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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앙의 안전거리 (눅 22:54-57)

[눅 22:54-눅 22:57]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왜 가장 앞장서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까?

가장 열심내던 제자가 이젠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되었을까?

예수의 십자가를 공언한 후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rebuke"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예수를 도리어 꾸짖었다. 혼내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니까 안된다고 하면서 예수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꾸몄던 계획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사탄의 계략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그리고 이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

정말, 예수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병사들에 의해 집히시어 심문을 받게 되자 가장 가까웠던 제자에서 이젠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잡혀 갔다. 자기 눈앞에서 함께 죽고자 했던 예수가 끌려갔다. 너무도 힘이 없고, 너무도 무력하게 예수가 세상에 끌려갔다.

예수님은 자기가 말씀한 대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데 자기 생각에 갇혀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멀어져간 주님을 보며 앞장 서던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가장 앞장 서던 자가 이젠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eter followed him at a safe distance

<베드로가 안정거리를 두고 예수를 따라갔더라>

앞장 서던 베드로가 적당히 신자가 됩니다. 안정장치를 두고 한 발은 예수를 따르고 다른 발은 이제 도망하여 세상으로부터도 욕먹지 않고, 고난 받지 않고, 언제나 도망갈 방도를 마련해 두고 예수를 쫓은 것입니다.

그래도 뒤돌아서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죠.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요 18:15-요 18:18]

(요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요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요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요한은 뜰 안까지 가서 예수를 보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이 블러서 그를 데리고 오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예수를 바라보다가 이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불을 쬡니다.

이것은 무슨 장면입니까?

자기의 믿음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랫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지, 언제나 예수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고, 문밖에서, 바깥뜰에서, 사람들 옆에서 예수와 점점 멀어지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도 예수편이지" 하니까 부인하고 저주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씩 부인하는 것! 이것이 멀찍이 따르는 베드로의 결말입니다.

 

여러분의 안전장치는 무엇입니까?

Return Policy: 한국에서는 반품하려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한데 여기와서 제일 놀라고 좋은 것이 영수증만 있으면 몇개월 지나도 반품....

결혼도, 삶도....결혼 안하고 동거하는 문화... 왜? 피할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변질되고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도 사람들의 여론을 들으면서 안전장치를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믿긴 믿되 적당히 믿자. 거리를 두자. 안전장치를 두자.....그렇게 점점 베드로처럼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십니다.

 

은혜는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이미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눅 22:31-눅 22:32]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서도 도망쳤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안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치유하시고 다시금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양들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십번 수천번 주님을 배반하고 여전히 안전장치를 하면서 주님을 멀리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런 나에게 네가 날 사랑하냐 하시면서 식었던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주님의 친구로,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시는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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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12-27절 (자기 몸으로 차린 만찬)

 

고난주간 목요일엔 최후의 만찬이 있는 날, 이 날 다락방에서 세족식, 성찬식, 유언설교를 행하시고 겟세마네로 가신다.

그 날의 시작을 알리는 마가복음 14장 1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우리가 추수감사절 하면 칠면조를 떠올리듯 유대인들은 유월절날 함께 먹을 어린양을 떠올린다. 유월절은 잘 알다시피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집은 재앙이 넘어갔다해서 Pass Over, 재앙아 넘어간 날로 지낸 유대인 최고의 명절이다.

 

그 시작을 알리는 무교절의 첫 날, 성경의 기자는 특별히 이 날을 이름 붙이기를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다. 예수는 그 날의 이름처럼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 의해 붙잡힌다.

 

그러니 제자들의 말은 더욱 더 어처구니없이 가슴 아픈 말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말인 즉, 어디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당신을 희생제물로 준비할까요?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결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 할 것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할 것이고, 그 열심대로 언제나처럼 누가 더 많이 하고,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영광의 자리를 앉을까를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주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무리에게 넘기는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최후의 만찬 현장에서 주님은 만찬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꺼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18절)

 

"만약 너희들 모두가 오늘 날 팔리라" 하셨더라면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분명 그들 모두는 그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장면에 동참하는데 주님의 어법은 그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그들의 잘못을 가리는 것인지,

단지 "너희 중 한 사람,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안도했던 것 같다. 기분은 썩 안좋지만 적어도 그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닐꺼라 말한다.ㅣ

 

[막 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성경은 친절하게도 열 두명의 제자가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하며 불안 가운데서도 안도하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의 모습은 늘 이렇다.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이 세대를 향해 꾸짖고, 홍수를 예언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교회의 심판을 이야기해도....근심 중에서도 "난 아니야, 난 다행히 그 저주의 명단에서 빠져있어."

스스로 안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하나도 예외없이 주님을 버릴 것을....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런데 바로 그 때 주님이 차리고자 했던 진정한 만찬이 시작된다.

제자들이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 분께서 첫번째 유월절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밤 그를 버리고 뿔뿔히 흩어질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로, 그의 몸으로 친히 그들의 양식이 되신다.

 

유월절 양잡는 날, 진짜 유월절의 만찬은 모두가 돌아가면 "난 아니지요"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자 할 때, 그 숨긴 죄는 곧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그의 피로 그들을 닦으시고, 그의 살로 그들을 먹이신다.

요한복음의 본문을 추가하면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그들의 죄를, 그들의 허물을 주님의 손으로 닦아 주신다.

 

오늘도 우리는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나름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내고자 말씀을 펴고, 기도를 하고, 유튜브를 찾아보며 나름대로의 수고를 하며 "난 아니지요?"하며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죄를 숨기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그 완악함을 주님께서는 그저 닦아주시며 그 분의 피를, 그분의 살을 우리를 향하여 먹이신다.

 

구원은 내가 그분의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분이 차린 만찬을, 그분이 손수 차린 구원을, 그 피를, 살을 먹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어떤 의도, 어떤 자랑도 있을 수 없고, 오직 그분이 담당하신 그 사랑을 우리는 받아먹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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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11-20절 (뿌리가 말라버린 성전)

 

[막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주님은 성전에 머물지 못하시고 베다니로 와서 주무신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마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촌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예수님이 그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가셨다. 그것도 최소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열세 명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예수님은 한 끼라도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아침도 드시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길을 나선 것이다. 아침을 거른 상태에서 예루살렘까지 3km정도를 걷게 되니 12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시장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나가시다가 무화가 나무를 본 것이다.

 

왜 번거롭게 이렇게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베다니를 왔다갔다 하셔야 했을까?

예루살렘에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곳에 주님이 머무실 거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주님은 성전부터 찾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으로 직행하신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관심은 성전에 있었다. 그런데 성전에 주님이 거할 거처가 없었다.

 

무화과 나무 사건을 둘러쌓고 있는 사건

11절-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가시는 사건

무화과 나무 사건 - 12절-14절, 그리고 다시 20절

성전 척결의 사건 - 15-17절

 

무화과 나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전 척결의 사건 사이에 삽입된 별개의 사건인가? 하나의 주제를 가리키는 사건인가?

 

당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여서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땅에 널려 있었고, 길 거리에 있는 무화과 열매는 누구든 따 먹을 수가 있었다. 시장하신 예수님도 무화과 열매로 식사를 대신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통 뚜껑을 열었는데, 밥이 없는 것과 같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밥통을 열었는데...그 실망감이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1: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는 잎만 시들해지고 줄기만 마른 것이 아니라 뿌리째. 아예 뿌리째 말라버린 것이다.

 

아니, 아무리 열매가 없어서 실망하셨다고는 하지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은 아직 무화가의 때가 아니라고 까지 설명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한다. 마태복음에 보니까 이 구절은 의문문으로 어찌하여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까?하고 묻는 구절로 나온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이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이다. 배가 고파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가 먹을 수 있도록 풍성했던 것이 무화과 나무이다.

그리고 더 가까이는 바로 성전이다.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시면서 그에게 하신 말씀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 그곳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곳, 하나님과 교제하는 쉼과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무화과 나무의 모습이 어떤까?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13절)

 

성전은 화려해지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지고, 성전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잎사귀 뿐이었던 것이다. 열매없는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였던 것이다.

 

[요 15:1-2]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11-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열매는 무엇인가?

곧 예수님 안에 붙어 있는 것- 그 분의 사랑 안에 붙어 있는 것. 그 사랑의 열매로 서로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도 곧 사랑을 이루기 위한 성령의 열매

 

어떻게 ?

 

(막 11: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갈라디아서 5:16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그렇게 성전 안에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이 멀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그 말씀을 의심했다. 당장이 이익 앞에서 말씀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 당장 앞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다. 그런 삶의 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무화과 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가 기도이다.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기도가 안된다? 왜 기도가 안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도하는 삶에 달려 있다.

 

기도는 신앙의 연조와는 무관하다. 10년 20년을 믿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못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빛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찬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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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1-10절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감람산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린 곳

예루살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감람산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대 중보의 기도를 드린 장소

가룟유다의 배반과 그로인한 로마 군병들에 의해 끌려가시는 장소

 

그 곳에서 제자들을 보내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볼 테인데 그것을 풀고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은 따로 주인이 있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그 주인을 모르는 것으로 봐선 예수님과도 일면식이 없는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당황해서 머뭇거립니다. 아니 예수님이 도둑질을 시키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하는데,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복잡한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또 어디서 왔고 예수님은 어떤 기적을 행했고 무엇 때문에 나귀가 필요한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 말만 하면 즉시 나귀를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큰일났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시키신 대로 그대로 말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희한하게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그냥 그대로 허락을 합니다.

백주 대낮에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자기 나귀를 풀어 데리고 가면서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니까 그냥 내어 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한 마디에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나귀를 내어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이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사실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나귀 주인은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 없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1. 주님의 주권...

주님이 원하시는 일- 어느 때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갑자기 가라고도 하고 멈추라고도 한다.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내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있어도 이렇게 하지 못한다. 상황을 설명하고 왜 필요한지 이유를 대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일은 때로 그런 설명이 생략이 된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이다.

그 분은 그럴 만한 분이다.

 

2. 제자들의 순종

제자들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속으로는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명령하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는 제자들이다.

물을 아귀까지 채워하 하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 물항아라리를 들고 손님들에게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은 종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주인이 시킬 때...항변하지 않고 순종한다.

왜? 종이기 때문이다. 제자이기 때문이다.

종은 따질 자격이 없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본분이다.

때로 우리는 주님, 하면서도 종된 위치를 잃어버린다. 제자의 위치를 잃어버린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항변하고, 잡아채고, 외면하고,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또 주님...하면서 기도한다.

 

기적은...믿음을 통해 역사된다.

믿음은 보이는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역사된다.

순종은 상황과 감정을 넘어서는 주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3. 주인의 허락

종의 순종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나귀의 주인의 허락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미 주님과 약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인정한다.

왜 그는 종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데 순순히, 한 마디 항변없이 아무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내어 드릴 수 있었을까?

 

"한 번도 쓰지 아니한"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는 밖에 매여 두지 않는다. 우리에 둔다.

메여 놀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주인은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날마다 매여 놓았다.

왜?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마치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처럼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좋은 것에 쓰고자 날마다 매여놓고 이 날을 기다린 것이다.

 

그는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고 가장 귀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던 주인이었다.

세상에 가장 귀한 축복이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어떤 분이 휴일도 없이 죽도록 일을 해서 그래도 한 30-40억을 모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아서 나머지 인생을 좀 쓰면서 즐기면서 살자...그렇다가 암에 걸린 것입니다.

처음엔 이런 방법, 저런 방법 살 방법을 간구하다가 살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하도 억울해서 내가 번 돈 계획적으로 다 쓰고 죽자하면서 의사가 말한 시간으로 나누니까 하루에 3천 200만원 정도를 쓸 수 있겠더랍니다.

그래서 이 돈을 쓰고 죽자해서 하루에 3천 200백만원을 쓰려고 했는데....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호텔에서 자고, 최고급으로 생활해도 5백 몇십만원 정도밖에 못썼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더 써 보리라 해도 하루 아무리 최고급으로 바쁘게 다녀도 500만원 쓰는 것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며칠 하다가 체력도 안되고, 그렇다고 입맛도 없고 결국은 나머지 기간 동안 1억원도 채 못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고 왜 모으고 왜 아낍니까? 잘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값지게 쓰려고 애써 모으고 아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인가? 어떻게 써야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것인가? 주님이 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가 배운 지식, 나에게 있는 재능, 내가 벌어놓은 재물, 내가 살면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남김없이 쓰십니다. 아낌없이 쓰십니다.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배운 의료 지식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가 몸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일생을 드린 복음 전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매도 많이 맞고, 풍토병에도 걸리고 위험한 일을 너무 많이 당합니다. 고문도 당합니다.

이 의사는 아얘 자기 일생을 이 복음 전도자를 따라 다니면서 그가 다치면 치료하고, 매맞으면 약 발라주고, 그와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그를 따라 지중해로, 아프리카로, 온 아시아를 따라다니면서 복음 전도여행의 생생한 증인이 됩니다. 복음 전도자는 죽었짐나 그를 따라다닌 의사는 전도자가 죽은 후에 그에 대한 기록, 그가 전한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그 자신이 복음 전도자가 되어 죽습니다.

누가 입니까?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가 이 세상 그 어떤 의사보다 크게 쓰임 받고 크게 축복 받은 의사 아닙니까?

 

천하장사 삼손이 가장 삼손 다울 때는, 하나님에게 그 힘을 쓰임받을 때였고, 솔로몬이 가장 솔로몬 다운 때는 그의 지혜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을 때였고, 마리아가 가장 마리아 다울 때에는 그녀의 값비싼 향유 옥합이 깨트려져 쓰임 받을 때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때로는 그 사람의 소유인 지혜나 재능을 쓰시기도 하고, 을 쓰시기도 하고, 물질을 쓰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에게 쓰임받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재능이 있어도, 학위가 있어도, 물질이 있어도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 준비가 안돼서, 내가 게을러서, 내가 아직 드릴 마음이 없어서,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재물, 그 재능, 그 지식은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 나귀를 보면서 주님은 어떤 자를 쓰시는가?

1) 어린 나귀 새끼-

나귀 새끼를 쓰시고자 한 예언은 스가랴서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태어 나기 500여년 전 이미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리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장면일까?

어리기 때문에 연약하고 힘도 세지 못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쓰시는 것은 우리의 소유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눈에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재능과 물질과 지식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쓰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주님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준비가 안됐는데요, 아직 부족한데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런 변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핑계대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2) 한 번도 타지 아니한

순결을 뜻합니다. 순결한 사람, 순결한 마음. 주님은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 마음이 순전하여 거짓이 없고 정결한 영혼을 지닌 자를 즐겨 쓰십니다.

(요 19: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값나가진 않지만, 비싸지는 않지만,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꺠끗한, 순결한 자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3)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으매

우리가 아무리 순결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

여전히 흠이 있습니다. 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겉옷으로 그 위를 덮습니다.

흠을 가립니다. 우리가 의로와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우리가 쓰임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쓰임받음의 결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9절)

쓰임받는 결과는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나귀 새끼는 그대로 이름없는 나귀의 모습으로 남습니다.

 

쓰임받는 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주님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을 드러내는 데서 유혹이 옵니다.

나귀는 자기의 이름을 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만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쓰임받는 자의 승리입니다.

왜 많은 쓰임받는 자들이 넘어집니까? 결국 자기 이름을 지키려다가 주님의 이름에 해를 입힙니다.

쓰임받고 버려지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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