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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주일예배 설교'에 해당되는 글 327건

  1. 2012.10.01 9월 30일 주일예배 영원을 준비하는 삶 (1)
  2. 2012.09.23 9월 23일 주일예배: 언약궤와 조각목 (1)
  3. 2012.09.16 Transformation – 변화 (1)
  4. 2012.09.10 주일예배 설교(9월 9일) 삶이라는 이름의 전쟁터 (4)

본문: 누가복음 12 13-21

12장 첫 절을 보면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예수님을 보러, 그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 수많은 무리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수많은 무리 중에 예수님께 개인적인 것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인생 일대의 큰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언제 다시 못 올 인생일대의 기회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단순한 그의 고민이 아닌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지금 예수님에게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고민 내용- 형이 하나가 있는데 지독한 이기주의자, 욕심쟁이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남겼는데, 이 형이 나에게는 한 푼도 안주고 혼자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니까 내 법적인 권리를 좀 찾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공의가 나에게 좀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 여러분이 지금 동생의 입장이라면 동생의 고민이 이해가 가십니까? 예수님께 수많은 무리를 뚫고 나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고 나와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동생의 고민이 깊이가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의 답변을 하십니다. 누가 나를 너의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러면서 더 뜻밖의 질책을 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해서 고민고민 하다가 예수님께 그 고민을 들고 나온 사람에게 주님께서 탐심을 물리치라고 질책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알아 듣도록 비유로서 예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한 부자가 그 해에도 풍년이 들어 소출이 풍성해서 곳간을 헐어 새 곳간을 짓고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고이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영혼아, 여러 해 내가 수고해서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덧붙여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지금 예수님께 나온 사람이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삶의 긴박한 문제, 가장 고민이 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솔직하게 고한 것에 예수님이 지금 탐심을 물리치라고 질책하십니다. 똑같은 일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났다면 그럼 우린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눌 적에 예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여서 영원, 영생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 믿음의 비밀을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제한 없이 영원히 사는 영혼과, 제한된 세월 속에 태어나서 살다가 사라져 없어질 육체, 즉 영육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살던, 지옥 불에 떨어지던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오직 만물 중에 인간 만이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육체는 반드시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이 이렇게 제한된 육신에 갇혀 삽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에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던 죽었다, 끝났다라는 말 대신 돌아갔다. 별세(세상과 이별했다)라고 누구나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을 영육을 지닌 존재로 지으신 후에 그냥 내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제한된 세월 속에 살다가 죽어 없어질 육체에는 땅에서 나오는 것을 식물로 주셔서 먹고 살게 하시고, 영원히 사는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어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 1:28-29]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4:3-4]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è  , 흙으로 나온 육신은 땅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살고, 영원히 사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먹고 살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땅에서 나온 음식도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떡은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때에 먹는 것이지만 말씀은 영혼을 위해 먹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말씀이 더 중요하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탄의 모략- 지금 당장 떡이 있어야 사는 것 아니냐? 영원을 생각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가?

그럼 왜 처음부터 영원히 살도록 하시지 육신을 두어서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도록 창조했는가? 영원히 사는 인간의 영혼을 육신이라는 제한적인 존재 안에 두신 것은 육신으로 살아갈 때에 영원의 삶, 영혼으로 살 영생의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라도 죄 아래서 저주와 온갖 고통 속에 살다가 육체가 끝나는 순간에 그 죗값으로 저 불타는 지옥에 가서 쉼 없는 고통을 세세토록 당하는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가 인생을 마감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은 죄 때문에 참으로 참혹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해도 오직 육신이 있을 때 뿐입니다. 육신이 끝나면 육을 위해 간직했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때에 오직 육신만 위하다 가는 사람은 모든 인생이 결국 밥먹기 위해서 살다 간 사람입니다.

ex) 스티븐 잡스, 문선명….

인생을 잘못 산 사람만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아담 이후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육신의 때가 끝나는 때에 지옥에 갈 운명에 처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 영혼의 멸망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주를 보내셨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è  오직 우리가 지옥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 만이 지옥의 저주에서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천국간다는 말보다 더 귀한 복음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그가 대신 당하셨다는 것이요,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오직 그 분만이 죄가 없어서 지옥 불이 그를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변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하심이 세상이 다 알도록 역사상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도록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역사라는 영어 자체가 그분의 이야기라는 ‘HIS-STORY’ 에서 온 말이고 믿는 나라나 안 믿는 나라가 달력의 년도를 그 분의 삶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까? 역사상에 그 분만이 내가 너를 위해 죽었고, 네가 나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나 공자,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네가 나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데에 꼭 지나가야만 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 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가슴 중심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가 없이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통회와 자복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후에야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개와 감사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죄, 나의 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 다른 사람의 실수,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때문에 내가 불행하고 방해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고 나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의 죄의 영향을 내가 받을지라도 내가 신앙 안에 서 있다면 나는 죄악 된 환경 속에서도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고, 평안함을 누릴 수 있고, 안전한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 받을 때에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에 다다를 때까지 회개와 감사는 반복적으로 거듭해서 우리의 영혼을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도들의 문제는 회개를 구원받았을 때에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날마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례 그렇듯이 하는 형식적인 회개가 많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올 때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데 말씀을 들어보면 다 예전에 회개 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저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만나 회개할 시간은 오직 육신이 있을 때뿐입니다. 육신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갈지 모를 위험하고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시한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 늙은 육체라도 육신만 있으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 공로 앞에서 죄를 회개할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정에, 자신에게 문제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죄를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것을 탓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탓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죄의 영향력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불행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 나의 죄를 전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조롱 받고, 불평을 받았어도 한 번도 그들의 죄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남의 탓을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이 일만 없으면, 이것만 아니면 하면서 자신은 의인이라고 우기는 것이 우리 자신들 입니다. 나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교회가 위기가 처하고,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서로가 남 탓만 합니다. 누구 하나 내가 서지 못해, 내가 양보하고, 내가 참지 못해 그렇다고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백하는 곳에 회복을 주시고, 치유를 주시고, 부흥케 하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잘했다고 하지만 교만하고 외식하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너희들이 바로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그런 소자들을 가장 반기시고 세우시고 축복하시는 것 아닙니까?

육신이 있을 때만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을 수 있고 육신이 있을 때만이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해 주께 충성하여 하늘나라에 영광의 기업을 만들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 육신이라는 인생의 때만 살 뿐 영적 존재로서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인생을 다 사용하면 자기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기회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육으로 지으신 것은 주어진 인생의 때를 육신을 위해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하여 자기 영혼의 부유를 도모하게 하려고 영육으로 지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 육신의 요구만을 좇아 육신의 때라는 제한된 세월을 모조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니 자기 육신을 영혼의 때를 위한 소모품으로 값지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월을 알뜰하고 값지게 활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육신이 살 수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물질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부지런한 자는 결코 육신의 일에 게을르지 않습니다. 단지 육신의 일만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것만 채우다가 영혼의 일을 게을리하고 결국은 자기의 육신만 배부르게 하는 탐심만 가득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을 위하여 살고, 현실에서는 세상에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 후에야 시간 남으면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부르시면 당신의 영혼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우리의 목숨은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낭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생사화복이 하나님께만 있나니 내가 육신이 있을 때에 내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내게 준 복된 육신의 시간을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알뜰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육신의 떡이 우선이라고, 천하 영광이 우선이라고, 육신의 때가 우선이라고 말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때는 회개할 기회, 거듭날 기회, 성령 받아 충성할 기회, 자기 영혼을 부요케 만들 기회입니다. 육신이 죄 아래서 정욕을 좇아 살면 천박하나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하여 값지게 살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 최고의 기회요, 기업이 됩니다.

가족의 이야기-

할아버지, 고모들, 고모부들신앙대신 세상의 것 추구.

한 세대도 안 되어 무너져가는 모습들.

고모들 셋이 어머니를 찾아와서 우리가 잘못 살았고, 네가 우리 가정을 지켰다. 잘했다하는 말을 결혼 한지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함.

그리고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죽은 듯이 기죽으며 지내던 우리 가정-> 세우심을 받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왜 영원을 준비하며 살지 못하고 곧 썩을 육신을 위해서만 사는가? 왜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만 복을 비는 종교가 되어 버렸는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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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0.01 21:40

    아직도 영혼,영원이라는 말이 익숙하진 않지만.....
    "내게 준 복된 육신의 시간을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알뜰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 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그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제목: 언약궤와 조각목

본문: 출애굽기 25 10-2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공급처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한 일은 그들이 이전의 애굽의 풍습과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율례와 규례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먼저 택하시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지껏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때 만큼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말할 때, 일주일 동안 세상 속에서 힘들며 고생하다가 주일날 말씀으로 공급받는 날이라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전제가 빠진 말입니다. 예배는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날이 먼저입니다.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사렙다 과부가 없는 중에서도 드리니까 하나님의 공급이 이어지는 것이고, 어린 소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리니까 5천명이 양식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먼저 드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날 예배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께 받으러 오는 날이라는 잘못된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받는다고 할 적에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이 됩니다. 내가 공급받으려는 곳을 찾으니까 화려한 곳, 큰 곳, 풍족한 곳을 찾습니다. 내가 드리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온전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 25:3-9]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è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실까? 누구나가 헌신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헌신은 부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형편에 맞게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헌신의 모습이 있다.

출애굽기 38 24-31절을 근거로 보면 이 때에 모인 것이 금 29달란트 730세겔, 100달란트 1775세겔, 70달란트 2400 세겔이었는데 이것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금 1.5, 5, 3.5톤 이었다고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과 은과 놋 외에는 그리 귀한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 귀해 보이지 않는 성막 재료들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6장에 보면 백성들이 아침마다 예물을 가져와서 너무 많아 지니까 모세가 명령을 내려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공포하게 됩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할 때도 스룹바벨에 의해 2차 성전을 재건 할 때도 힘든 중에 백성들이 예물을 가져왔는데 항상 넘쳐서 넉넉한 가운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헌신의 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헌신의 결과입니다.

, 이제 성막을 지을 모든 재료가 완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성막의 설계를 맡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대개는 먼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서 전체의 모양을 구상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구상을 할텐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제시하신 것은 지성소에 있을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바로 성막의 기초고, 설계이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공의이고, 능력이다. 속죄소는 인간의 죄의 가리움이고, 하나님의 은총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긍휼이다. 이 두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을 넣어둡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이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이고,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어두었습니다.

1.     돌판 말씀   만나- 육적 말씀- 그리스도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성령-> 삼위일체

2.     돌판- 말씀   만나- 생명의 떡   싹난 지팡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그리스도를 상징

3.     백성의 죄- 돌판-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진 돌판    만나 항아리- 그날 먹을 것을 다 먹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  싹난 지팡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망과 원망

è  우상숭배, 불순종, 원망과 불평에 대한 죄를 고백하고, 속죄소로 그 죄를 가리움으로 교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

교회의 기초는 먼저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기초된 것이고, 우리들의 죄의 고백과 그 죄를 가리움에 기초를 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언약궤의 주요 재료이자 성전 모든 기구에 있어서 목재의 재료로서 사용되었던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이라 번역된 이 나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성경과 KJV만은 이를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는 잎이 길고 넙적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중동지방의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아카시아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게 잎이 작고 꽃이 피지 않습니다.

조각목은 가시가 많고 볼품이 없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 궁전을 지을 때 쓴 백향목에 비하면 조각목은 참으로 하찮은 건축 재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을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도 조각목 같이 별 볼품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큰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쓰임 받는 우리는 하나같이 조각목에 불과한 자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조각목의 특성을 조금 더 깊게 하나하나 살펴보며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를 발견해 봅시다.

1.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까지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모나게 찔러대며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남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찔러서 상처투성이를 만들 때도 있습니다.

ex) 아이에게, 아내에게 찔러대는 모습. 화를 내다가 화에 다스림을 당하는 내 모습을 보며 놀라고이런 모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하나님, 과연 내가 과연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조각목입니다.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이런 부적합한 나무를 성막 재료로 쓰라고 하셨을까요? 볼품없는 조각목이지만 다듬어서 귀히 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각목처럼 남에게 계속 상처주고 시비하며 찔러대는 근성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교회 일꾼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성전 기둥으로 쓰임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찔리고 맞으셨지만 남을 찌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아버지, 저들이 몰라서 그렇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조각목처럼 모나고 찔러대는 근성이 나타날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최후 순간까지도 인간을 사랑하신 주님의 성품이 내게서 재현하도록 주위 모든 이를 사랑으로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2.     바짝 마른 가지

조각목이 가진 둘째 특징은 늘 비틀어질 정도로 바짝 말라 있다는 것입니다사막 식물 중에 가시가 많은 것도 잎을 통한 수분 방출을 최대한 막고 조금이라도 수분을 더 보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사막 땅 한가운데서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비로 수분을 공급하고자 몸부림치며 허덕이는 조각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렇게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습과 닮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도 사막처럼 목마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릅니다. 세상은 영적 갈증으로 목마른 곳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지식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도 그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더 목이 마른 곳이 세상입니다. 영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족함을 느끼는 이유도 영적 갈증을 해소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이유는 여전히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비틀어진 조각목을 성막 건축 목재로 선택하신 것은, 사막의 조각목과 다름없는 우리 인간이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3.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

조각목은 사막에서 모래와 바람에 많이 얻어맞으며 자라는 나무라서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조각목은 아주 단단하고 억센 악마디가 많습니다. 이 악마디 때문에 뿌리에서 만들어진 진액을 원활하게 공급받는 일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일도 조각목처럼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일 때가 잦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애매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은연 중에 고립 당하기도 합니다. 교인들 중에 뜻하지 않게 왕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목사도 성도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어 난감해질 때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 가는 것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조각목처럼 악마디가 너무 많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고립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이 많은 성품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들이 무슨 권면을 해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주려 해도 세상에서 너무 많이 얻어맞고 속아서 그런지 교회에 와서도그것이 사실일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라는 진액을 순수하게 공급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내 속에 있는 완악함이 악마디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고립해 성장을 방해합니다.

또 조각목은 항상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삽니다. 사막에서는 모래산이 만들어질 만큼 큰 회오리바람이 불기 때문에 언제 모래더미에 묻힐지 모릅니다. 바싹 메마른 모래땅이라 언제 말라죽을지 모르고, 바람이 모질게 불어 몸에 난 가시들이 서로 찔러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지속하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이처럼 회오리바람에 순식간에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아무도 도와줄 자 없이 죽음의 두려움 속에 홀로 사는 것이 조각목의 운명입니다. 우리 인간도 조각목처럼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이런 상황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막의 조각목처럼 고립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신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으로 이 땅에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 천사를 보내어 지키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있다가 목숨이 다하는 날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영혼의 때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l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해야 은혜가 입합니다.

조각목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예수를 간절히 찾게 됩니다. 나 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나고 어리석어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껴본 사람만이 살려는 본능으로 주님을 찾아옵니다.     탕자가 아비 집을 떠나서 온갖 무시, 멸시, 천대 다 받고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온 것처럼, 자신이 조각목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마신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압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감사를 느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조각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은 절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예수밖에 없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각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이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하던 버릇대로 자기가 정한 행동의 기준, 믿음의 기준을 갖고 그 이상은 절대 행동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믿음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12:30) 이 주님이 정하신  믿음입니다. 스스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신앙생활을 자기 수준에 맞추어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적당히 해도 신앙생활은적당히가 아니라죽도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한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임의대로 내가 정한 것만 믿는다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없는 조각목 같은 인생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임 받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이 조각목과 같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l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싯딤나무는 커다란 가시가 많고 심하게 뒤틀렸으며, 악마디도 많은 나무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무엇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각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새에 맞도록 잘 잘라야 합니다. 조각목을 성전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섯 자로 잘라야 하는데 나무가나는 일곱 자니까 일곱 자 그대로 있겠소라고 자기주장을 한다면 그 나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히 내 지식에 맞게, 환경 수준에 맞게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는 조각목의 자세가 아닙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합니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척하는 것,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것,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 가지지 못했으면서 가진 체하는 것 등 모든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을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성령의 지식과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조각목을 소용에 맞게 치수대로 잘라 쓰듯,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발가벗은 자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 주제에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가진 것처럼 껍질로 싸고 위선을 떨고 있으니 그 껍질을 속히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성,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한 근성들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다시 나를 싸야 합니다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재빨리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껍질을 벗긴 조각목처럼 연약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팁니다. 제일 속상할 때 제가 욕먹는 것도 괜찮고, 헌금이 안나와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무슨 일이던지 성도가 안나오면 죽을 만큼 속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을 인생입니다. 예배에 나오셔서 그 관계의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이 죽습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껍질 벗긴 조각목처럼 금세 부서지기 쉽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오면 쉽게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해 비틀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런 나약한 근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근성 그대로 놔두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싸라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보인다면 내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육신의 생각에 머무르는 나만 보이면 썩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비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쏙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주님만 밖으로 나타나시면 달라집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그를 부드럽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고, 만족하게 만들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듭니다. 금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뿐더러 언제 어디서나 제값을 지닙니다.

조각목의 변형을 막고 성전 기둥으로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서 금으로 싸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고 나를 통해 예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근성과 나의 자아가 드러나거든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했구나. 주님과 떨어져 나 홀로 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깨닫고, 부러지기 전에, 비틀어지기 전에, 썩기 전에,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 전에 빨리 주님 안에 들어가서 금으로 조각목을 둘러싸는 것처럼 예수로 나를 둘러싸야 합니다.

예수의 피 속에는 예수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받아 마시라는 것은 예수의 특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았을 때는 별의별 특성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능력도 나타나고 이적도 나타나고 악한 영도 몰아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합니다.

우리는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쓰임 받는 것처럼 예수의 특성만 나타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가진 못난 근성과 기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크리스천 즉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말인데, 안디옥 교인들은 그 당시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령이 충만해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예수쟁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원래 의미

입니다.

조각목은 정금으로 싸일 때 비로소 성전, 법궤, 기둥, 제단 등을 만드는 재료로 훌륭히 사용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예수의 피 공로로 씻음받고 예수의 특성을 나타낼 때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도 똑같이 주님의 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인를 조금이라도 나타내려 하면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굉장한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다가 10, 20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능력이 싹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전부 자기가 가로채서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고 영광 받으니까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전도도 자기가 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난 순종만 한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만 앞세우고 나는 주님 뒤에 가려서 주님만 보이게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능력을 나타내며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높여 드리고, 이해해 드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모든 것을 맡겨야 하나님이 제한 없이 역사하십니다.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 읽다가 가장 포기하기 쉬운 장; 성막, 계명

그 곳에서 발견한 조각목의 진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고 혼자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나같은, 조각목과 같은 쓸모없는 인생을 택하사 하나님의 금테를 입혀서 성전의 법궤로, 기둥으로 삼으신 주님. 우리 성도와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 싶다. 우리 모두 조각목인생이 아닙니까?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조각목인 것을 인정하면서 가시에 찔려도 우린 원래 그랬잖아, 나도 누군가를 찌르며 살아왔잖아 하며 감싸 안아주고 나 자신을 주님 앞에 고백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금테를 입혀서 정말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쓰임받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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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23 22:51

    말씀 내내 나에게 있는 가시들이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남을 찌르고 나를 찌르고 또 예수님을 찌른 내 가시들....조각목의 말씀 의미
    잊지 않고 항상 되새기며 나를 다듬어가도록 또 노력하겠다는.......
    또 찌르고 찔리겠지만 그래도 노력하며 기도하겠다는 생각밖에 할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 창세기 32:22-32

영화 Transformer – 자동차가 살아있는 로봇이 되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 어렸을 때에 만화영화의 내용같은 이야기들. -> 아이들만 볼 지 알았는데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영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 만화가 영화가 되었다. 어른들은 왜 이 영화에 열광했는가? 꿈으로만 꾸던 일들이 실재 영화가 되어 나타났다. 변화를 향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사람은 항상 변화를 꿈꾼다. 변화하기 위해 세미나도 참석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고 방송을 본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네가 바꾸기를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바꾸어 주겠다. 넌 무엇을 바꾸기를 원하느냐? 하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단 한가지만 여러분이 바꾸고 싶은 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시고 싶은가?  , , 직업, 교회 건물, 남편이나 아내?

실재로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사람들의 10년 뒤의 삶을 조사해 보니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집과 차를 바꾸거나 해외로 집을 옮겼고, 많은 퍼센티지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생기니까 실재로 배우자를 바꾼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물론 전액 교회나 어려운 단체에 헌금을 낸 사람도 적은 숫자이지만 있었다. 세상의 복, 물질의 축복은 대개 우리의 외형을 바꾸어 준다. 직업을 바꾸어 주고, 옷 차림새를 바꾸어 주고,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내면을 바꾸어 준다.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 준다. 정욕과 죄로 가득 차 있거나 지배 받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열매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변하는 사람이다. 내면이 변화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고, 내가 썩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다듬어 가신다. 날마다 변화시킨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성화이고 성결이다. 내 뜻, 내 욕망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우리 인생 과정 가운데 있다.

오늘 이 시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변화 될 수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는지 신앙인의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수천 년 전에 천사와 벌인 씨름이 오늘 당신이 변화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 수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지금의 나를 향한 살아있는 말씀이고, 변화시키는 말씀이다.  이 씨름을 통해 성공을 희망하던 한 모사가 야곱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되고 그를 통해 나라가 세워지고, 그 민족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씌여 진다. 나 하나 밖에 모르던 야곱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통로, 구원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가 일정한 틀 안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고 씨름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이 장면에서는 변화에 필요한 네 가지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데 그것은 위기, 고독과 인내, 고백, 변화이다.

 

1)     위기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바로 그의 삶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린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이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이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된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이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다. 야곱은 악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 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삶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못한 표면만 신앙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만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없는 초라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이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다. 끝을 보면 드러난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룬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는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이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혹 우리의 삶의 모습은 아닙니까?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인간을 AS하는 매뉴얼-> 성경이다.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변화시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삶 속에 위기, 문제, 짜증나는 상황 혹은 좌절을 겪게 하신다. 왜냐하면 현재 경험하는 고통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좀처럼 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담배, 맨날 끊는다고 하면서, 줄인다고 하면서 하지 못하는 이유그냥 지내는 것이 줄이고, 끊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에  그런데 체중이나 식생활 때문에 몸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그땐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다.

 

2)     고독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이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이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이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 수가 있는가?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낸다. 왜 나누어 보내나?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이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이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뢴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 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낸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 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이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다. 계속 두려움이 남는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이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지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다. 오직 그 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이럴 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그 분은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3)     인내 끊질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나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변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 고백하게 한다. 그런데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변화를 원하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것들을 놓치는 경우는 너무 빨리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또 쉽게 낙심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즉석에서 얻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음식부터 만남이나 성공 등도 즉석에서 얻기를 원한다. 그래서 한 번 기도하고 그 응답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어떤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으면 중단하고 과거의 나,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나로 돌아간다.

진정으로 우리가 변화를 원하더라도 그것이 단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칠 때에도 삶의 과정을 통해서 쌓여왔던 습관이나 상처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시고 다듬어 가신다.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일이 습관이 되려면 적어도 6주 동안 매일 같이 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는 것에 습관을 들이려면 최소 6주 동안 매일 같이 읽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작정한다. 그런데 2-3일 읽고 며칠 동안 잊었다고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6주는 켜녕 2주도 지속적으로 매일같이 읽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이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이.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을 찾도록 나를 막다른 곳으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갈구하게끔 하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나의 연약함, 더러움을 인정할 때에 부르짖어 나를 고치게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매달리는 것이다.

4)     고백

천사가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왜 그것을 물었을까?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사기꾼이라는 자기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 자신의 성품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그를 아프게 한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라반과 지겹도록 속고 속여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넌 어떤 존재냐? 너의 성품이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사기꾼입니다하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야곱이라고 밝힌 것은 그의 성품에 존재하는 결함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점, , 연약함, 실수 등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에 손대주지 않는다.

è  AS: 내가 말한 고장난 부분만 고쳐주지 그 외의 것은 손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가 더 많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내 환경 탓이야. 내 부모 때문이야.”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힘든 시대다. 

그 분은 왜 우리를 통해 그러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일단 우리가 인정하면 더 훌륭하게 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자원과 능력을 베푸신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았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기는 자인가, 지는 자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여러분들은 어느 것을 행하는가? 항상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가? 매일 매 순간마다 이긴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니었는가? 마음으로는 진다고 고백하는데 언제나 행동으로 이긴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는가.

하나님께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철저히 순종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지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나를 비로소 만나 주신다.

5)     변화

야곱이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매달렸을 때에 야곱은 자신이 천사와 씨름한 그 곳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은 그의 새로운 이름, 즉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신 것이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하나님은 야곱의 가능성을 보셨다. 세상적으로 강한 남자가 되려고 애쓰는 야곱의 껍질 속을 꿰뚫어 보셨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약점도 아셨지만 그 아래에 담겨있는 고귀한 성품도 아셨다. “야곱아, 이것은 진정한 네가 아니다. 너는 사실은 이스라엘이다. 너는 왕자다.” 하나님은 사기꾼 야곱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왕자의 모습을 보셨고 그를 통해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진짜 나를 발견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죄에 쪄들고, 변해버린 나다. 하나님이 날 만나 주시고, 고쳐 주실 때, 난 비로소 진짜 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의미: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주석에 기록된 해석

표면적으로는 맞다. 야곱은 항상 겨루어 이긴 자였다. 에서와도 그렇게 라반과도 그랬다. 하나님의 천사와도 당신이 날 축복하지 않으시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엉겨 붙으면서 물러나지 않는다. 언제나 끈질기게 주도하고 늘어져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던 것이 야곱.

25절에 보면 천사가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기록합니다. 천사가, 하나님이 정말로 진 것입니까?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야곱이 주도적인 사람입니까? 얼마나 끈질긴 사람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는 '야곱'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불러라. 왜냐하면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28).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거라. 네가 지금까지는 '야곱'으로 살아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오늘은 하나님인 나와 겨루어서까지 이기고야 말았잖니.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거라.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거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너를 주도하고 하나님이 너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나님이 너를 끈질기게 주도하시고 다스리기를..."

이스라엘의 의미: 히브리 원어 사전-> “이스라> '주도하다, 끈질기게 다투어서 이기다, 다스리다'를 뜻하는 <사라>3인칭 평서형 또는 기원형입니다. 그리고 <>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다.그러니까 둘을 합치면 평서형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주도하다, 하나님이 이기다, 다스리다'가 되고 기원형으로 보면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 된다. 이것이 히브리사전이 내린 이스라엘의 정의이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된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육신의 병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고 내가 연약한 것이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는 통로로서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브니엘은 곧 하나님의 얼굴이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된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이다.

지금 - 다시 한 번 야곱의 기도를 생각할 때....나 자신을 바라보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 굴복할 때...

굴복하고자 하나 매 순간 굴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시간...

여러분은 야곱처럼 다급하지 않은가? 아직 의지 할 때가 있고, 다급하지 않아서 야곱처럼 기도하지 않는가?그럼 야곱처럼 자식도, 아내도 다 필요ㅠ없어지고 정말 홀로 남았을 때에 야곱과 같은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왜 기도 안하는가? 무엇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하다가,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야곱을 통해서 날 바라보고 야곱과 같은 절박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자. 나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야곱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씨름하는 자를 찾으신다. 자신을 걸고 육탄으로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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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9 23:14

    살아가면서 변하고싶을때가 많았지만....특히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더더욱 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벽이라도 부디칠땐 여지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는 제 습성이 나의 변화를 또 방해하고. 주저앉고 말아버립니다.
    하나님과 겨루던 그 무엇과 싸우던 이겨야되는데....끝까지 해봐야되는데
    중도에 주저앉지않으면 변할수 있을거같은데....

주일예배 설교

 

제목: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본문: 왕하 21:1-23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나 사건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델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셔서 다시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올바른 역사의 예를 따르라고 주신 역사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성경의 역사를 우리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성령님께 묻고 분별하여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말씀이고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그 분의 인도하심이다.

여호사밧은 유다의 제 3대 왕 아사의 아들이다. 아사는 그의 부친 아비얌이나 대개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를 하였던 다른 이스라엘 왕들의 모델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삶을 살았다. Ehgks 그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나서 처음으로 종교 개혁을 행한 인물이었다.

[왕상 15:13-14]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그는 태후의 위를 폐위시키는 등 강력한 개혁 의지를 실천했다. 그는 41년 동안 왕위에 앉아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그의 선한 삶은 여호사밧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랫동안 왕위에 있던 부친 아사 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여호사밧이 남왕국 유다의 제 4대 왕으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으며 그때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아합이 왕이 된 지 4년째 되었던 때이다. 아합은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 선지자 때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여겨지는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왕이 되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비대해진 북왕국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일이었다. 그는 국경에 위치한 성읍들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의 부친 아사 왕이 정복한 에브라임 지역에 강력한 수비대를 투입하고 견고한 국고성을 건축하였다

여호사밧은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바알들은 복수로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모든 이방 우상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을 철저히 지켰으며, 계명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사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우상 숭배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무서운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섬기느냐 우상을 숭배하느냐의 문제에서 결정되었다. 여호사밧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겼고 백성들도 그렇게 하도록 지도하였다.

l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섬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제사를 게을리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늘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맞는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인간 편에서 보면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렸고, 기도를 하였고, 말씀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상도 겸하여 섬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아무리 예배를 하여도 두 마음을 가진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여호사밧이 백성들의 신앙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악의 요소들을 제거 해야 했다. 그리하여 여호사밧은 유다 나라 안에 있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제거하였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금하시되 그것들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를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자에 대해서는 벌을 내려 그 죄를 갚겠다고 하셨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상들을 유다 땅에서 제거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 남색을 일삼는 성적으로 문란한 자들도 몰아내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의 신앙을 쇄신하기 위해 소극적으로는 우상을 제거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삼 년에 방백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백성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개혁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레위 사람, 제사장, 방백들을 세워 각 성읍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는 백성에 대한 율법 교육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전체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여호사밧은 한 성읍도 빠짐없이 모든 성읍에 거하는 사람들을 율법으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을 회개시키고 경건한 삶을 살게 하였다.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았고 그 길로 나아갔다.

l  한 목사님과의 대화: 한국의 중대형교회에서 오랜 기간 목회하시던 분-> 답답해 하시며 신학생들이나 신학자들은 올바른 목회만을 생각하고 배우는데, 교회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어떻게 목회를 성공시키냐이다. 바른 목회와 성공하는 목회는 다르다. 신학교에서도 더 실질적으로 목회를 성공하는 법, 큰 교회를 이룰 수 있는 법을 가르치고 토론해야 한다.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è  맞다, 바른 목회와 큰 목회, 속된 말로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목회를 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만약 당신이 교회를 새로 개척하거나 새로 부임한 목사라 한다면, 당신은 바른 목회에 초점을 맞추겠는가? 큰 목회, 성공하는 목회에 초점을 맞추겠는가? 물론 바른 목회가 성공하는 목회로 이어지고, 큰 목회를 하면서 바른 목회를 하면 가장 좋은 것이겠지만,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교회를 연구하면서 느끼는 것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둘이 같이 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è  내려놓음,” “같이 걷기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이 저희 신학교에 오셔서 한국인 학생들을 모아놓고 간증-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앞날이 보장된 삶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은 무엇인가 기도하다가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족과 같이 몽골 선교사로 떠난다. 그런 그의 삶의 이야기를 하며 간증하며 자기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내려 놓으라고 간증하며 말씀을 끝내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마침 기도하면서 우리도 내려 놓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선교사님처럼 하버드 대학도 가고, 서울대도 가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됩시다.” 하면서 기도해서 가슴이 탁 막히고 막막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 교회가 안정되고 큰 교회가 되어야 큰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처음 시작부터 바로 하지 않으면 나중 되어서는 더욱 고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서 생활이 좀 안정되고 여유가 있으면 헌금 내고 십일조 내야지 하고 이야기 하지만 1000원 있을 때 10월 십일조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큰 돈이 들어와도 정직히 내어 놓지 못한다. 그런 신앙 생활 속에 온전한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현재의 많은 목회자들- 누구도 돈 이야기 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헌금생활 재대로 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렇다가 언제 이야기 하느냐? 성도가 제대로 헌금 생활 안 하는 것은 결국 목회자의 책임이고 그렇게 목회자가 성도가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니까 실재로 교회 재정이 어려워진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면 그 때서야 어렵게 헌금 이야기를 한다. 그렇니까 성도들이 생각이 아~ 우리가 헌금 안 하면 교회가 어려워지는구나. 우리가 헌금해서 교회와 목사가 먹고 사는구나 하면서 자기 헌금이 교회 운영이나, 목회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내는 것으로 느끼며 생각하기 시작한다. 목회자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고백을 드리고, 우리 삶의 모든 공급처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헌금을 단순히 교회와 목사를 먹여 살리는 품삯처럼 느끼도록 만든 것이다. 신앙생활의 매사가 마찬가지다.

한국- 선진국인가? 개발 도상국인가?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나라.

OECD- 살만한 나라들이 가입한 곳.

다른 지수는 평이한데 한국이 1등하는 것-> 자살률, 이혼률, 교통사고, 부정부패지수,

가장 최근에 조사한 웃어른에 대한 존경지수-> 끝에서 두 번 째…

è  왜 이렇게 되었나?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의 책임 아닌가?

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본다. 개혁해야 한다. 세계 최대 규모 50개 교회 중에 절반이 한국에 있다. 지금 유럽의 길로 가고 있다. 그 화려한 성전들이 이슬람교의 교회로 다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젊은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저의 책임은 기존 교회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해서 잘된 것은 받아들여 더욱 힘쓰고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리고 고쳐야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이 힘들면서 조심스럽고 어렵다. 그 기준은 항상 말씀일 수밖에 없다.

말씀, 전통, 문화-> 신앙의 통로...좋은 전통은 받아들이지만 (술문화, 담배문화, 이단에 대한 경각심(문선명), 성적인 보수성) -> 그것보다 우선인 것은 항상 말씀이다. 전통이 말씀보다 앞서서 타락한 것이 가톨릭이고 그래서 개신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개혁자이다. 항상 말씀에 빗대어서 자신을 개혁하고 자신을 개혁함으로서 내 식구, 내 친구, 내가 속한 공동체를 개혁해 나가는 것이다. 개신교가 영어로 무엇인가? Protestant-> protest 저항하다. 개혁하다는 의미에서 나왔다. 자신을 개혁하지 않는 성도는 죽은 성도이다. 개혁은 신앙적인 용어로 하면 회심이고, 변화이고, 성결의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전쟁터이다. 끊임없이 죄와 편견으로 물들어 있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고, 잘못된 전통과 싸워야 하고, 그리고 그런 가치관과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말씀에 서 있지 못하면 결코 이 싸움에서 버티지 못한다.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장엄했던 전쟁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이 와서 지금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자손들, 3개국 연합군이 쳐들어 온다고 알려 준다. 모압과 암몬이 어떤 민족인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 할 때에 아내가 뒤를 돌아다보다가 소금기둥이 된다. 그래서 빠져 나온 두 딸이 동굴에서 거하다가 베필이 없으므로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이 모압과 암몬이다. 마온도 암몬 족속의 일파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냐? 다같이 아브라함의 일가, 신앙의 뿌리가 있었던 일가이지만 근친에 의해, 죄악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 바로 모압과 암몬, 그들이 지금 연합하여 여호사밧에게 쳐들어 오는 것이다.

다윗 시대부터 유다에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던 모압과 암몬이었지만 여호사밧 통치 말기에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다에 침공해 들어왔다. 여호사밧은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리고 그는 종교 개혁을 단행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중대한 실책이 있었다. 그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정략 결혼도 하였고 아합의 요구에 따라 아람과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 일 후에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침략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자손이 아람에서부터 왕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려움에 싸였다. 그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며 그는 전쟁의 소문을 듣자 마자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였다. 여호사밧은 이 위기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알고 그분께 구원을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였다.

여호사밧의 전쟁은 우리가 인생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나의 영적 전투에서 적이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누구나가 알 것 같지만 시제 인생에서 내 영적 전투의 적이 누구인지 분별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적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나를 못살게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에 있어서 우리 신앙생활의 적은 우리 자신일 경우가 많다. 우리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이다.

지금 여호사밧을 쳐들어 온 적은 표면적으로는 모압과 암몬이다. 이들은 잘못된 신앙인, 세상적인 신앙인, 음란한 신앙인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아합왕과 화친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삼은 자신의 죄악을 보았다. 그래서 3절에 나온 여호사밧의 두려움은 자기의 죄악에서 나온 것이다. 신앙 안에 온전히 있으면 두렵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우리 자신이다. 여호사밧은 전쟁이 나자 자신의 죄를 알았다. 자신의 죄악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모압과 암몬을 향해서만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두려웠지만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낯을 향하고 간구하고 온 백성과 함께 금식을 선포한다. 오직 자신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 분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왔는데, 여호사밧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한다.

6절부터 13절까지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모압과 암몬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8-9: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적에 성소에 나와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의 영적 원리: 자신의 처지와 부족함을 솔직히 주님께 아뢰라.

(대하 20:12)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è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여전히 우리 스스로 살 방도를 찾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날 안 도와 주신다고 하며 원망한다. 위기의 상황에 정말 하나님만 의지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 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방법에 의존하는 것. 그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è  불행히도 대개의 경우 우리는 마지막 수단으로 기도를 하고 기다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l  하나님의 응답

[대하 20:15-대하 20:17]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하나님이 하셔도 우리가 할 일은 그들에게 내려가고 맞서고 만나는 것이다. 이것에도 용기와 담대함과 믿음이 필요하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신앙에서 흐트러지지 말고 삶에 성실히 임하며)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l  여호사밧의 응답

(21절)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미리 찬양대를 뽑아서 감사드린다. 부대 선두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노래할 백성들을 선택했다. 승리하기 전에 믿음으로 찬양하는 법을 가리켜 주신다.

상상해보라. 산 정상에서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다른 산 정상을 본다. 다른 쪽에서는 세 나라 군대가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부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장면에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찬양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모두 나와서 선두에 서라.” 이스라엘 군대는 성가대를 선두에 세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적진을 향하여 진군해 나간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할 때 취했던 전쟁방식.

(20)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목사로서 제일 두려운 것- 신앙과 삶은 다르구나. 현실과 신앙은 다르구나.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눈감아주고, 그냥 이 땅에서 가족들과 같이 평화롭게 사는 것…. 그런 목사가 될까 두렵다.

지금도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기도한다. 나 자신을 이기는 것도 힘들지만 성도들을 이끄는 리더로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날 지키실 것이다. 세상의 전통과 가치관을 분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배워야 할 전통이 무엇인지, 내가 따르지 말아야 할 전통이 무엇인지 분별할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 내 성도들이 날 믿어주지 못하고, 오해하고, 떠날 때…. 목사는 성도에게 외면 당할 때, 사명의 의미를 상실한다. 여호사밧이 그 말을 하는 것 같다.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여러분과 함께 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제 말을 믿어주는 성도님들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 하나 되어 정말 교회다운 교회, 예배다운 예배를 만들어가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그런 로고스 교회를 세우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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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수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0 12:15

    삶에 어려움이 날 삼킬것같은 순간에 생각 합니다
    주님에 십자가를....
    그리고 선포합니다 이세상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주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교회에 주신 약속에 말씀이 있기에 선포하며 갑니다
    말씀을 듣는내내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목사님 화이팅!!! 나도 화이팅!!! 우리교회도 화이팅!!!

  2.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0 14:26 신고

    "이 세상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고백이 가슴에 남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세상을 이갈 수가 없고 말씀이 거하면 세상도 하나님꼐서 다스리시는 활동무대임을... 우리 모두 힘냅시다!!

  3.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1 17:37

    여호와를 신뢰하라.

    헌금 십일조 물질적인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자신을 다시한번
    성찰하게 한 말씀....감사합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생각에 적당히 세상과
    타협도 해야 하고 물질도 눈에 보이는것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꺼라 들어도
    눈에 보이는 현실이 하나님 말씀을 거스르곤 했습니다. 단번에 바뀌지 않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듣도록 노력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