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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본문 : 미가서 6 6-8

 

목사가 되고 영성을 공부하게 된 결정적 계기, 원래 신학교는 기독교 상담을 공부하기 위해 온 것.

신학교 3학년 때, 인생의 여러 문제(결혼, 진로)가 겹쳐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잘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머리 속이 너무 복잡할 때

중세 교회사 수업시간의 일환으로 인천에 있는 한 봉쇄 수도원 방문

봉쇄 수도원은 바깥 출입을 제한하며 그 곳에서 평생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당시 나는 수도원을 현세 도피적이고 비성경적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마치 군대 훈련소 첫 주간에 방문했던 영창 속의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 만큼 봉쇄 수도원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무섭고, 낯설었다. 그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수도 중이던 그들과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그들 또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미리 교수님의 부탁이 있었던지 한 수도자가 나와서 수도원을 안내해 주었고, 그리고 우리에게 몇 마디 말을 했다. "개신교 신학생들이 보기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알 만합니다. 속세를 떠난 사람들처럼 도피한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지요.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치며 살아가는 삶이 어쩌면 맞는 것이겠지요. 전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실어 나르는 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그런데 그 배도 때때로 길을 잃지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길을 잃었을 때에 잠시 바라보며 길을 되찾는 등대처럼, 저희 수도자들은 세상 속의 교회가 길을 잃었을 때에 한 번이나마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훈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거나 읽습니다. 그들의 말씀의 깊이와 기도의 분량에 때때로 큰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신문을 보면 많은 목사님들이 때로 사사로운 일상의 문제 안에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넘어짐이 결코 말씀이 없거나 기도가 모자라서 생긴 것 같진 않습니다. 일상에 대한 훈련, 삶에 대한 연습이 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수행하는 것은 반복적인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일상에 대한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지쳐 그리스도의 은혜마저 볼 수 없던 때에 그 수도사의 한 마디는 내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내 일상 속의 수많은 문제가 그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훈련 속에서 정말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첫 수도원의 방문은 내 삶을 조금씩 바꾸었고 이 곳 미국에서 영성을 공부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때 그 수도사가 한 말, 등대 같은 존재, 그리고 일상에 대한 훈련이라는 말이 나를 목사로, 그리고, 참 목사 같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해 영성이 있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정말 어떻게 하면 구도자의 삶을 살까? 정말 때묻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까? 남들에게 등대 같은 존재가 될까?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또한 많은 목사님들과 신부 혹은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의 수도자들을 만났다.

그런데 신부들과 수도자들을 이곳에서 만나고 난 그들이 고민하는 말들을 듣게 되었다.

결혼 않고, 사회생활 않고, 살다 보니까아무리 그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그들을 상담해주고, 그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해주려 해도 도무지 그게 체감이 안된다. 그들이 하는 고민의 대부분이 가정문제, 부부문제, 자녀 문제인데 아무리 책을 보고 드라마를 보고, 그것을 공감하려고 해도 그게 피부에 와닿지를 않을 때에, 자기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그것을 들어주고 상담해 주어도 스스로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 스스로 독신이 신앙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회의….

또한 단순한 삶 속에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에딕트가 되는 것. 음식, , 기호…..

그러면서 개신교 목사들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결혼 생활하면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개신교 목사들과 신부들,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참 그리스도인, 정말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모여 경건생활, 영성생활을 정리하면서 영성생활의 중요한 키워드는 단순한 삶이고 반복적 삶 속에서 충만히 하나님의 임재, 함께하심을 느끼는 것이라 정의..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나 분주하다. 우리가 가정을 꾸리며 자식을 낳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면서 살아갈 때,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 같은 곳에 가면 나도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의 삶은 결코 수도원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수도자가 누리는 삶을 살긴 어려운 것일까?

많은 헌신된 신앙인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구도자로서, 수도자로서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질문하고 시도하고 또한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가정을 지키며, 밖에 나가서 일도 하면서 그 안에서도 충만히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까?

해답은 우리 삶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중심이 되는 가장 단순한 영적 경건을 위한 시간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루의 삶 속에 가장 단순하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마련해 두고 그 시간이 하루의 가장 핵심을 차지하게 하라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게 하시고 당부하신 말씀.

너희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너희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너희가 먹지 말라. 다시 말해 손대지 말라. 동산 중앙의 선악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징하는 나무. 그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을 훼손하지 말라.

즉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 네 삶의 중심에 선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을 훼손하지 말고 철저히 지키라.

 

본문의 말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 대하여 법정소송을 제기하는 장면. 먼저 원고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 미가를 세우셔서 피고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내용을 대신 읽게 하십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너는 일어나서, 즉 선지자 미가야 일어나서 산 앞에서 소송 내용을 샅샅이 밝혀라. 산과 언덕이 네 말을 듣게 하여라. 너희 산들아, 땅을 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아, 나 주가 상세히 밝히는 고발을 들어 보아라. 나 주의 고소에 귀를 기울여라. 나 주가 내 백성을 상대하여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내가 내 백성을 고발하고자 한다.”

“내가 내 백성을 고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아니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순종했으면, 이렇듯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고소했겠냐 하는 것입니다.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말하자면 재판을 걸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이다. 지금 판사는 산들과 작은 산, 언덕이다. 본인이 지으신 자연물을 판사 삼아서 지금 이스라엘을 고발한 사건이다.

 

두 번째 3절에서 5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결백을 설명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짐이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너희의 몸값을 치르고서,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너희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게 한 것도 바로 나다. 내 백성아, 모압의 발락 왕이 어떤 음모를 꾸몄으며, 브올의 아들 발람이 발락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를 기억해 보아라. 싯딤에서부터 길갈에 이르기까지, 행군하면서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돌이켜보면, 나 주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한 일들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돌이켜보면, 나 주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한 일들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노예로 붙잡혀 있던 이집트에서부터 마지막 싯딤과 길갈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시면서 자신의 결백을, 아니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은혜를 격정적으로 토해내셨습니다.

싯딤은 어디입니까? 싯딤은 요단 강 동편에 위치했으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마감한 곳입니다.( 3:1) 그리고 길갈은 요단 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머문 곳입니다.( 4:19) 하나님께서 이 두 도시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요단강의 그 범람하던 물길을 아무 사고 없이 건넜던가를 회상하라는 분명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억울해 하시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변론하실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있다는 것- 신앙생활 힘들다. 열심히 하는데 보람이 없다.

하나님께 바쳐도 하나님이 응답도 없고 기뻐하시지를 않는다.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나에게 짐만된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괴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6절부터 선지자 미가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 서서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하나님 왜 자꾸 노하십니까? 왜 또 화나셨습니까? 하면서 시작되는 말이 6절부터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지금 자기의 입장에서 뭘 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하나님께 원망 반, 탄식 반, 하나님께 반론을 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아, 백성들아, 하나님께서 선한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르쳐주겠다.

여호와께서 구하는 것은 천 천의 수양도, 네 몸의 번제도 아니고

1)     정의를 행하고: 정의 (: 바른 관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해라..

2)     인자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라. 자비롭게 대하라.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è  세가지 말씀으로 주셨지만 내용은 한 가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웃을 사랑해라.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마자 경험하는 것 기근- 애굽으로 피신함. –거기서도 하나님이 살리심. 아브라함의 관심- 자녀를 통해 복을 물려 주는 것 하나님의 관심- 너에게 이삭이 중요하냐? 나를 더 신뢰하냐이삭을 바칠 수 있느냐?

2.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

우리나라가 일제에 해방된 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기쁨을 나눈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 어린 양의 보혈, 다시 말해 예수의 보혈을 기념하고 누룩을 제하라-> 네 안에서 죄를 제하고 거룩하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행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행한 것은 무엇인가? 열흘 이면 될 길을 가장 먼 길 홍해길로 인도하신 것.

더 나아가 앞엔 홍해, 뒤엔 바로의 군사들이 뒤쫓아 오게 만든 것. 막다른 곳- 왜 그렇게 하실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는 것 이제 언제 가나안에 들어가는가?

하나님의 관심-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을 경험해보아라.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광야에서 죽느니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 말 그대로 우리가 스스로 답해 보자.

만약 신앙생활 하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정말 비참한 것인가? 다시 말해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예배 생활 했는데도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의 축복, 영광을 맛보지 못하면 정말 불행한 것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느니 애굽에서 종살이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그는 가나안에 못 들어갔어도 한 번도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지 않았다. 누구도 모세에게 실패한 지도자, 실패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모세와는 일대일로 대면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인정하셨다. ?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미 가나안 속, 가나안 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속에서 날마다 살아간 것이다.

 

신앙적인 고민

이제 목회 시작한 지 1….

유명한 목사님들의 간증…. 목회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부흥된 교회….

반대의 예들….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다가 현실에 절망하며 믿음이 사라져가는 주위 목사들

몇 명이 나가면서.. 처음엔  그 분들이 섭섭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데  못 알아주고,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가?

그런데 이젠 정말 그 분들께 죄송하다.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지만 결국은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내 말씀이 은혜가 안되고, 말씀이 현실을 극복할 은혜를 주지 못해서 그렇다. 교인들 중에서도 힘들어 하는 모습, 낙심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저들에게 은혜를 못 주는구나

그러면서 정말로 죄송해서 울고, 낙심되서 울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교회를 살리고 성도를 살립니까?

그 때 주신 말씀이 본문의 말씀..

내가 언제 천천의 수양을 원했냐? 네 아들을 원했냐? 네 몸의 번제를 원했냐?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나와 동행하는 것이다.

이 교회는 네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고, 성도들은 네 성도가 아니라 내 백성들이다. 네가 행할 것은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끝까지 네게 맡긴 영혼들을 사랑하고 나와 동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 속에서 은혜를 구한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내 삶의 중심을 말씀으로, 기도로 채워 나가는 것 밖에 없다. 그러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여호와, 나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견고히 서서 바라보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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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 누가복음 2:25-35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인사말은 샬롬(평안)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주가 다시 오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 말씀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나누게 시므온 입니다.

26절에 보면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 Christ.” 직역하면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그가 죽지 않을 것임을 성령을 통해서 계시 받았다는 것인데,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가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는 성령님의 계시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는가? 25절에 보면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관계가 바르다는 소리이지요.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못 되어 있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바른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며 기도 생활하는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복과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1. 이스라엘 민족의 위로
    •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 동안이나 선지자 없이 로마의 속국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마치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1. 교회의 위로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 신약시대의 이스라엘은 교회. 따라서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

  1.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스시"라는 말인데 이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와주는" "위로하는" "대신 요청하는" 나아가 "구원하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데 성령이 바로 파라클레시스, 위로하는 , 도와주는 자의 의미 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찬 사람입니다.

, 그는 날마다 성령의 위로, 성령의 감동,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으로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소망,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사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앉아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서 기다린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졸지 않고, 알아볼 있도록 기름을 준비하고, 다시 말해 성령과 함께 하며 깨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 처녀의 비유)

그는 이 약속을 경험하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렸던, 그래서 성령으로부터 지속적, 반복적으로 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것이다 거듭된 계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성령과 동행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시길 깨어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동행했던 시므온은 어느 날, 그날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그를 바로 그날, 율법에 따라 태어난 40일이 지나 예배를 드리러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평생을 그리스도를 만날 날을 꿈꾸며 기다려온 시므온, 그것을 위해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기도하며 성령과 동행했던 시므온,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기에게 다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바로 29절부터 시작되는 시므온의 기도, 혹은 시므온의 찬양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말씀의 의미를 다시 직역하면

하나님, 이제 종을 편히 있게 주세요.” “이제 사명을 다 했으니, 평안히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주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태어나서 막 세상으로 나왔는데,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왔던 시므온은 이제 예수를 바라보며 이제 평안히 올라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 기도의 응답,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날마다 겪게 되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30-32)

시므온의 이 기도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시오.”하는 기도, 찬양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임종의 자리에서 드렸던 임종의 기도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기도,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며 믿음과 평화의 기도를 드렸던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 분을 만난 기쁨에 감격한 사람들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며 드렸던 기도입니다. 이제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나의 일생의 사명을 이루고, 내 평생의 숙제를 다했다, 이젠 나의 구원과, 민족,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의 성취를 내가 받았고, 경험했다는 믿음의 고백 끝에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 잊지 않고 주님, 이제 나를 평안히 잠들게 하소서.”하며 평화의 기도를 드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조금도 두려움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있었는가? 바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안에 영원한 안식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또한 교회 역사에서 임종의 순간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잠에 드는 잠자리에서 했던 기도입니다. 말하자면 이 기도가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성도의 매일 매일의 잠자리에서였습니다. 잠들기 전에 매일 같이 주여 나를 평안히 잠들게 하옵소서, 이제 나를 평화로이 쉬게 주세요라고 하는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경건하고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 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했습니다.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경건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잠들기 이런 마음가짐으로 잠을 청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이렇게 하루를 마쳐 잠자리에 들듯, 인생도 언젠가 마칠 때가 오겠지요. 이렇게 하루의 노고를 마치고, 오늘 하루의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주님 앞에 평화롭게 날 쉬게 해 달라고 기도하듯, 인생 마지막까지 인생의 노고를 쉬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내가 잠들 때, 아무 걱정 없이 평안히 쉬게 주세요.”라고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경건한 크리스찬들은 기도해왔던 것입니다.

밤마다 이렇게 죽음을 기억하며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맞는 아침은 어떤 아침이었을까요? 이제 하루의 과업을 다했으니 내가 평화롭게 쉴 수 있게 해주세요 하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던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다시 맞이하는 아침.

그 아침은 바로 부활의 아침이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며 아무런 걱정없이 평화롭게 주님 앞으로 가기를 청하는 경건한 자들이 맞이했던 아침. 다시 찬란한 햇살이 비취며, 그들을 맞이하는 아침은 바로 매일 매일의 부활의 아침이었습니다.

, 이렇게 주님이 나를 깨워주시는구나. 이렇게 나를 잠에서 깨어주시듯, 새날을 주시듯, 주님께서 나를 죽음으로부터 깨워서 날을 맞게 하시는구나. 삶을 주시는 구나. 새롭게 맞게 되는 하루를 바라보며 그들은 또한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다짐했습니다.

살아야겠다. 믿음으로 살아야겠다. 다시금 소망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하루하루 날을 살아야겠다. 오늘 하루도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고난을 견디며 성령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새로운 날을 살아야겠다.”

날마다 죽음을 연습했던 그들은 결코 죽음을 고대하는 비관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날마다 부활을 기억하고 연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죽음을 연습하며 하나님이 새 날을 주시면 또다시 부활의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시므온이었고,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흔히 이야기하는 Real Christian 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 탄생하신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 기념예배입니다. 분의 탄생을 바라보며 우리는 때로 우리의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마다 마지막을 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고 이제 편안히 쉬게 하소서하는 담대한 기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깰 때에 새 생명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오늘 하루의 사명을 되새기며 하루를 열심히, 감사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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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oonflores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2.25 01:30

    주여 나를 평안히 잠들게 하옵소서.
    ....
    말씀과 기도가 몸에 베인 경건한
    real christian이 되게 하소서.

  2. 이수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2.25 21:19

    예수님이 오신날을 기념하는 오늘, 난 죽음에대해, 부활에대해 생각 했습니다
    난 예수님께서 그토록 선포하셨던 하늘나라를 준비하며 이땅에 실현하며 살고있나?...
    말씀을 듣는내내 이런 나에게 예수께서 오심이, 나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있음이 얼만큼
    감사한지... 우리교회 한사람,한사람을 눈에 담아 보면서 또 감사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는자 같이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 열왕기상 19 1-18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 시대인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당시의 왕 아합은 반대로 이스라엘 역사상 우상숭배와 탐욕스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악한 왕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아세라는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바알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고 있을 때에, 엘리야는 왕 앞에 나타나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린 형벌로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아합왕은 분노했겠지요, 이 분노를 피해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겼으며, 여호와께서는 매일 그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 등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셨다. 그의 예언대로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강물도 얼마 후에 말라 버렸지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어 보내어 우리가 잘 아는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떡을 지어 먹게 합니다. 마지막 남은 그것을 주의 종에게 공궤하자 비가 올 때까지 그 집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되고 이어 아들이 병에 걸렸는 데도 죽지 않는 역사가 나타나죠. 시돈 땅이 어디지요? 바로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던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이름없는 과부를 통해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이시고 또 그 때문에 그 과부에게 축복하시는 거죠.

3년 후, 계속 비가 오지 않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했다고 여기는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의 위협에 도망한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 슬럼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입니다. 육체적으로 지치고, 감정적으로 고갈됨. 그리고 누군가 그의 목숨을 위협. 이 때 일어나는 감정: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외로움, 걱정->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다. 의기소침해 있었다.

슬럼프는 자신의 문제에 갇혀 부정적으로 생각 할 때 온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온다. 사람의 감정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낙심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지금 낙망하고 있습니까?

[왕상 19:3-왕상 19:4]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 사실들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해버리고 맙니다.  

           -> 감정은 항상 현실을 과장하고, 극대화하고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 한 영역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에서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정이 아닌 진실에 귀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

슬럼프의 두 번째 원인- 자신을 남들과 비교함으로 나쁜 감정으로 치달게 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고후 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비교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고 누구를 흉내내어 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누구나가 나만의 삶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맞게 훈련하신다.

           3. 잘못된 비난을 하지 말라.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저는 열심히 일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주님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책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의 기대와 현실, 혹은 하나님의 응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이세벨입니다. 사탄이 그를 위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연약함이 현실 모두를 자기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 모든 사람이 나를 대적합니다. -> 단 한 사람만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도 단지 말로 대적하고 있다.

           이세벨-사자를 보내 협박, 정말 죽이려면 자객을 보내어 죽였을 것이다. 그녀는 백성들의 지도자를 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18절에보면 아직 이방 종교에 굴복하지 않은 수천 명의 선지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치료방법

           1.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라.

           [왕상 19:5-6]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하나님은 그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쉬게 하시고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신다. 영혼을 회복시키기 이전에 육체를 회복케 하신다.

           2. 속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라.

           [왕상 19:8-왕상 19:9]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원기가 회복된 다음 동굴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냄. 동굴- 골방

           -> 엘리야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자기 속내를 모두 토해냈다. 하나님은 그가 울분을 통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억눌렸던 감정들을 분출하게 하셨다.

           엘리야는 많은 것들을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만도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저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전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없자 허무하고 화가났다. 외로워서 절망했다.

           여기서 무엇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느냐?  무엇이 너를 집어 삼켰는냐?

           3.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으라.

           [왕상 19:11-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바람, 지진, 불의 모습->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했던 모습,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인생. 전쟁과도 같은 영적인 전쟁. 사역의 연장. 지금으로부터 말하면 큰 부흥회만 다니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또한 수 많은 영적인 우상들과 전쟁하던 삶->

하나님의 응답- 불과 지진과 바람도 나의 능력이지만 난 너와 은밀히 교제하기를 원한다. 은밀한 교제를회복하자하고  나지막한 소리.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심->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가 아닌 하나님과의 은밀한 속삭임. -> 새로운 일을 주심. 그리고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 일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1) 첫째는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삼는 것이었고, 2) 두 번째는 예후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것이었고, 3) 세 번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고 아합에게 예언했다 (왕상 21:23).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 이세벨이 예후의 말에 따라 내시에게 창문으로 던져져 죽은 다음 장사할 때는 두개골과 수족 외에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개들이 그 시체를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삼는 예후에 의해서 이세벨 여왕은 창문으로 던지워저 죽임을 당하고 개들의 먹이가 됨.        

지금도 우리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복 받으려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타협할 수도 있어야하고 부정한 것도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하고, 때론 술자리도, 음란한 자리도 낄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모든 것이다. 때로 그런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는 지치고 상하고, 넘어진다. 끝없는 사탄의 괴롭힘에 지긋지긋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드시 끝나는 전쟁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넘어져도 결코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고 또한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연민에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주신다. 우리를 도와 주신다. 그런데 사실 이런 침체에 빠지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로뎀나무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고 기력이 회복한 다음 사십일을 가서 호렙에 간다. 사십일 길을 가서 호렙에 간다? 낯선 단어들 아닌가? 바로 모세가 바로의 궁을 빠져 나와 사십년 동안 광야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I am Nothing의 시간,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시간이다. 자존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영적으로 보면 축복의 시간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또한 힘든 시간이다. 그것을 연단을 다 거친 엘리야,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를 맛보았던 엘리야가 다시 그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에 한 번 선 자들은 될 수 있으면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침체가 이르기 전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예화: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볍고 편한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침체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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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보면 나아만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문장에서 보면 'Naaman was a great man'라고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는 용장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도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그를 위했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로 전에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영어로 표현된 것을 보면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심으로 그가 전쟁에 나가 승리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아만은 세상적으로는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Now Naaman was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He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highly regarded, because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말하자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문장을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의 한계 또한 보게 됩니다. 1절 시작을 보면 나아만을 단지 아람의 군대장관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미국의 국방장관을 표현 할 때, 미국 오바마의 국방장관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의 국방장관, 한국의 국방장관이라는 말을 쓰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독 나아만은 아람이라는 나라의 왕의 군대의 장군이었다. “A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이라고 하면서 어찌 보면 쓸데 없이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그냥 존귀한 자가 아니라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합니다.  Great man great man인데 ‘in the sight of his master,’ , 주인 앞에서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 구태여 아람왕을 끼워 넣어서 표현을 했을까? 성경의 표현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올라갈 수 있는 위치는 항상 상대적입니다. 항상 누구 안에서, 혹은 누구 보다 높은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위치에 올라가도 그 위에 또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느냐 하는가에 따라서 내 존귀함이 인정되는 것이지, 나 홀로 자격이 되었다고 내 가치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주권자가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위엔 하나님의 평가가 뒤따릅니다.

그가 존귀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람왕의 인정이 있었어야 하는데 아람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 앞에 서 있는 두 존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지금 아람왕으로부터는 인정받아 존귀한 자로 여겨지고 있지요. 그 이유는 아람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거래에 의해서 그는 지금 아람왕으로부터 존귀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귀함은 지속적인 존귀함이 아닙니다. 자기가 왕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만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아람왕에게 필요가 없어지면 단번에 잃어버릴 수 있는 영광이지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얻었느냐? 그 말은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그를 통해서 아람을 구하게 하셨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았다거나 어떤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람왕으로부터는 존귀함을 받고 대접을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동떨어진 삶,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다음구절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큰 용사나 나병환자더라 ->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2

세상적으로 그는 왕의 인정을 받은 용감한 장수였지만 그러나그는 나병환자, 문등병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현 상황은 무엇입니까? 세상으로부터는 인정받아 떵떵거리며 살아가지만 그 떵떵거림은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저주를 받은 문등병자라는 것입니다. 문등병은 알려지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안에까지도 수치가 되는 고약한 질병이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뛰어나고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리는 나아만일지라도 문둥병이라는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용사요, 왕에게 존귀함을 받는 탁월한 지위와 명예가 있다 할지라도 그는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대상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밝혀지면 결국 혼자만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국가의 제 2인자인 군대 장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쟁 포로나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왜 그의 존재 앞에 자꾸만 아람왕이 등장하느냐? 아람왕은 그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용맹스럽고, 그가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아서 백성들의 신망을 받아도 그의 약점을 왕이 세상에 알리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어야만 하는, 그래서 항상 왕에게 비위를 맞추고, 왕의 눈에 인정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놓인 인생. 그것이 나아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잘 보인다고 언제까지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문등병은 점점 더 퍼질 것이고 더 이상은 왕이 가려줄 수 없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겉은 화려하고 대단했으나 속은 썩어 죽음을 기다려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부러울 것 없는 사람도 그것이 있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는 허다합니다. 아마도 나아만은 당대의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원들을 불러 끊임없이 치료받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들 안타까워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나아만의 모습을 보며 그의 모습이 결국은 나의 모습이구나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겉으로는 화려하고 그럴듯합니다. 남들도 인정하고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았다고 자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은 어떻습니까? 자기만 아는 속, 자기의 진짜 실체도 괜찮습니까?

혹시 나아만처럼 남들이 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남편문제로, 어떤 분은 자식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들어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인지. 그래서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짜 자기가 처한 위험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미련한지, 그리고 나병처럼 자신에 치명적 문제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꾸미고, ~인척하고, 그저 남들 앞에 눈치보며 왕의 눈 앞에 인정받듯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해결책은 없습니다.

차라리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아프면 속히 병원 가서 치료받기에 낫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아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자신이 썩어도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아무 고통없이 그냥 죽어가는 것이 문등병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살피고 자신의 병,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고 인정하는 것. 자신의 실체, 자신의 병든 모습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야 치료의 길이 열립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뭔가요?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아프신가요? 묻습니다. 그러면 다 말해야 합니다. 감추어서는 안됩니다. 여성들도 산부인과 질병도 다 말해야 합니다. 창피하다고 숨기고 감추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와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그저 자신은 말하지 않고, ‘하나님 다 아시지요. 알아서 하세요….’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는 안 고쳐주고 은혜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혼자 다 알아서 해주시면 기도는 왜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보다가 순간순간 저의 모습을 보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 “내가 이래서 사역을 할 수 있냐?” “내가 이런 형편없는 존재인가?”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치료해 주십니다.

사도바울도 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백합니다.

(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3~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자신이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실체를 보셨습니까? 죄인이고 추악한 존재이며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존재인 자신을 보셨습니까?

그 실체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치료의 길이 열립니다.

감추면 안 됩니다. 속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감출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셔도 우리가 드러내야만 역사하십니다. 어느 작은 일도 우리의 인정,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모든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회개하며 도움을 요청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꼿꼿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의 연약함, 질병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면 낮아집니다. 더 이상 위선적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들을 귀가 열립니다.

3절을 보면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게 누구의 소리입니까? 자기 집에서 수종 드는 노예 계집종입니다. 아마도 집에서 수종들다가, 혹은 빨래를 하다가 주인이 나병을 걸린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고통을 알았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름도 없는 소녀 하나가 전한 이야기를 아람의 영웅 나아만이 새겨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아만은 자신의 실체 앞에서 낮아진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교만하고 거만한 것입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세요. 당시 쟁쟁한 왕의 주치의들이 치료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 아이의 소리가 들렸겠습니까? 그러나 절망에 빠진 어느 날 그 아이의 소리가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갈 적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음성이, 평소에는 무시하고, 외면하고, 상종조차 않던 것으로부터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계집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속에서 요동이 쳤고, 희망을 주었고, 그리고 그 소망대로 그는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음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가득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잘 들리지 않을까요? 세상 생각과 내 마음의 소리가 가득하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여유가 없으니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나를 꽉 붙잡고 있으니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나병은 불치병이야, 나병은 저주받은 병이야이것이 우리를 꽉 붙잡으면 주의 음성이 안들입니다.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이 강하기에 하나님 음성과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들릴 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보세요. 말씀을 묵상하세요.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면서 마음을 비우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예배시간에 세상 것을 내려놓으세요. 자식 걱정 내려놓으세요. 사업 걱정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리고 음성이 들리거든 그대로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인생을 바꾸어놓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수 만 마디 말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는 극히 소숩니다. 대다수가 우리의 정욕대로, 욕심대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은 한 마디 말로 천지를 창조합니다. 그 한마디 말씀이 내게 들려질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라는 존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일개 계집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에게 갑니다. 중간에 아람왕도 있고, 이스라엘의 왕도 있지만 그는 지금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가야 치료받을 수 있느냐? 어디에 있어야 은혜받을 수 있는가? 어느 곳이 날 구원할 수 있느냐? 그 믿음이 들어오면 중간에 어떤 또 다른 통로, 계획, 유혹이 있어도 머무르지 않고 그 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람왕도 통과하고 이스라엘 왕도 통과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 생각과는 다른 대접을 합니다. 문도 안 열어보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종을 시켜 명령합니다.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그러자 나아만이 열을 받았습니다.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렸습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 딴에는 예를 갖추어 방문했습니다. 한 나라의 군대장군인데 일개 선지자에게 갖가지 예물을 가지고 큰 무리와 함께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사는 그의 여전히 스며있는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나병 앞에서 자기실체를 보았기에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왕의 추천서를 갖고 이스라엘 나라 왕에게 찾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벌벌 떱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대국의 장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엘리사 집 앞에 도착하면 얼른 뛰어나와 엎드려 자기를 정중히 맞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어 기도해 줄줄 알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신앙 생활에서 내 생각에는은 순종의 반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나를 망하게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 생각에는하는 생각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교만의 표현입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서는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못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 교만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나아만이지만 나아만을 고쳐주실 분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엘리사가 치료해 주는 줄 알고 찾아와서 합당한 대우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사람 앞에 서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도 목사 앞에서, 또는 성도 앞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저는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권위로서 사람들을 대하기가 정말 싫습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한 중요한 원인이 잘못된, 혹은 과장된 목사의 권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배운 리더십은 그래서 친구로서의 리더십이고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가지고 설 때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정승구라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제 개인이 무시를 당하고 허물 없이 생각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서는, 제가 전해야 하는 말씀이 무시를 당하고, 그 말씀을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의 말로 취급을 할 때에는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제 목회 철학이 잘못되었나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정승구라는 모습을 지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을 무시함으로서 그에게 질문합니다. 네 병을 고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서 네 병을 고치기 위한 겸손이 있느냐?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하시던 네가 순종하느냐?  명심하세요. 요단강 물이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과 순종이 그의 나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명령하면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을 못합니다. 왜죠? 내 형편,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못하나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신앙이고 하나는 교만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나아만은 흥분하여 돌아간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 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작은 계집종을 통해서 나아만을 인도하더니 지금은 지혜로운 부하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말합니다. 더 큰일을 하라 해도 할 텐데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이 뭐 어렵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미련하면 옆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살게 됩니다. 남편이 미련하면 아내라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늘 나를 점검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아만이 훌륭한 것은 그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뜻을 굽히고 그 말에 순종할 수 있는 겸손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해서는 안됩니다. 공동체 속에서 늘 서로 도우며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의 종이 옆에서 조언을 하고 우리의 생각을 고쳐주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옆에서 우리의 생각을 고쳐먹도록 지도해 줍니다. 그때 생각을 바꾸고 받아들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남의 말 듣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그 순간 그 말이 옳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린 포로소녀 한 아이의 말도 듣더니 이제 자기 아랫사람의 말도 듣습니다. 희한하게 나아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왕도 아니고 권위 있는 자도 아닌 계집종, 그리고 자기 수하의 부하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자기 맘에 안들과 기분도 안 좋고 처방도 달갑지도 않았으나 그는 요단강으로 갑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 앞에서 자기 옷을 다 벗습니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자기의 벗은 모습, 문등병을 모든 사람 앞에 내어 놓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명한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잠갔습니다. 7번 씻고 나왔습니다. 7번은 완전 숫자입니다. 온전히, 끝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때론 아픈 말을 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듣기 좋도록 아첨하는 말에 속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듣기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하면 아멘 하고 듣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게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복을 누린 결정적 전환점은 자신이 가장 화나 있고, 자신의 뜻이 선지자의 뜻과 가장 맞지 않을 때에 자기에게 충고하는 부하의 말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냥 되지 않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 우리에겐 때로 말 못할 상처도 있고 말 못할 나만의 약점도 있습니다. 다 목사에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낱낱이 고해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은 썩어져 가는데 겉모습에만 치중해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문등병을 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 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지 그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계집종, 수하의 부하, 엘리사.

가장 큰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는 목사의 설교입니다. 설교를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목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군대 장관이었지만 자신의 문등병을 자각했습니다. 작은 소녀의 소리를 구원의 소리로 받아 들고 이스라엘로 엘리사 앞에 나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엘리사에게 화가 났지만 부하의 소리를 듣고 꾹 참고 순종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였고 들려진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로고스 교회의 목사로서 난 우리 교회의 병을 하나님께 아뢰고 드러내고, 치료받아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 자신의 허물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혹시라도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질까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날마다 나 자신의 허물을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로고스 교회의 지체인 동시에 주인입니다.

2012년은 우리의 상처가 드러낸 해입니다. 그 상처 때문에 아팠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상처는 누구 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를 살립니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서지 못했기에 나도 상처 입은 사람 중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상처 안에는 나의 상처, 나의 문등병도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상처 안에 있는 나 자신의 허물, 나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리는 내 상처 때문에 내가 너무 아파요. 내 상처 때문에 가족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 상처 때문에 교회를 아프게 했습니다라는 고백이고 회개입니다. 내가 회복되면 교회가 회복됩니다. 2012년 교회의 표어는 회복시키는 교회, 빛을 발하는 성도였습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상처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고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고 순종함으로 치유받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순복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2012년이 한달 남았습니다. 12월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달입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상처를 그 분 앞에 내어 놓을 적에 그 분의 탄생을 우리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한 달 남은 2012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치유 받아 2103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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