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2019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목마른 자들아 (사 55:1-9)

 

한국 갔을 때에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의사의 종합적인 소견이 체중조절하고 운동해라. 그리고 식생활을 바꾸어라. 그 이전에도 많이 들은 말이지만 제 건강함을 믿고 흘려 넘기다가 여기 저기 이상징후를 겪고 나서야 그 말이 귀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주위에서 식생활 하면 얘기하는 것이 "소다" 마시지 말라. 많이 줄이긴 했지만 근근히 마시게 되는데 한국 갔다 온 후 로는 정말 조심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이다나 콜라같은 소다 음료를 사람들은 흔히 청량음료 라고 부릅니다. "청량"하다의 의미는 맑고 투명하다라는 의미인데 사이다 광고를 하면서 맑고 투명한 물에 소다 거품을 강조하면서 광고하면서 이름마저도 청량음료라고 지어 놓으니 "왠지 들이키면 시원하고 달콤하고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소다음료는 사실 마실때만 시원하고 실재로는 갈증이 잘 가시질 않습니다. 그 속에 있는 당분이 입 안에 남아서 오히려 더 갈증이 납니다. 그리고 그 당분과 소다성분이 합쳐져서 이를 썩게 하고, 위장을 거북하게 하며, 몸의 건강을 해칩니다. 이런 것들이 점점 알려지고 강조되면서 조금만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알아서 소다를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청량음료라는 착각에 속아서 들이키게 되면 결국은 건강을 상하게 되겠지요.

 

소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의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 여기면서 좀처럼 끊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 성공, 명예, 권력, 섹스, 도박, 게임, 쇼핑....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착각하면서 추구하고 중독되고, 가족을, 건강을, 사랑을 희생하고 포기하면서 나아가지만 결국 남는 것은 소다처럼 우리의 영육간의 건강을 헤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 - 사마리아 여인 (목마른 영혼의 대표적 인물)

사마리아 - 유대인로부터 외면, 남편이 다섯 -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

가장 뜨거운 정오,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 날마다 와서 그 날 먹을 물을 길러 먹는 인생

내일에 대한 소망도, 변화에 대한 기대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지, 살기 위해 겨우 또 우물가에 온 여인.

 

그녀가 길러 먹는 그 물을 달라하신 주님 - 성육신 하셨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경험하시는 분. 그 맛을 본 후에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요 4: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오늘 본문 이사야 55장

이사야 55장은 바벨론 포로기때 쓰여진 내용입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가? 형식적인 예배는 있었지만 산당에서 제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며 선지자들의 예언을 무시...

단지 예루살렘 성전만 있으면 자신들은 안전하다 생각.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모습은 황폐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탔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기구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을 떠났고, 조롱했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외면했고 죽였습니다. 자기들의 환경이 나빠질 수록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고 바알에게로 아세라에게로 더 향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애가 타도록 또 말씀하십니다. 미워하지 않으시고,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지기 품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오호라.... 통곡의 소리이고 탄식의 소리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떠나 있으려냐? 너희가 지금 힘이 들지 않느냐? 목 마르지 않느냐?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느냐?

 

돈 없어도 된다. 내가 주는 은혜는 값없이 사는 은혜다. 값없지만 영원한 은혜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은혜이고, 너희를 살릴 은혜이다.

 

 

  •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2A)

그들이 추구하는, 목말라서 얻고자 하는 그런 세상, 그런 물질, 그런 정욕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2B) "내게 듣고 들을 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그런데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배고파질, 또 목마를 것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투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내 영혼을 채우고, 내 영원을 책임질 말씀을 위해서는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또 배고파지고 목말라지는 헛된 것에 네 물질과 에너지를 다 쏟아붓지 말고, 내게로 와서 듣고 또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사 55:2)

 

  • 다윗과 솔로몬

다윗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어린 목동일 때부터 그의 직업은 양을 치는 것이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목동에서, 궁중의 노래하는 자로, 군대의 장군으로, 때로는 도망자로, 그리고 왕으로 인생의 여정을 따라서 자주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는 그의 유일할 삶의 직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복은 바로 이 다윗에게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가 되셨으며 그로 하여금 어느 상황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그를 푸른 초장에서 쉬도록 평안을 허락하셨고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시편 23장)

 

그것이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하나님의 보장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나라까지도 정복하고 그를 찾아와서 도움을 받아가도록 그의 인생을 축복했습니다.

그의 왕권을 영원토록 보장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왕국이 보장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다." (사 55:3-4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자의 삶을 하나님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토록 보장하십니다. 그를 만민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바로 솔로몬부터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곧 1천여개의 산당을 세워 성전을 지은 헌신을 다 까먹습니다.

 

전도서:

 

[전 2:9-10]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지혜자의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결과물이다.)

 

지혜자와 우매자

[전 2:13-16]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지혜자의 수고의 헛됨

[전 2:18-21]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르호보암)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윗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의 자랑 - 오직 하나님)

솔로몬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의 자랑 - 그의 지혜와 수고의 열매)

 

  • 왜 믿는 자들이 믿음에서 넘어지는가?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고 외면....

우리도 언제 신앙의 슬럼프가 오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 믿음대로 되지 않을 때

-> 하나님을 내 믿음 안에 가두지 마라. 그는 항상 내 생각보다 크신 분이다.

 

  • 하나님의 말씀

[사 55:10-13]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의 말씀은 결코 그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결코 낭비하지 않으신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누군가에게, 그 말씀을 믿는 누군가에게, 그 말씀에 두려워 순종하는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보낸 일- 우리의 사명 가운데서 형통, 즉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잣나무가 가시나무를 대신하고, 석류꽃이 찔레를 대신할 것이다.

 

반대로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가시나무가, 찔레꽃이 피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것이다.

 

  • 결론

아직도 청량음료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고 믿으며 세상에서 주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갈급해하고 있지 않은가?

 

[시 130:1]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5-6]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1:1-2]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예화)

정말로 공부를 좋아했던 두 사람 - 이희구 교수, 임성욱 교수

 

이희구 교수 - 그냥 공부 자체를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그 선배가 한 번 제게 와서 한 말씀 - 자기가 그렇게 공부를 좋아해도 성경을 읽을 때보다 더 기쁜 적이 없다. 내 마음에 평안을 준 책이 없다. 나는 책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하지만 성경은 단지 책이라 말할 수 없다. 행복을 넘어 나에게 표현할 수 없는 신비와 생명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관계를 맺게 한다. 다른 책은 한 두 번 읽으면 이해가 되고 파악이 되지만 이 책은 봐도 봐도 더 새롭고 더 알고 싶고 그러면서도 또한 친숙하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예수, 쉼을 주시다. (마 11:28-29)

 

현재 정치 사회적인 이슈는 일본과 한국의 대립.

그 이면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극우세력의 득세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 일대에도 일고 있는 극우운동. 영국의 유럽 연맹 탈퇴, 스페인, 오스트리아....

 

최근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 개종자들에 의해서 바울이라든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조명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 때 쓰여진 "열심"이라는 단어 - 단지 사도바울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해석

그런데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열심이라는 단어는 단지 개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파의 한 그룹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종의 행동강령이었다. (툼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

 

  • 바리새파의 두 그룹

1) 힐렐: 온건파, 공생공존, 로마 및 이방인의 치리 인정. 가말리엘, 방임주의. 기독교 운동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라면 반대하지 말고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2) 샴마이: 과격파, 열심당. 율법 자체가 이방인의 치리를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열심은 단지 기도나 경건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칼을 휘둘러서 드러내는 태도이다. 시카리(단도)- 이스캐리엇

이교도들을 단번에 패배시키거나 변절한 유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멸절시킬 혁명에 대한 열심

몸에 로마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협조하는 새리나 정치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단도를 지니고 다닌 사람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재건, 로마에서 파견된 헤롯이 차지하고 있는 성전을 탈환하는 것.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

 

예수 열 두 제자들의 대다수도 이 열심당원으로 여겨짐. (열심당원 시몬, 우뢰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형제, 예수님을 잡아가고자 했던 마고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 그리고 가룟 유다 (영문 이름 Juda Iscariot- 사카리라는 단도의 의미- 열심당원을 상징)

그들은 단지 갈릴리 출신의 촌사람 어부들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나라를 위해 칼을 지니고 다녔던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열심있는 행동파 사람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열심당원들을, 또한 열심당원의 행동대원 격이었던 바울을 만나 그들의 열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이스라엘의 재건, 성전의 탈환-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서도 그들이 꿈 꾸었던 완성된 세계)

그런데 그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려 너무도 무력하게 죽어간 예수....

 

이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11장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어떤 수고이고 어떤 짐인가?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열심, 때론 반대파를 숙청하고 목적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제거하는...

그런데 그렇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 로마라는 벽, 헤롯이라는 벽,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

 

마태복음 11장 - 요한-> 예수께로 관심이 옮겨 감.

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 이 - 메시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왕으로 오시는 이, 선지자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이끌 인도자. 리더.

 

그들이 힘썼던 열심, 열정 - 외부를 바꾸기 위한 열심.

나라를 바꾸고 성전의 주인을 바꾸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 나의 멍에를 메라

멍에는 짐을 지거나 밭을 갈기 위해 메어 놓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주인이 뒤에서 움직여야 작동하는 것이 멍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매는 것은 주인과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이 가시는 대로 가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멍에를 메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 멍에나 메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약한 자의 멍에를 매면 나도약한 자가 됩니다. 무지한 자의 멍에를 메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악인과 멍에를 메면 악한 자가 됩니다. 오직 주님의 멍에를 맨 자만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온유와 겸손

이 말씀은 두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멍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3)

 

주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멍에를 메고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면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도 , 공부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양들 섬기는 일도, 제자양성 하는 것도, 세계선교 하는 일들을 내가 하려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오히려 힘이 됩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라는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무엇을 배웁니까? 그 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멍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 그것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의 성품, 온유와 겸손.

 

온유란 단지 착한 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착한 심성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온유는 들판에서 내 맘껏 다니던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어지는 것이다.

 

길들어진 야생마가 바로 온유함의 뜻이다. 무엇에 길들여져야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다.

 

성경에서 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라로 칭함을 받은 자가 누구인가?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

 

왜 그가 가장 온유한 자인가? 바로 말씀으로 훈련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자기를 꺾고 말씀을 따르는 자요,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의 반대를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한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누가 온유한 자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귀를 기울이는 자, 바로 겸손한 자이다. 길들어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결코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이 온유함과 겸손을 보여 주셨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겸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온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온유와 겸손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이다.

 

[왕상 19:9-10]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어느 때인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를 죽이고 무언가 상황이, 나라가, 이스라엘이 변할 줄로 기대했다가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이세벨이 위협하며 달려들자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

 

열심이 유별하오니- 마치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 다른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오직 굴 속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모습만....

 

그 때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

로뎀나무 가에서 그를 쉬게 한 후에

호렙산으로 인도해서 그곳에서 그와 교제하시는 장면.

 

즉 말씀과 쉼이 있는 삶.

 

창조) 혼돈과 공허-> 그곳에 말씀이 임하여 빛이 있으라 하면서 창조의 사역.

창조의 사역은 곧 말씀의 사역-> 그 열매로, 결과로 얻어지는 것-> 쉼과 안식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여전히 끝없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짐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무거워지고 있는 삶을 살진 않는가?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는가? 주님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가 원하는 데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이 목자 되신 삶은 쉼이 있는 삶이다. 열매가 있는 삶이다. 그 열매는 외부환경과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떤 땅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이다. 주님이 약속하시고 통치하시는 땅이다.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복되다. 주님이 경영하시는 땅이 바로 천국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26 09:13

    온유와 겸손에 대해 생각해보며,
    제 신앙을 다시한번 점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2. 김지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27 09:23

    저도 부족한 목사입니다만
    진실로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 큰 은혜를 받는답니다 귀하신목사님 늘 건강 하시고 건강하십시오

    •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9.08.31 17:38 신고

      참 어려운 시기에 주의 길을 함께 가는 동역자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사역 위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막히지 않고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주 안에서 승리하세요^^

더 확실한 예언 (벧후 1:12-21)

 

외적 고난 이후 찾아온 내적 혼란의 교회의 시대 - 베드로 사도가 내놓은 믿는 이의 힘쓸 일은 크고 보배로운 예수의 약속을 믿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 위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힘쓰며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 것.

 

예수를 아는 것-> 예수를 경험하는 것->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하는 것 ->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

-> 예수님이 통치한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예수 닮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 예수를 닮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외적 환경이 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은가!

 

베드로의 고백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12) -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왜?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3절)

외적 핍박의 시대에 그 핍박을 벗어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예수한테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영화 쿼바디스

로마에 거하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베드로가 핍박을 피해 로마를 벗어나려고 할 때 예수의 환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시오리까? (쿼바디스 도미네)

나는 네가 버린 내 양들을 위해 로마로 간다

-> 이 말을 듣고 통곡하며 다시 로마로 들어가 결국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난 예수와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 말하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장면.

 

베드로가 죽기까지 힘썼던 사명

- 12: 너희가 이것을 알고 (예수의 성품에 들어감을 통해 그의 통치-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미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무엇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열매맺는다.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곧 실족하는 것이요 게으른 것이다.

 

  •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Witness- 증인)라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 왜 이 말을 썼을까?

 

(사도행전 1장 6-12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12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관심 - 이스라엘의 회복

그들의 관심 - 주님 부활 하셨는데 내 형편은 왜 똑같아요? 우리 생활은 언제 나아져요?

그거 알바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 성령받고 증인되라

1. 복음의 전도자가 되라

2. 성령받고 예수를 나타내는 자가 되라. 예수의 성품을 통해 예수가 너희를 통해 살아있음을 증거해라.

 

그리고 승천

이 때 흰 옷 입은 두 천사의 말 -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마 24: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 이 말을 토대로 예수의 강림을 기다렸다.

무슨 기대를 하고? 예수가 오시면 예루살렘이 회복될꺼야.

내 형편이 나아질꺼야....여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환경만 변하기를 바라보고....

 

처음엔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가 왜 안오나? 언제 재림하시나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해석

->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환경)의 회복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말을 바꾸니까 교묘히 만든 말이다. 합리화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며 실망한 자들이 비난한다.

 

주 예수의 능력 - 3절의 그의 신기한 능력

그를 앎으로, 경험함으로 임하는 은혜와 평안. 우리 안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일어나는 것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스도의 강림이다. -> 주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는 것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를 친히 본 자다.

그가 세례를 받으시고 변화산상에 오르시고 - 주의 권능과 영광을 직접 경험 한 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의 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직접 만진, 직접 경험한 제자의 말 - 그 당시 가장 큰 권위

 

그런데 베드로는 직접 예수를 경험하고 만진, 수제자의 그 경험보다 더 믿을 수 있고 확실한 예언을 소개한다.

 

19절을 다같이 읽어보자.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샛별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할 때까지

우리의 어두운, 불확실한, 불완전한 심령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듯이 예수의 성품이 내 마음을 채울 때까지

베드로의 경험, 요한의 경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라.

 

[시 119:97-10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각 절마다 표현된 더 확실한 예언 - 주의 말씀, 주의 계명, 주의 법, 주의 증거, 주의 규례, 주의 법도

그 말씀의 능력 - 원수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노인보다 뛰어나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 읽다보면 주께서 친히 날 가르치신다.

 

[시 119:105-107]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루 아침에 될까?

아니다. 주의 하고 결단하고 굳게 정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어릴 적 - 내가 7살 때 어머니가 예수를 영접

피부도 고치고 기도도 하고 기도원이란 기도원 따라다니기 시작

삼각산, 오산리,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귀신 쫓는 사람, 치유의 은사.... 정말 능력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언 받고, 능력자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그런 사람들- 신령한 세계에 눈이 떠짐

그런데 하나님같고 완전할 것 같은 그런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도 또 넘어지고, 타락하고, 음란을 행하고....

 

기도가 다가 아니구나. 말씀이 없는 기도는 반드시 타락한다.

기도원가서 은혜 체험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무리 읽으려 해도 읽어지지 않는다.

작정하고 댐벼도 창세기 출애굽기 떼고 레위기 넘어가면서 부터 무너지고...

신약은 복음서 겨우 읽고 로마서 가면서부터.....

말라기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에스겔까지 오면 걸려 넘어지고

요한 계시록 읽다가 포기하고

 

결국 신학교 가서야 작정하고 통독하기 시작

 

그래도 말씀이 꿀처럼 달지 않았다. 숙제였고 부담....

 

더 읽어야지, 더 기도해야지....

 

봉쇄 수도원) 28년간 수도원 생활하던 수도사 - 개신교 목사님 처럼 많이 말씀읽고 기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늘 넘어진다. 기도가 적어서? 말씀을 않읽어서?

삶에 대한 훈련이 없기 때문....

 

전환점 - 어떻게 삶을 훈련할 수 있을까? 영성을 전공하게 된 계기

 

영성을 공부하면서 깨닫고 얻었던 가장 큰 유익

1. 성경은 공부하고 Master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과 연애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과서 - 한 번 떼면 다시 보지 않는다.

성경- 매일 읽는다. 왜? 이해하려고가 아니라 교제하기 위해서, 만나기 위해서다. 동행하기 위해서다.

 

2. 말씀과 기도는 하나다.

말씀을 읽는 것이 곧 기도요 기도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말하고 말씀을 통해서 듣는다. 때로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과 상태를 아뢰고 기도를 통해서 듣는다.

 

어떤 낙심이 오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말씀이 날 일으켰고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 속의 폭풍우가 잠잠해졌다.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에 말씀이 들리게 하였다.

 

[벧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귀에 걸면 귀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가 절대 아니다. - 말씀의 진리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라. 개인의 해석에 따라 그 진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고 역사하는 진리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말씀이신 주님을 알고 경험하며 그 주님을 닮고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리도록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런데 그 약속은 또한 우리의 참여, 결단, 의지, 동참이 필요하다.

그래서 베드로의 사명은 사람들이 다른 교사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흔들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와 권면을 통해 그 들 자신 안에 거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님을 생각하도록, 느끼도록, 관심 가지도록, 그 안에 예수의 강림이 일어나심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도 목사로서 여러분 안에 이미 성령님이 계심을 생각나게 하는 다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여러분 안에도 있기 때문에

서로의 삶 안에서 그 예수가 어떻게 다르게, 또한 연합하여 역사하는지를 서로를 바라보며 기뻐하기를 원한다.

 

마 24장 4절부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때 - 산으로 올라가라, 산: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 골방

23절 - 믿지 말라, 그들이 혹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조지폭스 - 퀘이커의 창시자

영국 기독교사에서 가장 혼란스런 종교적 혼란기

스승을 찾아 헤메던 자

그러나 아무에게서도 해답이 없고 위로받지 못했는데

어느날 자기 내면에서 빛의 소리를 듣고, 우리는 그 내면의 소리를 성령이라 말하지만....

 

그 때의 교회를 뾰족탑 - 서로 높이 지으려고 교회를 통해 힘과 권력과 성공을 추구하던 교회

설교도, 찬양도, 모든 교회의 예식을 다 치우고 오직 침묵을 통해 자기 안의 성령의 소리를 듣고자 해서 생긴 교단.

퀘이커 - 그렇게 침묵 속에서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하면서 몸이 흔들리고 깨닫고 말하게 하심.

 

교회 혼란기에 극단적 해법

그런데 결론은 바깥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지 말고 샛별이 네 안에 떠오르기까지....

 

이렇게 말하면 어렵다고 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고 죽도록 때려 가며 나만 믿고 따르라고 하면 다 내어버리고 넘어가는 세상....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9.11 17:50

    샬 롬^^
    오랜만에 들어와 말씀으로 교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