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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강을 건너자! (여호수아 3장)

 

구약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 - 출애굽 사건


애굽에서 430년간의 종살이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죄인의 상태

출애굽 - 거듭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광야 - 훈련 (성화)

가나안 - 영화 (열매맺는 삶)

 

출애굽 할 때 건넜던 강 - 홍해 (세상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 세례

- 죄에 죽고 예수로 사는 삶

- 일회적 사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건너는 강 - 요단강

-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 광야: 성막과 십계명 (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훈련) 예배와 말씀

- 그 신앙생활을 거쳐 드디어 신앙의 열매를 맺고 추수하는 땅 - 가나안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는 땅)

- 성령세례, 성령 충만, 성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될 수 있는 사건)

 

요단강 -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취하기 위해, 열매맺기 위해, 추수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땅.

우리 힘으로 건널 수 없지만 동시에 반드시 힘을 써서 건너야 하는 땅

 

어떻게 이 강을 건널 것인가? (여호수아 3장을 통해 어떻게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요단강을 건널 것인가?)

 

  • [수 3: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수 6: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수 8:10]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 아이성을 정복할 때도

여호수아 - 새벽을 깨우는 자

요단강을 건너기 전 그는 자신을 건넌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전 그는 자신을 먼저 깨뜨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을 것인가?

몽상을 하는 자는 밤을 새우고 비전을 품는 자는 새벽을 깨운다. 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이다.

신앙의 열매를 맺고 싶은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싶은가? 새벽을 깨우라. 일어나서 가장 먼저 기도하라. 가장 먼저 찬양하라. 가장 먼저 말씀을 보라.

[시 57: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에.....

 

  •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민 25장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여인들과 음행하던 곳 - 가장 기억하기 힘든 죄악의 땅, 실패의 땅, 그 싯딤을 떠나기 위해 새벽을 깨우고 새벽을 깨워 싯딤을 떠나는 것이다.

 

 

  • 2절: 사흘 후에- 신앙은 계속적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사도바울 처럼 날마다 죽지 아니하면 또 넘어지고, 불평하고, 절망한다.

기도해서 응답이 없는가? 기도는 내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기도의 생각, 말씀의 생각이 내 삶 전반을 지배하도록 두루 다니는 것이다.

위에부터 영이 임할 때까지 전혀 기도하라. - 500여명 -> 남은 자 120명 - 성령의 은혜를 맛본 자.

요단강 - 기다림. 여리고성 - 조용히 하라. 불평하지 말라.

 

  • 3-4절 : 거리를 두고 언약궤를 따르라.

홍해를 건넘 -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라.

요단을 건넘 - 제사장들을 언약궤를 메고 이천 규빗 거리를 두고 따르라.

거리를 두라 - 너무 가까이 하지마라.

성경이 말하게 하라. 내 중심으로 해석하지 말라. 완전히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 -> 거리를 두고 말씀을 읽으면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하신다. 행할 길을 알게 하신다.

 

  •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5절)

성결은 무엇인가? 자기가 따르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 자신에게 말씀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자신을 맞추는 것 -> 성결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 지는 것 -> 성결

그러면->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언제? 새벽을 깨워 하나님 앞에 집중한 후에 말씀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자신을 성결하게 하면 ->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

 

그리고 언약궤가 앞서 건너고 백성이 따라 나아가니 어떤 응답이 주어지는가?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기적 - 우리를 성결케 하는 것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실재로 우리가 죽고 말씀 따라 살았더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이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지만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시는 그릇은 어떤 그릇? 깨끗한 그릇. 성결한 그릇

 

  • [수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홍해를 건널 때 - 모세가 지팡이를 물에 대자 물이 갈라짐. 갈라진 물 사이로 모세와 백성들이 건넘

요단강 - 물은 그대로이다. 그런데 언약궤를 맨 제사장으로 하여금 발바닥으로 요단강의 물을 밟으라 한다. 살짝 가져다 데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 - 네 명의 제사장이 함께 메야 한다.

네 명이 함께 물을 담구어야 한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두려울까?

그들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을 하기만 해도 적군이 벌벌....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발을 담굴 수 있는 근거 - 믿음.

 

금요일날 신명기 -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서서 겁내지 말라. 두려워 말라. 떨지 말라. 놀라지 말라.

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함으로....

왜 물 위에 올라 설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런 확신이 있는가? 이런 믿음이 있는가?

 

[수 3:15-16]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가장 물의 양이 많고 셀 때

물가에 발을 잠그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고 한 곳에 싸임.

 

(1) 구원받을 때를 기억해 보자.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삶은-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구원받는 믿음이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믿음, 열매맺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이다. 물위에 발을 잠그게 하는 믿음이다.

 

이기고 싶은가? 열매맺고 싶은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싶은가?

하루의 시작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라. 세상의 것, 세상의 말들을 경험하기 전에, 세상을 향하여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그 분께 찬양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으라.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 삶을 살라.

그리고 믿음으로 발을 내딛으라.

 

히브리민족: 핫비르라는 말에서 유래 - 강을 건넌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두 번의 강을 건넌 자들이다. 하나는 홍해의 강, 하나는 요단강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서 이미 홍해를 건넌 자들이다. '

그러나 우리가 건너야 할 또 다른 강이 있다. 바로 요단강이다.

홍해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건너게 하셨지만 요단강을 건널때는 우리의 행함이 필요하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난 우리 로고스 성도들이 이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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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에 빠져 버리자. (겔 47: 1-12절)

 

오늘 설교의 본문은 에스겔 47장이지만 에스겔 47장을 들어가기 전 요한복음 7장 37-38절의 말씀을 먼저 살펴 보고 나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장 - 한 명절(초막절)의 시작과 끝을 다루고 있는데

  • 2절 -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1-13절 - 그의 집안 형제들조차 예수를 믿지 않음 (5절)

 

  • 14절 - 명절의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니

-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 결국 죽이고자 하고 (25절) 잡으려 함 (32절)

 

  • 그리고 나서 37-38절 명절 끝날, 곧 큰 날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그 생수의 강이 무엇인가? 다음 구절 설명을 하지요

바로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 (39절)

 

  • 즉, 예수를 믿는 다는 것 - 육신적으로 가깝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도 믿지 못한다.

또한 율법을 지킨다고 믿을 수 있는 것 아니다. 지킬 수도 없지만 지킨다고 해도 주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려 한다. 즉,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처럼 지식적 동의나 수련의 결과가 아니다. 오직 무엇을 통해서 믿는가? 성령을 통해서 믿는 것이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결국 아버지의 영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 자 -

37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누구든지 가족이 아니어도, 바리새인이 아니어도, 아무런 조건이 없다. 차별이 없다.

못배워도, 가지지 못해도, 잘났거나 못났거나....아니 오히려 잘 난 사람들은 그 잘난 것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부르시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고자 하는 자 누구든지

  • 목마르거든 - 목적어가 없다. 처음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목마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목마르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 나왔다가 예수를 만난다. 어떤 이는 사람 만나러 나오고, 어떤 이들은 밥먹으러 나오고, 어떤 이들은 외로워서 나온다. 주님은 그들의 동기를 탓하지 않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수께 나오는 자, 그 마음을 열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 - 그들에게 생수의 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께 나와서 떠나지 아니하면, 몰라도 참고, 어려워도 참고 떠나지 않는 자, 끝까지 남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생수의 강, 성령
  • 어디에? 그 배에 koiliva (코일리아) - 배->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 영혼, 심령

 

성경에 이름과 같이- 여기에서 나온 성경에 나온 것 같이가 가리키는 구절 - 에스겔 47장

 

[겔 47:1-5]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 - 바로 성령

천척- 약 500M

처음에는 스며나오는 물이 천척을 지나니 발목까지, 또 천척을 지나니- 무릎까지, 또 천척을 지나니- 허리까지

 

성령이 임재하는 단계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여러분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던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신다.

  • 스며나오던 물이 발목까지 찰 때 -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는 단계

- 그런데 나는 내가 가고 싶은데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은혜는 받지만 내 삶은 내 마음대로...

  • 발목까지 찼던 물이 무릎까지 찰 때 - 더 큰 은혜를 맛볼 때, 내 삶의 길을 걸어갈 때마다 말씀을 기억하게 되고, 때론 그 말씀이 걸림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삶

- 은혜는 받지만, 내 삶에 적용도 해 보지만 잘 고쳐지지 않고 여전히 내 뜻대로...

  • 허리까지 찰 때 - 신앙의 가장 힘든 시기

- 내가 가고자 하는데 물이 허리까지 차서 좀 처럼 내 맘대로 갈 수 없을 때

풍랑을 건너는 제자들 - 물결을 거슬르기 때문에 만나는 고난,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고, 내 본성을 거스르고....말씀과 내 삶의 패턴이 자꾸만 부딛치는 단계..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연단기이지만 영적으로는 비로서 내 뜻을 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전환되는 단계, 그 은혜를 거스르면 거스를수록 점점 힘이 드는 단계

  • 그리고 다시 천척 - 내가 건너지 못할 강 - 내 힘과 뜻대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 나를 압도하는 은혜

 

그런데 그 단계가 되면, 아니 그 단계가 되어서야 비로서 일어나는 일

  • 6절-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겪었느냐? 이젠 너를 포기했느냐? 십자가 앞에서 온전히 죽었느냐?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시기로

  • 7절 - 내가 돌아가니 (내가 건널 수 없는 강을 돌아가서 그 건너편을 보았더니...)

->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은지라. (생명이, 열매가 풍성하게....언제? 허리를 넘어 그 물이 나를 온전히 삼겼을 때에...)

-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을 것이다. 그 고기가 각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을 것이다.

- 언제: 성령의 은혜가 발목을 넘어, 무릎을 넘어, 허리를 넘어 나에게 흘러 넘칠 때에, 내 뜻을 버리고 온전히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실 때에...

 

  •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바라로 내려가서 (8절),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10절) - 사해바다 주변지역들
    • 사해 (Dead Sea) - 염도가 너무 높아서 어떤 고기도, 생물도 살 수 없는 바다
    • 해발 -450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곳) - 물이 유입되긴 하지만 흘러 나갈 출구가 없기 때문에 고여있다가 소금으로 증발
    • 보통 바닷물의 염도가 5%인데 사해바다의 염도 - 30%가 넘는다.
    • 예루살렘 성전 - 서쪽 끝 (가장 높은 곳) -> 동쪽 끝 - 사해바다 (가장 낮은 곳)
    • 가장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낮은 자의 몸을 입어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 - 구원. 그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가장 낮은 우리 영혼 안에도 은혜가 임한다. 죽은 영혼이 살고, 열매가 맺히고 고기가 산다. 생명이 주어진다.

 

  • 사해 - 유입되는 물이 있지만 나가는 출구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죽은 바다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명절 끝날, 곧 큰날- 바로 지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큰 데 왜 자꾸만 마르는가? 왜 계속 목마른가? 은혜는 받는데 출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디다가 쓰는가? 우리 삶의 열매라고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자기 일, 자기 만족, 자기 목적만을 이루려고 하지 않은가?

수돗물을 강하게 틀고 작은 간장종지기를 들이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종지기에 물이 부딪치며 하나도 안남고 다 밖으로 물이 튀겨 나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는 태도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밑에 앉아 내 작은 텀불러 들이밀면서 물 받으려는 신앙. 다 튀겨 나가버리는 신앙.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무엇을 예언하고, 어떤 환상을 보고, 어떤 꿈을 꿀까?

좋은 직장 들어가는 예언? 복권에 당첨되는 꿈? 좋은 사람 만나는 환상?

아니다. 하나님의 일, 세상을 구원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꿈, 환상, 비전

 

  • 왜 성령을 받은 우리가 여전히 은혜에 목마를까?

혹시 발목에 젖은 성령의 은혜에 이게 은혠가본다 하면서 여전히 내 맘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릎에 찬 은혜를 맛보며 더 큰 은혜 맛보면 내 맘대로 못살까봐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허리까지 찬 성령으로 인해 힘들다고 불평하면서 신앙생활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은혜는 아무리 맛보아도 내 맘대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주위에 어떤 열매도, 생명도 없다. 그냥 맛만 보는 것이다.

그 성령이 내 속에서 넘쳐서 흘러 넘칠 때에 생수에 강이 내 심령을 차고 넘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할 적에 그 은혜는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죽어 있는 곳을 살리고 죽은 영혼을 살린다.

 

은혜는 받는데 출구가 없이 간직하려고만 하지 않는가? 은혜를 주고 또 주어도 사해 바다처럼 수증기로 다 날려버려 아무런 생명도 살지 못하는 죽은 은혜, 헛되이 받는 은혜가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는 그것을 흘려 보내는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 성령의 통로로서 사용되고 있는가?

 

  • LA에서 목회하는 갈보리 선교교회 한천현 목사 간증
  • 남녀 호랑개교 열심신도였던 개그맨 조혜련 간증

 

생수에 강에 빠져 버리자.

지난 주 시간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이 구원이라면 내가 그 십자가에 달리는 것 - 제자되는 삶, 그리스도가 주인되는 삶- 그 은혜가 나를 넘쳐 주위에 흐르게 하자.

 

에스겔 47장 - 생수의 강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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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살게 하는 것"

 

갈라디아 - 나라명이 아닌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닌 선교지역이 포함되는 넓은 지역을 칭호

 

이 서신서는

  1. 로마서 다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 (이신칭의)가 자세히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2. 다메섹 도성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나서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도자로서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열심있는 유대교인으로서 예수 및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였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 가족이나 혹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로 부터 검증을 받고자 하지 않고 호렙산이 있는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을 유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16, 17절)

 

체험-> 훈련 및 교제를 통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 이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나 십오일을 만나면서 역시 야고보를 만나 교제하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18, 19, 24절)
  • 그리고 나서 바나바 및 디도와 함께 이방인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14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이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수장이었던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 등을 만나 자신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증거자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리고 교제하게 된다. (2장 1-10절까지의 내용)

 

그리고 나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거꾸로 베드로가 바울과 및 바나바가 사역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에피스도를 다루고 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신앙적인 측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건을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게바가 마치 선교지를 방문하듯 바나바와 바울이 사역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에 왔다.

안디옥 교회는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호칭하던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이다.

1차 전도여행의 Base Camp가 바로 안디옥교회이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기대가 되는 모습으로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 교회에 방문한 목적
  1.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 탐방
  2. 구제헌금을 얻기 위해서.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사도행전 11장 -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헌금을 얻기 위해서...

 

[행 11: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본부교회가 선교지 교회를 돕는 것인데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보면 오히려 선교지 교회가 본부 교회를 돕는 역선교...

복음의 전파와 구제 및 선교는 항상 같이 가는 것 -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에 구제와 선교가 함께 진행됨.

 

1차적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온 헌금을 받고 지금 다시 교회를 방문하여 얻고자 하는 장면

 

  • 식사 만찬에서 일어난 사건

베드로가 방문하여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 및 안디옥 교회 사람들과 식사 - 당연히 그 식사 시간에는 안디옥의 성도들인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을 것이다. 아니 그림을 그려보면 아마도 그들 이방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초대되어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식사 중에 다시금 야고보 일행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면서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자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 및 함께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식사자리를 피한다. 왜?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절에 보니 베드로가 떠난 이유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 중에도 여전히 이방인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는데 베드로가 그들이 두려워 식사를 하는 도중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한 명만 슬며시 자리를 피했으면 눈에 띠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13절에 보니까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다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라고 전한다.

 

지도자 한 명이 외식하니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따라 한다.

바울을 이끌고 안디옥 교회를 개척했던 바나바 역시 식사 자리를 슬며시 피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외식"이라 명한다.

 

위선은 헬라어로 "히포크리시스" 가면을 쓰다. 조작하다의 의미다.

이것은 주로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꾸짖을 때에 그들을 지칭한 말이다.

마태복음 23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한 장 전체를 할예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를 일곱번 반복해서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 그러한 위선자들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런데 누구보고 지금 위선자라 하는가? 베드로보고, 바나바보고

11절에 보니까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느니라"

 

예수의 수제자. 그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이젠 성령 받고 과거의 연약한 모습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하루에 삼천명씩 세례를 받게 했던 베드로가 이런 위선의 모습을 띄게 된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바울을 인도하여 사도들에게 그의 회심을 보증하며,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이방선교에 앞장 섰던 바나바가 자기 교회 성도와 식사하다가 베드로와 더불어 그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만 이러한 일들이 있는가?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난 얼마나 많은 순간 말씀을 증거하다가, 기도하다가 이러한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절망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지 아니한가? 베드로처럼, 바나바처럼 믿는 자로서 이런 부끄러운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는가?

 

예수를 믿는 것.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통해 내 모든 죄와 허물이 사해지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아무리 죄가 사해졌어도 매일 같이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또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천국가기 전까지 비신자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그 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예수가 지신 십자가에 나도 못 박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 닮고자 해도 우리의 본성은 참 바뀌지 않는다.

성경 읽고 기도해도 나라는 인간은 잘 바뀌어지지 않는다.

베드로처럼 어떤 상황이 오면 우리는 비겁해지고, 가면을 쓰고, 외식하며,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

 

내가 변해서 예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가 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이다.

 

우리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풍랑이 일면 금방 흐트러진다. 지난 주 말씀처럼 풍랑이 일면 예수가 보이지 않고 우리 영혼은 어둠에 빠지게 된다.

그 때 어떻게 우리를 극복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내 안에 사는 예수가 살게 하도록 주님 바라보는 것이다.

 

  • 내 안에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화가 올라올 때, 참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살면 문제가 발생하니까 나를 십가가에 못박고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살도록 나를 죽이는 것이다.

 

  •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도저히 못하니까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이 내 삶을 살도록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 내 안에 탐심이나 음란함이나 죄악된 감정들이 올라올 때 그것과 싸워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께서 나를 살아달라고 기도하여 내어 드리는 것이다.

 

  • 반대로 내 안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나 혼자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쁜일 내어 드리면 감사하며 기뻐하면 절대로 교만할 수 없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 챌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죽이고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들려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넘어진다.

화가 올라오고, 잘못된 생각들이 올라오고, 낙심하게 되고, 음란하게 되고, 어떻게 내 안에 이런 모습, 이런 생각이 생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우리가 주님을 놓치면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내 삶을 인도하시니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학생 하나가 나에게 묻기를 "왜 그렇게 기도하시고, 왜 그렇게 성경에 집착하느냐?"

기도하지 않으면 또 외식하는 나, 범죄하는 나가 드러나고 말씀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늘 우왕좌왕 흔들리는 나이기에 나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살기 위해서는 그 분께 기도해야 하고, 나로 살지 않고 그분께서 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뜻과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양을 하는 것도 아니다.

변할려고 애쓰지 말라. 내 힘으로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바리새인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자다.

왜? 우리 안에는 분명히 예수가, 예수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을 분별하고 맡기기 위해서 말씀으로 기준삼고 기도로서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의 일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에 드러날 것이다. 내 한계 안에서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한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저와 우리 로고스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린다.

 

십자가의 삶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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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려던 땅 (요한복음 6장 16-26절)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가장 큰 표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루고 있다.

이 표적은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표적 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 혹은 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사건의 의미를 6장 전체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 분의 보혈의 은혜로 잃어버린 즐거움을 회복시키시는 사건이라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말미암아 굶주려버린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늘의 만나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공급하시는 생명의 떡 되신 주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과 그것에 대한 설명 사이에서 또 다른 표적의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바로 오늘 다룰 오병이어의 현장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폭풍우를 뚫고 가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표적은 오병이어 표적 안의 또 다른 표적, 오병이어의 의미를 완성케 하는 표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는 몇번에 걸쳐 했기 때문에 오늘은 오병이어의 표적 안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 오병이어 사건 이후 백성들의 반응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 선지자 -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 그리고 그 분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그 이유를 26절을 통해 밝히고 있다.

 

26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으실 십자와 부활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 분이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위해서 표적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찾는 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다. 그리고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라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와서까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무리들과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 제자들을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보내시고 (마, 막 -> 즉시, 제촉하사) -> 무리들에게서 이들을 떼어 놓으심
  • 무리들을 보내신 다음
  • 자신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심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백성들이 예수를 왕 삼고자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껏 의기양양하고 들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 주님께서 급히 그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탔고 바다를 건넜다.

 

떡을 먹고 배부른 그 땅에 좀 더 머물면서 그 날의 은혜를 나눌 수도 있는데 주님은 급히 제자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다.

문제는 주님의 이 명령 이후에 나타난다.

 

말씀따라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를 만난다.

 

주님의 길을 가는데 왜 어려움을 만나는가?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는다" (17절)고 성경은 전한다.

어두웠다는 것은 영적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이다. 영혼의 깊은 밤이 임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혼은 밤을 맞고, 예수는 보이질 않고, 바다에는 풍랑이 인다.

내 맘대로 가다가 맞게 되는 풍랑이라면 불순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가라해서 가는데 풍랑이 일고, 주님은 보이질 않고, 영혼은 침체된다.

단 한 번만의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말씀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는데 기근을 만나고, 말씀따라 홍해를 건넜는데 광야를 만난다.

 

이 풍랑을 만난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항상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풍랑을 만나는 사건은 누가 당하는 사건인가?

제자들만 만나는 사건이다.

 

  • 배에 타지 아니한 다른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바다 건너 편에 서 있던 무리-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
    • 그들이 목격한 것 - 가버나움으로 가는 배는 단 한 척 - 예수는 타지 아니한 것을 보았음
    • 아침이 되자마자 그들은 다시 오병이어 현장으로 달려간다. 왜 그리로 갔을까? 또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기 위해, 다시 말해 또 다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그 현장을 갔을 것이다.
    • 그런데 그 현장에 가 보니 예수도 없고 제자도 없다. 예수를 찾아 무리가 배를 타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간다. 그 곳에 가니 제자들도 있고 분명이 같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예수도 그 자리에 있다.

 

-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25절) 아니 어떻게 언제? 분명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 그렇게 예수 찾으러 온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0절) 하면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더라"(66절)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니 영생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과 상관없는 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워줄 신이다. 그게 예수이건, 아니면 다른 신이건 그들은 당장 그들을 배부르게 해 줄 신만 있으면 언제든 옮겨다닌다.

 

  • 다시 배에 탄 제자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역풍을 만남 - 어떻게 하면 역풍을 피할 수 있을까? 배의 방향을 돌리면...

그런데 돌리지 않는다. 왜? 주님이 건너가라 말씀하셨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건너려니까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

배부른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려니 고난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바람을 거스르며 가는 것이다.

  • 세상을 거스르는 삶: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일 2:15-16]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죄된 본성을 거스르는 삶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고난을 당하는가?

그 길은 세상에 거스르고, 내 본성에 거스르고, 악한 모든 죄에 대하여 거스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대충 사람들 하는데로 따라가면 되는데 말씀은 그렇지 말라하고

남들 하는 것 다 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성경은 그거 해 봤자 별거 아니라고 하고....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또 나 자신의 죄성과 항상 부딪치며, 거스르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내 힘으로는 절대 갈 수 없다. 그런데 그 길을 우선 떠나야 한다.

작정하고 내가 주님 믿는 사람으로서 말씀대로, 똑바로 살려고 길을 나서야 한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모세가 미디안을 떠나 바로에게 가고, 바로에게서 광야로 가듯이, 말씀에 의지해서 떠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분명치가 않다.

대충 죄 짓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도 자기는 예수 믿는 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 말씀 한 번 읽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눈에 날마다 말씀읽으면서 마치 말씀에 얽메여서 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저렇게 믿어야 주님이 받으실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주님이 무리에게도, 배를 타고 건너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말씀따라 순종하며 파도를 만나면서 건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시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신다.

내니 (ego eimi) -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대답하셨던 바로 그 대답

I am (ego eimi) - 너희에게 온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이다.

 

  • 그 길은 주님만 바라보며 가면 건널 수 있는데 자꾸 주위를 기웃 거리면 또다시 무너진다.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항상 주변의 상황과 비교이다. 주님만 바라보면 무너지지 않는데 비교하면 주위를 보면 이 길에 대한 회의가 인다.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 힘으로 갈 수 없고 내가 주님을 붙잡을 수 없다. 주님이 내 손을 붙잡고 가는 길, 그 길이 구원이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들은 가나 혼인 잔치를 보았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보았다.

그 분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았다.

그런 주님의 말씀 따라 바다를 건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파도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배를 탄 제자들이 고백이 무엇인가?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다시 요한복음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떡을 먹고 배부른 욕망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 따라 주님 말씀하신 길을 걸어가는 신앙으로.,..

그들이 가려던 땅 - 주님이 약속하신 땅, 주님과 함께 가는 땅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땅은 어디인가?

그 땅은 주님이 말씀하신 땅인가? 아니면 죄악된 내가 가고자 하는 욕망의 땅, 죄악의 땅인가?

 

여러분이 삶을 다 한 후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땅은 어느 땅이고 싶은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처럼 주님이 찾아야만 하는 전혀 상관없는 땅에 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며 주님 부르실 때에 바로 "나 여기 있어요! "하며 달려 갈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지 않은가?

 

물 위를 걷는 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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