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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2 13-21

12장 첫 절을 보면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예수님을 보러, 그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 수많은 무리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수많은 무리 중에 예수님께 개인적인 것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인생 일대의 큰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언제 다시 못 올 인생일대의 기회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단순한 그의 고민이 아닌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지금 예수님에게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고민 내용- 형이 하나가 있는데 지독한 이기주의자, 욕심쟁이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남겼는데, 이 형이 나에게는 한 푼도 안주고 혼자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니까 내 법적인 권리를 좀 찾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공의가 나에게 좀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 여러분이 지금 동생의 입장이라면 동생의 고민이 이해가 가십니까? 예수님께 수많은 무리를 뚫고 나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고 나와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동생의 고민이 깊이가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의 답변을 하십니다. 누가 나를 너의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러면서 더 뜻밖의 질책을 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해서 고민고민 하다가 예수님께 그 고민을 들고 나온 사람에게 주님께서 탐심을 물리치라고 질책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알아 듣도록 비유로서 예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한 부자가 그 해에도 풍년이 들어 소출이 풍성해서 곳간을 헐어 새 곳간을 짓고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고이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영혼아, 여러 해 내가 수고해서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덧붙여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지금 예수님께 나온 사람이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삶의 긴박한 문제, 가장 고민이 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솔직하게 고한 것에 예수님이 지금 탐심을 물리치라고 질책하십니다. 똑같은 일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났다면 그럼 우린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눌 적에 예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여서 영원, 영생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 믿음의 비밀을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제한 없이 영원히 사는 영혼과, 제한된 세월 속에 태어나서 살다가 사라져 없어질 육체, 즉 영육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살던, 지옥 불에 떨어지던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오직 만물 중에 인간 만이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육체는 반드시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이 이렇게 제한된 육신에 갇혀 삽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에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던 죽었다, 끝났다라는 말 대신 돌아갔다. 별세(세상과 이별했다)라고 누구나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을 영육을 지닌 존재로 지으신 후에 그냥 내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제한된 세월 속에 살다가 죽어 없어질 육체에는 땅에서 나오는 것을 식물로 주셔서 먹고 살게 하시고, 영원히 사는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어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 1:28-29]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4:3-4]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è  , 흙으로 나온 육신은 땅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살고, 영원히 사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먹고 살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땅에서 나온 음식도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떡은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때에 먹는 것이지만 말씀은 영혼을 위해 먹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말씀이 더 중요하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탄의 모략- 지금 당장 떡이 있어야 사는 것 아니냐? 영원을 생각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가?

그럼 왜 처음부터 영원히 살도록 하시지 육신을 두어서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도록 창조했는가? 영원히 사는 인간의 영혼을 육신이라는 제한적인 존재 안에 두신 것은 육신으로 살아갈 때에 영원의 삶, 영혼으로 살 영생의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라도 죄 아래서 저주와 온갖 고통 속에 살다가 육체가 끝나는 순간에 그 죗값으로 저 불타는 지옥에 가서 쉼 없는 고통을 세세토록 당하는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가 인생을 마감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은 죄 때문에 참으로 참혹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해도 오직 육신이 있을 때 뿐입니다. 육신이 끝나면 육을 위해 간직했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때에 오직 육신만 위하다 가는 사람은 모든 인생이 결국 밥먹기 위해서 살다 간 사람입니다.

ex) 스티븐 잡스, 문선명….

인생을 잘못 산 사람만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아담 이후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육신의 때가 끝나는 때에 지옥에 갈 운명에 처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 영혼의 멸망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주를 보내셨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è  오직 우리가 지옥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 만이 지옥의 저주에서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천국간다는 말보다 더 귀한 복음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그가 대신 당하셨다는 것이요,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오직 그 분만이 죄가 없어서 지옥 불이 그를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변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하심이 세상이 다 알도록 역사상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도록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역사라는 영어 자체가 그분의 이야기라는 ‘HIS-STORY’ 에서 온 말이고 믿는 나라나 안 믿는 나라가 달력의 년도를 그 분의 삶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까? 역사상에 그 분만이 내가 너를 위해 죽었고, 네가 나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나 공자,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네가 나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데에 꼭 지나가야만 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 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가슴 중심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가 없이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통회와 자복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후에야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개와 감사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죄, 나의 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 다른 사람의 실수,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때문에 내가 불행하고 방해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고 나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의 죄의 영향을 내가 받을지라도 내가 신앙 안에 서 있다면 나는 죄악 된 환경 속에서도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고, 평안함을 누릴 수 있고, 안전한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 받을 때에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에 다다를 때까지 회개와 감사는 반복적으로 거듭해서 우리의 영혼을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도들의 문제는 회개를 구원받았을 때에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날마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례 그렇듯이 하는 형식적인 회개가 많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올 때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데 말씀을 들어보면 다 예전에 회개 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저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만나 회개할 시간은 오직 육신이 있을 때뿐입니다. 육신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갈지 모를 위험하고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시한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 늙은 육체라도 육신만 있으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 공로 앞에서 죄를 회개할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정에, 자신에게 문제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죄를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것을 탓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탓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죄의 영향력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불행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 나의 죄를 전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조롱 받고, 불평을 받았어도 한 번도 그들의 죄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남의 탓을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이 일만 없으면, 이것만 아니면 하면서 자신은 의인이라고 우기는 것이 우리 자신들 입니다. 나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교회가 위기가 처하고,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서로가 남 탓만 합니다. 누구 하나 내가 서지 못해, 내가 양보하고, 내가 참지 못해 그렇다고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백하는 곳에 회복을 주시고, 치유를 주시고, 부흥케 하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잘했다고 하지만 교만하고 외식하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너희들이 바로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그런 소자들을 가장 반기시고 세우시고 축복하시는 것 아닙니까?

육신이 있을 때만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을 수 있고 육신이 있을 때만이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해 주께 충성하여 하늘나라에 영광의 기업을 만들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 육신이라는 인생의 때만 살 뿐 영적 존재로서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인생을 다 사용하면 자기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기회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육으로 지으신 것은 주어진 인생의 때를 육신을 위해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하여 자기 영혼의 부유를 도모하게 하려고 영육으로 지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 육신의 요구만을 좇아 육신의 때라는 제한된 세월을 모조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니 자기 육신을 영혼의 때를 위한 소모품으로 값지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월을 알뜰하고 값지게 활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육신이 살 수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물질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부지런한 자는 결코 육신의 일에 게을르지 않습니다. 단지 육신의 일만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것만 채우다가 영혼의 일을 게을리하고 결국은 자기의 육신만 배부르게 하는 탐심만 가득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을 위하여 살고, 현실에서는 세상에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 후에야 시간 남으면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부르시면 당신의 영혼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우리의 목숨은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낭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생사화복이 하나님께만 있나니 내가 육신이 있을 때에 내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내게 준 복된 육신의 시간을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알뜰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육신의 떡이 우선이라고, 천하 영광이 우선이라고, 육신의 때가 우선이라고 말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때는 회개할 기회, 거듭날 기회, 성령 받아 충성할 기회, 자기 영혼을 부요케 만들 기회입니다. 육신이 죄 아래서 정욕을 좇아 살면 천박하나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하여 값지게 살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 최고의 기회요, 기업이 됩니다.

가족의 이야기-

할아버지, 고모들, 고모부들신앙대신 세상의 것 추구.

한 세대도 안 되어 무너져가는 모습들.

고모들 셋이 어머니를 찾아와서 우리가 잘못 살았고, 네가 우리 가정을 지켰다. 잘했다하는 말을 결혼 한지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함.

그리고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죽은 듯이 기죽으며 지내던 우리 가정-> 세우심을 받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왜 영원을 준비하며 살지 못하고 곧 썩을 육신을 위해서만 사는가? 왜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만 복을 비는 종교가 되어 버렸는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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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0.01 21:40

    아직도 영혼,영원이라는 말이 익숙하진 않지만.....
    "내게 준 복된 육신의 시간을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알뜰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그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출 26:15-30]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되 남쪽을 위하여 널판 스무 개를 만들고 스무 널판 아래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이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지며 성막 다른 쪽 곧 그 북쪽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로 하고 은 받침 마흔 개를 이쪽 널판 아래에도 두 받침, 저쪽 널판 아래에도 두 받침으로 하며 성막 뒤 곧 그 서쪽을 위하여는 널판 여섯 개를 만들고 성막 뒤 두 모퉁이 쪽을 위하여는 널판 두 개를 만들되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각기 두 겹 두께로 하여 윗고리에 이르게 하고 두 모퉁이 쪽을 다 그리하며 그 여덟 널판에는 은 받침이 열여섯이니 이쪽 판 아래에도 두 받침이요 저쪽 판 아래에도 두 받침이니라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지니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이며 널판 가운데에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함께 짝을 이루는 말씀

[출 36:20-출 36:34]

 그가 또 조각목으로 성막에 세울 널판들을 만들었으니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이며 각 판에 두 촉이 있어 서로 연결하게 하였으니 성막의 모든 판이 그러하며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었으되 남으로는 남쪽에 널판이 스무 개라 그 스무 개 널판 밑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되 곧 이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고 저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으며 성막 다른 쪽 곧 북쪽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를 만들고 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니 곧 이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요 저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며 장막 뒤 곧 서쪽을 위하여는 널판 여섯 개를 만들었고 장막 뒤 두 모퉁이 편을 위하여는 널판 두 개를 만들되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각기 두 겹 두께로 하여 윗고리에 이르게 하고 두 모퉁이 쪽을 다 그리하며 그 널판은 여덟 개요 그 받침은 은 받침 열여섯 개라 각 널판 밑에 두 개씩이었더라 그가 또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었으니 곧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며 그 중간 띠를 만들되 널판 중간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였으며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도 금으로 쌌더라

 

 

구약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데 성막의 모든 기구들 또한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모습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아무것도 흠모 할 것이 없으나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면 사방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 본 성막의 의미이며, 좀더 세분하여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역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성소 : 성부하나님의 사역을 상징(성막전체의 넓이는 약 315평이나, 지성소는 약6평 정도임)

  성 소 :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 그리고 지성소 바로 앞에 분향단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는 모두 기름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소는 성령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성막뜰 : 번제단이 있는 성막뜰은 죄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서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성막 전체를 두르는 널판.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입혔다. 성막의 널판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20개씩, 서쪽에 6개 모퉁이에 2개 해서 모두 48개이다.
널판은 히브리어로 "젤라-"인데, 갈비뼈와 같은 단어다.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를 합 친 수와 성막의 널판 수가 똑 같이 48개다. 갈비뼈가 육신의 생명이 있는 심장을 보호하듯, 성막의 널판은 생명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법궤를 보호하듯 성막의 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한 널판에 각각 2개씩의 은받침이 있으니, 모두 96개의 은받침이 성막을 받치고 있 는 셈이다.

 

1.널판의 재료

널판은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다. 광야의 조각목같은 인간은 금같은 믿음으로 입 혀져야 구원을 받는다. 오늘날 성소인 교회는 버림받은 인간(조각목)이 믿음(금)으로 입혀 져 둘러쌓여 한 몸을 이룬 곳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때는 제각각 세상에 있던 모습 그대로 부르시지만, 하나님의 귀한 사업을 위하여 쓰실 때에는 금과 은과 놋으로 씌워서 쓰신다.

2.널판의 받침

널판의 받침은 은으로 된 은받침으로 널판 하나에 두개씩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은은 속전으로 쓰였기에 구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요셉은 은 20에(창 37:28-30), 예수님은 은 30(마 26:14-15)에 팔리셨다. 버림받은 인간(조각목)은 믿음(금)으로 구원받아 구속의 은총(은) 위에 굳건하게(2개의 받침) 서 있어야 한다.

은받침은 널판과 땅을 구별하여 준다. 그러므로 널판은 이제 세상에 속한 조각목이 아니 요, 금으로 둘러 싸여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집을 이루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 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라"(고전 6:19-20)

3.널판의 금띠

성막의 널판 양편에 있는 금띠 다섯은 널판들이 서로 잘 맛물려 바르게 서 있도록 지탱 해준다.
금띠는 사랑의 띠를 의미한다. 버림받은 인간(조각목)은 믿음(금)으로 싸여져 구속의 은총 (은)위에 서 있으면서, 서로 사랑으로 연결(금띠)되어야만 온전한 교회를 이룬다.

 

널판: 조각목으로 만듦. 널판 하나의 길이를 10규빗 * 1.5규빗-> 지금의 5미터 * 67.5세티미터. 하나의 널판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나무가 쪼개지고 가다듬어져서 하나의 널판을 만들고 전체 성막을 두르기 위해서는 48개의 널판이 필요.

->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조각목 같은 성도들이 서로 합쳐지고 으깨져서 하나의 널판을 이루고 또한 48 전체의 교회를 이룸.

널판은 은받침 위에 촉으로 고정: 받침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촉은 위에 든든히 서기 위한 믿음.

Cf) 성막에서 금은 하나님의 영광, 통치, 은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놋은 죽음과 피와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그러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못박힌 믿음으로 하나의 널판이 세워지면 48개의 널판이 하나로 유지되도록 금고리와 금띠를 입힘.

-> 고리와 금띠-> 성도들을 하나로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덧입은 성도들의 사랑.

 

->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세워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된 곳이 교회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우리 교회의 든든한 받침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단단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있는가?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어 있는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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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수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28 10:43

    주님에 전이 하나하나 하나님에 말씀으로 세워짐을 보며 내 심령이 그리고 우리교회가 하나하나 세워짐을 느낌니다
    우리와함께 성령안에 사랑에 끈으로 하나됨으로 믿음으로 행하시길원하시길 하나님...
    그동안 무엇이 약하고 무너져가고 있었는지 다시금 알게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출 26:1-14]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그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이어질 다른 끝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휘장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휘장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휘장을 연결하게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길이를 같게 하고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이을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휘장의 그 나머지 반 폭은 성막 뒤에 늘어뜨리고 막 곧 휘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쪽에 한 규빗, 저쪽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쪽에 덮어 늘어뜨리고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 이제 성막의 재료가 모아졌고, 성막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법궤와 속죄제, 그리고 진설병상과 등대도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전체 성막을 덮을 겹의 휘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장의 휘장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있습니다.

 

  1. 가장 번째 휘장은 가늘게 베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의 정교하게 수놓은 가장 안장의 막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생을 요약해 놓은 축소판입니다. 분은 가늘게 베실처럼 마구간에,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땅에 오셨습니다. 청색실은 하늘의 색입니다. 분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와 이는 사랑하는 자라 하신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색은 능력의 색입니다. 그분의 공생애를 통한 사역, 권능,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홍색실은 그분의 오신 목적인 십자가의 피를 말해 줍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교회의 가장 기초와 터도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 바로 교회 입니다.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에 가장 화려한 부분은 아마 가장 바깥 쪽에 두고 치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에서 가장 화려한 휘장은 성막의 가장 안쪽을 덮었고, 오직 성막 안에서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 겹의 휘장으로 겹겹이 쌓아 놓았습니다. 우리의 , 교회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로 우리의 중심,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움도 너무 세상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서야 비로소 맛볼 있도록 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1. 번째 휘장인 염소털 휘장은 가장 쪽의 화려한 휘장이 상하지 않도록 습기로 부터 지켜 줍니다. 염소털 앙장은  매일의 우리 죄를 속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레16장)에 보면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염소 두 마리를 놓고 하나는 번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그 머리에 안수하면서 모든 백성의 죄와 허물을 고하고, 그 염소를 광야에 내다 버리는 속죄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우16:21)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것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우리 죄를 지고 가시는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의 고난이 우리를 세상의 죄의 습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1. 그 위를 덮은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은 피흘리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붉은 물”은: 죄로 인한 심판을 말하며, “수양”은 남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가죽”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을 연상케 합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모리야산에 올라갔을 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수양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모리야산은 예루살렘 곧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단번에 속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1. 가장 바깥쪽을 쌓고 있는 해달의 가죽 웃 덮개는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로부터 우리를 영원토록 지키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혹은 성령의 보호하심입니다. 당시 신발을 만들었던 우중충한 해달의 가죽처럼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모양은 별 매력이 없이 보입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나셨고, 가난한 서민 가정에서 자라셨으며, 목수의 일을 하신 세상적으로는 볼품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약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위에 서서, 오늘도 우리 죄를 지고가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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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언약궤와 조각목

본문: 출애굽기 25 10-2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공급처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한 일은 그들이 이전의 애굽의 풍습과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율례와 규례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먼저 택하시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지껏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때 만큼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말할 때, 일주일 동안 세상 속에서 힘들며 고생하다가 주일날 말씀으로 공급받는 날이라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전제가 빠진 말입니다. 예배는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날이 먼저입니다.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사렙다 과부가 없는 중에서도 드리니까 하나님의 공급이 이어지는 것이고, 어린 소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리니까 5천명이 양식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먼저 드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날 예배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께 받으러 오는 날이라는 잘못된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받는다고 할 적에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이 됩니다. 내가 공급받으려는 곳을 찾으니까 화려한 곳, 큰 곳, 풍족한 곳을 찾습니다. 내가 드리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온전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 25:3-9]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è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실까? 누구나가 헌신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헌신은 부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형편에 맞게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헌신의 모습이 있다.

출애굽기 38 24-31절을 근거로 보면 이 때에 모인 것이 금 29달란트 730세겔, 100달란트 1775세겔, 70달란트 2400 세겔이었는데 이것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금 1.5, 5, 3.5톤 이었다고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과 은과 놋 외에는 그리 귀한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 귀해 보이지 않는 성막 재료들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6장에 보면 백성들이 아침마다 예물을 가져와서 너무 많아 지니까 모세가 명령을 내려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공포하게 됩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할 때도 스룹바벨에 의해 2차 성전을 재건 할 때도 힘든 중에 백성들이 예물을 가져왔는데 항상 넘쳐서 넉넉한 가운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헌신의 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헌신의 결과입니다.

, 이제 성막을 지을 모든 재료가 완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성막의 설계를 맡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대개는 먼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서 전체의 모양을 구상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구상을 할텐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제시하신 것은 지성소에 있을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바로 성막의 기초고, 설계이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공의이고, 능력이다. 속죄소는 인간의 죄의 가리움이고, 하나님의 은총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긍휼이다. 이 두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을 넣어둡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이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이고,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어두었습니다.

1.     돌판 말씀   만나- 육적 말씀- 그리스도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성령-> 삼위일체

2.     돌판- 말씀   만나- 생명의 떡   싹난 지팡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그리스도를 상징

3.     백성의 죄- 돌판-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진 돌판    만나 항아리- 그날 먹을 것을 다 먹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  싹난 지팡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망과 원망

è  우상숭배, 불순종, 원망과 불평에 대한 죄를 고백하고, 속죄소로 그 죄를 가리움으로 교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

교회의 기초는 먼저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기초된 것이고, 우리들의 죄의 고백과 그 죄를 가리움에 기초를 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언약궤의 주요 재료이자 성전 모든 기구에 있어서 목재의 재료로서 사용되었던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이라 번역된 이 나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성경과 KJV만은 이를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는 잎이 길고 넙적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중동지방의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아카시아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게 잎이 작고 꽃이 피지 않습니다.

조각목은 가시가 많고 볼품이 없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 궁전을 지을 때 쓴 백향목에 비하면 조각목은 참으로 하찮은 건축 재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을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도 조각목 같이 별 볼품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큰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쓰임 받는 우리는 하나같이 조각목에 불과한 자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조각목의 특성을 조금 더 깊게 하나하나 살펴보며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를 발견해 봅시다.

1.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까지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모나게 찔러대며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남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찔러서 상처투성이를 만들 때도 있습니다.

ex) 아이에게, 아내에게 찔러대는 모습. 화를 내다가 화에 다스림을 당하는 내 모습을 보며 놀라고이런 모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하나님, 과연 내가 과연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조각목입니다.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이런 부적합한 나무를 성막 재료로 쓰라고 하셨을까요? 볼품없는 조각목이지만 다듬어서 귀히 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각목처럼 남에게 계속 상처주고 시비하며 찔러대는 근성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교회 일꾼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성전 기둥으로 쓰임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찔리고 맞으셨지만 남을 찌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아버지, 저들이 몰라서 그렇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조각목처럼 모나고 찔러대는 근성이 나타날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최후 순간까지도 인간을 사랑하신 주님의 성품이 내게서 재현하도록 주위 모든 이를 사랑으로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2.     바짝 마른 가지

조각목이 가진 둘째 특징은 늘 비틀어질 정도로 바짝 말라 있다는 것입니다사막 식물 중에 가시가 많은 것도 잎을 통한 수분 방출을 최대한 막고 조금이라도 수분을 더 보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사막 땅 한가운데서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비로 수분을 공급하고자 몸부림치며 허덕이는 조각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렇게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습과 닮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도 사막처럼 목마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릅니다. 세상은 영적 갈증으로 목마른 곳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지식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도 그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더 목이 마른 곳이 세상입니다. 영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족함을 느끼는 이유도 영적 갈증을 해소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이유는 여전히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비틀어진 조각목을 성막 건축 목재로 선택하신 것은, 사막의 조각목과 다름없는 우리 인간이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3.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

조각목은 사막에서 모래와 바람에 많이 얻어맞으며 자라는 나무라서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조각목은 아주 단단하고 억센 악마디가 많습니다. 이 악마디 때문에 뿌리에서 만들어진 진액을 원활하게 공급받는 일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일도 조각목처럼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일 때가 잦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애매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은연 중에 고립 당하기도 합니다. 교인들 중에 뜻하지 않게 왕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목사도 성도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어 난감해질 때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 가는 것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조각목처럼 악마디가 너무 많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고립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이 많은 성품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들이 무슨 권면을 해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주려 해도 세상에서 너무 많이 얻어맞고 속아서 그런지 교회에 와서도그것이 사실일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라는 진액을 순수하게 공급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내 속에 있는 완악함이 악마디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고립해 성장을 방해합니다.

또 조각목은 항상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삽니다. 사막에서는 모래산이 만들어질 만큼 큰 회오리바람이 불기 때문에 언제 모래더미에 묻힐지 모릅니다. 바싹 메마른 모래땅이라 언제 말라죽을지 모르고, 바람이 모질게 불어 몸에 난 가시들이 서로 찔러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지속하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이처럼 회오리바람에 순식간에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아무도 도와줄 자 없이 죽음의 두려움 속에 홀로 사는 것이 조각목의 운명입니다. 우리 인간도 조각목처럼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이런 상황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막의 조각목처럼 고립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신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으로 이 땅에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 천사를 보내어 지키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있다가 목숨이 다하는 날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영혼의 때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l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해야 은혜가 입합니다.

조각목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예수를 간절히 찾게 됩니다. 나 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나고 어리석어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껴본 사람만이 살려는 본능으로 주님을 찾아옵니다.     탕자가 아비 집을 떠나서 온갖 무시, 멸시, 천대 다 받고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온 것처럼, 자신이 조각목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마신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압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감사를 느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조각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은 절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예수밖에 없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각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이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하던 버릇대로 자기가 정한 행동의 기준, 믿음의 기준을 갖고 그 이상은 절대 행동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믿음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12:30) 이 주님이 정하신  믿음입니다. 스스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신앙생활을 자기 수준에 맞추어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적당히 해도 신앙생활은적당히가 아니라죽도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한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임의대로 내가 정한 것만 믿는다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없는 조각목 같은 인생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임 받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이 조각목과 같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l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싯딤나무는 커다란 가시가 많고 심하게 뒤틀렸으며, 악마디도 많은 나무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무엇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각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새에 맞도록 잘 잘라야 합니다. 조각목을 성전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섯 자로 잘라야 하는데 나무가나는 일곱 자니까 일곱 자 그대로 있겠소라고 자기주장을 한다면 그 나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히 내 지식에 맞게, 환경 수준에 맞게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는 조각목의 자세가 아닙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합니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척하는 것,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것,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 가지지 못했으면서 가진 체하는 것 등 모든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을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성령의 지식과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조각목을 소용에 맞게 치수대로 잘라 쓰듯,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발가벗은 자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 주제에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가진 것처럼 껍질로 싸고 위선을 떨고 있으니 그 껍질을 속히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성,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한 근성들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다시 나를 싸야 합니다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재빨리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껍질을 벗긴 조각목처럼 연약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팁니다. 제일 속상할 때 제가 욕먹는 것도 괜찮고, 헌금이 안나와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무슨 일이던지 성도가 안나오면 죽을 만큼 속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을 인생입니다. 예배에 나오셔서 그 관계의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이 죽습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껍질 벗긴 조각목처럼 금세 부서지기 쉽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오면 쉽게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해 비틀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런 나약한 근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근성 그대로 놔두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싸라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보인다면 내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육신의 생각에 머무르는 나만 보이면 썩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비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쏙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주님만 밖으로 나타나시면 달라집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그를 부드럽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고, 만족하게 만들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듭니다. 금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뿐더러 언제 어디서나 제값을 지닙니다.

조각목의 변형을 막고 성전 기둥으로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서 금으로 싸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고 나를 통해 예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근성과 나의 자아가 드러나거든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했구나. 주님과 떨어져 나 홀로 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깨닫고, 부러지기 전에, 비틀어지기 전에, 썩기 전에,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 전에 빨리 주님 안에 들어가서 금으로 조각목을 둘러싸는 것처럼 예수로 나를 둘러싸야 합니다.

예수의 피 속에는 예수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받아 마시라는 것은 예수의 특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았을 때는 별의별 특성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능력도 나타나고 이적도 나타나고 악한 영도 몰아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합니다.

우리는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쓰임 받는 것처럼 예수의 특성만 나타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가진 못난 근성과 기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크리스천 즉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말인데, 안디옥 교인들은 그 당시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령이 충만해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예수쟁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원래 의미

입니다.

조각목은 정금으로 싸일 때 비로소 성전, 법궤, 기둥, 제단 등을 만드는 재료로 훌륭히 사용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예수의 피 공로로 씻음받고 예수의 특성을 나타낼 때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도 똑같이 주님의 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인를 조금이라도 나타내려 하면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굉장한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다가 10, 20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능력이 싹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전부 자기가 가로채서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고 영광 받으니까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전도도 자기가 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난 순종만 한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만 앞세우고 나는 주님 뒤에 가려서 주님만 보이게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능력을 나타내며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높여 드리고, 이해해 드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모든 것을 맡겨야 하나님이 제한 없이 역사하십니다.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 읽다가 가장 포기하기 쉬운 장; 성막, 계명

그 곳에서 발견한 조각목의 진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고 혼자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나같은, 조각목과 같은 쓸모없는 인생을 택하사 하나님의 금테를 입혀서 성전의 법궤로, 기둥으로 삼으신 주님. 우리 성도와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 싶다. 우리 모두 조각목인생이 아닙니까?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조각목인 것을 인정하면서 가시에 찔려도 우린 원래 그랬잖아, 나도 누군가를 찌르며 살아왔잖아 하며 감싸 안아주고 나 자신을 주님 앞에 고백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금테를 입혀서 정말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쓰임받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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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23 22:51

    말씀 내내 나에게 있는 가시들이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남을 찌르고 나를 찌르고 또 예수님을 찌른 내 가시들....조각목의 말씀 의미
    잊지 않고 항상 되새기며 나를 다듬어가도록 또 노력하겠다는.......
    또 찌르고 찔리겠지만 그래도 노력하며 기도하겠다는 생각밖에 할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