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19  이전 다음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

(마 16:21-28)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 부분에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마 16:16) 


이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다. 

교인은 누구인가? 교회 나오는 자들이 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는 자가 교회이고 교회의 교인이다. 


이 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생명력은 상실된다. 예수가 정말 내 주인인가? 난 주인에게 충성스런 종인가? 

이 고백을 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하늘의 크고 놀라운 비밀들을 알려 주신다. 하늘의 권세를 주셔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권세, 예배함으로 하늘 나라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공생애의 전환점이 되는 고백이었다. 

"이 때로부터" (21절) 

이 전까지의 예수의 사역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사역이었다면 이 고백 이후부터는 그리스도로서 오신 예수의 일을 완성하는 사역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스도로서 오신 예수의 사역은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성도에게도, 예수께도 중요한 고백이 되는 것이다. 

이 고백 이전의 사람은 온전한 의미에서 성도가 아니다. 성도는 예수를 주로 믿는 자가 성도이다. 참 그리스도인이다. 

이전까지의 신앙은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이신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가?하는 것을 알아가는 신앙이다. 그리스도가 정말 나의 구주이신가를 깨달아가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 고백을 예수님께서는 구태여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을 방문하셔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신다. 

이 도시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이다.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있는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에서 

로마의 상징: 힘(권력, 군사력, 경제력), 지식(대형 도서관, 서재의 크기를 자랑함)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조각상 즐비) 

거대주의, 성공제일주의, 황금만능주의

그 상징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신앙의 고백을 듣는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고 동경하고 바라는 그 중심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가?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백한 제자들에게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를 나누어 주신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다. 

아니 복되고 좋은 소식은 알려야 하지 않는가? 

전도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신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와 예수가 보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구절은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말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말씀을 보자. 

(사 61: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들인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로마의 압제 속에 살면서 상했던 마음을 고쳐주고, 로마 감옥에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며, 로마의 횡포 때문에 눈물 흘리며 슬퍼하던 이들을 위로해줄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 중에서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괴롭히던 로마를 물리치고, 빼앗겼던 유대의 나라를 회복해줄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보이고자 하셨던 나라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었다.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의 나라였다. 하늘나라의 복음이었다. 이땅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셨던 나라이다. 

죄와 사망에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탄의 세력에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고 그들에게 잠시 잠깐의 안녕과 평화가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러 오신 메시아였다.


그러나 사람의 기대와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니까 차라리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기까지....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알던 모르던 자신의 사역,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깨닫던 못 깨닫던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증인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그들을 또한 예수의 사역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마 16: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로마를 정복하고 군사 혁명을 일으키고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해 온 그리스도와는 정반대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행하고, 무조건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만드신 이는 구원에 있어서도 완전한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데 그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요,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면 모든 힘을 가지고 자기들의 억울한 일을 갚아주고 못된 자들을 심판하며 때가 되면 자기들을 예수의 좌우에 두고 성공된 길, 화려한 삶을 꿈 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의 성전 사람들과 같은 똑같은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듯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렸습니다. 

우리말 "붙들고"로 번역된 단어는 '강하게 잡아 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향변하여"는 '반대편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강하게 잡아챈 후에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 입장에서 예수님을 말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믿고 있던 그리스도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과 예수님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니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절대 죽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막어서라도 주님에게 결코 이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뜻밖의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마 16:23)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좀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성령께서 행하셨다라고 하셨던 그 베드로에게 지금은 곧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진노하셨을까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23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리며, 예수님이 행하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너뜨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집고 넘어갈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나 사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축복하신 사람도, 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도, 천국의 열쇠를 받은 사람도 어느 순간에 사탄이 되어서 예수님을 넘어트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믿음 좋은 사람도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사탄에게 종노릇하며, 사탄의 일을 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누구라도 사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은혜의 순간에 사탄도 따라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주가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가장 귀한 순간에 또한 사탄은 슬며시 들어와 사람의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서로 잘되고, 그냥 이대로가 좋고, 서로가 죽지 않는 길을 모색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길 같지만 그대로 가면 십자가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커녕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타락의 세계만이 있을 것입니다. 


술집, 도박장, 음란한 현장에는 사탄이 출몰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타락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굳이 유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자리, 축복의 자리, 신앙의 자리는 다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을 부어주신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만 계셨나요? 아니예요. 사탄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축복의 장소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서 광야에서 40일 밤낮을 금식하셨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영적으로 충만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은혜받는다고 방심하면 결국 넘어 집니다. 

오직 겸손과 순종함으로 가야 합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가장 높은 자가 가야할 가장 낮은 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화내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 화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로 육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로 가라. 지름길로 가라.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 광야를 거치고 연단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 십자가의 길로만 가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참사랑의 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정호승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시 하나를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어찌되었던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