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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대통령과 여성 리더십


        지난 2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취임했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 측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모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 국내외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남성적인 이미지가 결부된 정체성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그것이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과거의 경제 성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에게는 독재자의 억압과 착취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현재까지의 국정 수행 방식과 정책에서는 오히려 남성적인 모습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평가가 많다. 그렇다면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해야 할까? 최근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의 대부분은 엄마 같은 따뜻함’, ‘부드러움’, ‘섬세함 등을 갖추어야 한다는 등의 추상적이고도 얕은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들은 단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또는 통속적인 관념을 그대로 투사(projection)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도 이런 수준이라면,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 이른바 중세 중기 시대(High Middle Age)에는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교회에서는 남성 성직자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대체로 가정 안에서의 아내나 어머니로 제한되어 왔고, 그 역할을 넘어 사회에서 리더십을 보이는 여성들은 극단적인 경우 이단으로 정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몇몇 경건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아내 또는 어머니라는 제한된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중세의 여성들은 수도원에서 독신 수도자(anchoress)로 살거나, 베긴회(Beguins)와 같이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 공동체를 이루는 등 점차 다양하게 그들의 삶의 범주를 넓혀갔다.그리하여 이른바 중세 여성들의 영성 시대가 열리게 된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때의 여성 신비가들의 활동을 가부장적 신앙 체계에 대한 대안 영성’, 또는 남성 중심의 사고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대안 영성, 새로운 신앙 운동의 중심에 섰던 여성이 바로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is Bingensis, 1098-1179).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비리디타스(Viriditas)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여성 수도원장, 전기가 남아있는 최초의 여성 작곡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특출한 인물이다. 그녀는 1098년 지금의 독일 영토인 뵈켈하임(Böckelheim)에서 한 귀족 가문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나 가정의 십일조로 여덟 살 때에 수도원에 맡겨졌다. 힐데가르트는 여덟 살 때부터 환상을 본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 사회 여건상 그러한 사실을 숨겨왔다고 한다. 그러다 마흔세 살 때에 네가 본 것을 적어 세상에 알리라.”는 강한 음성을 듣고, 그 후 10여년에 걸쳐 길을 알라(Scivias는 역작을 남겼다. 그녀는 신학자로서뿐 아니라, 작곡가, 시인, 의학자, 식품학자로서 다양한 작품과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비리디타스(viriditas)’는 그녀의 방대한 사상과 영성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비리디타스는 라틴어‘virtus’(virtue, ), vis(strength, ), 그리고 ‘vita’(life, 생명)가 결합된 말로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하여 비리디타스를 녹색 생명력’, ‘푸르른 힘 또는 만물에 깃든 생명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 매튜 폭스(Matthew Fox)나 바바라 뉴먼(Barbara Newman) 같은 학자들은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사상은 이전의 남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독특한 창조영성, 생태영성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힐데가르트는 비리디타스를 통해 모든 창조물 안에 하나님의 영과 그 분의 영이 전하는 치유력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어떠한 생명도 죽어야 할 운명에서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바로 생명 안에 있습니다.따라서 한 그루의 나무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수액을 통해 자라고, 하나의 돌조차도 그 안의 습기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의 생명력은 생명을 낳는 능력, 즉 영원한 하나님의 비리디타스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의 편지들(The Letters of Hildegard of Bingen), vol 1. Oxford Univ. Press (1994), p.95.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대우주 안에 존재하는 소우주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다. 자연을 이루는 것들이 인간의 몸을 이루고 또한 정신을 이룬다. 몸과 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구원은 곧 몸의 치유와도 같다.그래서 힐데가르트는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의 탄식에도 귀를 기울였다.


만물의 요소들이 외쳤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지시해 주신 우리의 과제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악행을 저질러 우리를 파멸시키고 휘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악취를 풍기고 정의에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리디타스는 눈 먼 인간 무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 생명의 보상(The Book of the Rewards of Life), Oxford Univ. Press (1997), p.125-26.


        나아가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음악은 잠시나마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자연의 빛과 소리에 자신을 개방하고 머무르도록 인도하는 기도이다. 음악은 전체 창조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도록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인도한다. 그녀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력, 비리디타스를 대하게 되는 통로이다. 따라서 힐데가르트는 예배뿐만 아니라 바른 식생활과 자연치료법, 보석치료, 음악, 그림이 모두 영성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에코페미니즘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영성이 얼마나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는 지구의 환경 문제와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최근의 에코페미니스트들(생태여성주의자)의 주장을 보면 가늠할 수 있다.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가 결합된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여성의 차별과 자연의 파괴가 결국 동일한 원인에 기인하였음을 주장한다. 유력한 에코페미니스트 이론가인 밸 플럼우드(Val Plumwood)는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뿌리에는 결국 가부장적 위계질서,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도구적 세계관, 약자를 정복하려는 군사주의, 그리고 극대 이윤과 욕망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상하 질서를 강조하는 서구의 가부장제에서는 인간/자연, 남성/여성, 영혼/, 이성/감정 등이 양극을 이루며 분리되어 있고, 이 구조에서 전자는 항상 후자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가부장제 안에서 강자(남성, 인간, 영혼, 이성)는 약자(여성, 자연, , 감정)를 통제와 억압을 통해서 정복하고 이용한다. 이것은 자연히 폭력을 통한 정복, 즉 군사주의적 해결책을 정당화시키게 된다. 그래서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군사작전이 이루어지는 전쟁터에서 특히 여성과 자연이 파괴되어온 역사를 여성과 자연을 타자로 보아온 가부장적 이원론의 결과로 본다. 이러한 억압의 구조가 극대 생산과 소비를 추구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와 만날 때 자연 억압, 여성 억압은 그 극에 달하게 되어, 약자이며 타자인 여성과 자연이 착취의 대상으로 희생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그 결과 지구 전체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며, 그 대안으로 종전까지의 이분법적 사고(여성=자연, 남성=문명)를 탈피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조화와 균형의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 모든 억압의 근원이 되는 자연 지배의 전통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과의 차이점은 물론 공통점을 가지고 지구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힐데가르트와 마찬가지로 이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자연에 대한 관심과 회복을 통해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것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사회라는 생태계와 여성 리더십


        남성 중심의 질서가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중세 시대에,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명성을 듣고 지혜를 구하는 수많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더 이상 억압을 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여성 리더였다. 또한 그녀는 남성 중심,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여성과 자연의 희생이 정당화되던 시대에 모든 만물 안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 비리디타스를 발견하고,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모두가 동등하게 조화와 평화 속에서 사는 세상을 추구함으로써 창조 영성, 생태 영성,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이제 다시 우리 시대로 돌아와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나라의 발전과 여성 리더십의 발전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재가 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힐데가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고유의 통찰과 영성을 발전시켜 그것을 국정 수행에 적용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저 치마만 입는 수준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이미지로 치장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대한민국의 여성 리더십의 발전은 기회를 놓치고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말 것이다. 사실 청와대라는 곳은 여성들로 하여금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갖게 하고, 그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게 하는 일상생활과 단절되기 쉬운 공간이다. 또한 지도자라는 위치는 그 조직의 권력의 정점에 있기 때문에 가부장적 권력에 의한 희생자로서의 여성과 약자들의 아픔을 잊기 쉬운 자리이기도 하다.


        여러 면에서 매우 남성적이었던 지난 정부 집권 기간 동안, 4대강 개발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으로 자연은 신음하고, 중산층의 붕괴와 빈곤층의 확대로 대한민국 사회라는 생태계는 균형이 무너졌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단지 박정희의 딸로서만 역사에 남지는 않기를 바란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는 훗날의 여성들에게 고유하고 여성다운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줄 역사적 사명이 주어져 있다. 이전의 남성들과는 다른, 여성 고유의 통찰과 영성으로 역사적 사명을 다한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영성이 우리 사회의 여성 대통령과 여성 지도자들에게 의미 있는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정승구 /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프리몬트에서 로고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성결교 첫 여성 목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 과정에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에 기초한 해석학적 영성연구를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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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막힌 담을 허뭄 (엡 2: 14-22절) 


얼마 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땅에서 공화당이 오바마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나라 전체가 셧다운이 되는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하더니 요 며칠 전에는 천주교 정의 사회구현단에서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미사를 드린 것이 뉴스에 나오면서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정부패 정권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한쪽에서는 국가 전복을 노리는 빨갱이 세력이라며 신부들에게도 북한 추종자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셧다운과 같은 사건이 우리나라에도 임박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도, 이념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또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고, 지역별로도 갈라져 있고, 또한 세대별로도 갈라져 있습니다. 나라가 혼란할 때일 수

록 점점 중도층은 사라져 버립니다. 양쪽 극단이 대치되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가 빨리 평화로운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갈구하고, 희망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도 평화도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는 잠깐 머무는 것이며, 희망 역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화도 행복도 고갈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사회가 창조되었던 때, 에덴동산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 평화 그 자체였으며 담이 없고, 불신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교제했고, 인간은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실과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며 만물을 다스리고 그들에게 비전을 주며 살았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서로 돕는 베필로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평화가 깨어지고, 행복이 사라지고, 소망이 필요하게 된 것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옷을 입어 서로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또한 바위 뒤에 자신을 가림으로써, 무슨 말입니까? 돌처럼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하게 됩니다. 

평화의 땅,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서로 시기하여 형제끼리 살인을 저지르는 파괴자가 되고, 바벨탑을 지어 하나님의 자리를 꾀차고자 하는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니까 이제 끼리 끼리 말이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리며 말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 담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든 담이 바로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간의 깊은 불신의 담,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죄의 깊은 담, 육신적인 정욕과 영적인 갈급함이 동시에 존재하며 분열된 자아의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인해 무너지고 화목하게 되고, 평화가 오고 화해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 


에베소 교회는 계시록에 나와있는 교회중 첫 번째 소개된 교회로 이스라엘 밖의 아시아 땅에 있는 이방땅의 교회였습니다. 

11절 12절에 보면 예수를 믿기 전 이들 이방인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할례 받지 아니한 무리요,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이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언약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고, 따라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소외는 매우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전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까지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 의식과 율법으로 거룩하다는 우월 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 같이 취급하고 상종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외골수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 악독한 족속으로 낙인을 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것이죠. 


본문 14절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중간에 막힌 담"이 있음을 말합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 있었고,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유대인 남성을 위한)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유대인 여성을 위한)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 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마26:69). 높이가 1.5미터 가량인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결코 성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뜰만 왔다갔다 할 뿐이었죠.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오랜 반목과 질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로 묶어지는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엡 2: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는 결코 영원한 반목과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자기와 맞이 않는 사람, 그냥 안 보면 그만 입니다. 억지로 상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피로 인해서 먼 자도 가깝게 대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이 부모 말을 안들으면 '넌 이제 내 자식 아니다...'하면서 자식을 혼내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기에게 서운하게 하면 '난 분명 친아들이 아닐꺼야' 하면서 때로 가출을 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관계를 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때로 서운하고, 때로 보기 싫어도 결국 볼 수 밖에 없는 존재고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성도들은 역시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입니다. 

신분이 다르고, 출생지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결국은 천국에서 함께 해야할 식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담을 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 

또 우리 믿는 자들은 왜 담을 헐고 화평해야 합니까? 

엡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둘이 되었습니까? 왜 서로 원수가 됩니까? 왜 중간에 담이 막게 되었습니까? 

15절에 보면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 그들을 막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성령이 없는 법조문으로 된 율법은 그 시각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법도 재판관에 따라서, 변호사에 따라서, 검사에 따라서 그 법의 해석과 적용이 달라집니다. 결국 법조문으로 된 율법은 나에게는 의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에는 죄를 지적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내 시각에 따라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니까 서로 적이 되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내가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의가 되고, 상대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됩니다. 

십자가로 담을 허물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율법으로 상대방을 보지 말고 십자가 앞에 내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봉사, 헌신, 기부, 예배, 다 무슨 말입니까? 나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이 희생을 통해서 둘이 아닌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 성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과도 화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결국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교회- 담이 없는 건물 

 스가랴 2:4-5)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되 

  •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이제 구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 
  • 성곽없는 성읍: 벽이 없는, 담이 없는, 누구나가 올 수 있는, 목마른 자들은 누구나가 올 수 있는 그 곳.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병든자, 모든 죄인들이 거할 수 있는 처소 
  •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불로 둘러싼,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임재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 
  •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원수가 서로 화목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리라.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 
  • 사도: 시몬(열성당원) 과 마태 (세리, 매국노) 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툼이 없는 제자의 직을 수행함. 
  • 선지자: 남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요나와 같이 니느웨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선지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툼이 없고, 원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믿음 안에서


그런 믿음이 모여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절)- 성전은 계속해서 지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계속해서 담을 허물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화목, 화평을 선포하는 것이다. 

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성경에 나타나 있는 화해의 이야기 

  • 창33:3,4에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 창45:1-5에 요셉과 그의 형들이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단과 정통의 구분) 

이단은 자꾸 분리되려 한다.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정통은 화목하게 하는 자다. 무조건 화목하게 하는 것은 다원주의지만 십자가의 방법으로, 예수의 보혈로서, 희생하며, 헌신하고, 회개하며, 원수에게로 나아가는 것, 십자가의 은혜로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정통이고, 복음이고, 십자가의 진리이다. 


2013년 마지막 달입니다. 

여러분 앞에 어떤 담이 있습니까? 

무너지지 않는 담으로 인해서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계속해서 걸림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그 분의 십자가의 피가 이미 모든 죄의 담, 불신의 담, 분열의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분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평화의 사도가 되어서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직장에, 교회 공동체 안에 담을 헐고 평안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땅과 우리 조국 대한 민국의 분열의 담, 불신의 담, 지역감정과 이념갈등, 남북과 좌우로 분열된 모든 담을 허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내 안의 담을 무너뜨리고 내 가정의 담을 무너뜨리고, 내 교회의 담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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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 세워지는 나라 (하나님 나라의 인턴십) 삼상 22:1-5


저희 형이 어렸을 때 꿈이 파일롯 이었습니다. 탑 건이란 영화를 보고 꿈을 꾸더니 나중에는 이것 저것 자료들도 모았습니다. 이것 저것 자료를 모으면서 형이 어린 저에게 말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 파일럿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얼마만큼의 돈이 드는지 알아? 훈련시키는 비용만 해도 2억이 넘게 든데..." 무슨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한 지는 알 지 못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 2억이라는 금액은 상상할 수 없었던 큰 금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형도 파일롯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국의 한 교회에서는 거의 목회자 자녀들로만 구성된 찬양팀을 조직하여 합숙하며 신앙훈련도 하고 공부도 같이 하게 하며 그러면서 찬양 사역자로 훈련시키는데 그들에게 들어가는 재정만 해도 한 해 1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것 같지요. 요즘 한 자녀가 고등학교때부터 대학교때까지 교육을 마칠때 드는 돈이 거의 2억에서 3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학생활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가장 고민 되는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자녀 교육 문제이지요. 참 돈이 많이 듭니다. 돈 만 드는 것이 아니라 온 관심이 다 필요합니다. 여기 집사님도 계시지만 고 3 수험생 둔 가정은 온 가정이 그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오히려 가족들이 그 수험생의 눈치를 보고 삽니다. 


요즘 왠만한 기업들을 보면 처음부터 계약하는 경우는 왠만해서 없습니다. 좋은 직장, 전문 직장일수록 인턴 기간을 두고 그 직업에 필요한 소양을 쌓게 만듭니다. 간을 보면서 그 사람이 이 직장에 어울리는지, 그리고 필요한 기능을 익히도록, 그 직책이 맡겨 졌을 때에 시행착오하지 않도록 미리 훈련시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한 사람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신중하고 엄격하게 훈련시키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클 수록, 중대할 수록 그에게 투자하고, 훈련시키고, 다듬어 가십니다. 

모세, 야곱, 요셉, 12제자....


오늘 함께 나눌 다윗의 인생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나이가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16-17세 때로 여겨집니다. 30세때 유다의 왕이 되고 7년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 기름 붙고 15년정도를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일종의 인턴십인 경우이죠. 

다윗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고 엄격하게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훈련시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가 기름부을 당시 그는 이새의 여덟 아이들 중의 막내로 목동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이 다른 성경의 인물들과 달리 좀 특이한 점은 어머니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후 왕들의 족보로 보면 이것은 되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오히려 시편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자신의 출생이 아름답지 못하였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골리앗 사건을 계기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사울왕 옆에서 그야말로 왕궁에서의 인턴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였습니까? 둘도 없는 친구 요나단이었지요. 왕 옆에서, 그것도 왕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가 되어 왕으로서, 왕자로서의 삶을 몸소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어린 시절 바로의 궁정에서 자라면서 지도자로서의 인턴십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의 출생으로 보면 그가 왕궁에서 사울의 옆에서, 그것도 요나단을 가장 제일 친한 친구로서 사귀면서 왕으로서의 삶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이 없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의 군대장관으로까지 임명되어 승승장구하여 기세가 등등할 때 오히려 그의 인생의 위기가 닥칩니다. 가장 잘 나갈 때,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낮추시어 이제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가 되게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겸손과 인내를 배워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등,  역시 잘 나갈 때에 죄악의 유혹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솔로몬 이라던지 이후 이스라엘의 왕들에 비해보면 다윗은 끝까지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었습니다. 


이후 30세때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그는 사울을 피해 끝없이 도망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여러분, 일국의 왕이 군사를 모아 자기 하나를 따라다니면서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년을 통해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 쫓아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과정에서 다윗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강한 그의 영성은 찬양입니다. 목동일 때부터 그는 찬양하는 자였고, 왕궁에 있을 때도 그는 찬양하는 자로서 사울 곁에 있었고, 아삽이라는 성가대장을 따로 세우고 전쟁의 가장 앞에도 나팔불고 성가대가 앞장 서게 함으로서 그의 외적신분이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고 다윗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모습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망중에,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눌 아둘람 굴속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찬양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장인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합니다.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가 사울의 군대장관인데 어찌 왕앞에 둡니까하면서 말하니까 이것을 듣고 다윗이 입에 침을 흘리며 문에다 낙서를 하면서 미친척하면서 도망을 나옵니다. 

얼마나 서글픈 광경입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친 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이때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 보게 되지요. 

이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불면증에 걸려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기도는 커녕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 때에도 시를 씁니다. 

시편 34편이 이 때에 쓴 시지요. 몇 부분만 읽어 볼까요? 

(시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9-20]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그는 아기스왕에게서도 미친척 하고 쫓겨나서  지금 아둘라 굴 속에 피신하고 맙니다. 

'아둘라'의 뜻은 격리된 것, 즉 피난처, 도피처라는 뜻입니다.  동굴은 어떤 곳입니까? 앞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요, 앞이 꽉 막혀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일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인턴십과정에 있어서 어쩌면 이곳은 가장 중요하고 왕국의 기초를 닦는 중요한 장소, 중요한 시간이 됩니다. 


- 다윗의 아둘람 동굴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다윗은 아둘람은 피상적인 하나님, 막연한 하나님은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통해서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 아둘람은 다윗이 자원해서 들어간 동굴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어둠의 터널이었지만, 절망의 터널이었지만 그는 이 곳을 나올 때 밝은 빛을 경험하고 나옵니다. 
  • 시련과 원망의 동굴이 어떤 동굴로 바뀝니까?
  •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노래 

1. 시 57편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시 57:9]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 (시편 142편) 

(시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 142: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시 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 이방 왕에게 가서라도 자기가 안전하게 피해볼까하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침을 질질 흘르며 미친척하고 쫓겨나서 이제 하나님이 인도하신 아둘람 속에서 들어갔더니 이젠 정말 하나님밖에는 의지 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피난처인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 의지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피할 다른 것, 다른 곳을 예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 굴속에서 자신의 피난처, 자신의 보호자는 오직,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 이들은 깜깜한 고난의 동굴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동굴 속에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동굴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2. 다윗은 아둘람 굴 속에서 전정한 동역자를 만납니다. 그 동역자는 그의 평생의 동역자요 이스라엘 왕국의 초석이 됩니다. 

  • 오늘 추방자요 도망자인 다윗의 곁에 찾아온 자들은 누구입니까?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지금 자기 혼자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아니 세상에 힘든 사람이란 힘든 사람이 다 모여서 그에게 모여듭니다. 우리는 힘이 들고 기분이 안좋으면 좀 밝은 곳,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기분전환이라고 하고 싶지요. 내 기분도 안좋은데 더 안좋은 사람 만나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이 이방땅에서 미친척 하면서 쫓겨나서 가까스로 이곳에 피신했는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환난당한 모든 자들이 이 곳에 모여든 것입니다. 
  • 자신의 문제도 감당하지 못하고 숨으려 할 때 자신이 부담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닥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쫓기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에게 더욱 위험스런 일이었고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모여드는 이런 일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돌려보내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책무를 다했고 그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은 10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갔고 또한 위험을 극복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넓혀 갔습니다. 
  • 그들은 장차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 
  • 삼하 23장에는 다윗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나라의 장수들, 기둥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 아둘람 굴 속에서부터 만나 동거동락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굴람굴에서부터 같이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장수가 되고 기둥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부담만을 안기어주었던 사람들이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그런 왕국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3. 다윗의 인생에서 아둘람 굴

  • 다윗에게 아둘람은 결코 비련과 회한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둘람(고난과 시련의 장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렵니까?
  • 원망과 좌절 대신, 무릎으로 나아갑시다

      [시 142:1-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 울분과 상처대신, 주의 날개 아래로 나아갑시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이런 깜깜한 고난의 동굴에 갇혀있는 분이 있습니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이 동굴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훈련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동굴에서 여러분들을 훈련시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으로, 또 하나님께서 복주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낙심하지 마시고 피로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상처를 치유 받고, 열심히 훈련받아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크게 쓰임받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양을 치던 목동 다윗에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형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맡기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었던 다윗을 아둘람 굴로 보내어 다른 영혼들을 또한 돌보게 하십니다. 왕중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충만한 다윗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파 본 것 까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의인이 고난이 많은 이유는 어쩌면 다른 영혼들의 아픔을 미리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낮추셔서 아둘람 굴로 보내셨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만 모여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지금 기가 막힌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데 자신처럼 힘든 길을 걷는 영혼들을 돌봐야 하는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내 문제 네 문제 할 것 없이 함께 울고 함께 견디고 함께 힘을 키웠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었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굴속의 영혼들을 돌보는데 생명 걸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영혼들을?"하고 물어 볼 세도 없이 절박하게 이들과 함께 하루 하루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갔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품을 수 있는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초석은 왕궁이 아닌 이 아둘람 굴속에서 다듬어져 갔고 세워져 갔습니다. 아둘람 굴 속의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서 기둥이 되고 장수가 되고 유산이 되었습니다. 
  • 나는 우리 로소스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어떤 상황에도 요동치 않고 폭풍 속에서도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고 훈련받아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려움 중에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맡겨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다윗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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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람은 누구나가 잘 살고 있습니다.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소망입니다. 문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가 죄 짓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문제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심했다가 무너지고, 마음 먹었다가 유혹이 오면 흔들리고, 계획을 세웠다가도 당장 급한 것 때문에 번번히 계획을 수정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의 통치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가치관으로 번번히 우리 안의 고귀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 쫓아 살아보면, 어느 순간 양심도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옵니다. 

세계 대전때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60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학살할 때 가장 장애가 된 것이 무엇인줄 압니까? 바로 독일군의 양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힘없는, 저항 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을 군인이지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유대인 학살을 위해서 교묘히 생각해 낸것이 유대인들을 사람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수천명씩 흩어져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을 없애버렸습니다. 공식적으로 수용소마다 포로가 쓸 수 있는 화장실을 하나씩만 만들어 놓고 나머지는 다 없앴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급하니까 아무대나 싸게 됩니다. 스스로 모욕감을 느끼면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저 주면 먹고 시키면 일하다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병사들이 유대인들은 사람이 아니다. 저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이는 데에 양심의 거리낌을 갖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랑크라는 유대인 의사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면서 썼던 <죽음의 수용소>라는 글을 읽어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간증을 들어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죽어나가면서도, 또 매일 같이 자기 동료들이 불려나가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들은 하루에 물 한컵을 배급받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밥을 먹으면서 그 물을 다 먹어 버리는데, 조금 먹고 나머지는 헝겁 조가리에 물을 조금 묻혀서 이빨을 닦습니다. 또 남겨진 조금의 물로,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합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수용소에서도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먼저 골라내어 처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지금도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가 성도다움을 포기하도록 공격하고 미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게 되고 죄책감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끊임없이 성도답게 살려고 합니다. 문제와 허물과 단점이 많아도 자기에 대한 자부심과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시작은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생각도 없고 노력도 없이 산다면 누가 나를 돕겠습니까? 자신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 계시도 없고, 자기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남도 나를 믿어 줄 수 없습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자신의 인간다움과 성도다움을 회복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 지금도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가 성도다움을 포기하도록 공격하고 미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게 되고 죄책감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끊임없이 성도답게 살려고 합니다. 문제와 허물과 단점이 많아도 자기에 대한 자부심과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1-11장까지는 주로 교리의 문제를 다루고 12-16장은 실천편입니다. 

이것을 이어주는 것이 12장 처음 시작인 '그러므로'입니다. 값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구원 받은 자 답게,  믿는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 12장부터의 내용입니다.


  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구약시대는 제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죄지은 인간이 하나님앞에 사죄의 은총을 입기위하여 살아있는 흠없는 가축을 제물로 삼아 성소의 제사장 앞에 끌고옵니다. 그리고는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전가하고 그리고는 짐승을 도살합니다. 죽어지는 짐승을 보고 죄인은 마음을 아파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를 합니다. 죄지은 자신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며 죽어지는 짐승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용서해주시도록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귀한 것을 자기 대신 죽게함으로써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고자 다짐하고 재물을 통해 자기 죄를 사해주심을 감사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러한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 오랜 반복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제사 곧 예배행위가 형식화되고 동물제사 만능주의적인 사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즉 동물 희생제사만 드리면 사회에 나가서 웬만큼 죄를 지어도 또 제물로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습관화된 제사의식에 점점 젖어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나 말라기같은 선지자들은 그런 제사의 무용론과 심지어는 재물 폐지론을 내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바치고 죄짓고 제물바치고 죄짓고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 나는 지겨우니까 제발 그런 희생제물을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 예배는 나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의 생명을 재확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좀 겁이 나고 흠칫한 말 같기도 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쓰는 용어로 말하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의미가 '몸을 드리다'의 의미 아닙니까? 

  • 바울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고 했지요. 명한다라고 하지 않고 권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로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ex) 기부와 헌신 (산 제물) 

닭과 돼지가 어느날 사이좋게 길을 가다가 "굶어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닭이 제안합니다. 돼지야 돼지야, 우리가 저 사람들을 돕자. 우리가 "햄과 에그"를 저 사람들에게 주자. 

얼마나 좋은 제안입니까? 그런데 돼지가 반대합니다. "싫어, 넌 기부만 하면 돼지만 난 내 몸을 다 내 주어야 돼." 

뭡니까? 닭은 자기가 낳는 알만 낳아주면 되지만 돼지는 자기를 죽여야 햄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돼지는 헌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 기부는 자기의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지만 헌신은 자기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헌신은, 나를 드리는 삶은 나의 부분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재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기쁨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주님의 기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이 세상은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가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 시대마다 그것이 유행처럼 크고 강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한 때 오래 유행했던 땅 투기 열풍, 과외과열, 얼짱 몸짱, 성형 바람, 다이어트, 조기유학 유행 등 이런 패턴을 따라 사람들은 휘말려갑니다. 이게 공중권세를 잠은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내 의지가 주도하는 삶입니다. 알고보면 다 자기 자랑거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식자랑 집자랑 직장자랑, 학벌자랑,,.외모자랑,,.
  •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나만 하지 않고 빠지면, 뒤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끼어 들게 됩니다. 시대를 거스려 하나님 의 뜻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 예)구약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산파(産婆)들이 그러한 용기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애굽왕 바로가 그들의 노예민이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의 인구가 급증하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말살정책을 쓰게됩니다. 이스라엘의 산파들에게 명령하기를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서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느 명령이라고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거역하면 그 즉시로 자기들이 죽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둘러대기를, "이스라엘 여인들은 기운이 좋아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라고, 출애굽기1장 2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파들이 그처럼 행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믿음 가지고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고독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 패턴은 거대하고 강한 흐름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간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생명이 있을 때만 물고기가 역류하여 올라가듯이 우리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자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다윗은 범죄한 후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한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속에 정한 마음이 없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은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비로소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주여 나에게 깨끗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은 창조입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깨끗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해 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마음이 정직한 영으로 새로 나기를 탄원합니다.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에스겔 36:26)
  •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꿈과 환상을 줍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 하는 자는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되고,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꿈을 생각합니다. 물질과 자원과 인맥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고 그 꿈을 실천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력, 재력, 학력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를 이기고, 바리새인들을 이기고, 이방인들을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물은 비전이고 꿈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믿음입니다. 그 선물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 새롭게 변화된 마음을 가지라: 자기의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 주신 꿈과 비전을 보십시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목사로 인정되는 무디 목사님은 가난으로 말미암아 초등학교 4학년 중퇴를 하였지만 100만명을 전도하고 무디 성경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참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삶의 스타일을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고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불리한 것이 유리한 것이 됩니다 믿음이란 불리함 속에서 유리함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는 것 같아도 희망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극복의 길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분별력: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뜻인가? 꿈과 환상에만 매달려 있으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자기 자신안에만 머물러 있어도 분별력을 가질 수 없다. 
  •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어느 날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이 예수님을 데리고 가려고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막 3:35) '누가 내 형제 자매 내모친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1장 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그럽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씀을 몇 군데 더 말씀드리면,

      마 18: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요6장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살전5:16-18절-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고,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3대 삶: 헌신, 변화, 분별력. 

가장 성공적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변화된 마음을 가지고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인시타인인가가 말했지요. 우리 인간은 자기 능력의 5%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약해서 조금만 역풍이 불어도 뒤로 물러서기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과 뜻과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보십시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 최고의 선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최고의 선물은 바로 자신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복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정말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만 위하여 사는 사람들,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은 미혹되어 살아갑니다. 가치없는 일에 매여,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망가뜨리고 자기 능력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 하나님이 우리의 본질을 아시고, 달란트를 아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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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갈렙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06.14 03:39

    이토록 귀한 말씀을 이제야~~,
    슴겨진 보화를.
    감사!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