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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십니까? (막 7:24-30) 


사순절을 맞아 기도를 하면서, "주님, 겸손한 자가 되기 원합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교만한 자가 누굴까? 내 주위에 가장 교만한 자가 누굴까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네 주위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누구냐?"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이사람 참 교만하다 할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교만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않좋은 소식을 들으면서 정죄하고 판단했던 순간들, 유명한 정치가나 심지어 역대 대통령들의 이런 저런 기사들을 접하면서 분노하고 비난했던 모습들,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경기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 바라보면서 혹이나 실수라도 하면 소리를 버럭 지르던 순간들....잘생기고 이쁜 연예인들이 혹시나 도박이나 불륜을 저지르면 사생활을 들먹이면서 비난했던 순간들.... 

처음에 그런 장면이 떠오르고 기도하면서 언뜻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정치가들을 보고 분노하며, 바르지 못한 신앙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폐를 끼치는 목사를 멀리하고, 함께 응원하며 경기에 몰두하다가 선수들의 실수에 안타까워하고, 연예인들의 불건전한 사생활을 비난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마땅히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건 교만이 아니잖아요. 마땅히 그럴 수 있는것 아닙니까?"  


왜 갑자기 그런 일들이 필림처럼 쭉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그런 장면들이 흘러가면서, "넌 그들보다 어느부분이 나아서 그들을 비난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수했어도 평생을 목회하면서 기도하고 연구했던 목사님들을 내가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정치가들보다 난 참 바른가? 똑똑한가? 운동선수들보다 부지런한가? 연예인들보다 잘생겼나? 

뭐 하나 그들 보다 잘 난 것 없는데 늘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니까 와~ 내가 정말 교만한 자였구나!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마치 난 의로운 양, 정직한 양, 바른 양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런 것은 교만함과 상관없다고 하면 할 수록 내가 참 교만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더 깊어져만 갔습니다. 교만함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아담과 하와을 유혹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창 3: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판단하는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교만하지요. 참 교만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겸손한 자가 누굽니까? 겸손한 자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면서 기도하는데 문뜩 떠오른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주인공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다룬 마태복음에서는 뭉뚱거리면서 그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제력으로도, 지식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예수가 그 동네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녀가 예수를 찾는 장면이 더욱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그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질렀다고 기록합니다. 

어느정도 지체 있는 양반이 자기 딸을 위해 애가 닳아 예수에게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계속 부르짖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모르쇠로 일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섰습니다. "예수님! 여자가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으니 대충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돌려 보내주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더욱 소리를 높여 지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끈질기게 애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수를 꽂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 이스라엘 전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 했지요. 그래도 자기들끼리 이야기이지 사람을 대 놓고 이렇게 개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끼리는 싸우자는 소리고 여인에게 했다는 것은 정말로 해서는 안되는 자존심을 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저 자기 딸을 고치러 온 한 연약한 이방여인에게 "개"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쾌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게 여인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이순간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자기는 그런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지금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자존심, 지금 딸 앞에서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 읽혀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고 여자를 칭찬하시며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이 사건에는 우리가 알고 있고 기대하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매몰차게 여인을 대했을까? 


우리는 얼마전 요한복음 4장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갔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이나 여인의 마음에 상처가 임할까봐 다른 제자들을 음식을 구해오라며 마을로 다 보내시며 홀로 여인을 대합니다. 먼저 물을 달라고도 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자상하시고 인격적이신지 모릅니다. 


(마 11:28-29)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2:20-21)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도,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도 이 여인인데 주님의 반응은 차갑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이방여인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인격적인 모욕까지도 서슴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침묵/ 혹은 외면이고 두 번째는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1. 침묵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하소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한 번 부른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라고 했겠습니까?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답답하고 두려운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혹시 불공평하신 것은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 고쳐주시고 이방인에게는 침묵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한 불쌍한 이방 여자가 와서 요구를 했을 때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없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은 이 여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우리의 일상 속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이 여인처럼 답답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가? 자칫 시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침묵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향해 있는가? 정말로 나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내가 내가 침묵할 때 넌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끝까지 내게서 구원을 얻으려 하는가? 넌 나의 때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수 있는가?... 

지금 마음에 안달이 나 있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첫 번째 침묵으로 그녀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다가 침묵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낙심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실 때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분이 먼저 우리의 상황과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분은 침묵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확실히 하고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 (막 7: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지난 주에 나누었던 성전 미문의 소경처럼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을 아뢰고 부르짖습니다. 이 여인도 모든 간구의 목표는 딸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금과 은을 좀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음식을 구하고, 돈을 구하고, 치료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기도 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만을 구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열명의 문등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한 명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내가 주님께 구하는 것과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이방인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있고 뼈 속까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고, 그녀의 생각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채, 오직 딸만을 위해서, 에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이지 그 이상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 7:8)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지금 국가라는 벽, 종교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합니다. 그 믿음은 국가와 종교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사람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처럼 혈연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닙니다. 허다한 잡족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 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신앙인들에게 준 것이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모시고,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넌 나의 자녀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계속해서 이방인으로서 살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여인이 대답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난 개입니다. 난 이방인입니다. 내 종교와 내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딸을 고칠 수가 없고 내게 어떤 구원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당신이 내 주인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것 바라지 않습니다. 난 이방인이고 아직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주인으로 이제 주님만 믿으니까 나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지요. 

이제 국가와 종교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지체없이 그녀를 칭찬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자들에게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시는 것이지요. 


많은 한국의 신학자들과 목사님들, 혹은 한국에 정통한 외국의 유명한 신학자들은 한국인의 기독교에는 뿌리깊게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이 섞여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정통 신앙인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른 하나님의 뜻인지, 그냥 유교적, 불교적, 혹은 샤머니즘 전통에 의해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과도 같은 이방땅의 크리스찬들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 왔어도 뿌리 깊게 한국의 전통 신앙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땐 그런 것들 때문에 은혜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때로는 신앙 생활 하면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받은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상속자,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겸손함을 곧 간절함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그 큰 벽, 그 짐을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간절함은 침묵을 극복합니다. 인내로서 영적인 성숙을 이룹니다. 

침묵할 때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왜?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함은 자존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큰 자는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존심을 내세웁니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입니다. 

행동하는 양심, 영등포역 노숙자 사역.....

음식을 먹던 노숙자 왈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런 걸 줘...."하며 식판을 내동댕이 침. 

우리도 다 같이 먹는 음식인데... 충격...흔한 일이라고 함. 

뭘로 보기는요, 노숙자로 보는 거지... 부유하고 귀하게 보았다면 애써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았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문등병을 치료하라고 할 때... 요단강에 가서 목욕해랴... "날 뭘로 보고... 우리 나라에는 그만한 강이 없는가?" 

"뭘로 보긴, 문등병자로 보지...문등병 치료하러 왔지 장군 훈장 받으러 온 거 아니잖은가?" 

목적이 분명하고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헛된 데 자존심 세워 그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모세를 부를 때에..."제가 무엇이라고 이런 일을..." 

기드온을 부를 때에도, 여호수아를 부를 때에도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척이 아니다.마음에서 우러나온 자기 고백이다. 베드로에게 나타나 물고기를 잡게 했을 때에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자존심이 무너진 자들을 일으키시어 자존감을 세우시고 그들과 동역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약할 때에 그의 강함을 보여 주십니다. 


이전에 한 번 한 적이 있지만 한 예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있을 때에 개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큰 절망과 낙심 가운데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루터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이 올라가면 자신의 애완용 강아지의 눈도 따라 올라가고, 숟가락이 내려오면 강아지의 눈도 따라서 내려오는 등 계속해서 손만 보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뒷발을 들고 앞발 모아 서서 루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고기 한 점을 썰어서 던져 주었더니 폴짝 뛰어 받아먹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루터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며 이 본문이 생각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밥먹다 말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인의 밥상 앞에 앉아 ?주인의 손길을 바라보는 저 애완용 개처럼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 한 점을 받아먹기 위해서 주인만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여! 주님 앞에 한 마리 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응답을 기다립니다. 도움을 기다립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혹시라도 그분이 침묵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아무리 상하고 내 인격이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그 분께서 버리라 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됩니다. 그래야 천국의 복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시험하려고 우리에게 신앙적인 불편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참 자녀를 삼아 주시려 하기 때문에 때로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도 하십니다. 저도 주의 종으로서 언제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 자유를 주시고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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