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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과 지지난 시간 2주에 걸쳐서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의 비유"를 가지고 첫 주에는 이른바 탕자라고 불리우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었고, 지난 시간에는 아들이 집을 나갈 때에 나가도록 두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결국 허랑방탕하여 탕자가 될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시는가하는 문제를 열왕기상 3장의 "솔로몬의 재판"에 나와 있는 사건을 살펴보면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짓 어미를 대신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산 자의 어머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아들의 비유의 마지막 시간으로 첫째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이 비유는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원독자)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가?

[눅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 장면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3. 그리고 예수와 함께 있는 제자들

-> 3절에서 말씀의 대상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 누가복음의 말씀과 평행하는 두 아들의 비유 사건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유일한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마 21:23) 백성의 장로- 존경을 받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바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혹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 그동안 이 비유는 탕자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탕자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지만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의 일등 신앙인이라고 불리던 자들.
  •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닌 두 아들의 비유로 불리워야 할 것이요, 이 메시지는 두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요, 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는 비유이다.

 

2.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첫째 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1) 그는 성실한 자이다.

맏아들은 벝애 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25절)

아버지는 부자였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동생은 유산을 챙겨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다.

형에게도 유혹이 없었을까? 나도 좀 놀면서 하자. 이제 나 밖에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때에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야 어떻든, 종들이야 어떻든 언제나 자기 일에 충실한 성실한 자이다.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29절)

동생은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나갔지만 형은 그 말씀을 어김없이 순종하는 자녀였다. 그는 순종하는 자녀였고 또한 아버지를 섬기는 자였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다.

 

4) 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31절)

아버지의 입으로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던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신앙생활 하면서 저도 그렇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성실하고 검소한 자)

어쩌면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

 

3.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사 중의 하나인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에서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하나님과 멀어지는 두 길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둘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로, 이는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 밖에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부류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 믿고 "자아 성취"를 위하여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심하게 말하면 "제멋대로"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은, 교회의 전통에 철저히 순응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자라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동생을 맞이하자 분노하여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적인, 형식적인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동생의 길은 "못되" 보이고 첫째의 길은 "착한 길"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동생이나 형이나 매한가지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오히려 비유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못된 인생을 살았던 둘째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고 형은 아버지가 계속적으로 설득하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로 끝이 난다.

그가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눅 15:28-29]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로운 전력, 자기의 선한 행동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 품을 떠난 죄인이요, 첫째 아들은 순종하지만 아버지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자 똑같이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다. 요나의 불순종처럼,...

 

영화 <아마데우스>

젊은 살리에르라는 촉망받는 음악가의 기도

"주여, 저를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음악으로 주를 찬송하며 또한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서 저와 제 작품이 사랑을 받는다면 저는 주님 앞에 저의 순결함과 근면함과 겸손함과 제 삶 전부를 드리겠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여자를 건들지도 않고, 무료로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자들을 열심히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뜻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여자들과 맨날 희희락락하면서 풍문이 끊이질 않고, 술취한 모습으로 연주하기 일쑤다.

살리에르의 고뇌에 찬 기도가 시작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하나님께 재능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하며 매사에 신중을 가하고 흠없이 살려고 본능마져도 누르려고 애쓰는데, 저 젊은 친구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어찌 아무일이 안 나타납니까?"

그러면서 급기야 "이제 하나님, 당신과 나는 적입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다. "모짜르트, 그 자가 나타나면서부터 하나님도, 그리고 나 자신도 싫어졌다..."하면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살게 된다.

 

둘째의 희망은 허랑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형의 정말 큰 문제점은 돌아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방법에 분노하게 되고 둘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끝까지 자기가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욘 4:9b)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이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볼 때 첫째에게서 없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없다. 그는 매말라 있었다. 즐거움이 없다. 그는 친구들과 잔치할지도 모르고, 가족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화평(Peace)이 없다. 그는 동생과도 불화하고 급기야 아버지와도 불화한다. 자비(Mercy,Forgiveness)가 없다. 그는 동생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금할 수가 없는 성령의 열매이다.

 

형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그런데 교만은 그 어떤 죄보다 우선된 죄다. 왜? 교만은 하나님 위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행실에 대한 회개도 해야 되지만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자기 의의 뿌리까지도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4. 아버지

탕자라고 할 때 영어. Prodigal의 의미는 "무모할 정도로 다 써버리다" "남김없이 다 쓰다"의 의미다.

아까 언급한 팀켈러 목사는 이 비유에서 정말 프로디갈한 존재는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이다고 말한다.

 

왜? 두 아들이 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만 허랑방탕하고 돌아온 둘째는 뛰어나가서 반기시며 어린 양을,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피로 먹이시고 입히시며 잔치를 여시고

그런 자신의 사랑에 분노하며 집밖으로 뛰쳐나간 큰 아들에게는 "얘, 내 아들아!" 하시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시면서 여전히 설득하시면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그 모습이야 말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 주신 은혜 안에서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런 잔치에 초청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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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 (열왕기상 3장 16-28)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비유를 기억하면서 둘째 아들을 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아버지의 모습에 관하여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이 비유가 두 부류의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국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살펴 볼 신학적인, 혹은 실재 신앙적인 문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요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내 몫"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무엇인가를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기도- 대화

간구- 들어달라고 구하는 것

중보- 남을 위해 구하는 것

 

하다못해 예배드리러 와서 "은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잘못 된 것 아닙니다. 제 자녀가 학교에서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부모에게 요구하듯이 자녀에게는 아버지께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함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 있을 때 이지요.

그 분깃 만을 요구하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 한다면 아버지는 그것을 더 이상 들어줄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나 복주어서 내 맘대로 살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를 어찌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여서 들어주었더니 더 이상 하나님 필요없어서 떠나버리는 것 -

사사기서의 교훈이요, 유럽, 미국,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까지 펼쳐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역사

 

더군다나 이 아버지는 분명 복을 주어 내보내보았자 아버지 품을 떠난 그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결국 세상에 기생하는, 짐승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내보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 품 떠나서 어디 한 번 혼 좀 놔봐라!" 하는 모습이지 사랑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가만 내 버려 두시는 하나님.

그래서 17, 18세기의 하나님에 대한 상

창조하시고 심판 때까지 내버려 두시고 간섭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라기 선지자 이후 - 400여년간 어떤 말씀도 들려지지 않는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지을 때 간섭하지 않으시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손 대실 수 없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의 판결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서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온 솔로몬의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유명하게 한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촛점이 솔로몬의 판결에 맞추어져 있지요. 그리고 성경은 이 판결의 일화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제 구약의 말씀을 필요없고 예수님의 말씀, 사도들의 말씀만을 들을 것인가하고 고민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리더들은 그리스도를 해석의 틀로 삼고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성가들과 심지어 후대의 종교개혁자들까지도 무엇이라고까지 주장하였냐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설교들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까지 했으며, 성경의 각각의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이 사건 역시, 성경이 자세히 다루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을 다시 들여다 봅시다. 또한 솔로몬의 지혜가 세상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지혜가 결국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 솔로몬의 재판 (왕상 3:16-28)
  1. 이 재판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왕, 산 자의 어머니, 죽은 자의 어머니, 그리고 살아있는 한 아이.
  2. 간략한 내용: 한 집에 두 창기가 함께 살고 있고 사흘 차이로 아이를 낳는다. 그 중 한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의 엄마가 죽은 아이를 산 아이와 바꿔치기해서 지금 서로 자기가 산 자의 어머니라고 재판을 걸어온 것.
  3. 왕: 왕되신 하나님 산 자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의 어머니 : 사탄 산 자: 모든 인간, 혹은 그리스도인.

 

    • 왜 두 창기라고 표현했을까?

창기: 몸을 판 자,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자,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자

사탄: 천사에서 타락하여 땅으로 떨어진 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자

 

    • 아이의 부모가 바뀌다.

원래 우리 인간은 그 소속이 사탄이 아닌 그리스도께 속해 있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우리의 소속이 산 자에서 죽은 자가 된 것이다.

 

    • 칼을 가져오라: 하나님의 공의, 심판

아이를 둘로 쪼개라는 엄위한 명령 앞에 산 자의 어머니는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죽은 자의 어머니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사탄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열과 파괴와 함께 공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권리, 아니 그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다.

당시의 재판 - 칼을 가져오라는 왕의 심판 (최후의 판결)- 타협의 여지가 없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거짓이 탄로나는 자가 죽든, 그 둘이 아니면 아이가 죽어야 했다.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그저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한 것이다.

 

그 때 그 어미의 심정을 설명하는 말이 무엇인가?

 

26절: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예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셨다.

자기의 옳음도, 하늘보좌도, 사람들의 기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우리를 살리셨다.

 

  •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공의

모든 것을 지켜본 왕이 아이를 살리려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어미의 모습을 보며 공의로운 판결을 한다. 왜? 참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 때문이다. 참 신과 거짓 신이 어디서 나뉘는가?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어디서 분별되는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가? 아니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결국 자신의 잇속만을 채릴 것인가?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확인을 통해 사탄의 거짓이 판명되었다. 이제 누가 죽게 되었는가? 사탄의 정체가 탄로나고 그는 심판받아 죽게 된 것이다.

 

28절: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솔로몬의 지혜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머문 것이다.

 

이 본문을 설명한 한 주석에서 이 때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한 산 자의 어머니의 모습과 분깃을 얻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결국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연결시킨다.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아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자기 권위의 치명적인 손상이요, 자기 재산의 손해요, 무엇보다도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아들이 죽게 되는 것 보다 자기가 손해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빼앗기는 것을 감수하는 어머니의 불붙는 마음과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것을 알면서도 보낼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바알과 앗세라로,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결코 어디 한 번 나를 떠나면 어떻게 되나"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집 나간 자식을 잊어버리고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무감각한 아버지도 아니다.

 

아들이 나가자만자 한 날도 마음을 놓치 않으면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잃어버린 아들을 향한 불붙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십자가의 마음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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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삶을 누린 모델을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기 좋아하셨습니다." 보시기 좋아하셨다는 말은 언제 봐도 또 보고 싶은,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한다는 것은 서로가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일이 있어도 '서로가 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만을 보고 마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알람을 울리고, 찾아다니시는 감시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가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낙원의 장소였지만 타락하기 이 전에도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다시 말하면 보고 싶어할 적에, 반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다가와 말걸고 인사하고 교제하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교제란 부르심이 있고 응답이 있는 교제 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부르심(콜링- 소명)" 이 있고 "응답- 순종, 헌신"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마치 집 안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함께 살지만 동시에 서로의 공간이 있고 활동이 있고, 그렇지만 언제든지 보고 싶거나 할 이야기가 있으면 부르고 찾고, 응답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공간들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통해 동산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며 동산의 모든 실과들을 맛보며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바로되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에 모자라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뱀이 인간을 유혹해서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되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커다란 억압이고 불행인양 우리의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게 합니다.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니까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냐면 나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내가 벗었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부족하다. 내가 부끄럽다는 의식입니다.

 

  • 내가 벗었다 - 나의 열등감 Vs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 나는 그 분 안에서 충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입히고, 꾸미고, 가리고, 먹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벨탑을 만들고, 나 자신을 위해 여리고성을 쌓고 나 자신을 위해 성전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자신을 정말 위한 것인가? 결국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기준이 없고 절제가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이죠.

 

사사기-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가질 것 다 있어도 왕이 없는 삶, 기준이 없는 삶, 집안에 어른이 없고, 내 안에 주님이 없는 삶은 혼돈과 공허로 표현된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마치 붕어에게 먹이를 주면 붕어는 주는 대로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붕어 밥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주다 보면 붕어는 죽을 때까지 먹다 죽습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인간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채우다 보면 시간의 차만 다를 뿐이지 계속 자기를 채우다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채우다 채우다 죽는 것입니다.

 

  • 또한 죄의 결과로서 온 것은 하나님이 부를 때에 숨는 것입니다. 그가 찾아도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콜링은 있는데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 분의 콜링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 그 분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담아 어디있는냐?"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응답이 없는 인간을 행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멈추질 않습니다.

 

[창 3:8-11]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담이 범죄함을 알고서도, 아담을 찾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합니다. 대답하지 않습니다. 몇번을 부르시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는 것....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이 소리는 분명 꾸짖는 소리, 자기의 죄를 지적하시는 노하신 아버지의 분노로 들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탄식으로 풀이합니다.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답던 사람의 마음 속에 죄라는 커다란 상처가, 부패가 생겨서 더 이상 이들이 하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제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숨을 수 밖에 없게되는 인간의 타락을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서 여겨졌던 것은 질병, 특히 문등병. 그리고 부정한 자, 창기와 신약시대의 세리와 같은... 부정한 민족, 사마리아인들과 같은...(섞인 민족)

그런 자들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여겼기 때문에 아얘 쳐다보지도 않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이런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죄 지은 자를 정죄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창조한 그들이 그토록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통한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하여 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많은 설교가들은 이 제목을 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서기관들과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작은 아들을 이들과 다른 평범한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자기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 분깃 - 내 부분, 내 몫

아버지가 주신 것 - 그 "살림"을 각각 주었더니...

살림 - 헬라어 "비오스" 생명, 인생

 

창 2-3장 : 에덴동산에 거할 때에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 피의 제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만나시는 것.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의 생명을 주어 그를 보낸다.

 

"구약의 시각"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 죽는다. 저주 받는다.

신약의 시각 - 하나님이 벌을 주셔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떠나면 저주가 임한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도래한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하지요.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아버지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분깃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고 나만 보았던 탕자가 자기를 보고 회개하니까 비로소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

신을 신기라- 참 자유

를 주시는 분.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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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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