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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인 유다 (마가복음 14:17-21) 

가룟 유다 -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제자. 

가룟: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제일 먼저 땅을 분배 받은 민족이 바로 유다지파. 

 

 

왜? 야곱의 아들 중 장자권이 유다에게 넘어옴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땅을 분배받음. 

그 분배 받은 땅 중 하나가 가룟지방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함이라는 뜻.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 

그러나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그 이름은 배반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찬양하다가 타락한 자가 또 누가 있나? 

바로 루시퍼,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장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교만함이 들어가자 그는 하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거나 오히려 높이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자가 된다. 

        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타락한 자가 되기 쉬운가? 

        감정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이다. 찬양의 대상이 바뀌게 되면 찬양은 타락의 도구가 될 수 있다. 

        

        80-90년대 예배- 찬양 예배가 주. 찬양의 밤, 경배와 찬양. 거의 모든 교회가 찬양을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예배당이 콘서트홀처럼 변해가고 신학교마다 찬양사역자를 배출하는 과가 생겨나고 수많은 찬양음반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자 한 수간에 그 찬양의 예배들은 시들해져 버렸다. 많은 찬양사역자들이 찬양사역을 그만두거나 일반음악으로 넘어가게 되고 90년대 찬양문화를 이끌던 주찬양단이나 옹기장이의 리더들이 이런 저런 스캔들을 일으키며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왜 그럴까? 한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기스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그들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자들이 스타가 되었고 말씀보다, 예배보다 찬양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가룟유다, 그는 어떤 자인가? 

주님은 그를 처음부터 배신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부르셨다. 

(막 3: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 산에 오르사: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부르셨고 제자들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에 올라 주님을 따랐다. 
  •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였고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였다. 그는 주님과 함께 했고 제자들과도 동거동락했다. 
  • 그리고 주님이 주신 권능을 함께 나누고 사용한 제자였다. 


(요 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 12장 6, 13장 29절에 보면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돈 궤를 맡은 자, 즉 회계 담당이었다. 

돈을 취급하는 자,  세리 마태가 있음에도 유다가 제자들의 회계를 맡은 것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도 세리보다는 타 지역 사람이지만 유다를 더 신뢰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실재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북쪽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하는 땅으로 통했고 유다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모든 종교,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중산층 이상의 배운자들이 거하는 땅으로 통했다. 


다른 다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 해방을 줄 메시야, 경제적 부를 가져다가 줄 경제적 메시야로 기대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발전시키고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등으로 고백하며 성령으로 변화되었지만 유다는 변화되지 못한 제자였다. 

그는 끝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요 6: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이 구절의 배경이 무엇인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저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베부른 까닭이다."라고 한탄하시며 썩지 않을 양식, 즉 자기의 몸과 피로서 거듭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 중 많은 무리가 떠나갔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그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에게 주님이 "너희도 가려느냐?"하고 물으니 제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생명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하며 참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에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그의 믿음이 처음 부터 잘못되었음을 알고 계셨다. 


  • 루시퍼가 교만함으로 인해 찬양하는 자에서 사탄으로 떨어졌다면 유다의 죄악은 탐심이었다. 

(요 12: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여인이 쏟은 향유를 보며 그는 저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큰 돈인가?한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그 중심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한 마음이 아니라 탐심에 있었다. 

그는 돈궤를 맡았으나 그 돈궤에 손을 대고 훔쳐 갔다고 기록한다. 무엇이 훔쳐가는 것인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 쓰는 것이 훔치는 것이다. 


(딤전 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눅 22:3)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눅 22: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눅 22:5)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탐심을 지닌, 돈을 사랑했던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가 사탄은 아니었다. 그의 탐심을 통하여 사탄이 걸고 미혹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스승, 메시야를 은 30에 팔아넘긴다. 

은 30은 노예 한명의 값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의 값을 받고 팔아 넘긴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판 돈의 극히 일부를 숨겼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큰 것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미혹은 작은 탐심에서부터 나온다. 


  • 위선의 극치 

향유를 보고 가난한 자들을 언급하는 모습. 

그리고 예수를 팔아넘기면서 그 입에 입맞추는 모습.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이중적인 죄인의 단면을 보여 준다. 

겉모습이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의 이중적인 위선에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기회를 주신다. 


  • 유다는 버림받은 신앙인인가? 처음부터 예수의 죽음을 위해 선택된 자인가? 

그렇지 않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유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그 자리에 있던 열두 제자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했다. 

그런데 그는 세번의 주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는 말씀에 눈물로, 회개로, 다짐으로 화답했다. 


유다에게도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회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주님과 눈이, 손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고백대신, 회개 대신 그 자리를 뛰쳐 나갔다. 

둘 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병사들을 대동하고 주님의 입을 맞출 때이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말씀하신다. 

마지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마음에 후회가 들어왔다. 

(마 27: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런데 그의 뉘우침은 단지 후회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회개이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후회했지만 돌아오는 대신에 죽는 길을 택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사망의 길을 택한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유다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 안에 숨겨진 교만함과 탐심, 누구든지 말씀과 기도에 깨어있지 않으면 빠지게 되고 빠질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가면을 벗어야 한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이 연약함을 벗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가면은 위선을 낳고 한 번 위선에 빠지면 진실해지기 어렵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또한 많이 후회한다. 그런데 후회에서 멈추면 안된다. 반드시 돌이켜야 한다. 돌아서야 한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은 미혹에 빠져 있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거듭 거듭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아담아 어디있느냐 부르시고 네 동생 아우가 어디있냐고 가나안을 부르신다. 죄의 소욕이 네게 있으나 너는 그것을 다스려라고 말씀하신다. 

은혜는 이 안타까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은혜다.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역사할 수 없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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