 있다.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37:18)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우리를 삶의 극단에 빠지게 해서 꿈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악한 영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세력의 방해를 말리지 않으신다. 

 악한 영들은 우리를 고난에 빠뜨려서 꿈을 버리게끔 만들지만 하나님은 또한 그러한 고난을 통해 자신을 의지하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품안에 있던 요셉이 나와서 오직 하나님과만 교제하여 신앙의,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옴을 알기 떄문이다. 

 고난은 악한 영들을 통해 오지만 고난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인사말에 우리 로고스교회의 목회 비전이 나온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미 실패했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부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때 부흥했던, 아니 지금도 겉모양은 여전히 부흥하는 교회들로 인해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를, 복음을,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있다. 

 수 많은 무리들을 쏟아내지만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기의 삶을 내어 놓는 Real Christian은 점점 사라져 간다. 

 더 이상 이렇게 부흥만을 외치는 교회를 소망하지 말아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교회, 다른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나오면서도 왜 자기가 교회 나오는지, 예배의 목적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나의 신앙의 목적은 예수님 닮은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내 목회의 오직 유일한 비전은 예수님 닮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 의인 열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진정한 크리스찬 열명만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12명의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고 그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이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자기를 위해 예수를 희생시키는 무리를 만들 것인가, 예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가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꿈을 꾸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인생을 헛되이 살지 말자. 

 사탄은 지금도 꿈 꾸는 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그러나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죽이지 않으신다. 꿈을 꾸면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분의 꿈을 이루어 가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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