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22020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제목 : 가죽 옷

(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에덴 동산에는 따로 예배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어디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냥 삶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에덴 동산이라는 부족함이 없는 동산에서 내 비전이 아니라 만물에게 비전을 주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단 하나의 계명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è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계명, 말씀,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의미: 선악의 기준오직 하나님…. 행위자가 동시에 기준자가 될 수 없다. 범법자가 법을 어겨가며 법을 정한다면그 법은 어떠하겠는가?

선악과를 먹음: 이젠 내 기준대로 살겠다. 내가 선악의 기준이 되겠다.

그 명령에 순종할 때에 나타났던 결과

è  (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누구에게? 두 사람 사이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가지고 뱀이 유혹

(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자기가 자기 행동, 선악의 기준을 알고자 할 때에 자기의 기준이 되는 것

(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자기 선악의 기준. 자기 삶의 기준

그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과 내 삶의 기준, 하나님의 본질과 내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

è  수치심. 수치심이 찾아오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불안한 감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어디론가 숨어야만 된다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è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뒤에 이들이 가진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자책과 회개와 죄의식이 아니다. 단지 수치감이다. 죄의식과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고 수치감은 내 안에 몰려오는 나에 대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내 맘대로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과는 다르고, 그 방법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무가치하게 스스로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드는 생각과 감정이다.

 

바로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수치감에 어쩔 줄을 모를 때에 평소와 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부르셨다. 그들은 서둘러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것이 최초의 종교의례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신의 부르심에 그대로 나아가지 못했고 반드시 의례를 통하여 나아갔다. 그가 부르실 때마다 무화가 나무를 만들어 입는다.

하나님은 그냥 함께 거했지, 의례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기 위해 우리를 불렀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무화가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숨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다. 부르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고, 두려웠고, 숨었다. ->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아담의 고백이다. 이 세 마디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의 죄의 증상과 상처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누가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누가 널 정죄하였느냐? 뱀이? 하나님이? 하와가? NO!

아담 자신이 지금 자신을 정죄하며 두려워하며 수치감을 느끼고 숨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한꺼풀 무언가를 덮어 쓰고 가리고 나온다. 그리고 그런 의례를 해 놓은 다음에 마음으로 안심한다. 신에 대한 의무를 다했으니 자신의 마음도 가볍고 자신의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뭐하면 복을 받고, 뭐하면 저주를 받고 등등의 자신의 행위를 기준을 여전히 판단한다. 이런 신앙행위 속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 사귐이 없다. 복종은 있으나 대화가 없다. 순종은 있으나 친밀함이 없다. 하나님은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면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모습을 나아오길 바라시지만 사람은 절대 그냥 안 나간다. 무화가 나무를 엮는다. 엮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수고한다는 행위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화가 나무는 자기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자기의 수치심을 절대로 가릴 수 없다.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또 숨고, 또 두려워하며, 또 무언가 자신의 행위를 만들어서 예배하는 것이다.

(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어떤 목사님이 책에 오늘 날의 많은 예배의 장소는 단지 앞치마를 만드는 공장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평가한다.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러 와서내 할 도리 다했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하러 나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심판하신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우리 스스로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내 육신의 욕심, 안목의 욕심,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살다가 어느 순간 또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도저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교제를 위하여 만든 인간이 이젠 하나님이 오실 때마다 가리고, 숨고 어쩔 줄을 몰라 할 때에 느끼는 하나님의 감정

그러한 죄인들에게 주신 은총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것.

나무 잎의 치마는 범죄한 인간이 벗은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작품인데 반하여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형벌 아래 있는 인간에게 구속과 사죄의 상징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입히신 가죽옷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기죽옷은 자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현실적으로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갈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참지 못하고 숨어버립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신앙양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가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큰 바위 뒤로 숨습니다. 나뭇잎 치마가 오죽했겠습니까? 금방 오그라들고 감추이던 것이 드러납니다. 잠시잠깐 지나면 또 다른 것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치가 가려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둘째, 가죽옷은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범죄한 인간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말은 무언가 가죽을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가리워주기 위해서 희생당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가죽을 제공한 동물은 물론 양일 것이라 결론을 짓습니다. 출애굽할 때에 사망의 재앙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들만 그 재앙이 넘어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페인트를 잘 칠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무조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가정만 하나님의 재앙을 피해갔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

(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가인과 아벨 사건 이전에 가죽옷의 사건은 인류 최초의 피흘림의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수 양을 잡아 그것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몸에 옷을 입히시는 사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언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3:27에서는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심으로 수치를 가려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심으로 우리의 수치, 죄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16:8에서는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입견: 선악과를 먹지말라. 정녕 죽으리라. -> 먹지 않으면 혼나, 너 죽어!

선악과를 먹고 버림받은 인간. 심판, 징벌….

 

No! 선악과를 먹음으로 징벌 받은 것은 인간 스스로…. 수치감, 두려움, 숨고 피하고무화가 나무로 자신을 가림.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고, 함께 만물의 비전을 세워가는 동역. 교제는 필수적인 것. 그 사이에는 부끄러움도 없어

그런데.. 선악과-> 하나님 없이 내 기준대로 살겠다. 내 원칙대로 살겠다.

죄는 인간에게 먼저 온 것이 아니라뱀을 통해서, 사탄을 통해서…. 사탄: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가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면서 땅으로 내려온 자.

그들의 목적: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존재의 목적이 아니잖아. 창조의 목적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결국은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것.

그런데 자기 자신의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다. 그 분의 부르심, 그분의 찾아오심에 피할 존재가 없다. 그러니까그 분이 오실 때마다 피하고, 숨고, 무화가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릴 옷을 입어야 해그 분 앞에서 항상 진실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거짓이고, 피하는 모습….

나를 너무 보고 싶고 교제하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인간이 마치 바람피다 걸린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숨고 피하고,,, 그러니까날 피하지 마라.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마라 하면서 어린양을 죽이면서까지 입히신 것이 가죽 옷.

그런데도 그것으로 완전하지 못해/…. ? 겉은 가렸어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선악과가 있기 때문내 마음, 내 기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밭을 바꾸진 못해…. 그 대신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교제할 끈은 열어둔다.

구원의 긴 계획. 선악과의 마음/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사탄이 가져다 준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원 복음

(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너희 식대로 사는 것과, 나의 식대로 사는 것을 경험해보고 깨닫고 돌아와라.

스스로 인정하고 돌아오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안되는 구나. 가죽옷의 방법으로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구나

아담과 하와를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같지만 결국은 3 15절에 온 복음을 말씀하시며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축복.

가인과 아벨…. 너의 식대로 하는 제사. 나의 식대로 하는 제사. 엄격히 알려줘야 해. 깨달아야 하니까?

그런데 화 내고 아벨을 죽임.

[ 4:14-15]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살인까지 했는데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심….

탕자: 내 멋대로 살겠습니다. 마음은 아퍼.. 그런데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해그래 너 스스로 깨닫고 와라.

깨달은 자를 기다리며 문밖, 마을 어귀까지 와서 기다리시는 분,….

 

가죽옷: 이젠 부끄러움 없이 내게로 와라.

너의 주관, 너의 목적을 가지고 그대로 나에게 올 수 없다. ? 스스로 수치감 속에서 숨고, 감추고, 가리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anna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1.22 15:40

    은혜 받고 갑니다.

마가복음 4장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사나운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면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여러가지 기적을 맛보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그가 누구이신지 가장 가까이 보면서 머물지만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제 5장에서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다고 배경을 설명합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유대인들이 아닌 거라사인들이 사는 이방지역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동편) 지역이지만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거라사인들이 사는 이방지역이다. 이곳은 데가볼리 지역(20) 중 하나로서 많은 돼지들을 치는 것으로 보아 유대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가 유대지역을 떠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풍랑이 일어난 거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방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난폭한 광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 묘사된 장면의 모든 것들(무덤, 돼지 떼들, 이방인들, 그리고 더러운 귀신들린 광인의 난폭한 모습)은 유대인에게는 정말 부정한 것들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지역을 들어서거나 관계를 맺지 않았을 터인데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데리시고 어두움의 풍랑 가운데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복음전파를 위해 의도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둠과 풍랑을 지나 절망에 빠져 죽어가는 영혼에게 오는 것. 이것이 지금 예수의 사역이고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선교의 모델이지요. 죽어가는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사려있는 어두움과 풍랑을 지나 그것을 잠잠케 하고, 혹 물리치고 건여야 할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는 어두움의 세력, 불결한 세력(군대 귀신)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광적이고 파멸적인 한 사람(5:2-5)을 만납니다.,.

본문은 이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하는 '.

1.     그의 거처 : 무덤이나 산(3)

더러운 귀신이 들려 마을로부터 축출을 당하여 무덤이나 산에서 기거하는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인생으로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간다. 비록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무덤)의 죽은 자들(시체들)과 다름이 없다. 특히 돼지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묘사된 무덤 가에 기거하는 이 사람은 이사야에 따르면 우상을 숭배하는 불결한 백성으로 이해된다

( 65:4)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2.     제어할 수 없는 사람(3-4)

모든 통제력과 사회성을 상실한 그는 어떠한 것으로서도 길들여 질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쇠고랑과 쇠사슬도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4).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없는 인생, 더러운 귀신들린 인생의 통제가 불가능한 파멸의 모습을 본다. 자유한 것 같지만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 중독자….

3.     벌거벗은 채 처절한 자학의 사람(5)

하나님 없이 사는 귀신들린 이 사람에게는 벌거벗음의 수치와 소외(버림받음)와 자기 번민과 소리 지름과 광란만 있다(5). 정말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자기 자신도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스스로를 자학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본문에 나와있는 지역의 사람들처럼 처음엔 어떻게든 이 사람을 제지하려 가두기도 하고, 묶기도 하며 관심을 가지겠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사람이 죽던 살든 관심을 끊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광인은 결국 하나님(예수) 없이 버려진 인간의 악함,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쌍해 보이는 사람뿐 아니라 성공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사실 알고 보면 똑같이 마귀에게 잡힌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축복된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게 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거지처럼 땅의 욕망을 구걸하는 자가 되도록 속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곧 죽어져 가는 무덤 속에 거하는 자, 자유한 것 같지만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방치하며 자학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했던, 죽었으면 좋았을 그 한 사람을 조준하고 찾아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의인을 찾으러 오신, 의인을 만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죄인을 구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 예수께서 그를 만나러 배에서 내리시자 귀신들린 자자 뛰어 나와 예수께 소리지릅니다.

(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똑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 의하면 당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나를 좀 내버려 두소서 라고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 올 때는(치유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이지만 이 귀신들린 자는 자신을 좀 내버려 달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멸망치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 군대 귀신의 간청은 그들이 이 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기를 청한다. 결국 예수의 허락에 의해 군대 귀신은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그 속에 빠져 죽게 된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질문들을 갖게 합니다. 왜 귀신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 예수님은 왜 돼지 떼에게 귀신이 들어가도록 허락을 하셨을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예수를 그 지방에서 나가시기를 구하였을까? 왜 고침받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자 하였을 때에 그 자리에 남아 있게 하셨을까?

1.     네 이름이 무엇인가?” –네 상태가 어떠한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는가? 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 있는가?

è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 귀신에 사로 잡혀 있는 자-> 네 이름이 누구인가? 네가 네 자신으로서 살고 있는가? 일생을 헛된 욕망에 매여 전전긍긍하다 지옥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의 역사를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악한 영이 나를 사로잡고 그렇게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한 것입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귀신은 나에게 역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정신과 의사à 귀신들린 자의 특징-자기 의지가 약한 사람. 타인이나 권위에 심하게 의존하는 사람. 교회에서도 목사나 다른 사람에게 심히 의존하는 사람은 잘 순종하는 사람 같지만 진정한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늘 이야기는 단지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원치 않게 끌려 다니고 상처 주는 사람을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 영적 실상을 알기를 바랍니다.

2.     왜 돼지에게 들어가라 하셨을까? 사람들은 왜 예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라고 하셨을까?

è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체는 상관이 없다는 말씀인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자꾸 저울질 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살게 된 한 사람에 초점촛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희생된 물질, 정성, 시간, 생명들에 초점을 맞추어 의문을 제시합니다. 돼지 2천 마리는 10억 정도나 되는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돼지주인은 아마도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저건 사람도 아니고 짐승만도 못해, 저런 인간 때문에 우리 지역이 수치야하는 그런 사람이라도 주님은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켜서라도 그를 살리실만큼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가족이나 속 썩이는 가족들을 위해 10억을 투자하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영혼을 그만큼 가치 있다고 여기십니까? 주님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신 이유는 주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영혼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을 쫓은 후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깊이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5:16-17]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왜 사람들은 예수에게 떠나라고 하였을까요? 오히려 사람을 구하고 귀신을 쫓은 예수에게 감사하며 더 많은 은혜를 사모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마을 사람들 주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이 그 동네에서 떠나가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건 한 번만 더 생기면 동네가 남아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돼지입니다. 사람이 죽건, 귀신들리건, 무덤에서 살건 오직 나에게만 피해 없으면 괜찮은 것이고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내 재산이, 탐욕이 희생되는 것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돼지, 오로지 내가 가진 내 것, 내 욕심이 없어진 것만 중요합니다.

정식으로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목회의 마음, 목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 전 설교의 제목을 미리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가치라는 제목을 받았습니다. 신학교 때에도, 어머니에게도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마음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 이번 주는 본문을 먼저 받은 것이 아니라 제목을 받았지요. 그런데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여러 본문을 찾아보아도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새벽예배 말씀을 같이 나눈 후에 자꾸 그 말씀이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정말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 목사는 주님을 담아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사람인데 전 아직도, 너무도 그렇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혹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한 두 사람 희생시키고, 필요가 있는데도 채워주지 못하고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혹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누구의 희생도 강요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사람,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사람, 목사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라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이 보기에도 구제 불능인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쏟을 정성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쓴다면 더 많은 일,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합리화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군대 귀신 들린 한 영혼을 위해서, 밤 늦게 바다를 건너와 그 마을의 재산인 돼지 2천 마리를 몰살시키면서까지 그 영혼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네가 더 귀하다는 그 분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돼지가 예수님보시기에 하찮고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구제 불능이더라도 그 한 영혼이 예수님 보시기에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의 값을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정하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럼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세가지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은 우리 인간의 생명이 영원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은 힘듭니다. 가치 있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생명을 출산하는 것도 힘이 들고, 그 생명을 양육하고 돌보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한 생명을 탄생하고 돌아보는 것이 힘든 이유는 그 만큼 우리의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산의 고통과도 같은 아니, 해산의 고통은 주어진 시간에만 참으면 해결되는 고통이지만 한 생명을 구원하는 고통은 그 영혼이 구원될 때까지 받게 될 고통이므로 더 큰 고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왜 그 사람을 따라오지 못하고 남게 하셨을까?

[ 5:18-19]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남아있는 그 사람은 자신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참 기쁨은 맛보았을테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아 마을에는 큰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남느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기쁘고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 한 영혼을 통해서 생명을 전하는 것. 잃어버린 한 영혼을 통하여 또 다른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것.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즐거운 일을 택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복음을 위한 좁은 길, 힘든 길, 주님과 동역하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 남겨지는 것. 그리고 그 길에 순종할 적에 합당한 열매가 열리는 것

( 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 한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분.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는 사나운 풍랑이 일고 어두움이 깔려 있는 바다를 건너오신 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은 배척과 수난을 당하신 분.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조롱과 모멸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정결의 원천이 되신 분.

귀신들린 자: 무덤 가에서 소리지르는 거라사의 광인. 그는 더러운 '군대' 귀신들에 의해 사나움과 광란과 자학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모습은 마치 더러운 '군대'가 그를 끌고 돌아다니는 모습과 같다. 6000명의 더러운 귀신들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내면 속에서 활동하며 그를 이리 저리로 끌고 다니는 모습은 사단에 시달리는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러한 그가 예수를 만나 구원 받았을 때 그는 정신이 온전해 지고 수치가 가려지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름을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산다. 난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없이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거라사의 광인들이다.

마을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귀신들린 자의 당한 것'(온전함) '돼지의 일'(몰사함)을 듣고 예수를 떠나도록 간청하는 이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 다른 사람의 회복(구원)과 마을의 정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재물(기득권)의 손실에만 관심을 둔 사람들. 이들의 모습이 오늘의 한국 사회며 한국 교계의 현실은 아닌지어쩌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는 본문 앞에서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마태복음 5장 13-16절 영향력

 

 

한국 사회,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같은 목사님들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게 하는 데 영향을 준 1세대 목사님들이라면 순복음교회와 영락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특성이 다른 목사님께서 70-80년대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하는 옥한음 목사, 하용조 목사, 홍정길 목사, 이동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의 롤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앞의 두 목사님이 부흥회 중심, 기도원 중심의 오순절 운동파와 예배 중심, 성경 중심의 약간은 상반된 한국교회 영성의 두 측을 대표하는 분들이었다면 복음주의 4인방은 청년 시절 CCC와 같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훈련 받아 미국 유학도 하시고 서로 가깝게 교제하면서 미국교회들과도 상호 교류하면서 각각 제자훈련, 열린예배, 가정사역, 찬양예배등과 같은 목회적인 다양한 모습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분들 중 하용조 목사님, 옥한음 목사님은 소천하시고 나머지 두 목사님은 은퇴를 하시어서 그 분들의 뒤를 잇는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거나 영향력을 끼치는 뚜렷한 목사님들이 나오지 않고 한국교회 자체가 주춤하며 위기를 느끼고 있는 상태가 현재의 상태이지요.

지난 주에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 중에 가장 늦게 은퇴를 하셨던 홍정길 목사님이 한 모임에서 목사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목사로서의 삶을 되돌아 보시면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는 목회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더 깊이 목사로서의 삶에 대해 정리하며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교회의 한 실패한 목사의 단면을 보여 준다며 뉘우치셨습니다.

“속지 말라.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론 나쁜 사람이 많다”며 “특히 기독교인들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다. 말을 멋지게 하고 굉장한 글을 쓴다. 그런데 그 삶에 실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언제나 진리는 예배에만, 말에만, 신학 속에만 있지 실제 삶 속에는 없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수치고 또 나의 수치”라고 고백했다. 삶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원로가 된 그의 고민,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사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자기 성찰이었다.

나는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천만 성도를 달라 했고, 이 나라 59천 마을에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보이지도 않았던 서쪽 대륙, 중국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마을마다 교회가 섰고 중국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는그래도 교인들의 삶은, 목회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지식들이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

결국 그 목사님이 삶의 변화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자녀 교육이었다. 그는내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이 후회는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저 세상에 나가 승리할 수 있겠나. 부모밖에 답이 없다. 바른 신앙을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생을 목회를 하다가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해 기도한 대부분의 것을 이루고 자신의 목사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린 결론이 나는 목사로서의 삶이 부끄럽다. 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조차, 자녀에게 조차 떳떳하지 못한, 온전히 내 신앙을 전수해주지 못한 삶을 살았다며 자책하는 모습에서 진실하지만 후배 목사로서 안타까운 마음도, 과연 나는 어떤가하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의 내린 결론, 결국은 내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 내 자녀에게만이라도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신앙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최소한이면서도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결론 지은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TV가 우리 삶에 깊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생각에는 어느덧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속의 본질보다 보여지는,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쓴 것이지요. TV에 한 번 나오려면 더 자연스러워보이게 하기 위해서 화장을 합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은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초라하고 이상하게까지 보입니다. 자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 옷에 자신의 가치를 두기도 하고, 표정이나 말 한 마디 마디, 사람들의 모습에 비춰지는 내 모습에 더 신경을 씁니다. 대통령 선거라도 할치라면 TV 토론회를 둘러쌓고 얼마나 많은 이미지의 신경전이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그러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갑니다. 잘 생긴 사람이면 속도 착할 꺼라 생각하고 TV에 범죄자나 악한 사람으로 등장하면 그렇게 생긴 사람은 똑같이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TV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결국 상업적인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영향력과 이미지의 차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미지는 인기와 맞물리고, 짧은 시간에 당장에라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향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미지에 꽂혀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지 관리 잘해서 참 신앙인, 참 그리스도인 인 것처럼 보여지길 원합니다. 즉 좀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시간에 누구보다 아멘 잘하고 찬양 할 때 뜨겁게 뛰고, 사람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하고, 헌금도 꼬박 빠지지 않고 하면 이보다 더 멋진 그리스도인은 없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분명 믿음의 행실로 나타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중심이 잘 잡혀지지 않았으면서 그저 사람들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게 되어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이 아파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행동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문화는 유교문화입니다. 양반문화입니다. 양반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채 하면 안됩니다. 소변이 마려워도 급한 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그냥 말하면 체면 문화, 좀 좋게 말하면 품위, 교양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체면문화, 품위 문화는 이미지 관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에 배고프라 하십니다. 나의 죄를 보고 애통하라 하십니다. 체면 따지다 보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이미지로 살아가려했던 자와 영향력으로 살아가려했던 자의 대표적인 예는 사울왕과 다윗왕입니다. 사울왕은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인기 때문에 다윗왕을 질투해서 평생을 험한 곳에다 낭비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을 때마저 사람들의 눈 때문에 사무엘에게 제발 덮어달라고 애걸복걸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날 어떻게 보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 앞에서 사람들이 알건 말건 간에 철저히 회개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든지 왕이면서도 옷이 벗어질라 춤추며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서 살았지만 사울은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자신의 인격도 잃고 인기도 잃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아, 급기야 스스로도 버림을 받게 되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쭉 다루워왔던 팔복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원리를 말씀 하신 후에 이제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소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은 소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설탕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설탕이 없어도 살 순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설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고 당뇨에 걸리지만 소금은 성인병을 낳게 하고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인간의 피, 채액의 성분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해서 염류, 즉 소금은 인간 생명의 원류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금의 역할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썩는 것으로부터 음식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소금에 절이는 것,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것은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세상에 뿌려지라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산에 올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정치가 잘못 되어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 말합니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말을 합니다. 부자들이 부패해서 세상이 어둡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어부, 농부들과 같은 서민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세상이 부패되는 것을 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유교는 왕이나 가장, 선생에게 주신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나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통치자에게 주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통치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문제 투성이인 애통하는 자를 불러내어 세상의 평화를 만들고 부패를 방지하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성령께서 함께 그 일을 이루어 가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2. 소금은 부패를 방지할 뿐 아니라 맛을 냅니다. 소금이 없으면 싱거워서 먹질 못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살맛 나는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싱거운 남편을 멋과 맛을 내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내의 소금역할 입니다. 싱거운 아내를 멋과 맛을 내는 아내로 만드는 것이 신앙 있는 남편이 할 일입니다. 무엇으로 맛을 내게 합니까?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통해서 싱거운 세상, 더러운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어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맛을 내기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이 죽어 세상의 맛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그 역할을 못할 때에, 자신이 맛을 내기 못하고 세상을 비판만 할 적에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봅니다. 모든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저질러 놓고 왜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느냐? 죄된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게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교회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제 역할을 하는지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곳은 사찰입니다. 문화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갖가지 명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찰이 부패했다고 조사하며 신문에 내고 방송에 내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기 저기서 감시합니다. 억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산 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 위에 두어서 세상을 비취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3. 소금은 우리의 인체에서도 음식물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지만 소금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이 중요하다 해도 소금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의 진정한 맛은 자신의 짠 성질로 인해 다른 것을 살릴 때에 그것이 비로소 소금의 진정한 맛입니다. 즉 소금은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이란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과자에 들어가면 과자의 맛을 살리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을 살리고, 여러 가지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을 살립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서 그 음식의 본래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그것이 소금의 맛입니다.

만약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다른 양념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짠 맛만 나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소금이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이 나야지 소금의 짠 맛만을 내면 이미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소금 그 자체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소금은 아무 매력도 없는 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은 짠 맛이 아니라 살리는 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의 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 성품이 녹아져서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내가 녹지 않고, 소금 그대로의 맛을 내려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입니다. 자기만을 나타내는 인생, 자신만을 드러내고 인기를 누리는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은 유명세를 타는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없어도 유지되지만, 살리는 사람이 없다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는 소금과 같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서울의 동교동교회 음동성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이지만 영성을 이야기하는 주요 활동가들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분이 음동성 목사님이다." 그 분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은 개인수련으로 끝나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고하다. 영성의 출발과 마지막은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개인주의를 버리고 12제자 공동체를 이루셔서 그 공동체를 통해 영성을 표출하셨다. ,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성도는 별거 없다. 공동체를 잘 이루면 그 성도 영성이 참 좋다 생각하면 100% 맞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사는 지역에 마을 공동체, 일터 공동체, 가정 공동체를 잘 이루는 사람이 진짜다." 그 분이 영성을 정의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소금의 사명은 그 음식을 위해 죽은 것이며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바침으로 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어주며, 그 사람을 살게 해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로 인하여 그 사람의 단점은 덮여지고 장점만 나타나게 되므로 그 사람이, 그 공동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맛을 잃어 어디에도 쓸모없는 소금이란 바로 자기 자존심에 갇힌 사람입니다. 자존심만을 꼭 쥐고 있어서 자신이 항상 잘하고 자기 말이 항상 맞는 틀림 없는 말이며, 자신만이 항상 깨끗함을 나타내는 사람은 맛을 낼 수 없는 소금과 같이 후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자기 맛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결국은 음식과 함께 버려지고 맙니다. 나도 죽고 공동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들의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 그 자체가 악이므로 나를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고 그를 높여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로 향하고 내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높아지고, 나로 하여금 귀히 여김을 받게 되면, 나 자신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꼭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고 낮아지는 자가 결국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고 영향력,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비밀입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잘 났다고 자기 자존심만 지키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자라지 않은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그 인격과 사고의 세계와 보고 듣는 세계가 자라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므로 자라지 않아 매우 유치합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자라고, 나를 통해서 자식이 자라고, 나를 통해서 형제가 자라고, 나를 통해서 이웃이 자란다고 한다면 나 자신은 이미 누군가의 소금이 된 것입니다. 목자라고 한다면 목자를 통해서 반드시 성도가 자라야 진정한 소금인 것이고, 건강한 목자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힘은 자존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자존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누구에게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귀한 여인이 되도록 받들게 됩니다. 또한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이 고귀한 사람으로서 어디에 가든지 존경 받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행복하고 고귀하게 자라게 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남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자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나에게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생명이므로 반드시 자라게 합니다.

자존심은 생명을 막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막습니다. 남을 막다가 나도 죽고 남도 죽고 공동체도 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 혼자 서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정의 자체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 인자는 누군가 있을 때에 내가 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세워 줄 때에 나도 서고 그도 섭니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라지 못합니다. 자존심 가진 사람이 당할 것은 곧 죽음입니다. 남을 자라지 못하게 하므로 나도 자라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남을 높이고 살았는지 통회해야 합니다. 빛은 비추기 위해 있습니다. 남을 비추기 위해 있는 것이지 자기 자랑을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비추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런데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멉니다. 태양의 빛은 비추어 주는 사물을 통해 태양을 아는 것입니다. 내 빛이 아무리 빛나도 비취는 대상이 없다면 내 빛은 남의 눈을 멀게 하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자신을 비추고 빛을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등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아, 내가 저분을 만나서 귀하게 됐어. 저분이 없으면 내가 천하게 살았을 텐데. 저분이 있어서 내가 귀하게 됐어.’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목자의 자격이 있고,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의 자격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목: 빈그릇을 모으라

본문: 왕하 4:1-7

 

엘리사 시대에 그의 스승 엘리야가 세운 선지학교선지학교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신학교겠지요에서 한 선지생도가 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장가를 가서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도중에 그만 육신의 병이 들어 공부를 중단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날마다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다 보니 그나마 있는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결국 병은 점점 악화되어 슬하에 어린 두 자녀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어린 두 자녀와 엄청난 빚을 떠맡게 되었으니 살길이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와서 준비 중에 이런 비참한 일을 당했으니 부인의 입장에서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거기다가 이젠 빚쟁이가 날마다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남자들처럼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농사를 짓거나 겨우 남의 집 일을 거들고 하루치 먹을 것을 받아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빚을 갚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급기야 이 여인이 빚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두 아이를 뺏어다가 자기 집 몸종으로 삼겠다고 윽박지릅니다.

여러분이 이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엘리야, 엘리사라는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그들을 따라 잘 훈련 받은 선지자가 되겠노라고 결심한 남편을 따라 뒷바라지 하며 애들을 키우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참고 견뎌왔는데, 남편도 가고, 이제 두 아들마저 빼앗기게 되었다면,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아마도 교인들 중에 이런 지경을 만나면 상당히 많은 분들은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주의 종을 이런 비참한 꼴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자기 남편의 스승인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엉어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엘리사를 찾아가 조용, 조용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죽을 껏 같고, 괴로운 그 마음을 토합니다.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소연을 하던, 원망을 하던, 아니면 부르짖고 매달리던, 이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그 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엘리사 선생님이시여! 내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 줄을 당신이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채무를 남겨 채주가 어린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 합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33: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간 여인은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숨김없이 정확하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기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이렇게 해 주십사라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현실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기도는 아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코 이렇게 이렇게 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만 아니라, 최선의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필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것이 꼭 필요했지만, 내일은 전혀 무용지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일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대안을 제시하고 구하기보다, 당면한 현실을 아뢰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문제를 만나면 기도하라. 성도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기도조차 하지 못하고 절망합니다. 절망하면서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시지 않고 버렸다고 원망합니다. 절망하거나 원망하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의 가장 첫번째, 공인된 가장 영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딱한 처지를 듣고 있던 엘리사가 입을 엽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말하라…”

흔히들 도움을 처하러 오면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살펴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도와주려고 합니다. 지금 죽은 선지생도의 아내가 필요한 것은 물질적 도움입니다. 위로와 격려도 필요하지만 당장 자식들을 구하기 위한 물질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가지고 여인에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묻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 말을 하면 거기에는 의도가 있고 깊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 하는데 모세가 난 아무것도 못합니다.” 할 적에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있는데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살 길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방법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엘리사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남긴 것이 있다. 너에게 찾을 것이 있다.” 고 하십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기름 한 그릇, 기름 한 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름 한 병이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 기름 한 병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l  한 병 기름.' 혹자는 한 병 기름을 '작은 병의 기름'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원문상 맞지 않는 해석이다. 문자적으로 이것은 '기름 부을 정도의 기름' '한 사람에게 기름 붓는 데 알맞을 정도의 기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입니다. 기름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 안에 남아있는 믿음입니다.

내 남편도 죽고, 빚은 넘치고, 두 아들마저도 빼앗길 처지이지만….그래도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도움이시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당신이 주신 성령이 남아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건,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한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이라면 내게 도울 수 있다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 안에는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큰 믿음을 가지진 못했어도, 확실한 체험을 가지진 못했어도, 때로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끈덕지게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 내게 작은 기름 한 병 남아 있습니다.”라고 깨닫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 있다는 여인의 대답에 엘리사는 또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채워지길 원하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내 삶에 나타나길 소원하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더 이상 빠지면 광신에 빠지고, 친구도 잃게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니까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같습니다.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한 영혼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벼랑 끝 막다른 곳에 와 있습니다.

빈 그릇은 내 영의 갈급함의 공간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분량입니다.

엘리사는 집안의 모든 빈그릇을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합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웃의 빈그릇을 긁어 모으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치는 은혜를 주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부어 줄 테니 네 주위의 갈급한 심령, 네 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심령, 모든 공허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긁어모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으나 지금 육신적으로 주리고 있는 자들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에 작은 소년의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보시고, 이제 사람들을 모으라. 내가 축사하리라. 내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모든 주린 영혼을 먹이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빈그릇을 모으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가까웠으니 네 주위 모든 빈 영혼들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에, 엘리사의 이 요구는 황당한 요구입니다. 지금 빚쟁이가 독촉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웃에 나가서 또 빈그릇을 빌려 오라니,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빌려 오라니, 이웃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 그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을 듣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이 모라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그릇을 가져 옵니다.

4)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어디로 들어갑니까?

네 집안의 골방,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세상의 것 생각지 말고, 빚쟁이도 생각지 말고, 죽은 남편도 생각지 말고 오직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져온 빈그릇,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의 모든 빈 그릇, 빈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까지, 문을 닫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 81:1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절망과 원망과 염려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45:11-12)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내 문제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고난에 처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고 강권하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 주위의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기름을 준비한 영혼, 빈 그릇을 준비한 영혼을 통해,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의인 열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남이 아니라, 세상이 아니라, 남 탓 안하고, 세상 탓 안하고, 신앙 안에 우뚝 선 의인들을 통해 회복되고 치유되고 부흥 될 것입니다.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남이 은혜 받을 때에 혼자 고립되는 것보다 더 불행 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올해 2013년도 로고스 교회는 은혜의 해가 될 것입니다.

3 17일 취임예배, 3 31일 부활절 예배, 4 12일부터 부흥회, 여러분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것이 크던 작던 여러분 안에는 작은 기름 한 병들이 있습니다. 그 기름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름을 앞에 두고 더욱 갈급한 심령으로 빈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나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웃의 빈그릇까지 채우고도 넘칠 은혜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빈그릇을 모아 놓고 기도의 처소에 들어 간절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빈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이젠 우리 안의 모든 빚을 청산하고 넘치는 은혜로 살아나가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도 기도하고 나가서도 기도하고 집에서도 기도하고 직장에서도 기도하여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하나님 앞에 맡기고 그 분이 권면하는 대로, 순종하며 은혜를 채워가시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