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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를 만나다 2 (눅 5장 1-11절) 

 

[눅 5:1-1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요한복음에서의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 

->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를 따르고 예수와 함께 거하는 자들이 됨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만남 - 물고기 잡고 있는 때 다가오신 예수님 -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 실재 사건으로서는 마태, 마가, 누가의 증언이 더 유력함 

왜? 요한복음의 특별한 위치

마태, 마가, 누가 -> 공관복음 "같은 사건을 보고 각각의 관점으로 기록한 복음서"

요한-> 제 4 복음서: 요한복음만의 특별한 기술 

가나 혼인잔치, 니고데모와의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38년된 병자.... 요한만 기록한 특별한 사건들

요한의 특별한 신학적, 영적기술들... 

 

마태, 마가, 누가의 기술 중에서 가장 자세히 기록한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 본문. 몇가지 살펴볼 내용들이 있다. 

 

  • 1-2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1. 무리가 몰려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분명 예수가 말씀하시는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부터 듣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2. 바닷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또다른 자들 가운데 서 계신다. 

그곳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는 있지만 앉아있기는 한데 말씀과 상관없이 그물을 닦는 자들이 있다. 바로 어부들의 무리다. 

어부는 고기낚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우선순위는, 관심은 오직 고기낚는 데에 있다. 

지금 예수님이 앞에 서서 말씀하시는 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관심이 그물에, 고기에, 먹고 사는 일에, 오늘 잡히지 않는 고기에, 내일 걱정에 꽂혀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건 그것은 남들을 향한 말씀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있는가? 

 

  •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1. 시몬의 배에 올랐다. 

배에 올랐다는 것은 내 인생에 그가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 내 인생에 개입하셨다. 언제나 주님이 먼저 오신다.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찾아오신다.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다. 

 

2.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무리와 베드로 사이에 서 계시던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멀어지셨다. 무리에서 멀어져 베드로에게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씀은 여전히 무리들을 향한 말씀일 뿐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다. 

오늘 걱정도 걱정이지만 또 내일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데도 그물을 닦았다. 

허탕치고 그물을 씻는 기분이 어떨까? 좋을리 없다. 짜증은 짜증대로 깊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또 그물을 씻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모습은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세월좋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내 배에 올라오신다. 

기분이 좋았을까? 아니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라 명령하신다. 

그물 다 씻어놀고 내일 준비 다 해놓았는데, 계획도 다 세워놓고 이젠 쉴 일만 남았는데 또 배를 움직이라 하신다. 평소 베드로 성격이라면 벌컥 화를 낼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릴리 없다. 주님은 날 보며 말씀하시는데 아얘 귀를 닫고 외면한다. 

그래서 주님은 더욱 베드로와 가까워 졌는데 말씀은 여전히 무리를 향한 말씀으로 표현된다. 

 

  •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 더 이상 무리를 향한 말씀은 끝이 났다. 이젠 직접적으로 말씀이 베드로를 향한다. 핑계될 구석이 없다. 마치 불순종하는 요나의 귀에 대고 하나님이 소리치는 것처럼 애써 성질 참아가며 억눌르며 피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2. 이 말씀은 불순종할 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시간적으로 이제는 피곤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고, 작은 고기배로 가기엔 말두 안돼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시고, 그리고 그물도 다 씻어 정비해 놓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었다. 순종할 이유보다 순종하지 않을 이유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일어났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고 그물을 낚던 그가 말두 안되는, 정말 상식밖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도 불순종의 반응이 아닌 순종의 반응 

 

  • 5절) 선생님 (Master, 주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한 마디로 시몬의 인생은 한낱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 그것도 사람낚는 어부 중에서도 예수의 수제자, 반석이라 불리는 자가 된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의 공통점 - 둘 다 모두에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친다. 

고난이 없다는 말이 없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온다. 반석같은 믿음이 있어도 고난이 오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에게도 고난은 온다. 우리의 착각 -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고난이 오나요? 

열심이 믿으면 고난 안받는다고 어디 나와 있나요? 

 

반석 위의 사람과 모래 위의 사람 - 둘 다 듣는다. 말씀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씀을 외면하면 아얘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고 은혜 받았다고, 깨달았다고, 반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석은 순종할 때 주어지는 은혜다. 아무리 화나고 불순종할 이유가 많음에도 그 분의 말에 귀기울이고 순종할 때 모래 아닌 반석의 신앙이 된다. 

 

설교 말씀 듣고 간증을 들으면 나도 믿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감정이 움직인다고 내 믿음이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 완성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약 1: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나에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애쓰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도 넘어짐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없고 끝까지 자신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고 더욱 말씀을 붙잡는다. 세상의 여건과 환경이 나쁠 때 더 실력발휘를 하고 더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 깊은 데로 가라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얕은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것이다.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살고 있다. 깊은 곳에는 조금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 얕은 물이 안전하니까.. 깊은 물의 파도를 두려워 하고 단지 쉽게 피할 수 있는 얕은 물 가에서 산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고난 없기 위해, 남들처럼 살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이지만 그건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 지금 너무 힘들다.
-> 그런 힘듦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힘들기에 날 따르라는 것이다. 

힘드니까 이젠 너 의지 하지 말고, 상황 의지하지 말고, 감정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너의 집을, 너의 배를, 교회의 주인을 사람아닌 주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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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를 만나다 1 (요 1:35-42) 

 

[요 1:35-42]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스가랴 - 메시야를 기다리라는 Vision -> 성취 
  • 세례 요한 -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 준비하라. 길을 뚫어라. 대로를 만들라. 돌을 제거하라. 여리고를 무너뜨려라.  
    • 회개의 세례 
    • 청빈, 순결, 증언 - 돈, 섹스, 권력 
  • 오늘 말씀 - 드디어 메시야를 만난 자들, "만나다"는 것은 경험하고 깊게 사귀다.
    • 중생에서 성결로 이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 자라가야 된다. 깊어져야 한다.  

 

첫 제자- 안드레와 그 동생 시몬 베드로 -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내용과 요한복음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 누구를 통하여 만나는가? 세례 요한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증언을 듣고 -> 증언, 증거, 선포를 듣고 그들은 준비되었다. 
    • 세례 요한의 증언 :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6절) 
    • 이는 앞서 증언한 29절의 내용을 반복한 증언이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양 (순결, 흠 없는)  Vs 세상 죄 (더러움, 죄로 가득찬) 

그의 성품과 그의 사역, 그의 운명을 종합한 증언이다. 그는 거룩하신 자로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제물로 바치어질 양이다. 

 

[요 1:37-39]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 그 증언을 듣고 그들은 예수를 따르고 예수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묻는다. 
    • 왜 예수를 따르는가? 말씀을 듣고 나서이다. 어떤 이는 병을 고치기 위해, 어떤 이는 어떤 모임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이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런데 안드레와 시몬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를 따른다. 
    • 처음에 예수는 그들이 따르건 말건 그의 길을 간다. 쳐다보지 않는다. 어느 때 우리가 예수를 따라도 쳐다 보지 않으실 때가 있다. 난 내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 기독교는 내가 다가가는 종교가 아니다. 그가 내게 다가오시는 종교이다. 이들의 만남을 다룬 다른 복음서를 읽으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내가 다가가는 열심으로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가 나를 보셔야 한다. 
    • 돌이켜 그들에게 묻는다. 주가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물으신다. "무엇을 원하느냐?" (What do you want?) 

복음서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묻는 질문이다. 무엇을 원하느냐? 날 왜 따르느냐? 왜 신앙생활 하느냐? 왜 교회 다니느냐? 

그냥 공동체가 필요한 것인가?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것인가? 

관심받고 인정받는 제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큰 일을 하고 싶은 것인가? 

 

눈 먼 바디메오에게, 우물 물을 뜨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그리고 나에게 주님은 물으신다. 

"무엇을 원하느냐?" 

우리가 예수님께, 교회에게, 혹 목사에게,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친절, 사랑, 관심, 보호....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나 있는가? 아니면 그냥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아니면 남들과 휩싸여서 그 목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 안드레와 시몬이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라고 대답한다. 묻는 것과 대답하는 것이 다른 것 같다. 
    • 영문으로 보면 좀 더 이해가 가까워진다. 
    • "what do you want?"  "Rabbai"..."where are you staying?" 
  • 그들은 선생을 원했다. 랍비는 학교 선생님과는 다르다. 삶의 모든 지혜와 목적과 방향을 함께 하는, 함께 동거동락하는 존재가 선생이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지도해줄 랍비를 원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머무는지 물었다. 왜? 
  • 와서 보라 (Come...and you will see) 

무엇을 원하느냐? 할 때 랍비요! 그런데 그 랍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을 인도할 선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간격을 두고 말씀하신다. 

"와라. 그럼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은 주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여정은 주님께서 머무는 곳을 향하게 된다. 

그 분의 삶의 모든 방식,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행동, 그 분의 기도, 그 분의 사역을 바라보며 함께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 분의 부르심과 나의 머뭄이 함께 할 때 비로서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 1:41-42]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주님의 오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다가가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름이 바뀐다. 삶이 바뀐다. 아브람이 아브라함되고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 시몬이 게바가 된다. 

성질대로 살던 그가 요동치 않는 반석이 된다. 

 

신앙은 주님이 계신 곳에 다가가 내 이름을, 내 본질을,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가? 

그와의 만남을 위해 준비하고 예비하고 있는가? 

그와 함께 자신이 바뀔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이 주님을 통해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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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주의 길을 뚫는 자 (막 1:2-8)

 

[막 1:2-8]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태, 누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요한 - 태초부터 존재했던 예수 

마가 - 세례 요한의 기사로부터 

 

  • 세례요한 -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자 (구약에서부터의 예언) 

 

 (출 23:20-21)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 왕이 행차하시기 전 사전에 먼저 와서 도로를 정비하고, 걸림돌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 

 

  • 세례요한이 한 일 - 회개의 선포와 세례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단지 세례를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외친 것이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것 - 회개의 세례를 행하고 전파하는 것 
  •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준비한 것 

[막 1:6-8]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 청빈함 (Poverty: noble poverty, honest and poor)
    • 순결함 (Purity)  
    • 증거, 선포 (proclaim) 

 

<-> 개신교 목회자들의 필독서: 리처드 포스터 "돈, 섹스, 권력" 

돈의 반대 - 청빈함, 섹스<-> 순결함, 그리고 올바로, 바로 증거하기 위해서...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목회자들을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여전히 가장 많이 넘어지는 것 - 이런 것들 

영성을 공부하기 전까지 청빈과 순결함이 초대교회로부터 근대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최고 덕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

  • 세상과 타협하고 부유해지는 불편한 삶이 아닌 정직하고 거룩하게 자족하며 사는 삶
  • 신앙에서 순결함의 반대 - 우상숭배... 내 안에 있는 우상, 하나님이라는 또다른 우상을 만들지는 않는지...그리고 너무나도 널려 있는 세상의 우상 
  • 그리고 증거하는 삶, 세상의 힘의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삶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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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 기다림의 끝에서 만난 메시야 

 

[눅 2:25-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대강절,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 이 그리스도의 오심의 3중적인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기다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말을 삶으로 가장 잘 보여준 사람으로 등장한 인물 - 시므온 

 

  • 그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말씀을 듣고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 보면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며 기도 생활하는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도 매일 같이 말씀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도 그것대로 살지 않는 형식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의로움의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며, 반대로 말씀은 의로움, 바로 관계를 통해서 온전해 짐을 보여줍니다. 
  • 자기 편의대로, 자기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말씀을 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스시"라는 말인데 이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와주는" "위로하는" "대신 요청하는" 더 나아가 "구원하는"의 뜻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람도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성전을 찾은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축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 자지 결코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메시야를 축복한 인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것보다 비교 할 수 없는 것 만큼 큰 사건 - 바로 시므온의 축복 사건입니다. 

 

메시야를 축복한 후에 시므온은 천지의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자기의 사명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눅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성령으로 부터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Vision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은 그가 죽기 전에 성취하고 나서야 온전한 믿음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말은 묶였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해졌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았던 모든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신앙의 모든 숙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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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만으로는 기다리지 못한다. 희망을 지닌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림의 목표는 희망이며 기다림의 과정이 인내인 것이다.

 

1. 창조 신학, 창세기의 시작 

  • 바벨론 시대의 사정으로 돌아가 그 당시 이들의 충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벨론 유배는 한마디로 야훼 불패의 신앙의 패배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송두리째 뒤엎는 사건이었다. 절망한 이들은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예루살렘은 도대체 뭐고, 이전에 주었던 땅, 이 땅은 무슨 의미였나? 이스라엘 왕국이 무너진 이 마당에 신앙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백성이란 우리 꼴이 도대체 뭔가?" 모두들 이런 회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데서 피어난 큰 획이 있었으니 이른바 "창조신학"의 대두였다. 
  • 이제 이들의 역사는 끝이 났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이 역사를 끄짚어내기 위해서는, 이 역사보다 더 큰 분, 역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분이 필요했다. 누구인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이제 성전 중심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게 된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분을 조명한다. 역사 보다 큰 분은 하나님이시고 역사보다 큰 개념이 창조다.  창조는 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있는 것도 다 없애는 것(노아)도 창조이다. 
  • 제사장들은 창조기사들을 종합하여 지금의 "창세기"를 편찬한다. 이 효과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회복이다. 창세기는 바벨론에서 우상 숭배에 빠지고, 절망에 빠졌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우상보다 더 큰 분이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하였다.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가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을 붙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 두 번째는 예언자 그룹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것이 이사야이다.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39장까지는 주로 "망한다, 망한다"는 얘기를 하고 40장부터는 "위로하라, 위로하라,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회복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 제 2 이사야가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창조에 대한 기사가 굉장히 많다. 

(사 48:12-13)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 이 말씀은 땅도 일어서고 하늘도 일어서는 판인데 내가 너희를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은 어떠하랴는 소리이다. 

(사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아직 너를 버리지 않았다. 두려워 마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창조주다. 역사는 내가 만든다. 걱정하지 마라." 이 말이다.

(사 45:7-8)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 결국 이 말씀은 천지개벽을 이야기한다. 

 

  • (사 55:8-9)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우리가 고통 속에, 시련 속에, 실패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왜 이런걸 저에게 주셨습니까?" 그 때 주시는 답변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섭리, 경륜은 우리의 생각과 방법과 다르다. 그러나 참이고 바라고 선하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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