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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식사기도 (마태복음 26:26-27) 

 

[마 26:26-27]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예수그리스도 - 구원자, 메시야임과 동시에 모든 성도의 삶의 모델, 성도의 삶-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감사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삶이 보여주는 것, 그 모델과 의미를 알 적에 우리는 비로서 그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일생에서 가장 많이 하는 기도 - 이마 주기도문? 아마 식사기도일 것이다. 

그 식사기도의 모델- 음식 앞에서의 기도 

 

오늘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의 기도보다 앞서서 행한 식사기도 

 

1.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축사하다, give thanks- 유로게센 (헬)> - 식사 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 -유대인의 식사기도습관
  • 왜 우리 말로 "축사하다"도 번역했을까? 신약성경에서 감사와 축복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 주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구해야 할 것 - 오늘의 양식 
  •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기도의 응답이고, 또 내일에 대한 믿음이고, 주신 것을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요, 그 축복을 남들과 나눌 수 있는 축복이었다. 
  • 오병이어의 현장은 이 감사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본문 
  •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 그 무리는 장정만 오천 명, 거의 이만명으로 추정되는 수 많은 무리, 그러나 그들에게 지금 있는 것 -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수많은 먹여야 할, 해결되어야 할, 무리가 오천인데 지금 있는 것 - 오병이어, 그 때 드리는 감사의 기도- 지금 있는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있는 것을 통하여 그 무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축복의 간구- 축사다. 
  •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다. 그래서 감사와 하나님의 축복은 동의어로 쓰인 것이다. 
  • 오병이어 기적의 예표가 되는 구약의 사건 -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적을 베푼 사건 (왕상 17장),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100명을 먹이고도 음식이 남은 사건 (왕하 4장)
  •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인 사건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 불평과 원망 Vs 예수님의 사건  감사함으로부터 시작) 

 

2. 최후의 만찬에서 

  • 오병이어 사건과 최후의 만찬 사건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주신 음식을 가지사 -> 축복하시고 (give thanks- 유로게스)-> 떼어 주시매 (나눈다) -> 온 무리가, 온 인류가 나눈다. 
  • 그가 가지신, 떼어 주신 음식은 무엇인가? 바로 주님의 몸을 떼어 주신다. <내 몸이다. (26절) 내 피이다. (28절)>
  • 그러니까 주님의 감사는 어떤 상황에서 나타난 감사인가? 자신의 삶의 죽음을 두고 한 감사,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위기를 앞에 둔 감사
  • 지난 주의 나눈 하박국의 한 밤 중에 드리는 감사와도 같은 것
  • 이제 최후의 만찬이 지나면 바로 닥치는 것 - 겟세마네의 기도와 체포, 심문, 죽음 만이 남아있다. 주님을 지금 앞으로 다가올 그 사건들 앞에서 감사하고 있다. 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죽음 앞에서의 감사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온다.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어떤 상황인가? 바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드린 감사이다.  
  • 어떻게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예수의 죽음 이후, 나사로의 죽음 이후 나타나는 사건 - 바로 부활
  • 그 분의 죽으심이 멸시와 실패와 모멸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모든 양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으로 열매맺고,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믿는 자에 대한 부활의 소망을 가리키는 모델이 될 것을 아셨기에 그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 지난 주 설교 말씀 중에서 고난 중에서는 과거도 보이지 않고, 미래도 보이지 않고 단지 땅만 보이고, 현재만 보이고, 현실만 보인다. 
  • 그런데 복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눈과 미래의 소망을 통해 이 죽음 같은 현실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큰 그림, 하나님의 지도를,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기도와 흡사한 기도가 또 다른 인물을 통해 신약성경에 등장한다. 바로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다. 

[행 27:33-38]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 이것이 언제 나타난 기도인가?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후송되는 배 안에서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 다 죽게 되었을 때에...
  • 276명의 승객들이 배에서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선장과 선원과 사람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모든 짐을 다 물로 내어던졌는데 그들이 주리면서도 저 음식마저 버리면 다 죽을 까봐, 폭풍으로 지치고 주린 상태에서 굶고 있을 때에 사도바울의 말
  • 죽을 까봐 먹지 못하는 인생, 내일 걱정 때문에 오늘 죽어가는 인생- 오늘, 지금, 여기서 먹으라.  
  • 가져다- 축사하고- 떼어 먹고 - 또 나누었다. 
  • 먹으니 배가 가벼워져서 태풍을 통과한다. 감사하고 나누니 고통이 없어지고 인생의 짐이 사라진다. 배가 가벼워진다. 

 

<결론> 

  • 가져다가 - 감사는 지금 내게 남아있는 것,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통해 시작하는 것이다. 
  • 축사하고 - 믿는 자에게 현재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 감사의 제목이 된다. 믿지 않는 자에게 현실은 언제나 고통의 현장일 뿐이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예수를 통해 배우는 것 - 어떤 형편- 어떤 현재적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것이다. 자족하는 것은 곧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형편에서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범사는 곧 모든 형편에서 감사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형편에서 감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죽음 뒤의 부활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나를 환경에 매인 자가 되지 않게 하신다. 말씀에 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이고, 복음에 매인 자가 되게 하신다. 
    • 감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습관이다. 객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더 감사하지 않는다. 헨리 나우엔 :"감사는 의식적인 선택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불쾌해하거나 반감이 가득찬 상태에서도 우리는 감사를 선택할 수도 있고 살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 떼어주고 나눈다. - 
    • 감사는 우리의 삶이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얽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감사할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관계의 풍성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감사를 잃어버리게 될 때에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며 모든 관계에서부터 소외된다. 
    • 감사를 잃어버린 자들의 생각: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모든 것이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 -> 감사를 막는다. 
    •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한 소년의 오병이어의 감사가 오천 명의 무리를 다 먹게 하고 남게 한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님의 감사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감사가 된다. 유라굴로라는 태풍의 현장에서의 감사는 276명의 모든 파선된 자들 구원한다. 감사는 곧 구원이다. 
  • 열 명의 문등병자가 문등병을 치료받았지만 예수께 와서 감사한 자는 단 한 명이다. 아홉은 문등병을 고친 것으로 끝났지만 감사한 한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 
  • 알버트 슈바이쳐 (의사, 신학자, 선교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터득한 사람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신비를 꽤뚫고 있습니다. 삶의 신비는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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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에 부르는 노래 (합 3:16-19) 

 

[합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한 달 전쯤만 해도 아침 묵상 녹화를 하고 집에 가는 길에 공원에 들려 한 시간쯤 새벽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수도, 나무도, 호수 위에 오리들도 새벽녁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Day ligit Time이 끝나고 나서 한시간이 늦어지니 새벽이란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7기가 되어도 밖이 어두워서 산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간만에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차라리 시간을 옮겨 오후 5시쯤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새벽녁 걷던 공원에 나갔습니다. 걷기 시작한지 몇분이 채 되지 않아 공원이 칠흙같이 어두워졌습니다. 아이들이 무섭다고 빨리 들어가자고 보챕니다. 결국 핸드폰 후레쉬를 비추고 가장 짧은 코스를 서둘러 걷느니 마느니 하고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길도 어둠이 임하면 두렵고 어둡습니다. 

물리적인 길도 그러한데 인생길이야 두 말할 필요 없습니다. 눈 앞이 캄캄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인생길이 하루 아침에 감옥과도 같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보이는 길을 걸어가는 길도 때로는 쉽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어두운 밤 길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급습합니다. 코로나 19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지만 사람들이 희망을 갖기 보다는 앞으로 닥칠 큰 혼란과 갈등을 더 두려워합니다. 

 

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칠흙같은 어둠의 밤이 찾아오는 지 하나님은 그 때 그 때 답을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러한 밤에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나누고 있는 이사야 45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 45: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바벨론의 압제 하에서 흑암의 밤을 지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준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나눈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값진 진주를 장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흑암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하시고 역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철저히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한동대학의 세워진 기록을 담은 [갈대상자]의 서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길이었지만 그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나는 길목 길목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지켜보며 그 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할지라도 가장 안전하다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되어 갔다." 

바로 흑암 중의 보화를 캐내는 사람이다. 

 

1. 하박국의 배경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사람으로 바벨론에 의해 유다나라가 파멸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흑암의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피 토하듯이 말씀을 전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았고,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형제국가였던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망했어도 남왕국 유다는 태연하게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살아갔습니다.

바벨론이 갑자기 떠올라 앗수르와 애굽을 차례로 제치고 주변 지대를 장악해 갑니다. 그리고 급기야 유다를 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이 때의 상황을 하박국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얼마나 두렵고 절망했으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겠습니까? 

지금도 어려운데 닥쳐올 환날 날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내 뼈가 썪는 것 같다고 하고 온 몸이 집안 처소에서조차 떨린다는 것입니다. 

 

온 몸과 뼈가 다 떨리는 위기의 때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이 한 절에 "없다"라는 표현이 다섯 번, 무성하지 못하며까지 합치면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위기는 닥쳐오는데, 온 몸은 절망하는데 내가 가진 것을 보니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저 완전히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런 인생의 캄캄한 밤을 보내는 하박국이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뿐만 아닙니다.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한참을 자신들의 처한 칠흙같은 밤을 하나님 앞에 아뢰다가도 그들의 끝은 언제나 찬양으로 마칩니다. 의례껏 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흑암 중의 보화를 캐내는 것이고 은밀한 중에 재물을 주시듯 그들의 입술에 찬양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양, 이 고백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입술로만 외치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1장부터 흘러오는 하박국의 마음의 흐름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1장: 하박국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두 번 반복됩니다. 

첫 번째 기도 

[합 1:2-4]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 지금 그들이 처한 현실은 흑암처럼 어렵기만 한데 하박국의 눈에 비친 가장 큰 고통은 유다 백성이 그러한 현실에도 죄악으로, 패역으로, 갑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 정의가 없고, 말씀도 없는, 전혀 정신 못차릴 뿐만 아니라 악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 

[합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무슨 소리입니까? 유다 백성의 죄악이 극에 달했으므로 그들보다 더 악하고 강한 갈대아 사람, 바벨론 사람을 일으키어 그들을 삼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응답에 놀란 하박국이  기가막혀 더 크게 기도합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뭐라 기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을 했다고 그래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 이방인들을 통해 성전을 짓밟고, 허물어 낼 수 있습니까? 기도라기 보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 이런 항변의 기도를 통해서도 하박국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그 분은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주님 살아계시기에, 그 붙의 통치하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요구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의 주된 내용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늘어나고, 은행의 잔고가 늘어나고, 부동산이 늘어가고...좋은 직장, 좋은 대학..세상 일이 잘되는 재미로 살아가지만 하박국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란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단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을 꽤뚫는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더 이상 하나님께 따지지 않습니다. 항변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유다 백성을 어렵게 할지라도 하나님은 종국에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엄청난 흑암과 어둔 밤같은 인생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의 능력이요, 구원이요, 생명인 것을 알았습니다. 

고통의 현장과 아픔의 현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뚝 서 계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를 둘러싼 모든 "없음의 상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장으로 가면 하박국은 지나온 자신의 삶과 이스라엘의 지나온 과거를 돌아봅니다. 

[합 3: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 데만과 바란- 바로 시내산과 동일한 지명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광야 땅에서 언제까지,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다가오셨던 곳,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면서 약속해 주셨던 바로 그 곳입니다. 
  •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다. 내가 너희를 돌본다. 다스린다"는 말씀을 주시고 확인시켜 주신 장소가 데만이고 바란 산입니다. 

 

위기에 처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어려움이 없었던 자가 없습니다. 환란이 없었던 자가 없습ㄴ지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환란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신뢰하게 되었고 결국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는 과거에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현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여 현실로 가져오도록 절기를 정하여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 사건을 통해서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끌어와서 오늘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맛보고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억하고 기념하여 현실로 가져오는 시간입니다. 

 

그런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과거에 나를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을 오늘 여기에서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면, 미래에도, 장래에도 끝까지 나를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비전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과거의 것을 이끌어와서 현재에 경험하는 것임과 동시에 미래의 사건을 끌어당겨서 여기 내가 처한 현실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장래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보게 될 혼인잔치를 끌어당겨서 지금 칠흙과도 어두운 흑암의 현실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지나온 삶들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보다 힘든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픔이 있었지만 동시에 은혜가 있었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들이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큰 지나가버리지 않았습니까? 

돌이켜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답답하고 안타까운 날 들 중에서 인생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손 길이 없었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통은 과거도 잊게 만들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다 끊어버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도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여전히 연약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장받았습니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은혜의 과거와 은혜의 미래 속에서 지금을 이기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다 끊어진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지금이 제일 힘들다. 지금 처럼 힘든 날이 없었다." 

여러분 그런데 그 말 진짜입니까? 진짜 지금보다 더 힘든 때가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고통스러워 밤 잠 못누리고, 서럽고 외롭던 시간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시간들, 그 순간들 지금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나갔지요? 잘 기억도 안자지요? 그럼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어떨까요? 또 지나가고 기억도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은혜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하늘 나라 사이에서 각자가 선택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객일 뿐입니다. 

 

  • 하박국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다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았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덜 가치있는 것을 가장 가치있다 말하고, 덜 좋은 것을 가장 좋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고 좋은 것을 아시고 주십니다. 

농부의 고백: 한 낮의 더위가 너무 뜨거워 일하지 못할 때,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때조차 곡식은 익어갔습니다. 한겨울의 추위가 온 몸을 얼어붙게 해서 논밭을 들여다볼 수 조차 없을 때에 땅 속의 온갖 병충들이 다 죽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난 내 손길이 다 열매인 줄 알았는데, 정작 농작물은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때에 자연이, 자연의 주인이신 당신께서 모든 열매를 익게 하시고 열게 하시고 또 다음 해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 이생진 시인이 하늘을 본다 - 개미에 관한 많은 시를 남겼는데 한 구절이 기억나는 시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은 개미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진다. 

 

물론 성실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늘을 잊고 땅만 뒤지면서 사는 개미들은 자기가 가는 길도, 본향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내 인생의 과거와 미래, 그 방향을 바라보며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유다가 멸망당하면서도 그저 악행을 그치지 않고 멸망당하는 자기 민족을 바라보며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악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노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시고, 현실을 넘어 흑암 너머의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사 하나님의 백성은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하박국은 모든 없음의 상황에서도 난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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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행복을 캐내는 자 (마 13:44-46) 

 

[마 13:44-4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 천국 -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의 주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백성 (참 이스라엘), 그리스도가 주인된 교회 (참 교회) 

이중적인 개념 

  • 천국 - 내세, 죽어서 가는 나라. 이 땅이 아닌 저 세상, 육신적 세계를 넘어 거하는 저쪽 나라, 장소적 개념,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거할 수 있는 나라  

              - 지금 여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관계의 개념

  • 관계적 개념으로서의 천국의 모델 - 에덴동산,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거하였다. 에덴 (즐거움, 행복)의 의미 
  • 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렸다) - 왜 잃어버렸나? 
    • 뱀의 유혹 -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의 개념 -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친밀한 관계 
      • 생명나무와 선악과 - 생명나무: 하나님의 공급, 충만함, 선악과: 하나님의 통치 -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 각자 소견에 옳은대로...
    • 실낙원에서의 인간의 삶 - 항상 낙원을 동경하게 되어 있다. 
      • 유토피아를 꿈꾸며 - 선악과만 먹는다면, 장자권만 얻는다면, 라헬하고만 결혼한다면... (정욕과 소유) 

                                              - 아벨만 아니라면, 다윗만 내게 없다면...  (미움과 시기)

                                              - 항상 if~(가정)의 세계를 동경하고 추구하게 만든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항상 부족(결핍)하거나 지금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 미움의 상태다.  

      • 현실부정- 지금 여기에 대해 만족이 없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무엇을 가져야 얻을 수 있었는데(이스라엘의 자치권)

                                         무엇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로마, 부패한 정치가, 부패한 종교인)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주님의 말씀에 거하면, 제자가 되면 얻게 될 자유, 행복, 천국)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이 자유를 동경하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자유로부터 도피되는 삶, 무엇엔가 지배되는 삶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예수가 곧 진리다. 곧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실낙원(천국을 잃어버린 인간) - 항상 현실을 부정한다. 애굽에서는 애굽이 못견디겠다고 하고 광야에서는 광야가 못견디겠다고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왕을 달라하고 왕을 주니 우상을 섬긴다. 달라는 대로 주어도 언제나 부족하고 주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다. 

     예수의 구원 - 어떠한 현실에도 긍정, 자족,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음 

     바울은 스스로 터득했다가 아니라 배웠다고 말한다. 배웠다는 것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고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바로 내게 능력주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실의 종교다. 

     다가올 내세만을 강조하며 현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현실을 긍정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적어도 맛보게 하신다. 

     현실의 천국과 내세의 천국을 이어 그 두개의 천국이 결국 하나님이 주인된 하나의 세계임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 천국의 비유, 천국장 (청국장이 아니라 천국장) 

  • 씨뿌리는 자 - 밭의 비유 (1-23절)  - 같은 씨앗이 밭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 
  • 가라지의 비유  (24-30절) - 잘못된 씨앗이 뿌려지는 경우 - 추수 때에 골라내자 - 그 씨앗에 속한 열매인지, 아닌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인지, 세상에 속한 악한 자의 아들들인지...
  • 겨자씨와 누룩 (31-35절) -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어 그늘이 되고 안식처가 된다. 

 

-씨뿌리는 자를 통해서 우리는 밭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밭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마음 밭, 말씀이 심겨지는 우리의 심령이다. 

- 가라지의 비유에는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삶의 현장에는 참된 씨로부터 열린 열매도 있지만 잘못된 씨로 부터 열린 열매가 있음을 말한다. 현재의 교회, 현재의 우리의 심령에도 그 두가지 열매가 뒤섞여 있다. 그런데 추수 때에 그 두가지 열매를 반드시 걸러내겠다고 하신다. 

하나님 믿으면서도 믿음없이, 순종없이, 자기 생각과 자기 열심으로 이룬 열매 - 가라지

- 겨자씨와 누룩: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열매-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남들이, 나 자신조차 대부분 외면하는 말씀이지만 그것이 삶에 나타날 때 모든 새가, 사람이 머물며 안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처소가 됨을 말한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마 13:44-4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밭은 무엇인가? 내 마음, 말씀이 뿌려진 심령. 그런데 천국이, 보화가, 말씀이 그 심령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왜 이 말씀이 내 마음에 감추어져 있는가? 왜 내 마음 속에서 발견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가? 

기독교 역사에서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 -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영국의 기독교가 가장 혼탁하던 시절 - 가톨릭, 성공회, 청교도, 그 외의 모든 교파들이 난립하던 시기 

진리에 목마른 청년 - 조지 폭스 

교회가 진리의 장소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장사하는, 말씀을 팔아 배를 불리는 사람들로 가득찬 곳

교회라는 말 대신에 뾰족탑 건물이라고 칭하면서 어디서 참된 스승을 구할 수 있을까? 모든 교파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참 스승과 참 교회를 찾아다녔던 사람 

그런데 그가 찾은 빛은 외부가 아니라 그의 마음 깊숙히 새겨진 말씀과 성령

그들의 예배- 자기 안의 성령이 말씀하실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당시 모든 교회의 은혜의 통로로서 주어지던 예식, 성찬식, 심지어 찬양도, 심지어 설교도 자기 안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된다며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침묵으로 자신 안의 빛에 집중. 

특별한 시대, 특별한 자에게 주신 메시지. 

 

오늘의 본문과 똑같은 의미의 구약의 말씀 

[잠 2:4-5]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 구하고 찾는 것 - 열정을 다해 수색하고 구석구석 살피는 것-> 어디를 찾는가?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심겨진 말씀을...
  • 그러면 얻는 것 - 여호와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 그 분을 얻으면 누리는 것 - 바로 천국,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그 분의 통치

 

45절부터 댓구가 되는 구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44절)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5절) 

  • 진주: 조개 안에 작은 모래나 뼈조각이 들어오면 그것을 내보내지 않고 품다가 그것이 주는 고통 때문에 조개 내부의 콘키오린이라는 진액을 뿜어내어 그 모래알을 감싸고 또 감싸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모래알을 둘러싼 액이 굳어져서 진주가 되는 것 
  •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어떤 말씀은 나를 찌르고 수술하여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게 날 아프게 하지만 그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면서 내 마음 속에서 품으면 그것이 진주가 되고 내 삶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 보화와 진주가 댓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화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댓구를 이룬다. 

왜 보화와 진주가 댓구가 아니라 보화와 장사가 댓구를 이루는가? 

묵상하며 이 의미를 생각하는 중에 아주 우연히 이 말씀을 기가 막히게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Boudin이라는 빵집 - 샌프란시스코 Pier 39에도 있고 체인점이 몇 군데 더 있다고... 

그 빵집의 싸인판을 보면 그 역사가 1849년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금이 발견 된 것이 1848년 -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인구수가 1000명도 안되는 척박한 곳 

금이 발견되자 수만명의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금을 찾은 사람은 극소수, 그 극소수. 나머지 수 많은 사람들은 그저 찾지 못한채 허송세월. 

사람들이 금을 찾아 헤매고, 저 멀리 서부 어딘가 있을 법한 보석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때, 바로 그들의 옆에서 열심히 맛있는 빵을 구웠던 사람. 그리고 황금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그 어떤 것도 손에 얻지 못할 때, 하루 세 번씩 매일 먹어야 하는 빵을 열심히 구원던 사람은 1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면 한 번쯤은 찾아가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던 것

 

외부에 있을 어떤 것을 찾기에 무지개를 찾아다니듯 천국을 찾아,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족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 천국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캐낼 수 있는 것이다. 

 

11월은 감사의 달

여러분에게 천국은 어떤 곳인가? 

여전히 내게 무언가 있다면, 아니면 저사람만, 이 사건만 없다면....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인가? 그런데 그런 삶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채워질 수도 없다. 

감사는 내 안에서 캐내는 것이다. 

내 안에 심겨진 말씀을 내 마음의 진액으로 싸매어 아프고 또 아프더라도 그 모래알 같은 말씀이 내 안의 가장 귀한 보물이 되도록 묵상하고,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 내 마음 속에 진주를 만들어가는 것. 

2020년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깊은 고난과, 답답함과, 어려움과 환란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 심겨진 말씀을 통해 보물을 캐낼 수 있는,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지혜가, 그런 간절함과 진실함이 우리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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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의 기름을 채워라! (왕하 4:1-7)

 

아합왕의 시대 - 북왕국- 20명의 왕조 중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여로보암의 길,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자신이 정한 사람을 세워놓고, 자신이 정한 때에 황금송아지를 앉혀놓고 예배하는 길.

자기복음,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우상-> 황금으로 자기들을 섬겨주기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이 표현된 신께 제사하는 신앙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 아합왕. 그나마 명목상으로나마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데서 떠나 자신의 아내 이세벨을 따라 바알과 앗세라 사제들로 성전을 채우고, 바알과 앗세라 상을 세우고 제사하게 함.

 

그 때, 그러한 시대에 의분에 차서 일어났던 선지자 - 엘리야

그가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인 후에에도 아합이 변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자, 낙심하고 지쳐 로뎀나무 가에 망연히 주저앉아 고백했던 말

- 내가 열심히 특심하오나 나만 남았습니다.

-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두었다." (열왕기상 19장까지의 내용)

 

그 칠천명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고, 또 다른 무리들을 찾아 그 믿음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여 엘리야의 남은 일생 - 자신의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선지자를 양성하는 것.

 

우리나라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6.25때에도 국가적인 위기 때에 힘썼던 것 - 전쟁보다 우선 한 것 - 교육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과 더불어 세우고자 했던 것 - 학교

우리나라 빈민선교, 구제 선교에서 늘 중시하면서 세워 나갔던 것 - 야학-> 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바알에게, 세상에게, 세상 권력에게 무릎꿇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열왕기상 후반부와 열왕기하에 걸쳐서 엘리야와 그 뒤를 이은 엘리사의 때에 "선지자의 제자,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열왕기하 2장에 보면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상당한 수의 제자들의 수(50여명)가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선지자라는 것이 교육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기름 부으심)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를 제외하곤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구약의 시대, 성경은 적어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시기에 현재의 신학교와 같은 선지자로부터 교육을 받고 또한 선지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신앙적으로 부흥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던 시대였습니다.

나라의 분위기가 왕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 선지생도들의 삶은 대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웠지요.

하나님 믿고 의지해서 살려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하는데 아합과도 같은, 그 뒤를 이은 아하시야와 여호람 같은 모든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들의 삶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한 아내의 남편되었던 선지생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라 선지생도가 되었지만 무슨 경위인지 모르지만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빚만을 남긴채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경제 활동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과부들은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룻기를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 남기워진 이삭을 주어 살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갚는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빚쟁이들이 독촉을 하다가 급기야 두 아들을 데려가 종을 삼고자 합니다.

그 가족이 한 것이라고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잘 믿고자 한 것 밖에는 없는데 남편은 아무런 열매도, 사역도 하지 못한 채 죽고 이제 두 아들은 악한 세상의 종이 되어 끌려 가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권자이시니까 이런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얘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가정에 닥친 이 여인과 같은 가정의 고난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어떤 선한 뜻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악한 세상 중에 하나님 믿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하는 자들, 신앙적으로 열심내는 자들이 세상에서 받는 고통은 신앙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답을 내릴 순 없지만 믿는 자건 믿지 않는자건 고통은 현실이라는 것이고 삶은 곧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편한 날보다 어려운 날이 더 많습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고통의 현장에 들어서면 그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고통은 현실로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해답을 찾을 수 없게 합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빚만을 남긴 채 죽은 선지생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경우는 여전히 우리 일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어서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각자가 가진 고통의 환경은 각기 다르지만 그것은 양으로 측정되거나 객관적으로 단계를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남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나에겐 견디기 힘든 큰 문제일 수도 있고 저런 걸 어떻게 견딜까 싶은 문제들을 어떤 이들은 넉넉히 이기기도 합니다.

 

고통의 현실에 있어서 "왜?" 라는 문제에 매달리면 우리는 점점 더 절망하게 됩니다.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에게, 저들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왜 하나님이 이런것을 허락하셨을까? 생각하다보면 미로에 갇힌 것처럼 점점 더 하나님이 멀어지고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욥기 고통을 받을 때에 아내가 뭐라고 얘기하면서 떠납니까?

"아직도 네가 하나님께 예배하느냐? 차라리 저주하고 죽어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애썼는데 그런 고난을 받으면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것이지요.

 

고통의 상황에 있어서 "왜?"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에 대한 문제입니다. 모두가 이해 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를 만나지만 어떻게 그것을 다루고 어떻게 그것을 이기고,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가?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여러 한계의 상황을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 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왕하 4: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1.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가?

원망이나 기가막힌 일이 일어났을때, 대개 사람들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앞에서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문을 닫아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선지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에게 나왔습니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자를 만났습니다.

1절에 보니까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조용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응어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엘리사를 찾아가 조용, 조용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죽을 것 같고, 괴로운 그 마음을 토합니다.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소연을 하던, 원망을 하던, 아니면 부르짖고 매달리던, 이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그 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렘 33:2-3)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국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에게 나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할 수 있는 자에게 나아가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행할 수 없는 자에게 이야기 할때가 살펴 보면 더 많습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능력없는 자가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일을 행하십니다. 성취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것들을 보여 주십니다.

 

2. 여인의 고백-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여인은 엘리사에게 절규합니다.

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습니다. 이제 빚쟁이들이 와서 두 아들을 종삼겠다고 합니다.

여인의 의도는 이겁니다.

  • 신앙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 그리고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신앙 좋은 사람이 좋게 죽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한 신앙인 이었지만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죽을 때에 자기 자녀들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나라의 기울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분의 제자들은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했습니다.

 

신앙인이 좋게 죽으면 좋겠지만 좋지 않게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든지 신앙인은 죽으면 하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결국 신앙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지껏 남편의 신앙에 의지해서 살았는데, 남편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떠났습니다. 이제 나 어떡해요...

아내의 말은 무엇입니까?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는 부르짖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은 말을 못합니다.

여인은 믿음 좋은 사람의 아내였을는지는 모르지만 믿음 좋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하 4: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엘리사의 응답 -너의 믿음을 채워라.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엘리사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아내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신앙좋은 남편이 죽었으니 내 하소연좀 들어주십시오. 거기다가 좀 더 기대하는 것은 '내가 억울하니까 날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사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네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 말이 엘리사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네 집에 있는것이 무엇이냐?"

지금 아내가 엘리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가진 것이 있다면 날 도와줘야 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도와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의지하는 남편이 없어졌을 때에,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냐?

믿음 좋은 선지 생도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여인이 말합니다.

"기름 한 그릇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살 길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방법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엘리사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남긴 것이 있다. 너에게 찾을 것이 있다.” 고 하십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기름 한 그릇, 기름 한 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름 한 병이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 기름 한 병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남편과 남편의 믿음만을 의지하던 여인에게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남편의 신앙, 남편의 믿음이 아닌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내 남편도 죽고, 빚은 넘치고, 두 아들마저도 빼앗길 처지이지만….그래도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도움이시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당신이 주신 성령이 남아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건,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이라면 내게 도울 수 있다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 안에는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큰 믿음을 가지진 못했어도, 확실한 체험을 가지진 못했어도, 때로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끈덕지게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 내게 작은 기름 한 병 남아 있습니다.”라고 깨닫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 있다는 여인의 대답에 엘리사는 또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채워지길 원하는 은혜의 공간입니다. 빈 그릇은 내 영의 갈급함의 공간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분량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더 이상 빠지면 광신에 빠지고, 친구도 잃게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니까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같습니다.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엘리사는 집안의 모든 빈그릇을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합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웃의 빈그릇을 긁어 모으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치는 은혜를 주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부어 줄 테니 네 주위의 갈급한 심령, 네 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심령, 모든 공허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긁어모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모든 가난함을 채우지만 나만 알았던 나의 시선을 내 주위에, 내 이웃에 돌리도록 합니다. 지금 나도 없어서 죽을 것 같은데 내 주위의 더 가난한 영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에, 엘리사의 이 요구는 황당한 요구입니다.

지금 빚쟁이가 독촉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웃에 나가서 또 빈그릇을 빌려 오라니,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빌려 오라니, 이웃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 그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을 듣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이 모라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그릇을 가져 옵니다.

4절)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어디로 들어갑니까?

네 집안의 골방,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세상의 것 생각지 말고, 빚쟁이도 생각지 말고, 죽은 남편도 생각지 말고 오직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져온 빈그릇,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의 모든 빈 그릇, 빈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까지, 문을 닫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81:1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다. 그러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절망과 원망과 염려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것이 크던 작던 여러분 안에는 작은 기름 한 병들이 있습니다. 그 기름이 있기 때문에 누가 억지로 앉혀놓지 않아도 예배의 시간에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름을 앞에 두고 더욱 갈급한 심령으로 빈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갈급함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왜 은혜가 충만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아닌 다른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맡긴 것이 있다 하십니다. 네게 믿음이 있고 네게 성령이 있고 네게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갈급한 영혼들을 위해 골방에 들어가 기름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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