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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장 1-9절 

 

1. 전체 구성

  • 이사야는 전체 6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39장까지는 유다 멸망 이전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심판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40장부터 55장까지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주는 위로와 희망(구원)의 메시지, 56-66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에게 주는 계시와 당부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한 사람이 쓴 거냐? 예언자는 문서를 남기지 않는다. 후대의 사람들이나 그 동료, 혹은 제자의 무리들이 그 예언자의 삶과 설교를 기록한 것이다. (제 1 이사야, 2 이사야, 3 이사야라고 나눌 필요없다.  이사야서는 긴 형성과정을 통해 의도적으로 한권의 말씀으로 형성된 책이다. 신학적으로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다. 이사야서에는 많은 시간과 장소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심판과 구원 신학을 표현하기 위해 한권의 책으로 읽는 것 -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이 이 책을 대하는 태도로서 읽기를 원하는 것이다. 
  • 특별히 기독교 교회 공동체에서는 신구약 성서 전체가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전체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기도 특히 40장부터 55장 사이에 나와있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는 내용이기에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이사야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 이사야 BC 740년 부터 BC 680까지 4대의 왕(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어 걸쳐서 약 60여년간 예루살렘에서 사역한 선지자 

 

  • 이 때의 가장 큰 사건 

BC 743-32: 아람과 북이스라엘 동맹군이 유다를 침공한 사건  (아하스 왕때) 

BC 721년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 정복 

BC 701년 앗수르 산호렙 왕이 예루살렘 침공 (히스기야 왕 때) 

 

  • 이러한 시대적 배경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구원이 이스라엘 역사적 현실에서, 매일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경과 예배를 통해 경험하는 신앙적 삶이 우리의 매일 매일의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체험되어 지는가? 

성경의 사건은 역사임과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만나야 하는 하나님이다. 

 

 

  • 이사야의 소명 - 6장에 가서야 비로서 시작 (웃시야 왕이 죽던 해) 

1-5장: 이사야의 소명 이전에 역사적 정황이 먼저 소개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께 예언자의 직분을 받는 데서 이사야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사 1:1-9]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시간순서대로 쓰여졌다기 보다는 이사야가 살았던 역사적 전체의 맥락을 보여 준 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유다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전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 이것을 이미 경험한 이사야의 입장에서 이 재앙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니라 어떤 시각에서 볼 것인가? 왜 일어났는가? 

-> 역사적 주체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 지점에서 구약의 역사를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 출애굽기 - 애굽을 빠져나오면 행복한가? 
  • 여호수아 - 광야를 벗어나면 행복한가? 
  • 사사기 - 가나안에 들어가면 행복한가?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 - 먹고 살만하면 드는 교만함. 애굽때 보다도, 광야 때 보다도 가장 패역한 모습을 보인다. 
  • 열왕기, 역대기 - 왕이 있으면 좀 나아지려나, 누군가 질서를 잡아주고...

-> 하나님을 제외한 삶의 모든 추구, 행복의 추구는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점점 더 추락하기만 하다. 

 

왕정 

왕-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메개자.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청지기 

그런데 이 일은 매번 실패한다. 

다윗이라는 한 명의 왕만을 남기고....

 

솔로몬 - 성전 건축, 그에게는 업적이지만 백성들은 이것으로 인해 매우 고단해한다. 

그는 성전을 건축했지만 성전을 짓고 나서 1000여개의 산당을 지음으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어 놓는다. 

 

어떤 신학자는 현대의 물질문명 하에서의 교회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보다 훨씬 많은 자신들의 신전, 우상들을 만드는 교회

화려한 성전을 짓기 위해 성도들은 늘 피곤하지만 그 성전을 바라보며 어느덧 화려한 성전에 취하여 드는...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화려한 건물에 취하여 가는 성도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그 성전을 다시 지어줄 메시야... 그들이 정말 기다리던 메시야는 다윗 같은 하나님가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왕이 아니라 솔로몬 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 눈에 보이는 부흥을 일으켜 세워 줄 자. 

비록 1000개의 산당을 지어도, 그 성전만 지어준다면.... 얼마든지 그 산당은 눈 감아 줄 수 있는... 

 

솔로몬의 죽음 이후, 왕국은 10개의 지파와 베냐민 반 지파 - 대다수가 이쪽으로 가서 나라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유지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은 베냐민 반 지파와 유다지파 - 그 유다 지파가 곧 국호. 

그런데 성경은 대다수의 선택을 받은 북왕국을 하나님을 배역한 나라로 여기고 역대기에서는 유다의 왕들의 이야기는 다루어도 북왕국의 왕조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리고 19명의 왕이 나오는 동안 정말로 한 명도 하나님앞에 바로 서고자 한 왕이 나오지 않는다. 

 

유다지파 - 다윗의 신앙을 이러가려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향력 또한 크다. 하나님을 바라면서도 또한 북왕국처럼 세상을 본다. 그들의 왕도 둘로 갈라진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와 외면하는 자. 

 

이사야에 등장하는 네 왕 - 유다의 왕들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웃시야 - 16세 때 왕위에 올라 오십년간 통치,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함, 

[대하 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런데 사사기 시대처럼 먹고 살만 해지자 그가 교만해진다. 

[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 분향 - 제사장 만... 그가 더 이상 스가랴 같은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려 하다가 문등병에 걸려 왕궁에서 별궁으로 쫓겨나서 자기 아들 요담을 왕위에 앉히고 대리 청정하는 왕으로 전락.  요담은 명칭은 왕이었지만 웃시야의 지배를 받는 이름 뿐인 왕으로 살아간다. 

-> 왕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세상의 왕됨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상을 보여준다. 

 

  • 아하스- 앗수르가 당시의 실권을 잡는데 앗수르 제국은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식민지를 지배했던 무자비한 세력 

당시의 앗수르에 대항할 수 있는 강국 - 아람 (나아만이 군대장관으로 있던 나라) - 북왕국 이스라엘- 엘리사가 활동하던 때 

 

아람과 북왕국이 주도하여 앗수르에 맞서려고 동맹을 결성하여 유다의 동참을 요구하는데 아하스가 거절- 아하스를 죽이고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세우려고 동맹군이 유다를 침공

 

[사 7: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줄 것을 약속 (7장에 자세히 기록) 

그런데 아하스가 이사야의 말을 듣기 보다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냐면 앗수르에게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여 앗수르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그런데 그 댓가로 엄청난 조공을 앗수르에게 바치게 되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 아들을 몰록이라는 신에 제물로 인신제사를 드리며 앗수르의 모든 종교를 유다로 들어오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신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요나 - 엄청난 뱃삯을 지불, 태풍으로 인해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세상에서 요구하는 삯은 너무나 크다. 

 

왜 이사야의 말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했을까? 

현실은 어렵고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앗수르의 힘은 눈에 보이고 강력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감추어져 버린다.

당시의 왕-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해 제사장이나 선지자로부터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어야 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말씀을 보아도 막상 위기가 닥치자 앗수르를 찾는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 히스기야: 왕에 오른지 6년만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아하스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과감한 종교개혁을 시행. 그러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바치던 조공을 내지 않고 멀어지자 유다를 침공하여 다 내어주고 예루살렘 한 도시만 남음. 하나님이 기가 막힌 방법으로 앗수르의 대군이 스스로 자멸하게 하고 히스기야를 구하여 위기를 지났는데,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려 그 유명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살아나게 됨. 그러나 죽을 뻔하였다가 살다가 그의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 - 바벨론의 사신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와서 (율법을 어김) 성전 안의 모든 기물들과 그 위치를 보여 줌. 웃시야 왕의 반복. 

 

남왕국 유다의 역사에서 이사야가 경험했던 시기 

유다왕조 20대 왕의 역사 중에서 10-13대까지의 중간을 넘어 후반부의 역사 - 네 명의 왕들 중에서 아하스를 제외한 3명이 하나님께 바로 서고자 했지만 불완전한, 형통할 때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실수했던 때 - 멸망을 향하여 추락해가는 과정 .

 

물론 그들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는 단순히 회개하라는 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아무리 뛰어나고 신앙좋은 왕이라도 형통에서 시작되는 교만함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를 조명한다.

아무리 악했던 아하스 때에도, 서고자 노력했으나 넘어질 수 밖에 없었던 웃시야나 히스기야를 넘어 39장까지 이사야는 끊임없는 우리의 한계와 고난의 이유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 모든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희망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감싸 안고 넘어서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위로와 용서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신다. 

 

탕자의 비유 

나가겠다는데 나가게 하시고 재산을 달라는데 주신다. 다 경험하고 깨달으라는 것인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크기와 그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신다. 

우리는 아버지 날 사랑한다면 내가 나가겠다고 했을 때에 말렸어야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전능하신 하님조차 건드시질 않는다. 

 

설교자로서 내가 단상에 설 때에... 나는 없고 주님만 드러나게.....NO, 철저히 네 안에서 역사하시는 삶을 보이라. 네 입술로, 네가 경험한 나를 네 목소리로 증거하라. 

잘못한 것 벌주시는 데서 끝나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통한 결과를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그것이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죄악과 연약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다. 

 

  • 그리고 이사야가 임한 상황....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원인: 

[사 1:2-3]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난 내가 필요할 때는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별 애원의 소리를 다 하지만 내가 죄를 지고, 외면할 때는 너무도 쉽고 차갑게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않는가? 

 

  • 그리고 그들이 임한 현실

[사 1:5-6] ...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 하나님을 떠난 자의 현실 - 머리가 병든다. 제대로 된 생각을 못한다. 온통 비뚤어지고 왜곡되고 피해망상적인 생각만 할 뿐이다. 

마음은 피곤하고 -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깊이 생각하면 깨닫는데 좀 생각하다 포기하고 벗어날 줄 모른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 떠난 자의 모습은 이토록 처참하다. 

 

그럼 이젠 멸망으로 가는가? 희망이 없는가? 추락하는 유다 백성에게는 심판만이 남아 있는가? 

 

  • 마지막 희망 

[사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생존자, 남은 자-> 우리를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 -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불에 탄 나라. 음행과 범죄가 가득찬 나라- 에덴 동산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날. 

하나님은 모든 약한 자의 실패를 넘어 구원을 이루시지만 동시에 누구를 통하여 그 구원을 이루시는가? 

생존자. 남은자. 모든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꿋꿋이 노아처럼, 엘리야처럼, 세례 요한처럼, 악한 세대 가운데서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바라보는 자. 

그들을 통해 이 땅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게 하지 않으신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예배하는 성도여러분! 

생존해 계십니까? 아직 살아계십니까? 

아직 여러분의 영혼이 깨어 하나님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끝없이 절망하다가 넘어져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으십니까? 

머리는 병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은 피곤하여 기도조차 나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그러한 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 아무리 내가 넘어졌어도 들으면 삽니다. 아무리 상처가 났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곪은 마음을 짜고 터진 상처를 싸매며 성령의 기름을 부어 부르럽게 하면 우리는 삽니다. 살아납시다. 이 시대의 생존자가 되어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오르지 않게 합시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얻은 교훈 

심판 중에서도 그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결코 심판에서 자유롭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심령에 어린양이 없고, 십자가의 길이 아닌 자기 욕망과 솔로몬의 영광만을 구하면서도 믿는다고 여기는 자, 입으로 주여 주여 외치면서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자. 이들을 어찌할꼬... 

 

계시록을 마치고 다음 강해를 준비하면서 기도할 때에 주신 말씀  - 이사야

 

아직 그 깊은 뜻을 모른다. 

그런데 계시록을 전하면서 가진 아쉬움, 녹화하고, 실시간으로 언제, 몇명이 이 말씀을 나누는지 체크하면서 

매일 꾸준히,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별로 없다. 

물론 매일 같이 보내주는 설교를 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줄 안다. 

그런데 그 결과 우리의 심령이 어떠한가? 오늘 본문처럼, 어느덧 하나님에게서 시선이 멀어져 발바닥에서버터 머리끝까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음은 병들고 피곤해져 있지 않은가? 

 

Zoom으로 모이고 교제하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같이 보고 듣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사야 강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성도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다. 하루 30분 보내주는 말씀을 통해 이 시대를 이기는 생존자가 되자. 소돔과 고모라를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이기는 생존자가 되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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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서 있는가? (요한복음 8장 31-32절) 

 

도입 - 포스트 - 트루스 (Post-Truth)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특징을 한 용어로 특징짓는 용어는 포스트트루스 (post-truth)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의 시대는 객관적 사실 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말로서 이 말이 근근히 쓰여지다가 본격적인 사회현상으로 대두된 것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 였다. 

 

당시 미국의 대선에서 폴리 팩트라는 대선주자들의 유세나 TV연설에서의 발언이나 공약을 팩트 점검하는 싸이트에서 트럼프의 말 중 70%가 거짓이라고 싣고 이를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보도하자 이에 대한 역공으로 신문이나 방송 모두가 거짓이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유세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여론의 형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6년 가장 공신력이 있다는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에서 뽑은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가 뽑히게 되고 2018년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였던 리 메킨타이어가 "포스트 트루스"란 책을 내며 현대 사회의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의 여파로 사람들은 그동안 여론 형성의 중심이었던 신문이나 뉴스를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sns나 팟케스트, 그리고 현재에는 유튜브와 같은 대안 매체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팟케스트나 유튜브마저 가짜 뉴스들의 진원지가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공적인 매체나 대안 매체 모두 신뢰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제는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미국이나 한국의 현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함께 이루어져 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진리의 수호처인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서 자유로운가? 

교회의 목사로서,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나누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포스트-트루스"의 현상은 교회나 성도들에게도 이미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포스트-트루스"라는 말은 "탈- 진실", 즉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또 다르게 해석하면 "진리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도 한다. 

"포스트-트루스"시대의 사람들은 객관적 진리 자체를 거부한다. 어차피 그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니,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각자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듣고, 바라보며, 사는 삶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 자체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진리에 대한 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에겐 성경도, 신앙도, 교회도, 각자의 신념을 위해 선택하게 되는 도구일 뿐이다. 

각자가 자기의 뜻을 합리화하고, 주장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지만 그 해석은 각자에 따라 달라진다.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보수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가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싸우지만 똑같이 성경에서 근거를 제시하고 주장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 진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호하는 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그 반대편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인을 미혹하는 사탄의 마지막 방법이 바로 이러한 포스트-트루스 전략이 아닐까 싶다. 

말씀이 진리라고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말이 곧 진리가 되게 함으로 결국 자기 뜻이 가장 중요하게 되게 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 인들의 불안함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교회마다, 목사마다 말하는 진리가 다르기에, 자기에게 맞는 사람 말만 듣게 되지만 그것이 참 진리일까라는 근본적인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에게 있어서 진리는 어떤 것인가? 

 

 

 2. 믿음의 출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고백, 혹은 자기 선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곧 예수가 곧 진리요, 하나님을 믿고 만나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곧 진리입니다. 유일한 길이요 진리인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와 동행하고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지금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만 해도 크게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큰 세개의 종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종파 안에는 또한 수많은 교단과 연합회와 크고 작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들은 연합하지 못하고, 서로를 적대시하기도 합니다. 

 

마치 누구는 코끼리 머리를 보고, 누구는 다리를 보고, 누구는 꼬리를 보면서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를 보는 양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면서도 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르고 믿고 강조하는 것이 다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진리 안에 거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 바로 전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 

[요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 - 내 말에 거하면 

단지 그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거하는 삶

말씀 속을 살피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 말씀을 살아가는 것. 늘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삶. 

 

2) 그러한 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결과 - 제자가 된다. 

 

제자가 된다. - 예수를 따르는 삶, 예수와 함께 거하는 삶 

누가 제자인가?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사는 삶, 그가 곧 제자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으신 목적 -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 (막 3:3절) - 예수와 함께 거하는 자가 바로 제자이다. 

 

예수와 함께 하는 자가 제자이듯, 지금의 시대에는 "말씀 안에 거하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제자"이다. 

 

3) 제자에게 주신 것 - 진리를 안다. 진리는 곧 그리스도. 예수가 곧 진리

예수를 알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선 나를 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세상의 모습을 안다. 세상 돌아가는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안다.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수를 우상숭배하듯이 믿는다.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려 한다. 

 

[요 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제자, 진리를 알고 자유케 되는 삶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 너희는 나를 죽인다. 말씀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죽인다. 

 

믿는 자가 되어도, 그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하면 결국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다. 

실천적 무신론자 -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믿지 않는 자.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 믿는 다고 하지만 말씀도 모르고, 그렇기에 말씀에 순종함도 모르는 자.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는 이방인이 아니라 잘못 믿는 자요, 그 말씀에 거하지 못하는 자이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를 알지 못했던 제사장들이,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였다. 

왕으로 알았다가 십자가 지시는 것을 보고 뒤돌아선 유대인들이 죽였다. 

 

4. 그렇게 진리를 아는 자, 그리스도를 아는 자- 경험하는 자. 함께 하는 자에게 주신 것 

바로 자유함이다. 세상이나 환경이나 감정에 요동하지 않고 내적 자유가 충만해진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자유케 하는 삶이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 세상에서 종노릇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에게서 나오게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것은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케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광야에서 주신 말씀과 성막이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서 자유한 자가 된다. 

기독교의 가장 큰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역설이다. 

 

세상에 중독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이다. 

세상의 자유는 우리를 방종으로 빠뜨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우리를 더욱 깊은 삶으로, 더욱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다. 

 

5. 더 깊은 자유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한 자가 누리는 더 큰 자유 - 남을 얻기 위해, 남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자유. -> 복된 자유

 

예수- 가장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사신 것 

가장 아픈 삶이지만 가장 자유한 삶이기에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사 홀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세상 어떤 것에서도 눌리지 않는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 더 깊은 사랑으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결론 

 

사탄은 우리를 진리에서부터 멀어지게 한다. 진리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 곧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그 진리는 예수를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한다. 

그 분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 말씀 안에서 우리를 보고 세상을 보고, 다시 그 분을 만나게 하신다. 

 

진리를 아는가? 진리 안에 사는가? 진리를 충만히 누리는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을 갈망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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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5:7-11: 찢어지지 않는 그물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 불같은 시험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하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편지 

  • AD 64년 경 - 로마의 화제를 잠재우기 위해 그 희생양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와 핍박 
  • 고난 중에 있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던져버려라. 떠 넘기라. 

 

염려-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스스로 짊어지는 것-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태도를 교만이라 보았다. 

6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겸손은 맡기는 것이고 염려는 내가 맡는 것이다. 

 

왜?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 He cares for you 

1. 그가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

2. 그가 너희를 염려하기 때문.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런데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 근신하라. 깨어라. (Be alert and of sober mind) 

조심해! 그리고 술에서 깨! 염려나 근심에 취해 있지 마!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할 이유 

  • 마귀가 우리를 삼키기 때문 

감정 - 우리를 사로잡게 한다. 

사탄의 방법 - 우리의 감정을 이용한다. 시기, 질투 (사울), 가인 (살기), 우울 (엘리야, 모세..) 

우리는 감정이 내 것인줄 알지만 사탄은 영이 아닌 우리의 육신을 통해 (질병으로), 또 감정을 통해 우리를 삼키게 한다.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 거린다. 

감정에 중독된다. 

 

어떻게 감정을, 마귀의 공격을 이기는가? 

  •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 

어떤 믿음 -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 난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 날 위해 근심하신다. 그 분이 내 짐을 맡아 주신다. 

  •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짐으로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하게 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모든 권세는 무너졌다. 

그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단지 속이고 미혹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당하실 때에 하신 방법 

사탄아 물러가라. 

 

언제? 염려가 날 휘어잡으려고 할 때 

마귀가 날 삼키려고 할 때

나쁜 감정에 휘둘릴 때에...->  사탄아 물러가라.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온전하게 하다- 이미 끊어져서 쓸모없게 된 것을 다시 재생시키다. 처음 것 처럼 만들다.   
  • 굳건하게 하다-이미 깨어지고 갈라져서 소용없게 된 것을 틈을 매워 새것처럼 만들다. 
  • 강하게 하다 -  힘이 다 빠져버린 생명을 다시 재생시켜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다. 

[겔 37:7-9]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기초를 다시 세워 건물이 건축되게 하다. 

 

-> 다시 일어나게 하는 능력, 부활의 능력,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여 새롭게 하는 능력 

 

베드로 -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의 인생에도 부활을 경험하는 인물 

 

예수님과의 첫 만남과 끝 만남 (똑같아 보이는 사건이 중첩되며 그의 삶을 감싼다) 

 

1. 첫만남 

[눅 5:4-6]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2. 마지막 만남

[요 21: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상황 : 예수님의 부재, 만나기 전과 떠난 후에...물고기가 없는 상태, 부족한 상태, 지친 상태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주님의 말씀이 임함-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완전히 무너져 있는 상태에 그 분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

- 순종: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을 내려놓고 순종). 이에 던졌더니...

-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잡은 물고기가 많아 그물이 다 찢어졌다. 그물은 무엇인가? 자기의 그릇, 자기의 역량, 자기의 기대와 소망 

고기 잡는 전문가. 자신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작은 은혜 하나에도 우리 그릇이 다 깨어진다. 부서진다. 

그리고 나서 하는 고백 - 나는 죄인이로서이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 신앙 생활의 시작이다. 

이제 고기 낚지 말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 만남을 통해 자기의 그물이 다 찢어서 쓸모없는 그물이 되었다

아니 깨어져서야 비로서 주님의 일, 사람 낚는 일이 시작된다. 

주님의 일은 그물이 찢어지는 데서 시작한다. 깨어지고 부서지지 않고 사용되지 않는다.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를 높이리라. -> 겸손하지 않으면, 네가 무너지지 않으면 너를 쓰지 않는다. 

 

  •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 정말 찢어진 그물같은 인생 아닌가? 십자가 상에서 세번씩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 

언제나 행동이 앞서던 제자. 

다시 찾아와서 그 찢어진 그물을 이젠 영원히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게 하시는 주님

 

온전하게 하다. (카타르티조) - 회복시키다. 수리하다. 그물을 수선하다

 찢어진 그물 같은 베드로를, 그리고 우리를, 나를....

 찾아오셔서 

 찢어진 곳을 기워주시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워주시고, 다시금 주님의 교회가 건설될 수 있는 견고한 터를 세워주시는 주님

 

 염려로 인해 무너져 있지 않은가? 

 감정에 취해 지금 마귀에게 삼킨 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염려도 교만이라는 것을 아는가? 주님은 맡기라 하는데 우리는 염려하며 내가 하겠다 한다.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 하는데 우리는 열심히 일할테니 잠자코 계시라 한다. 그리고 열매맺지 못한다. 

 쉬지도 못하고 열매맺지 못하고 찢어진 그물 마냥 아무런 고기를 낚을 수 조차 없다. 

 

 지칠 땐 무엇 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품에 안기어라. 

 걱정될 땐 잠잠히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그 분의 품을 느껴보라. 

 그 분의 말씀이 임하면 그 때 순종하라. 그 때 움직여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 - 잠깐 당하는 고난 

 1. 시간적인 표현 - 어떤 고난도 지나간다. 

 2. 임시적, 일시적-> 돌아갈 처소가 있다. 우리가 머물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될 곳 - 주님이 주인 되신 하나님 나라. 

 

 지난 3월부터 공예배를 금하고 온라인 예배로..

 참석하는 인원 - 어쩔 땐 3명, 많으면 5명 

 

그런데 시청에서 우리 교회에서 모임을 가져서 시끄럽다고 검사관이 2번씩 왔다가더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물 용도변경 하가증을 받으라. -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전문 건설업자가 책을 만들듯이 작성해야 하는 긴 작업.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걸리는 일. 

 

건설업자가 교회 건물을 처음 등록할 적에 해야하는 절차. 

 

그런데 2004년부터 이 자리서 예배 드리고 있는 데 하필이면 지금 그것을 트집잡아 

2013년부터 연방정부와 캘리포니아 주 정부, 프리몬트 시에 정식으로 교회로 등록받아 어떤 것은 2년에 한 번, 프리몬트 시에는 1년에 한 번 교회 등록을 Renewal하는데 이제 와서 교회 건물을 가지고 트집. 

 

맡기고 말씀하실 때에 움직이자. 

그 일을 해결하시든지 새 예배 처소를 주시던지.... 

함께 근신하고 깨어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신다. 

찢어진 그물을 깁듯이 이젠 영원히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게 하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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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9-13절 (마태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제자입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제외하면 마태의 행적이 나온 것이 거의 없습니다. 

 

출생 신분으로 보면 열 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 한 사람만 다른 지방 사람이고 나머지 열 한 명이 예수님이 자랐던 갈릴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시각으로만 보면 다른 열 한 제자가 당시 열심당원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외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과도 같은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면 마태는 로마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착취하며 살았던 당시 열심당원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히려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의 정반대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였습니다. 

 

그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공동체의 돈관리를 마태가 아닌 가룟 유다에게 맡긴 것도 의아한 일입니다. 

여하튼 열두 제자 중의 하나임에도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마태가 신약성서의 시작을 알리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고, 그가 기록한 성경이 신약성경의 첫 권이 된 것도 참 신비하고 의아한 일입니다. 

 

영향력 면에서는 베드로나 요한의 글이 더욱 권위가 있었을 것이요, 가장 먼저 쓴 글이라면 마가의 복음이 더욱 빨랐을 터이요, 가장 사실적인 기록하면 뭐니뭐니해도 의사의 눈으로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누가의 복음이 더욱 신빙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약의 시작은 마태복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일어난 역사일 것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마태복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주제어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이 왕대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여기에 마태가 경험하고 마태를 통해 보이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마태복음에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로서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장)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1장 1절은 언약의 족보:하나님 나라의 족보 - 아담으로부터 이어온 죄악의 계보를 떠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새 언약의 계보가 바로 마태음에서 소개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족보입니다. (사실을 기록한 누가 - 아담으로부터 시작)  
  • 그 족보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연약한 자, 부족한 자, 부정한 자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1) 연약한 자 (아브라함, 75세의 나이, 자식도 없고 이방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살던 소망이 없는 자..) 

2) 부족한 자(원래 은혜의 흐름은 장자를 통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의 신앙../ 그러나 14명 중에서 장자는 단 5명, 나머지 9명은 아니다. ex)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다윗 

오직 온전한 장자는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뿐이다. 

3) 부정한 자 

다말 - 시아버지에게 기생으로 둔갑하여 베레스를 나음

룻 - 이방여인, 거기다가 보아스의 잠자리에 스스로 들어가서 누워있음...

라합 - 직업 자체가 기생... 매춘부...

 

그러나 그러한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한 자들을 하나님이 택하셨고, 그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서 신앙의 피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보여줍니다.  

 

- 아담의 족보와 예수의 족보 

  • 차이점: 창세기의 족보 - ~를 낳고, ~낳다가, 몇세때 죽었더라....결국은 죽음으로 끝남.... 죽음의 족보...
  • 마태복음: 낳은다는 동사가 자그만치 40회 등장 -> 죽음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자들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 산상수훈, 팔복  (마태복음 5-7장) 

또한 마태복음은 이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복,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이른바 산상수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은 구약의 사람들이 율법을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예수님의 설교요, 새 율법이요, 삶의 방향들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길로서 받아들여졌다면, 산상수훈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요 (5장 17절), 그분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5:13) 원수를 사랑하고 (5:43) 모래 위가 아닌 반석위에 기초한 집을 짓는 자들임을 말씀하십니다. (7:24) 

 

3.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불화했던 세 집단이 나옵니다.

  1. 9:1-8절: 율법학자들-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2. 9-13절: 바리새인들- 그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 14-17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해야만 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걸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셈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신학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목회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수도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듯 당시의 유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형식적으로, 전통적으로 굳어져 있던 신학자들, 목회자들, 구도자들과 신앙의 모든 태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들은 이 세상의 권력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었고 이단이나 권세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시면서 세금을 낼 것과 위에 있는 권력에 순종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오히려 당시의 종교인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들만이 잘 믿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믿는 자들, 혹은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그 안에서 안주하며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이 행해왔던 전통과 관습을 더 우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보다 그들의 행위에 기초해서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장 의롭다고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 나라의 방법 -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수님은 이미 전 이스라엘에 유명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이미 한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내려오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로서 그를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오만하고 힘쎈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고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로마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뿐만 아니라 다윗의 떄, 솔로몬의 때처럼 이웃의 열방들이 부러워하고 무서워하는 힘쎈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언하고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세력보다 더 큰 힘으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나라. 자신들을 맨 밑에서 맨 위로 올려줄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요 18: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 나라는 칼과 힘으로 정복되는 나라도 아니요 오직 십자가의 피로, 그 은혜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올라서는 권력이 아니라 낮아지며 섬기는 나라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방법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결론 

지난 한 주, 대한 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광복절 집회로 말미암은 코로나 확산 - 그 중심에 선 한 목회자, 그가 이끄는 교회와 무리. 

 

그들이 외치는 것 - 이 정권을 몰아내서 공산화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애국이다. 

 

이 땅 미국에서는 종종 받게 되는 메시지. 

서로의 당을 주장하면서 다른 당이 집권하면 망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그들의 뜻대로 정권을 바꾸거나, 정권을 몰아내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정치권력에 의해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인가?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 -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 뿐.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이 땅에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 - 그들만의 나라. 

 

물론 기독교인은 사회의 변화에 둔감해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문제에도 눈감지 말고 시대를 분별하고, 때로는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나라가 힘들 때,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고, 불의에 눈감지 말고 맞서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갖되,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영혼에 깃드는 나라요, 그 영혼을 통해 영생하는 나라이다. 

 

  • 온갖 핍박을 인내와 믿음으로 견디고 견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들의 국교로 삼았을 때, 이젠 불행은 끝나고 새 시대가 옮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인과 로마의 기독교의 국교화는 오히려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통해 교회의 몰락을 초래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으로 얻어지는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고 부인하는 나라이다. 

 

  • 마태는 세리였다. 세리는 로마에 대항하기 보다는 그 권력에 순응하면서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자였다. 

탈무드에 보면 어떤 짐승보다도 가장 사악한 짐승이 바로 세리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올 정도로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의 준수자였고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서 볼 때 마태는 자기가 세리와 같이 죄인 중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 자기는 사형에 처할 만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자였음을 자기가 쓴 마태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했더니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를 택하시고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는 마태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없다면 그들은 언제든 마태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된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공산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이땅에 속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난 이데올로기에 빠진 교회를 경계합니다. 

노예해방을 두고 남북전쟁을 치룰 때에 정치 문제보다 더 치열하고 극심했던 싸움은 교리전쟁이었습니다. 

노예가 성경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그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노예를 지지했던 남부측 교회들은 노예는 구약에도 신약에도 존재했던 내용이고 그 존재를 인정했기에 그들에 대한 법이 세워졌다고 말했고 북측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싸웠습니다. 

이 때에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 치열하게 다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한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지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기 위한 필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따라서 한 편은 죽여야 하는 적이 되고 한편은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싸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화 된 기독교는 서로를 적으로 돌리며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복음으로 화합하는 나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이단이 설치고, 온 세계가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조차 분별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금 복음으로, 기본으로,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다른 누가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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