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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에의 열망 (디모데전서 4장 6-7절) 


오늘은 개신교 교회력으로 1517년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정부태로 인해 성당 건물을 짓기 위해 이른바 면죄부, 죄를 사해준다는 증서를 돈을 받고 팔고자 하는 것에 반대해서 가톨릭교회의 잘못되어 가고 있는 점들을 95개조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여 발표하면서 시작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개신교의 시작을 알리는 운동입니다. 

독일의 루터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 운동은 스위스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빈, 그리고 칼빈의 제자였던 존 낙스가 스콜틀랜드로 가서 개혁장로교를 세움으로 전 세계로 확장이 되어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 후이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톨릭 입장에서보면 이러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큰 배반이요, 재앙이나 다름없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곧 종교 전쟁을 낳게 됩니다. 가톨릭은 천년 이상을 지켜온 자신들의 전통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루터나 종교개혁자들을 사탄의 무리로 단죄하며 무력을 실시했고, 개신교파들 역시 성경에서 떠난 가톨릭의 신앙에 반기를 들고 맞서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교6-7절) 전쟁의 시대는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평화협정을 통해 끝마치게 됩니다. 

점점 더 확장되는 개신교의 전파와 전쟁으로 인한 서로간의 피해는 전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여 제도적, 형식적으로나마 서로간의 존재를 인정하며 각자의 길을 걷도록 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313년 로마로부터 국교로 공인받아 오직 하나로만 여겨졌던 신앙과 교회가 이젠 형식적으로나마 둘 이상의 교회를 인정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협정입니다. 

이러면서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어떤 일에 집중하게 되냐면 무력 전쟁이 아닌 이젠 교리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스스로 개혁하면서 정화운동을 일으키는데 이 때에 생겨나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예수회입니다. 


루터교와 칼빈파도 이젠 본격적인 교리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를 정통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젠 각자의 교회가 성경을 공부하며 무엇이 바른교리인가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가톨릭의 교리문답이나 개신교의 세례 문답, 각  교단의 교리나 신조가 확립되는 시대입니다. 교리를 주장하려다 보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도 열심히 봐야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증명하고 논증하고 논쟁하여야 하니까 철학적인 학문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리와 학문에만 너무 집중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성직자들이나 교수들과 같은 엘리트들은 바쁜데 평신도들은 도무지 따분하고 고리타분해 지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재미없어 집니다. 성령의 역사나 회개가 일어나고 부흥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맨날 이것이 옳으니 저것은 틀리니 하면서 교회가 학교보다 더 외울 것이 많고 지루하고 힘들어 지겠지요. 

그래서 이른바 경건성의 위기의 시대가 옵니다. 

학문은 발달하는데, 머리는 꽉꽉 들어차는데 도무지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이 재미있고 활기찬 것이 아니라 머리 싸매고 외우고 암기하고 논증하고 토론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타락한 가톨릭에 반기를 들고 성경으로 돌아가자, 은혜로, 믿음으로 돌아가자 해서 시작한 종교개혁이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은혜 없는, 믿음이 무언가 머리로만 이해하는, 열매없는 신앙이 되어 버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7세기, 영국에서는 청교도 운동이,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신앙의 새로운 운동이, 흐름이 일어났습니다. 정통주의가 신학자나 교수들이 주도하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었다면 경건주의는 교회 현장의 목회자와 평신도가 신앙의 정말 중요한 강조점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경건을 갈망하기 시작한 평신도 중심의 운동이요 흐름이었습니다. 죽은 신앙이 아닌 산 신앙으로, 삶의 신앙을 외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자발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처음에 이러한 삶의 변화를 주장했던 자들은 여전히 교리와 신조를 주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가톨릭으로의 복귀하는 자들이라고 비난과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다시금 행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믿음이 아닙니까? 

후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은 루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서 그 완성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건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우리가 실재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가?를 고민하며 실재적인 기도와 말씀의 삶을 갈망하며 교회 안의 새로운 교회, 뜻있는 몇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소그룹 중심으로 확대되어 큰 하나의 운동이 되었

던 것입니다. 


성경도 배우고, 나름대로 신앙서적도 읽고, 그리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설교를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럽고 회개하는 삶을 반복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머리 속에 들어오는 지식들에 비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훈련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련회나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무언가 은혜를 받아서 자신이 확 변한 것 같은데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오늘을 맞이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은혜가 지속이 되질 않습니다. 다시 건들면 화내고, 토라지면 예배빠지고, 기도도 중지하고 성경 읽는 것도 지속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갑자기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일까요? 왜 확 변할 것 같은 내 삶은 도대체가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은혜 받으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해서 나를 옳은 길로만 인도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또 틀린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듭된 메시지로 그 분의 뜻을 가리켜주지만 그러나 그것을 선택해서 행동을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내 삶의 방향을 잡고, 이렇게 고쳐야겠구나 깨달음도 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는 확신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생활입니다. 잘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믿음만큼 하는 것이고 은혜를 받는 것도 믿음만큼 받습니다. 믿음이 큰 자는 하나님께서 큰 일을 시키시고 믿음이 적은 자는 끊임없이 책망하고 연단시키는 것이 성도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 우주보다도 크고 넓고 한량없지만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믿음의 그릇 만큼만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내 그릇을 넓히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정답은 오직 훈련에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곧 끊임없는 믿음의 연습을 통해서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통로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를 하려면 내가 움직여야 합니다. 저절로 기도되고 저절로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안하던 기도, 안읽던 말씀을 읽으려면 지루하고 어렵습니다. 도대체 마음은 있는데 앉아 있질 못하겠고 눈감으면 졸립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많은 기독교 인들이 기도는 노동이다고 까지 했습니다 .

그런데 그것을 이기고 꾸준히 읽고 기도하면 점점 재미있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임재를 체험합니다. 더 읽고 더 기도하고 깊은 갈망이 일어납니다.  


훈련은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훈련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읽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고, 들은 것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에 베일 때까지 끊임없이, 끊임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동안이나 지내면서 훈련받습니다. 

여러분 출애굽이 구원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까? 


출애굽 한 것이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은 성도의 목적지 입니다.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훈련받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냥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열가지 재앙으로, 홍해도 건너게 하셨는데 

광야 훈련소에서는 비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매추라기로 계속 먹이고 보호하시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곳에서 순종으로 성막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며 

오직 순종함으로 훈련하여 땅을, 기업을,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훈련 받은 자의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이 된 사람은 전혀 미래가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처럼 예수께서 언제 어느 모습으로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는 주위에 민감합니다. 

누가 뭐라면 흔즐립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베리칩이 어떻고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어떤 교회가 이단이고....

뭡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니까 이런 저런 말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이 된 사람, 경건이 몸에 밴 사람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알아봐서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날 알아보시고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

신학교 대학원 3학년 때인가, 한참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일로 고민하며 힘들어 했을 때에 변두리에 있던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라고 평생을 밖에 나오지 않고 수도원 안에서 지내면서 수도를 하는 수도사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이야기 하다가 25년을 그 곳에서 지내고 있던 한 수도사가 저에게 한 말을 저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참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우리보다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또한 존경하는 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도사인 제가 그 분들을 보며 하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성경도 많이 보고 기도도 많이 하지만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그 분들도 많이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쫓겨나기도 하고 지탄을 받기도 하구요,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분들 자리를 벗어나는 이유를 보면 대개 돈 관리, 인간관계 관리, 여자 문제 등으로 넘어집디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 분들이 기도가 부족해서, 성경을 많이 않읽어서라고만 말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평생을 이곳에서 있지만 1년을 하루같이, 10년을 매일 같이 힘쓰는 것은 매일 매일에 대한 삶의 훈련입니다. 물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지만 개신교 목사들처럼 그렇게 많이 보진 못합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서 벗어남이 없지요.. 물론 모든 성직자들이 저희처럼 수도사가 될 순 없겠지만 여러분들이 저희들을 보면서 하나 얻어갈 것이 있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훈련일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원 몇번 가서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뜨겁게 은혜 받아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의 일상이, 한결같은 내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바라보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내 삶이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믿고 순종하고 행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 스스로가 경건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 우리 로고스 교회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요즘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열심내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 열심들을 통해 영원한 유익을 얻으실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한 것입니다. 영원히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경건한 자에게 있습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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