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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1-26-2014) 

가시 은혜 (고후 12:7-10) 



여러분 두리안이라는 과일을 아십니까? 전 기회가 없어서 아직 먹어보질 못했는데 그 과일은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동남아의 많은 호텔 입구에, 혹은 택시에도 두리안을 가지고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냄새를 무릅쓰고 그 과일을 한번 맛보면 얼마나 맛있는지 그 냄새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히다고 합니다. 

두리안의 두리(duri)는 말레이어로 가시라는 뜻입니다. 거친 가시로 둘러싸인 껍질 속에 두리안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 안에 기가 막힌 열매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가시는 죄의 결과, 죄의 흔적, 죄의 열매입니다. 

성경에 가시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아담의 타락 때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고 증거합니다. 즉 죄가 있는 곳에 가시덩굴과 엉경퀴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받은 저주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싹튼 저주이기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도 가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가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가시로 말미암아 잘 열매 맺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찔러대기도 합니다. 

가시덩쿨과 엉겅퀴가 있는 세상에 나가 인간이 행한 것은 살인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가시로 찔러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도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

라고 말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가시로 말미암아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가 왜 생깁니까?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며 재물과 향락을 바라고 취하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이 땅의 것을 생각하다가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잘못된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을 취하다가 얻게되는 못된 열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성경에 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용서받았는가, 용서받지 못하였는가만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 스스로만 보면 다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몸에서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간질, 안질, 두통, 관절 등 많은 질병의 가시들이 찌르는 아픔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가난, 가정의 불화, 자녀문제 등의 많은 가시가 자기를 찌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가시가 되고, 부인이 가시가 되어서 일생을 찌르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평생의 가시가 되어 찌르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목사들은 가시와 같은 교인이 있어서 평생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찌르고, 상대방을 찌르고 주위를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도바울도 가시 때문에 괴로웠다고 말합니다. 자기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을 일생동안 찌른 가시가 뭘까요? 

그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칼빈은 바울 자신이 받았던 영적인 유혹이나, 의심, 가책, 갈등 같은 것이었다고 해석했고,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이 받았던 핍박이나, 외적인 환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교부 터툴리안은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안질이나, 두통, 몸에 안고 있는 질병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터툴리안의 해석이 통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육체적인 고질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사용한 가시라는 단어는 고문하거나 찌르기 위해 사용하는 막대기나 가시 등의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하면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심히 괴롭히고 깊이 찌른 이 가시 때문에 바울은 큰 고통을 당하고 사역에 방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가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찔리고 찌르는 가시를 내가 해결할 수 없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그분께 나아오면 우리의 가시가 무뎌집니다. 그 분을 찌름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주님께 나왔는데, 계속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가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남겨둔 가시가 있다는 것이지요. 

계속 간구했어도 남겨두었다는 것은 대부분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거나 

아주 가끔 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아까 부른 찬양 가사 중에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기도가 거절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듭니다. 인정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힘들어서, 아파서, 가시를 좀 제거해달라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절하실 수 있을까? 자기가 아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받은 응답은 "내게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입니다. 

가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교만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처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환도뼈를 치게 함으로 그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 없으면 내가 평안해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더 붙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또 하나님을 멀리 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시를 남기셔서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람은 약할 때 겸손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나는 감기한번 안 걸렸어" 라고 뽑내던 사람도 중병에 걸리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또 권세가 있던 사람도 그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우쭐대지 못하게 막습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두번째로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에게 그 가시보다 더 큰 은혜, 더 한 사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가 당장 아픈 것, 당장 없는 것, 현재 내가 힘든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인도하신 것, 그 분이 내게 주신 것, 그 은혜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광야에서...항상 불평.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그래도 늘 불평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나에게 없는 것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의 아픔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받은 은혜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층 천까지 올라가서 (일층 천- 우리가 보는 하늘, 이충천- 해와 달과 별이 운행되는 하늘, 우주  상층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 하늘나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려서 기도하다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데 앞에 큰 돌이 막고 있어서 위험하게 생긴 것입니다. 

다급해서 "하나님 돌좀 치워 주세요 내가 너무 위험합니다." 하는데 갑자기 물이 불기 시작하더니 배가 거뜬히 돌을 넘어 항해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돌이 앞을 막고 있을 때에 그 돌만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방법으로 은혜로 돌을 넘게 만드십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족하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가시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숨깁니다. 남이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혼자 괴로워하다가 아파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져나와 기도하는 자, 예배하는 자는 더 이상 가시를 숨기지 않습니다. 

응답하시건 거절하시건, 치료하시건 남겨두시건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자기의 가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했습니다. 

내 능력의 약한 데서 더 온전하여짐을 경험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강하게 보이려고, 남에게 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사는데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약해질 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제작년 1월부터 주일마다 설교를 하는데...설교한 것을 들어보는데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더듬더듬....(제가 철면피 같지만 속은 소심해서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 설교하러 올라가면 더 더듬거리는지...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이 한 설교테잎이나 동영상 보면서 또 연구하고 가다듬고 하는데 전 아직도 그 더듬거리는 것을 들었을 때의 부끄러운 감정 때문에 잘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 좀 더듬거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주일날 예배 맞추고 우리 집사님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데...

"목사님 설교는 조마조마해서 졸 수가 없어... 말씀하시다 막히면 고개를 막 젓고 더듬더듬... 혹 실수하지 않을까..." 

유창하게 하는 설교도 조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정말 2년 좀 넘는 기간 동안 조는 성도 거의 못 보았습니다. 가끔 우리 고완기 성도님 빼고는...

제가 목회한다니까 학교에 있는 후배목사가 묻습디다.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성도들이 설교를 잘 듣습니까? 아휴 아이들이 설교를 듣지 않고 딴짓하고 잠자고...

"좀 더듬더듬 거려봐... 그럼 성도들이 긴장하고 잘 들어..." 


세상은 자기의 강한 것을 자랑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가시를 감추고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가장 중요한 때에 가시를 드러내며 찔러댑니다. 매정하게 찔러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시를 인정하고 가져와서 치료받던지, 아니면 가시보다 더 큰 은혜를 맛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이나 언약궤를 지을 때에 주재료로 사용했던 나무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 혹은 아카시아 나무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가시가 많고 볼품이 없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 궁전을 지을 때 쓴 백향목에 비하면 조각목은 참으로 하찮은 건축 재료입니다.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을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땅에서 받은 면류관이 어떤 면류관인줄 아십니까? 

바로 가시 면류관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씌여준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찌르시는 것을 다 담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에 은혜에 동참해서 그 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똑같이 이 면류관을 나누어 주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낮은 자가 무엇입니까? 결국 무시당하는 것을 괴념치 않고 견디는 자입니다. 은혜가 크면 무시당해도 별 요동함이 없습니다. 누가 무시당하는 것을 못 참습니까? 은혜없는 자가 못 참는 것입니다. 가시많은 자가 못참는 것입니다.


물론 가시가 있으면 아픕니다. 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시를 빼내어야 합니다. 나자신도 남도 찌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재료가 조각목이든 교회는 가시 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그 찔리는 상처가 아프고 괴로와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로서 서 가는 것입니다. 

가시가 예수님의 면류관이듯이 가시가 그 분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면류관이기도 합니다. 

가시를 통해서 더 겸손해 지시고 가시를 통해서 더 큰 은혜, 넘치는 은혜를 맛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