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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23-24절 상실 너머에 있는 형통의 세계

 

요셉 - 라헬로부터 난 아들, 사랑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 성경은 특별히 사람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에 대한 기사들이 많다.

솔로몬 - 밧세바, 잘못된 관계였지만, 다른 처들 - 거의 정략결혼,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다른 아들들보다 솔로몬을 가장 사랑했다.

사무엘 -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아들...

 

우리 성도의 위치

[시 2:7-8]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누구로부터 나은 자식인가?

[행 13:32-3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우리는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그 분의 자녀가 된 자들. 사랑받는 자.

 

요셉 -

  • [창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자. 홀로 집에 남아 아버지와 함께 유하고, 남자이면서도 혼자 채색옷을 입고....형들은 일하러 가고. 편애 중의 편애..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형들에 대한 배려도, 형제우애도 잃어버리고(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자신이 사랑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인격적으로 볼 때 미성숙한 자. 형제들 사이에서 밉상.

cf) 사도 요한 -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 그런데 그는 성령 받은 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를 받들고, 마리아를 받들고, 자신의 범위를 넘지 않고 섬기는 자, 사랑의 사도

여기에 비해 요셉은 사랑받는 것을 통해 남들의 미움을 받는다.

 

자기의 꿈을 가감없이 형제들에게, 두 번씩이나 고함으로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받았을 터인데 꿈이야기를 통하여 이젠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형들 위에 군림하려는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 수 벗다.

  •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그의 꿈보다 더 미운 것, 그의 말...진실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배려가 없는 진실은 오히려 남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말을 통해 배려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형들이 악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느날 야곱이 세겜 땅에서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밥을 갖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평소 때와 같이 감시자로 보낸다. 고자질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고하게 한다. 이미 다른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형들은 아버지에게 이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머물면서 양들을 친다.

아버지는 편애하고 형들은 불순종하여 아뢰지 않은 다른 곳에 진치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가오는 요셉을 보고 유명한 말을 한다.

 

  • [창 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구절을 잘 기억해 두자.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채색옷 - 요셉이 사랑받음을 벗기는 것, 그가 가진 모든 사랑을 벗기고 빼앗아 버림.

그리고 구덩이에 던진다. 구덩이는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이다. 누가 꺼내주기 까지는 나올 수 없다.

깊은 낙망, 깊은 우울증. 깊은 슾픔, 깊은 절망 -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설명을 붙인다. 그 구덩이는 빈 것이고 그 속에 물이 없다.

왜 이 구절을 붙였을까? 무언가 의미를 주고자 함이다. 빈 것이고 물이 없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물이 없음은 이제 받아왔던 모든 은혜가 사라진 상태다.

이후로부터 요셉의 삶은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것 마냥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옷이 벗겨진 채로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는 인생이 된다.

꿈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사는 이유도, 희망도 사라진다. 꿈이나 비전같은 말은 요셉의 삶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사치가 되었다.

 

적이 아닌, 악인들이 아닌 형들에게 배반당한 요셉 -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다 사라져 버림.,

아버지의 사랑이 속수무책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원인을 찾아보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야곱이다.

 

상실 - 자발적인 포기는 상실이 아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갖고 있는 것, 겅제로 빼앗기고 사라져 버릴 때 - 우리는 그것을 상실이라 한다.

요셉은 지금 전형적인 상실의 삶을 살아간다 - 그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을 지는 상실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

부정, 저항, 포기, 낙심, 우울, 생의 의욕이 완전히 꺾여짐.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 - 잃어버린 것을 그 것보다 더 한 것으로 채우는 것 (욥- 나중 받는 것으로 이전 잃어버린 것들을 극복한다)

가치 없는 것으로 그 상실을 극복하고자 할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중독과 일탈과 타락의 삶으로 더 깊숙히 추락한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다.

 

  • 보디발의 집에서 적응한다. 그럭저럭 삶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도록 노예의 삶에 잘 적응한다. 눈에 띠는 노예가 된다.

요셉은 집에서 궂은 일을 해 본 일이 없다.그런데도 이방 땅, 다른 문화, 다른 언어의 사람에게 팔려가서 온갖 굳은 일을 해가며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는다.

.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노예로서의 삶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경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하나의 구절을 통해 힌트를 준다. .

 

상실을 대체하는, 누군가가 그에게 있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요셉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등장.

사랑받는 자녀였을 때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등장한다. 언제? 그가 상실의 극한에 있을 때에

꿈을 잃어버렸을 때에, 형들에게 배반당했을 때에, 물이 없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

 

그런데 그 전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자신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에게 경험된 하나님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비로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만난다. 아버지에 사랑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 분은 언제나 존재하시지만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경험할 때 그 존재는 현존, 임재, 동행이 된다.

 

포기 할 만할 때에 그의 삶에 생명력이 들어온다.

아버지의 집에서도 하지 않던 남의 집을 자신이 관리한다. 자신이 청소하고 운영한다. 모든 것을 관리한다. 놀라운 생명력이다. 포기의 순간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시간이 된다.

 

형통 - 찰라흐

외적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영과 혼이 만족되면서 오는 만족과 기쁨.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형통이다.

삶에 동기가 생기고 생명력이 생긴다.

그런 형통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한다.

 

  • 또 한 번의 시험 - 두 번 째 상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힘.

죄를 이겼는데 그 죄값을 치룸,.

이제 그 집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 집을 빼앗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상실이 찾아온 것이다. 어떤 상실이 더 큰 상실일까?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었다.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했다. 그래서 신나게 일하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칭찬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첫 번째 상실이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상실이라면 두 번째 상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실이다. 어떤 상실이 더 컸을까?

두번째 상실은 그간 버텨온 요셉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상실이다.

첫번째 상실이 그의 외적 환경을 빼앗는 상실이면 두 번째 상실은 그의 내면을 뒤흔드는 상실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첫 번째 상실을 신앙으로 극복하지만 두 번째 상실을 만나게 되면 무너진다. 넘어진다. 일어서질 못한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창 39:2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떤 상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견뎠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을 때에....

그런데 그 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상실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상실을 통해 요셉이 얻은 승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 넘어에서 행동하시는 분이니까... 그 분의 행동은 내 생각 밖에서 움직인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겪는 가장 흔한 실수

-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꺼야... 자신이 주도하고 해답을 내리고 하나님을 이끌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안되면 넘어지고 화내고 실망한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의 자람은 내 마음대로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이다. 그 때에 비로서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난다. 내 존재 위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 전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결국 내 믿음, 내 신념을 기대사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내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더하신다. 은혜를 받게 하신다. 요셉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포기하지 않도록, 그에게 사랑을 주신다.

 

17살에 끌려와서 27살 떄 그 감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또 붙든다.

 

성도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도 오히려 내 삶이 무너질 때

 

내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상(iMAGE)일 뿐이다.

내 과거의 믿음을 넘어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부활 전의 예수님의 상에 갇혀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제의 믿음을 깨뜨리고 오늘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실날처럼 보여진다.

말씀이 새롭게 보여진다. 그 분의 어떤 맒씀도 허투로 보지 않는다. 내 경험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 안에 내 영혼을 드린다.

 

감옥에서 3년만에 총리가 된다. - 오늘 새벽에 나눈 사도 바울의 아바리아에서의 3년....

 

[창 42:8-9]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꿈을 붙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루 하루를 살았더니 어느날 문득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결국 자신에게 주신 말씀, 자신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갔을 때에 그는 과거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말도 잃어버렸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꿈을, 비전을 잃어버려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여호와로 경험하는 삶이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난 후에 알게 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에 형들에 대한 사무친 억울함과 원망도 사라지게 된다. 상실을 넘어 형통으로, 상실을 넘어 화평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뉴욕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과 통화

예수 붙들자. 예수 바라보자. 견디고 참고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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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개요: 부부가 세시간 간격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사건

4장까지 한껏 고조되었던 성령의 역사, 교회의 역사가 멈칫 하는 사건. 그 이후에 줄줄이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리파 유대인의 분열사건, 스데반의 순교와 이어지는 교회의 핍박사건. - 그 시작이 되는 사건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니니아 :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삽비라: 보석, 아름답다

 

헌금을 떼어 먹었다가 죽은 사건인가? 그것이 죽을 이유인가? 만약 그것이 이유라면 우리 성도들 하나라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하나님이 설립하신 두 개의 공동체 : 가정과 교회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러한 가정이 깨어진다. 왜? 그들이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

누구의 잘못인가가 핵심이 아니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가지고 오랫동안 여성을 핍박

 

  • 죄를 짓게 하는 세력이 있다. 사탄의 존재
  • 죄를 짓게 하는 방법: 극단화, 과장화 -> 거짓과 죄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넘어질 때 - 상황이 극단적으로, 과장적으로 생각되고, 느껴지고, 경험됨. 애굽에 있었더라면 배불리 먹고....

- 진리를 어느순간 바꾸어 버린다. 사탄은 과장된, 극단적인 우리의 생각의 틈을 파고든다.

그 거짓이 무얼 건드리느냐? 바로 탐심, 정욕-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 탐심과 정욕의 결과 -> 가정이 깨어지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

깨어진 것은 가정, 에덴 동산은 그대로 있으나 추방당한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 그 이름은 행복

에덴동산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추방당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있지만 탐심과 정욕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에서부터 추방되어진다.

 

가정을 깬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깨는 사탄의 전략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윤리적 실패가 아니다. 그 이면에 사탄이 움직였다.

가정을 깨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깨어질 수 있는 시험이 왔다.

 

1. 교회는 영적인 세력의 방해가 분명히 있다.

내부적으로, 과학적으로만 접근- 심리학, 상담학....

물론 사람을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뿐이 아니다. 분명 사탄의 방해, 참소, 유혹이 있다.

그것을 외면하고 분별하지 못하면 이것을 이길 수 없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취급하는 것 - 김기동 성락교회 - 이단

그러나 모든 것에서 영적인 것을 외면하는 것 역시 잘못된 신앙, 또 다른 이단이다.

 

교회마다 넘어지는, 깨어지는 돈 문제, 여자 문제, 세습문제, 이단 문제..분열문제 -> 개인적 일탈인가? 그 뒤에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조직적 방해, 영적인 전쟁이 분명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개인에 대해,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만 사탄에 대해서도, 그들의 공격과 방법에 대해서도 놓치지 말고 분별해야 한다.

 

[엡 2:1-2]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개인의 문제도 중요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영적 싸움, 우리의 존재 뒤에 역사하는 영이 있다.

 

2. 사탄의 방법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사도들이 헌금을 강요했나? 작정헌금하라고 했나?

자원적 헌금 - 자원하는데 일부를 감추었다.

 

-> 이단이나 잘못된 부흥사 - 하나님 드릴 헌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 벌받는다.

성도를 위협하는 도구로.... 아니다.

헌금의 마음은 조금도 강요됨이 없이 자원하는 것이고, 감사의 열매이다.

 

그러면 그들이 왜 헌금을 드리려고 했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드린 동기는 무엇인가?

[행 4:34-3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러나와서 도왔다. 그들을 먹였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때 꿈쩍도 하지 않닸다. 언제 그들이 밭을 팔아 헌금을 내려 하는가?

[행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오늘 새벽시간에 나눈 배경 -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 -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뭄. 머문 자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낸 헌금

그런데 36절 - 그 중 한 예 정도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사건...

34절의 밭 - LAND

37절의 밭 - FIELD (어마어마한 양의 땅을 내어놓아 초대교회에 소문이 나고 그를 볼 때마다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 바나바- 로 불림)

 

요셉을 바나바라고 부름 - 사도들로부터, 성도들로부터 너도나도 칭송을 받음.

 

이것을 누가 보았을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들의 자원함은 무엇? 부러움과 시기함을 통하여...

그런데 그 흉내를 내다가 스스로를 속임- 그 칭송은 받고 싶은데 그 밭을 팔려니 아까운 마음, 거짓으로...

 

물질로 칭찬과 존경을 사려고 함 - 마술사 시몬과 같은...

헌금은 자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 남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거짓으로...

 

  • 그래도 너무하지 않느냐?
  • 하나님이 주신 기회 - 대수롭지 않게 거짓으로... 회개할 기회...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8-9]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것 - 거짓과 탐심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이유 - 거짓과 탐심

 

2. 이 사건을 통해 교회와 성도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글로 읽는 우리들의 반응 - 당혹스러움, 하나님 너무하시네....

그런데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신앙의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성격 -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두려움

 

구약의 하나님 - 두려움.

신약의 그리스도 -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

구약 속에서도 한결같이 흐르는 것 - 그 분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언서, 시편, 선지서에 반복적으로 흐르는 구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백성들이 느꼈던 하나님의 모습 - 엄위하신 하나님. 두려움의 하나님

 

신약의 그리스도 -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삶을 통해서 잘못된 종교인들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

교회의 장사치들을 몰아내시는 하나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그런 모습을 잃어버린다.

 

사랑과 공의 - 사랑하시지만 그 분은 동시에 심판하시는 주이시다.

 

  • 경외의 반대는 무엇인가? 무시, 경시이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우상숭배하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세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며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우리에게 없는 것 -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 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대제사장 -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항상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하나님의 현현을 본 사람들은 화로다 나로 죽게 되었구나....

 

그런데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슨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 주시는 유덕한 할아버지처럼 생각한다.

두려움을 잃어버리면 남는 것은 불순종이고 지기 마음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서의 반복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지기 힘으로 이기려는 바벨탑의 역사만이 남는다.

경건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성경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탄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질병을 두려워하고, 사탄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회복되니 그 다음 구절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행 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 두려운 줄 아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아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때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때,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한다고 말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 - 나는 성도를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달 넘게 전세계 교회가 예배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죽어가고 있는 이 사태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가지라는 경고라는 것이다.

 

아이들과 가정예배 때마다 주는 말

지금은 방학이 아니라 고통의 때다.

지금은 HOLYDAY가 아니라 Crisis고 위협의 때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잠시, 또 무너져버린 생활 패턴을 되찾지 못한다.

 

기름값이 올라서 문제가 된 적 - 그 기름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상 초유의 사태 - 기름 값이 Minus - 가름 한 배럴을 파는데 돈을 주면서 제발 가져가 달라고....

비행기가 뜨지 않으니까 기름을 쓸 뗀 없고, 놔두면 기름 생산이 한 번 중단되면 재가동하는데 엄청남 돈이 또 들어가니까 돈을 주고서라도 저장되어 있는 기름을 팔려는 것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비싸다고 하는 것들은 무가치해지고 생필품들은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마스크, 휴지, 쌀 - 맛배기였지만 이런 초유의 사태는 마지막 때의 시작 일 뿐...

 

복된 두려움을 회복하길 원한다. 그 분을 두려워함으로 말씀이 보여지고, 기도가 쉬어지지 않고, 진정한 예배가 여러분의 심령에서부터, 가정에서부터 회복되기를,

진정한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이 사태를 통해 교회 안의 거짓, 교회 안의 하나님을 멸시함과 남을 시기함과, 거짓과 탐심이 사라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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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절 (두 가지 시선)

 

제 구시 - 오후 세시: 일상을 멈추고 기도하는 시간

11시 예배 - 아침과 점심의 중간 - 가장 중요한 시간.

 

성전에 올라갈 새 - 일상을 멈추고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는 것

예수가 성전 척결을 하면서 하신 말씀 - 이 곳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다른 목적으로 성전에 온 사람. -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 날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 지금 나이 40살

지금도 당시도 사회의 가장 주축, 중심의 시간

그런데 나면서부터 육체의 병으로 인해 그런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저 구걸하기 위해서 성전에 오는 사람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만 있는 자.

-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 성전 안의 예배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

마가 다락방 안의 사람들과 다락방 밖의 사람들.

 

은혜의 안에 있는 사람 - 오직 주만, 오직 성령만

은혜의 밖에 있는 사람 - 당황하고, 놀라고, 조롱하고---오직 사람만 보이는 사람.

 

은혜의 소리는 듣고, 그 사람들은 보지만 정작 그 은혜는 누려보지 못한 자.

 

교회 문 앞을 기웃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안, 신앙 안,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성전과 세상의 경계선 상에서 서있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비슷한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성전 깊이 들어와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본다. - 그리고 구걸한다.

4절 -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 두 시선이 마주치는 사건

그는 받기를 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받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돈이다.

주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그리스도다. 은혜다.

 

받기를 원하는 자와 주기를 원하는 자가 만나면 곧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받는 대상이 다르고 주는 대상이 다르면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받아야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이 다를 때 거기엔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 없다.

 

베드로가 그 불일치를 깨뜨리는 선언을 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네가 얻고자 하는 것 내게는 없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내게 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무엇을 주고자 하는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은과 금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가장 귀한 것. 누구에게? 그 은혜를 아는 자에게....

 

이것이 합쳐질 때에 성령이 임한다. 아무리 받고 싶은 사람과 주고 싶은 사람이 만나도 그 대상이 바르지 못하면 항상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그리스도로 합쳐질 때에 은혜가 임한다. 역사가 임한다.

그 예수는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가장 근원적인 것- 멈추어진 인생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주었던 것 - 은과 금

물론 고맙고 선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시간이 지나면 계속 사라지는 것.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는 것.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예수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딱 거기까지다.

 

돈도 주고 예수도 주면 안되는가? 아니다. 돈을 주면 예수를 찾지 않는다. 예수를 바라지 않고 돈을 찾는다.

 

선교학 강의 - 한국 선교에 대한 세계의 비판 -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돈을 전한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붙인 교회만을 짓는다. 그들은 십자가의 선교가 아니라 십자군의 선교만을 할 뿐이다.

 

내게 있는 것 - 여러분에게 예수가 있는가?

여러분 안에 예수가 있는가?

그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 대신에 돈을 남겨주고자 하지 않는가?

교회가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집 대신에, 카페, 체육과, 콘서트홀.... 이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가?

 

내 부모.... 나에게 남겨주실 동산, 부동산은 하나 없지만 내게 주신 가장 귀한 것. - 예수

형제가 모두 예수를 물려 받았다.

얼마나 감사한가....

 

기적 - 뛰어 서서 걸으며....

그것 보다 더 큰 기적 - 성전으로 들어갔다. 한번도 들어간 적 없는 성전 안의 세계, 은혜 안의 세계, 깊은 물의 세계, 지성소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것을 경험 한 적 없는 자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경험한 자, 그리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지 않은가? 뛰어 서서 걷는 것 보다 가장 큰 기적

-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인생의 무게가 떠나갔다. 노래 할 수 없는 자가 노래한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한다.

 

노래는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나를 향해서 부르는 것

찬양은 그가 좋아서, 그를 위해서, 그를 향해서 부르는 것.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않는 그를 위한 노래... 찬양.

 

남에게 돈을 구걸하던 그, 관심과 도움만을 구하던 그가 비로소 진정으로 예배하며 찬양했다.

 

앉은뱅이 - 홀로 설 수 없는 자. 홀로 걸을 수 없는 자.

그가 예수를 통해 걷고 뛰고, 그리고 찬양한다. 성전 안에 들어가 예배한다.

 

떄로 우리는 영적 앉은뱅이가 된다.

주님은 여전히 오늘의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데 우리는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해, 우리가 짊어진 감정과 관계와 짐과 고난과 광야를 통해

그가 주시고자 하는 것, 그가 주시는 평안, 그가 주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도 앉은 자리에서 뛰어, 서서, 걷는 역사, 성전 안의 깊은 곳을 체험하는 은혜, 노래가 아닌 진정한 찬양이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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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을 위해 (누가복음 24장 36-49절)

 

부활을 믿지 않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평강 - 샬롬, 에리레네

평안과 편안: 편안함은 평안함의 모조품이다.

 

평안함은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편안함은 환경을 통해 누리는 육신의 즐거움이고 평안함은 마음을 통해 주어지는 영혼의 즐거움이다.

 

요즘 처럼 육신적 편안함 가운데서 영적 평안함을 간구한 적이 있을까?

몸은 편한데 마음은 절대적으로 불안한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주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편안함이 아닌 평안함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왜 제자들을 방문했을까? 어떤 상황에서 그들을 방문하신 것일까?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런데 그 소리를 믿지 않았다.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그 이전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허탄하다: 영어 번역- (Non-sense) 감각할 수 없는 것. 넌센스- 비이성적이라는 말의 기원- 자기 몸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

그런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 그게 더 Non-sense 아닌가?

 

왜 믿지 않았을까?

믿었더라면 그들이 있어야 할 곳 - 갈릴리.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신앙생활, 끊임없이 내 감각, 내 상식, 내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그분을 믿고 바라는 것- 그런데 그 분을 믿지 못하는 일들이 불신지들이 아닌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씀을 읽고, 왜 기도하는가?

과거의 믿음이 날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령한 은혜를 체험해도 말씀 가운데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또 내 감각 속에 갇혀서 산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가 된다.

 

그들이 믿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숨어 있으니 주님이 갈릴리로 가시지 않고 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발걸음을 돌이키신다. 우리를 찾아다닌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왜 나타났는가? 그들이 안믿으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어떻게 믿게 하시는가?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몸- 마리아도, 제자들도 못알아본다. 왜?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 모든 상처와 죄와 연약함이 사라진 몸.

 

십자가상의 주님의 몸 - 상처투성이의 몸- 채찍질, 가시면류관....

온 몸의 모든 상처, 찢긴 것들이 다 회복된 몸일진대....단지 이것은 회복하지 않고 그대로 오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못박힌 손, 못박힌 발.

왜 그 상처를 부활하신 주님이 남기셨을까? 오직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늘보좌에 좌정하셨던 그 예수가 왜 이 죄많은 땅에 내려오셨는가?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껜 어떤 의미일까?

여행하는 기분으로 오셨을까?

애인만나는 기분으로 즐겁게 오셨을까?

물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의미는

재벌가 자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자기 상속과 지위를 다 버리고 오는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이 더 큰 불편함과,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자기의 사명을 다 끝내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 겪으시고, 감당하시고

이제 하나님 나라, 그 보좌를 향해 가는 일만 남았는데, 어서 빨리 가고 싶은 그 나라를 바로 올라가시지 않고

40일간을, 마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에 40일간 금식하셨던 그 마음으로, 그 고통을 다시 감당하며

이 땅에 남으셨다. 왜? 오직 제자들을 위해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려고....한 영혼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그냥 남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쳐다보기도 싫은 그 고통의 흔적, 그 조롱과 비아냥과, 그 모욕의 흔적인 손과 발의 못자국을 그대로 남기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무슨 훈장처럼 달고 오셨을까?

그 고통의 흔적을? No! 오직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제자들이 그 못자국의 깊이를 알까? 그 고통의 의미를 알까?

예수가 못박힐 때, 창에 찔릴 때, 그들은 다 어디 있었는가?

 

숨고, 도망가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그 손의 못자국을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그들이 보기 싫어 외면했던 십자가, 그들이 지기 싫어 도망쳤던 십자가, 그 십자가의 흔적을

 

살아나신 주님께서 나타났는데도 그 분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뚫어진 입이라고

"당신이 만약 예수라면 손의 못자국 보여줘 봐. 발의 못자국 보여줘 보! 창에 찔린 옆구리 보여줘 봐!"

 

그들이 그 상처를 보기라도 한듯이, 알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닫혀진 문을 뚫고,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뚫고

"어찌하며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하면서 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감각이 있어야 믿는다고 하면 너희들 가 감각을 가지고 마음껏 만져보라....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눅 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 문장은 제가 아무리 해석해도 해석이 안돼.

너무 기쁜데, 믿지 못해....

눈으로는 보고, 손으로는 만지는데 그래도 믿지 못해....

그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데도 아직도,.....

 

뭘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주석들과 논문들을 찾아봐도 뚜렷이 확 마음에 닿는 것이 없는데....

 

크게 두 종류의 해석

 

  • 너무 기뻐서 실감하지 못하는 마음
  • 기쁘긴 한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 마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증언하고, 이제 급기야 자기 눈으로, 손으로 만지는 데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 믿지 못하게 하는 것 -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하는 common sense

영적, 육적 모든 감각보다 더 우선하는 사회적, 일반적 상식.

 

나를 주님 안으로 더 가깝게 믿게 하지 못하는 일반적 상식

 

다른 복음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면서 생선을 구워 그들 앞에서 같이 식사한다.

그들과 늘 하던대로, 가장 일상적이고도, 친근하게 지내던 함께 밥먹는 일. 영이 아닌 육적으로 살아났음을 친히 체험케 하신다.

 

우리는 식구잖아......

 

그리고 나서....그들을 믿게 하는 더 깊은 길

45절: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은 우리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말씀은 주의 못박힌 손과 발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말씀은 가장 친밀한 주의 사귐보다도 오히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이게 믿어지고, 인정이 되고, 이게 납득이 되야 말씀 앞에 목숨을 건 자가 된다.

 

가장 좋은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증거가 확실한?

사랑의 교제가 뜨거운?

물론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하고, 필요하지만 가장 좋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이다.

 

그래서 성도는 목사의 설교를 위해, 강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무엇을 통해 확증되는가?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위로부터의 능력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을 통해 .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위로부터의 능력으로 덧입혀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와 당신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심을 믿는가?

그리고 그 분이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음을 믿는가?

그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그 상처를 내 보이면서까지 나를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함을 믿는가?

 

우리는 지금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능력이 필요하다.

 

영국 형에게서 온 메시지... (영국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번역해서 나에게 보내 준 편지)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

 

지구가 속삭였지만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고 급기야 소리쳐 외쳤을 때 조차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벌 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깨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지구는 도와 달라 외쳐왔습니다. 대규모의 홍수로 외쳐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고, 불타는 화염으로 외쳐도, 강력한 폭풍과 돌풍에도 당신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양의 생물들이 해양 오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당신들은 여전히 지구의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심각한 경고에도, 혹독한 가뭄에도, 지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끊이지않고. 욕심은 멈추지 않고, 무수한 증오에도, 하루에도 수 많은 죽음이 일어나도 당신들은 그저 당신들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지구가 보여주는 수많은 징후를 알아내기 보다는 최신 아이폰을 갖는 것이 더 중요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여기서 서서 세계가 돌아가는 그 궤도에서 멈추게 했습니다.

내가 마침내 당신들로 듣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로 대피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고 계십니까?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뜨거워 몸살을 겪는 것처럼 당신들에게서 고열이 나고,

지구가 대기가 오염으로 가득 찬 것처럼 당신들에게 호흡곤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구가 매일 약해지는 것 같이 당신들에게 연약함을 주었습니다.

세계를 멈추게 만들어 당신들로 지구와 그 아픔을 잊게 만들던 편안함과 즐거운 외출을 당신들로부터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단지 공장들이 더 이상 오염물질을 지구의 대기에 내뿜지 않게 된 것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니스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곤돌라가 멈추는 것 만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신들은 비로소 당신들의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여기에 당신들을 벌 주러 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깨우기 위해 온 것입니다.

내가 떠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제발 이 시간들을 기억해주세요.

지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더 이상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을 멈춰 주세요.

 

싸움을 멈추고, 더 이상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리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이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시작해 보세요.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혹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오게 될 거예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마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깨우듯 이 질병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깨우고자 하는 이 글의 모습이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까지 우리를 믿게 하시면서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갖지 않은가?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부활의 증인이 되라 하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 시작 한 뒤로 처음맞게 되는 가정 온라인 예배라는 말씀들을 하신다.

편지 글 대로 우리를 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일꺼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자기 길로만 가는 수많은 성도와 교회들에게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단지 예배당에서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으라고....

 

부활의 주님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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