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19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거듭남 (중생), 하나님의 인치심 (엡 1:13-14; 요 3:16-17) 


1. 서론. (문제제기) 왜 성결교회와 사중복음을 알아야 하는가? 

현대 사회 (인터넷, 스마트폰, 스마트 왓치- 글로벌, 정보, 첨단, 속도의 시대) 

교회, 교리가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인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교제할 수 있는, 자라갈 수 있는, 깊어질 수 있는 통로 (은혜의 수단) - 성경과 교회 


계시- Revelation 보여 주었다. 살짝 보여주었다. 은밀히, 비밀히 보여주었다. 발설했다. 

왜? 창조주이신 그분과 피조물인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거룩하신 분과 죄인인 우리의 근본적인 막힌 담 때문에...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길이 닫혀 있었다. 


기독교: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신 종교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먼저 말 걸어오신 종교 (내게 물을 좀 달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 종교가 기독교이다. (대전제) 

구도자: 자기가 도를 찾아 떠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오심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보자, 성경과 교회의 공통점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 역사를 통해 전해져 온 흔적, 번역본, 사본... 유적.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내가 속해 있는 교회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자라갈 수 있도록 주신 것


성결교회의 전도표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성경 해설의 기본으로 한다. (헌법 제 4조 1항)  

성결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며 모든 성도에게 성결의 은혜, 즉 성령 세례를 전하여 교회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기를 힘쓴다. (헌법 제 1조 1항) 


우리 성결교회와 성결교회 교인은 이 사중복음, 그 중에서도 성결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하나님께로 다가가도록 초대된 것이다. 


오늘 내일, 그 사중복음 중에서도 특별히 다룰 것은 중생과 성결에 대해서이다. 

성결, 성결의 은혜, 성령세례가 우리 교단 헌법이 나타내는 바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의 목적이요 사명이라면 중생은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개신교 교회 전체의 정체성이다. 성결로 나아가는 전제요, 시작점이 바로 중생이다. 

오늘 말씀은 중생, 거듭남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면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해서 가톨릭에서 기독교의 출현까지) 

내일은 성결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에서 경건주의, 경건주의에서 웨슬리까지...) 


2. 본론 (중생에 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 66권 중에서 만약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한 절 뽑으라면 무슨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을 들어가기에 앞서 예수를 전후로 두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잠깐 살펴 보자. 


1) 유대교,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

우리가 믿는 하나님, 즉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을 믿은 가장 믿음의 시초된 종교는 역시 유대교이다. 유대교의 경전이 바로 구약성경, 그 중에서도 토라, 즉 모세오경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복음, 구원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삼듯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원의 모델과 구원의 핵심을 출애굽 사건에서 찾는다. 비록 구원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고 대신 해방이나 자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이라는 말을 하지만...어떤 형태로 그들의 구원관을 이야기하든, 혹은 그들이 이런 구원이란 말을 원하지 않든 우선 해방이나 자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위한 그들의 방법론, 개신교에서 말하는 구원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광야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 바로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면 살 길이 열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노예와 저주와 패배의 삶이 펼쳐진다. 

출애굽기 전체 40장에서 사실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을 하는 과정은 20장 이전에 끝난다. 20장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다. 시기적으로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부터 시내산까지의 여정이 3개월이라면 이제 시내산에서 가나안땅까지의 여정은 장수로 20장, 시간적으로 39년 넘는 세월이 걸린다. 

그 시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언약하고 주신 말씀 그대로 성막을 지어가는 과정이다. 


2) 그리스도교

예수의 시대가 열렸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셨다. 

그들은 안식일 대신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 주일을 예배하면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 땅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다. 

그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로 모셨다. 


그들에게 남은 문제는 무엇일까? 

그 동안의 그들의 구원의 모델이었던 출애굽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것이다. 

과격한 사람들은 이제 구약의 모든 말씀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 (마 5:17)고 선포하시고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인용한 점을 들어 이제 예수의 구원의 관점에서 구약을 바라다보기 시작했다. 


출애굽 사건은 완성된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구원의 모형이다. 

십계명과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로 집약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교인들이 율법을 구원의 통로로 삼았다면 이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향했다.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말씀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대 교인들은 이것이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것, 즉 순교로 보았다.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공인되자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다. 피의 순교의 영성은 이제 화려한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떠나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흰색 순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매일 매일 일상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녹색 순교, 혹은 일상의 순교의 정신을 이야기 하였다. 프란시스는 가난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 여겼고, 로렌스 수사는 수도원에서 궂은 일 도맡아 하면서 예수를 따랐다. 


자, 다시 요한복음 3장으로 가보자. 

3장 1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설명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의 관원이라.”

즉 다시말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말은 공의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고 하는 말이다.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니고데모는 학자였으며, 귀족이었으며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왜 예수를 찾아왔을까? 그것도 밤에...

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빛이신 예수와 대조되는 구약의 모델. 

영혼의 허전함- 지킴으로 인해 다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 

그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는 자이고,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고, 가리키는 자이고, 존경을 받아도 늘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기대를 가지고 나온 자.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입니까?” 하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거듭나야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는 것 같지만 니고데모를 꾀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니고데모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숨김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네게 심령이 가난해서 그렇게 허전하고 괴롭고 한데 그것은 네가 하늘나라의 신분을 얻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네 마음의 가난함을 위해서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의 네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네가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듭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거듭나는 것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단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그만한 지위에 있고, 남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위치에 있고 성경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안타까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책망까지 하십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니고데모는 신실하고 겸손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도 땅의 믿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세상의 복과 연결 시켜서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구약 시대때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인간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이 임하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이 구약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래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욥도 당대의 부자였고 다윗도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말씀을 잘 지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900살 이상 산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일찍 죽는 사람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잘 안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부자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부자되었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오래 살았더라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지켜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받고 성령이 임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더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역할은 줄어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비로서 흡족한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큰 축복은 순교로서 임합니다. 땅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자신의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혹은 신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 못배우고, 가난하고, 처량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성령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역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복은 성령의 복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주제로 삼습니다. 구약의 복은 이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이땅에서 복받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복은 이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복과 구약의 복이 확 떨어져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팔복에서 보듯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구약시대때와 똑같이 땅의 복도 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결과로, 궁극적인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팔복을 끝맺고 있습니다. 복의 복, 복의 결과는 이땅에서 복음 때문에 핍박받더라도 하늘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그런데 육적인, 혹은 율법적인 마음에 젖어 있던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그런 소리도 율법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구원은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날 사랑하심을 믿는 것이다. 

날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중세에 들어와서 서구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깊은 수렁. 교회들은 대형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면죄부 판매와 성직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고, 젊은 신부 루터는 비텐베르크 캐슬교회의 문에 95개 항목의 반박문을 내걸고 정면으로 맞섰다. 

면죄부? 

성전을 짓는데 헌금 내면 죄가 면죄된다. 

루터의 고민: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3. 바리새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당시의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헤롯의 성전에서 로마의 보호아래에서 자기 안위에 안주하는 자. 

백성들이 그들을 존경했을까? 별로... 

그들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사건.. 

동방박사가 헤롯을 방문했을 때. 

마태복음 2장 2절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이유- 메시아가 탄생하셨다고 함으로....

헤롯왕이 대제사장을 부른 이유- 메시야를 죽이려고...

죽이는 것에 동참하거나 적어도 묵인하던 자- 대제사장...왜? 그들의 안위를 위해...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누가 지어주건 성전을 통해서 기득권에 안주하고 백성보다는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았을 때에, 끝까지 말씀을 수호하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자. 


그런데 예수의 표적, 진노의 대상은 사두개인들, 대 제사장이 아닌 바리새인들... 

왜? 자신들의 의를 주장함으로... 

왜 자기 의에 대해서 주님은 그렇게 분노하셨을까? 그것은 절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상에서 구원을 받은 자 

- 구레네 시몬 (사도바울이 그의 자녀와 아내를 두고 이는 내 어머니다 할 정도로 초대교회의 인물) 

   자기 공로 없는, 자원하지 않은,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 십자가상의 강도

   부끄러운 구원? 과연 성경에 부끄러운 구원이 있는가? 상급으로 나뉘고? 

   상급 많은 사람들은 큰 집에서 살고 작은 사람은 천국에서 궂은 일 하고...

   구원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부끄러운 구원이란 없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주님께 나아온 자 

- 백부장 

- 아리마대 요셉

- 니고데모

끝까지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던 자 - 여인들... 


  • 에베소서 1장 13절을 보면 

(엡 1: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인치심, 바로 하나님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이 서명이 새겨져 있습니까? 바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 자'는 성령의 인치심, 하나님이 서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다. "나는 하나님이 서명을 받은 자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바울은 롬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14장에 보면 짐승의 이름표와 하나님이 이름표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짐승의 이름표라는 말은 잘 아는데 하나님이 이름표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계 14: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계 14: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또한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3)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 9:4)"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기다리시고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과 같은 만물을 보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치신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요, 택한 자들이 다 인치심을 받기 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변경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파수꾼이 굳게 지키고 인을 처서 봉했습니다(마27:66).

‘인’은 내용을 안전하게 보장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살펴보면, 먼저 진리의 말씀, 구원 복음을 ①듣고, 예수님 안에서 ②믿고 약속의 성령으로 ③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사탄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그 순간부터 성령님께서 우리의 고백에 도장을 찍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 크신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삶을 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엡 4: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내가 예수님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음성을 인정하려고도, 들으려고도,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자가 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동행하심과 그 역사하심에 대해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의 마음 밭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이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적으로 내 안에서 생각나고 반복되며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에서 시작해서 성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고 근심시키게 되면 어떻습니까?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릅니다. 

-기도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바쁘다고요?

-섬기고 싶으나 시간이 없다고 요?

-성경을 더 알고 싶으나 바쁘다고요?

-가정에 충실하고 싶으나 바쁘다고요?

-주일예배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을 할 수 없다구요? 

-성도의 교제가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다고요?


이런 것 하나 하나가 왜 우리 안에 고민되기 시작하는가?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 들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어둠 속에 거하던 우리를 이제 빛의 자녀로 옮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룩한 갈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 끝에 지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넘어지면 결국 성령의 거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렴님은 다른 발로 보혜사입니다.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도 늘 다른 길로, 자기 눈에 드는 것만 행동하고 보던 제자들이 성령이 거하심으로 이젠 악한 생각에서부터 보호하고, 우리에게 계속적인 은혜를 부어 주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놀라운 일들이 초대교회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나 자신의 변화를 예고 합니다. 기쁨으로 받아 들이고 성령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열매가 나옵니다. 확증입니다.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교제하세요. 섬기세요. 이게 성장입니다. 온전한 교제는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역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시작은 성령의 임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자라며 성령의 역사를 맛보도록 인도하신 안전한 장소가 교회입니다.  

믿음은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머리 되신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에서 믿음이 성장합니다.

교회를 떠나서 혼자 설수 없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