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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살전 2장 13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있는 아테네 인근의 도시였고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빌립보 도시 다음으로 방문한 두 번째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지역에서 큰 핍박을 받으며 교회를 세운 후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를 하였는데 빌립보 지역에서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한 유대인들이 소문을 듣고 따라와 데살로니가 지역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 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일행을 쫓아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곳 데살로니가 지역에서의 활동은 10절도 되지 않게 짧은 문장으로 매듭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2-3주 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길어보았자 2-3개월 가량이라고 합니다. 짧은 기간동안 단기선교를 가서 아름답게 선교를 해도 열매를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일행이 다녀갔던 그 기간동안 마을은 큰 소란이 일었고, 바울 일행에 대해서는 나쁜 소문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고 교회만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지나간듯한 경유지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늘 마음에 품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바울이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라고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하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게도냐 유럽지방에 전한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는 날 주 앞에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너희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평생을 신앙생활 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을 읽지도, 믿지도, 기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데 인생의 선택의 순간이나, 여정을 보면 신앙과는 전혀 관계 없는 행동이나 선택이나 계획을 합니다.

 

어제 새벽에 나눈 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이렇게 한탄합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생각하며 선택하며 잔소리 듣듯 하는 사람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났다 하시면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리듯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어떤 이는 짧은 만남, 한 번의 만남을 통해서도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과 신앙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기도훈련, 말씀의 훈련....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도구 들이 신앙의 본질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소 귀의 경읽기 처럼 아무리 교육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듣는 말씀을 책읽듯이, 교육받듯이,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을 것이냐,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이냐 하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열매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고작 사람의 열매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면, 그 말씀은 우리 심령을, 본질을, 모든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에 종교개혁을 통해 영국 성공회가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 영국 성공회의 신앙은 형식적인 면에서 가톨릭과 전혀 구분되지 못하였고 당시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실질적 영국의 종교개혁적 운동이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들은 가톨릭으로부터도, 영국 성공회로부터도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 도무지 마음껏 찬양드리며 기도하며 말씀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열려지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100명 조금 넘는 신앙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건너온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여러분,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목숨을 걸고 떠날 용기가 과연 어떤 마음일까?

한 달 넘는 항해로 말미암아, 항해 중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고, 미국 땅에 도착해서 첫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은 그들이 한 해를 보내고 첫 감사의 축제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과연 그러한 때에 원망없이 감사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은 이전의 신앙생활을 기억하며 많은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맘껏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 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마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먼 항해를 떠나는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들 합니다.

물론 사람들 부딛치지 않으며,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예배를 공급받으며 더 편해졌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편한 습성에 익숙해져 버리면 교회의 본질 또한 잃어버리고, 부딪치며, 깨어지며, 나 자신을 훈련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곳이 없습니다.

세계의 어느 장소도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각성과 회복을 위해 어디를 향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전세계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가장 신앙이 뜨겁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나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십니까?

가장 뜨겁게, 순수하게 신앙생활한다고 여겨지는 나라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빼앗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지금 현재에도 격리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지역 사회에서 축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구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이 들어왔던 말씀을 암기하고 또 되새기며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가장 억압받는 땅에서 가장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꽃피는 것입니다.

 

몇주전 무엇이 유대인들을 경멸의 대상, 비난의 대상에서 존경받는, 뛰어난, 지혜있는 민족으로 바꾸어 놓았나하는 말씀을 느혜미야 말씀을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무엇이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까?

바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다. 그들의 본질이 바뀌니 상황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도, 그들의 삶도 바뀝니다.

 

코로나 상황은 익숙한 상황에서 너무 쉽게, 나태하게 신앙생활 해오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우리의 믿음은 과연 환란이나 곤고에도 요동하지 않는 반속위에 기초한 믿음이었나? 아니면 모래 위해 쌓여진 모래탑은 아니었는가?

 

약 400 여년전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긴 항해를 하며 자유의 땅을 찾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신앙이라면 이제는 물질적 장소가 아닌 우리 마음의 장소를 찾아야 할 제 2 의 추수감사절을 준비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 역사상 수많은 성경을 불태우고 없애려는 노력들.

활자 인쇄술이 개발되기 전 약 1500여년 동안 성경은 오직 필사를 통해 다음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가히 경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사하기 전에 목욕재개 하고 기도한 후에,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경외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하나님을 대하듯 말씀을 옮기고,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단어가 나오면 필사를 멈추고 기도하고, 한 글자라도 틀리면 집중하지 못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기록하던 장을 찢고, 만약 한 권의 책을 필사하는 중에 네 번이나 다섯번, 어떤 이는 세번이상 틀린 글자가 나오면 그 모든 장을 다 찢어 처음부터 성경을 다시 썼습니다.

천년 이상을 이러한 필사가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손상됨 없이 후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우리는 화난다, 짜증난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데 필사가들이 필사를 하면서 화를 낸 대상은 찢어야만 하는 종이가 아니라 오류를 범하는 자기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자신의 죄, 자신의 나태를 두고 회개하고 또 다시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기록된 필사 성경이 그들 교회의 영성이 되었고, 교회의 자부심이 되었다.

 

새벽말씀을 전하고, 또 그 말씀을 필사하면서 난 내가 경험하는 그런 말씀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또 함께 경험되어지기를 깊이 소망합니다.

떨어져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이런 떨어져 있는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순수해지고 뜨거워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뵈옵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우리가 읽는, 우리가 쓰는 이 말씀은 만물을 창조한 바로 그 말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을 보는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역사를 통해 상처입고 비뚤어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처럼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고난 가운데 가장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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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편 1-5절 사랑하는 자가 받는 고통 

 

[시 22: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신약- 요한복음 3장 16절

구약 - 시편 23편

 

그런데 구약학자, 특별히 시편을 전공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된 시편 시편 22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의 하나(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읊조리신 유일한 시편구절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한 시편 - 시편 22편 - 메시야 시편, 십자가의 시편 -> 1절 외에도 여러구절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성취되는 고난기사의 절정이다. 

 

다윗의 부르짖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윗의 언어로, 사람의 언어로 아파하시고 부르짖고 기도하셨다. 

 

하나님도 고난당하실 때에, 천상의 고통을 천상의 언어로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언어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기도하셨다. 

 

  • 절에 가면 앉아 있는 부처의 상 

편견을 버리고 그 상을 바라보면 느끼는 것 

세상의 것을 다 초월한 미소와 따스함.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한 손은 무릎에 한손은 앞을 향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평안함과 위엄. 

 

그래서 불교에 귀의하면 결국 세상을 떠나 그 초연함을 따라 산으로, 부처가 되어 속세를 버리고 모든 집착과 나 자신마저도 잊고 해탈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 해탈, 무아지경

 

  • 그런데 예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 고통당하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 

석가모니는 세상을 초월해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갔다면 

예수는 초월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으로, 그 고통으로 내려와서 그 육신으로 인간의 고통을 당하신 분. 

그리고 그 언어로 기도하신 분. 

 

이 세상의 것을 아시고 경험하시고 그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신다. 

 

나는 이 세상의 문제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데

믿음 좋다는 한 분이 "다 부질없는 것이야. 그런 고통은 다 소용없는 것이야..."하면 그 말이 과연 위로가 될까? 

 

그런데 우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를 통해 받는 위로는 무엇인가? 

"내가 안다. 내가 그 고통을 안다. 나도 그렇게 아팠다...." 그 말이, 그 음성이, 그 말씀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emphas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 yet he did not sin. 

->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없는 대제사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 당하셨던 한 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배고품의 문제, 육신적 고통의 문제, 오해당함의 문제, 배반당하는 문제,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버림받는 문제....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오늘 다윗의 부르짖음처럼 그가 가장 의뢰하고 의지하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문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하며 그에게 가든 그는 아신다. 공감하신다. 그리고 같이 아파하신다. 

 

십자가의 구원 - 우리의 죄를 구속해주시는 것 - 추상적인 것 - 신학적인 것 

그에 앞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십자가 아래에서의 은혜 - 구체적인 것 - 영성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내가 너의 고통을 이해한다. 내가 너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내가 너의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한다"

 

시편 22편 - 다윗의 고난, 예수의 고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 그 침묵 때문에 난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 그렇지만 난 신뢰한다. - 더 큰 은혜가 임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 

다윗이 아닌, 예수가 아닌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았다"하는 경험이 있나? 

그런 막연한 감정이 아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럽게 부르짖어버린 적이 있는가? 

 

그만큼 먹고살기가 편해서 그런가?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옛날보다 편해졌다고는 할지 모르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난의 강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힘들어하고, 나이 좀 먹었다하면 내 인생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고난이 많은 삶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누구도 나만큼, 이토록 고난에 대한 경험이 많을 것이라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면서도 내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부르짖음, 그 호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자가 막상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서 느껴지는 적막감, 고독감, 두려움, 염려, 낙심....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정말 다윗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했던 것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기도해 보았는가? 그런 기도를 들어보았는가? 

 

그 분의 음성이 들리기 전에 나 혼자 포기하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다른 길을 찾아오진 않았는가? 침묵하시고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그런 침묵이 오히려 더 익숙한 것이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 누가 버림받았다고 이토록 아프게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다윗처럼, 예수처럼 이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할 수 있을까? 

 

한 연인이 있었다. 서로 사랑해서 둘이 꼭 결혼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인이었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 커플이 헤어지게 되었다. 

한쪽은 덤덤히 이 이별을 받아들였다. 사랑했으니 헤어질 수도 있지. 그래도 그동안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으니 헤어지는 것도 아름다운 거야. 그 사람도 축복해주고 나도 이젠 새로운 사람 만나야지. 

 

그런데 한 쪽은 헤어진 것을 통해, 내가 버림받았다는 고통으로 인해 몇날 며칠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밥을 먹지도 못한다. 삶이 다 끝장 난 것 같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헤어졌음에도 계속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을거란 환상에 빠지기도 하고 도무지 헤어짐을 인정할 수 없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한 것인가? 누가 간절히 사랑한 것인가? 누가 자신의 전부를 받쳐 사랑한 것인가? 

버림받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 사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고통이 없다. 나 자신만 중요해서 그 사람 아닌 나를 채워 줄 다른 사람만 있으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것-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니라도 자기를 만족시킬 누군가만, 어떤 것이든지 있으면 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 것 - 그래서 우상 숭배는 곧 간음이다. 그 우상 섬김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시기하시는 것도,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니라 하신 이유도

왜?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못견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예수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왜 나를 혼자 남겨두었나요? 하면서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했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 이 설교를 하게 된 배경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분이 계속 시편 강해를 하는데 이 22편을 준비하는 중에 아이들과 함께 빈 학교에 가서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와 한나랑 동갑인 아들이 있다. 

 

목사님이 술래 차례가 되어서 아이들을 숨게 하고 있다가 재빨리 딸아이를 찾고 장난끼가 발동되어서 거꾸로 아들아이 몰래 딸과 같이 둘이 몰래 숨어 있었다. 

아빠가 자기를 찾을지 알고 꼭꼭 숨어있던 아들아이가 주위가 조용하자 숨은 데서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게 보고 있다가 아들이 경기가 일으킬 정도로 울자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아빠가 뛰어서 아들에게 가니까 아들녀석이 서럽게 울면서 "아빠가 날 찾아야지, 왜 안찾었어..."하면서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울면서 아들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내 던졌다. 

"난 아빠 믿었는데, 난 아빠 믿었는데..."

 

그 말을 듣고 이 본문을 묵상하니까.... 아, 이 버림받은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 믿었던 자가 외면당했을 때 당하는 고통이구나. 정말 사랑했던 자가 당하는 고통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는 자만이 그 분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 버림받은 것처럼 괴로워할 수 있는 것다. 그 분이 내 삶 속에서 충만했던 경험을 하는 자만이 그 분의 모습이 삶 속에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 무섭고, 고통스럽고, 울 수가 있는 것이다. 늘 하나님이 안보이는 듯이, 신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그 분이 침묵해도, 내버려 놓아도 어떤 걱정도, 불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안될 때, 내 삶에 문제가 닥쳤을 때에만 하나님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런 성도는 시편 22편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 1절 - 나의 하나님: 걱정이 많고 두려움에 쌓여 부르짖는다. 
  • 3-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한다. 
    •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내가 그를 보지 못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 그는 나의 신앙의 선배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나의 존재가 불확실하고 내가 환란 중에 정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그 분은 기도하는 자를 건지시는 분이기에 또 신뢰한다. 

 

이러한 고통과 신뢰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조롱거리니이다. (6절) 

->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바라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8-9절) 

-> 평소에 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의 믿음을 바라보며 참고 있다가 그가 고난당하니 그의 믿음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렇게 믿더니 왜 하나님이 안 구해주시냐? 

예수님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제 몸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냐..."

이렇게 조롱당할 때에도 다윗은 또 하나님께 기도한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나를 도울 자 없나이다." 

언제? 하나님이 안느껴지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그 때에도 난 당신 밖에 없습니다. 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만 바라봅니다. 

 

  • [시 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 이런 고통이 왜?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이지만 

 

[시 22: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 그래도 또 기도한다. 마치 차인 여자가 나를 찬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버리고 떠난 연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간음한 백성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실까? 어떻게 이토록 자신 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그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실까? 

 

21절부터 31절까지는 왜 그런 설명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그의 응답이 나타난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다. 

 

[시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그리고 그의 경험을 개인의 경험에 두지 않고 자기를 따라 행하는 모든 성도에게 약속으로 준다. 

[시 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내가 이렇게 찬양하게 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다. 나와 같이 주를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약속하는 것이다. 

 

지난 주간 예배 후 zoom미팅을 통해 한 집사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더이상 가게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정리를 해야 하고, 이지역의 물가가 너무 비싸 이 곳을 떠나야만 한다면서 괴로워하시는 것이다.  

떠나기 싫고 옮기기 싫은데 자꾸만 떠나야만 하도록 떠밀리는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40여년간 정들었던 이 곳을 떠나기가 너무 서운하다는 것이다. 

 

그 서운함이라는 말이 일 주일 내내 가슴에 남았다. 

그 서운함은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깊이 때문에 겪는 고통일 것이다. 

오랜 동안 사랑했던 사람만이 겪는 그런 고통일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만 하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도 다윗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보자.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 분이 행하시는 것을 바라고,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 분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을 그려보자.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 분을 믿기를 포기하고,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그 분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때로 나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여전히 그 분께 부르짖어 보자. 

왜 안보이냐고, 왜 말씀해주시지 않느냐고. 난 당신만 바라본다고. 난 당신만 믿는다고....

 

그리고 그 분이 하신 것을 증거삼아 그분이 인도하시는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리자. 찬양을 드리자. 

 

버림받음 - 사랑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이 버림받은 감정을 가장 깊이 체험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아왔다.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지만 성육신 하신 그 예수님을 우린 또 버렸고 죽였다. 

 

 그렇기에 그 분은 버림받은 인간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리신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하신다. 

 당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그 때, 바로 그 분께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맡기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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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37-38절  영혼의 갈증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사람의 신체 - 70-80퍼센트가 수분으로 이루어졌다. 

내 몸무게가 만약 100킬로그램이라면 80kg이 물이라는 소리. 

걸어다니는 물통. 

 

신체에 물이 부족하면 피부가 건조해져서 가물어진 땅처럼 피부가 갈라진다. 

관절을 부드럽게 움직일 수도 없다. 

혈액이 잘 순환되지 않으면 모든 병의 원인이 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몸의 수분이 부족하면 사고의 질도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눈물이나 땀으로 몸의 배설물을 내보내지도 못한다. 몸이 부패한다는 것이다. 

 

몸의 수분이 모자랄 때 몸의 경보장치 - 갈증, 목마름이다. 

입술이 마르고, 혓바닥도 바짝 타오르고, 두통이 생기고, 피부도, 관절도 상하기 시작한다. 

배고픔보다 더 심한 고통 갈증, 목마름이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못배긴다. 물을 마셔야만 갈증이 끝난다. 

갈증이 나는데 계속 운동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여행을 할 수는 없다. 갈증은 물을 마셔야만 해결된다. 

 

영혼은 어떨까? 

영혼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양한 경보장치가 울린다. 

작은 일에도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나타난다. 툭하면 화가 나고,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죄와 두려움이 영혼을 죽인다. 

이런 영혼의 갈증은 병이 아니라 경고다. 육신의 갈증이 물을 공급하라는 경고이듯 영혼에도 영적 수분의 공급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내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경고, 우리 감정의 경고, 때로 우리 육신의 경고- 우리 영혼에 갈증이 날 때 흔히 영, 혼, 육이라 불리는 우리의 존재는 끊임없이 경고음을 낸다. 

 

  • 영혼의 갈증의 증상 

외로움 (사랑), 두려움 (담대함), 분노 (기쁨), 염려 (소망), 불안 (평안) 

-> 영혼의 갈증이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갈증을 사라지게 하는 수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이는 당연히 영적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다행히 그 물을 구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거져 얻는 이 물을 은혜라고 부른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그 물은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 명절 끝 날

초막절 -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이것은 일년의 농사를 다 지은 후에 야외에 초막을 짓고 가족 들 뿐 아니라 성안에 거하는 노비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다 함께 모여 일년 동안의 농사를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이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때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초막절이라 부른다.  

 

초막절 행사의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가 제사장이 매일 실로암 못에서 금으로 만든 물병에 물을 가득히 채워 가지고 백성들 사이를 지나와서 제단을 돌면서 물을 뿌리는 의식을 한다. 일주일 동안 매일 한 번씩 하다가 마지막 날 끝날, 이 날을 특별히 큰 날이라고 하는데 이 날에는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제단을 일곱바퀴 돌면서 물을 뿌리는 의식을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목말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을 이 날, 초막절에 행하는 것이다. 

 

이 날도 제사장이 이 의식을 하고 있을 때에 예수가 백성들에게 소리치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갈이 흘러나리라!" 

 

갈증나서 애가 탄 사람에게 물이 들어가면 그 갈증이 사라지고 새 힘이 쏟듯,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에 똑같은 일을 하신다. 갈라지고, 염려하며, 화가나고 불안한 마음에 그 분이 공급하시는 생수는 우리 안에서부터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 갈라지고, 메마르고, 녹슬었던 자리가 유연해진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 외에는 공급자가 없다. 세상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그 갈증을 해결해 줄 것 같지만 그것은 생명수가 아니라 콜라나 사이다보다 몇천배는 더 해로운 청량음료 일 뿐이다. 

 

  • 누가 이 생명수를 마시는가? 

예수님은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은혜에 대해 우리 스스로 제한을 둔다. 오늘은 기도하지 못했으니까 은혜가 없겠구나. 

오늘은 정해 놓은 말씀을 읽지 

 

  • 어디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가? 종교행위가 이루어지는 제사장들의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바로 그 중심에서... 

일년 중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그 절기에 성전 중앙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그들을 주목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게로 오라"하신다. 

"종교"행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기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평안을 줄 수 없다. 갈증을 감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생명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 안에서, 자기들의 행위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갈증은 깊어만 간다. 이단들을 보면서 차라리 저들이 더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러워하기도 한다. 똑같이 예수 없은 의식에, 자기 열심에, 잘못된 것에 충성하며 갈증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 생수를 "마시라"의 표현은 되풀이 해서 들이키라는 것이다. 계속 마시라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쉼없이, 목마를 때마다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부어주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나를 짖누를 때마다, 형식적 종교의식이 아닌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이 생명수를 공급하라는 것이다. 

 

[엡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러한 건물의 치수로 묘사했을까? 어떤 높이의 벽도, 어떤 깊이의 절망도, 아무리 넓은 바다도, 아무리 긴 고통의 순간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갈증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채우지 못할 것은 없다. 
  • 우리는 ~때문에 사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 내가 비록 오늘 해야 할 순종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갈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만 한다. 사랑의 출발점은 항상 그리스도이지 나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길 때에 은혜를 바란다. 그런데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은 삯이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받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샘은 마름이 없다. 다함이 없다. 멈춤이 없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들에게, 제사장들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난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너희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연약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절박한, 간절한 그런 심령의 생명수가 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이사야 - 유다나라에게 주신 말씀 

유다 나라 - 그 주변국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 이사야 19장 말씀 -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사야 19:16절) 

여기저기서 얻어터지던 연약한 민족 유다를 하나님이 택하사 함께 하니 당시를 호령하던 강대국들이 유다를 두려워한다. 유다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거하라는 것은 방문하라는 것이 아니라 살라는 것이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라. 그 분 안에서 살아라. 그 분의 사랑으로 내 집을 삼으라. 그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주님은 나의 안에,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랑 안에서 내 집을 지으라고, 밤이 될 때마다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배고플 때마다 그 곳에서 밥을 먹고, 외로울 때마다 그 안에서 사랑을 공급받으라 하신다. 

 

두려운 일이 있는가? 염려되는 일이 있는가? 고통 많은 당신의 집에서 나와서 그 분의 사랑안에 당신의 집을 지으라.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가지는 죽은 가지다. 그러나 살아있는 나무에 접붙인 바 되면 내 가지와는 상관없이 나무의 열매가 나온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는 주님의 열매를 맺는다

그 분의 열매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열매다. 그냥 넉넉히 쌓아놓는 열매가 아니라 때에 맞게, 꼭 필요할 때에 주시는 모자람이 없는 열매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십자가 아래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기 전까지는 세상에 발을 딛지 말라" 

그 안에서 회복하라. 그 집에서 잠을 자고 그 집에서 밥을 먹고 그 집에서 맘껏 이야기 하고 채운 다음, 당신의 세상으로 일하러 가라. 일이 끝나면 또 당신의 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들어가라. 그 분의 집은 거할 곳이 많다. 

 

예배도 중요하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를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다.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 누릴 때까지, 내 마음을 그 분께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목 마른가? 당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가? 

무엇으로 그 갈증을 채울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그 갈증을 채울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예수만이 그 갈증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을 믿는가? 동의하는가? 

아니면 밤낮 예수를 믿었어도 한 번도 그 갈증을 멈춘 적이 없는가? 

정말 예수께 와서 그 분께로부터 물을 받아마셨는가? 

마당 뜰만 밟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고 아직 예수로부터 그 물을 얻지 못하진 않았는가? 

내 방법이 잘못 되어 있진 않았을까? 

 

오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동의한다면 

그 분께 나아오라. 그 분으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물을 받아 마시라. 매일 같이 그 사랑안에 집을 짓고 살으라. 가슴 벅찬 그 사랑을 누리라. 

 

아무리 예배드려도, 기도해도, 그 사랑이 체험되지 않으면 그 사랑을 깊이 맛보기 전에 그 집을 떠나지 말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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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 민족을 변화시켰나 (느 8:1-12)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 -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특히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형식적 종교인, 외식인, 예수님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 현실에서의 유대인 - 1700만명의 인구 

           - 전세계의 경제, 정치,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민족 -> 그들하면 떠 오르는 것 - 지혜, 탈무드... 

           오히려 구약의 때, 신약의 때보다 그들의 역할과 영향력과 이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져 있다.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인 민족이 세계를 이끄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었는가? 

그 변화의 전환점은 무엇인가? 

유대인에 대한 여러 연구가 쏟아지지만 랍비들은 한결같이 그 물음에 이렇게 답변한다. 

 

유대인의 신앙과 삶을 변화시킨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었던 두 번의 성전파괴를 통해서이다. 

 

BC 600-580년경에 걸친 3차에 의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화재 

  • 영적 딜레마 - 어떻게 하나님의 집이 불탈 수 있을까? (신앙적 딜레마) 
  • 성전의 상실은 곧 이스라엘 종교의 상실 - 민족의 상실 - 공동체의 상실 
  • 선지자들의 활동 (바로 성전 파괴의 시대 가장 활발한 선지자의 활동이 일어난다) 
    •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보다 너의 삶을 제물로 드리라. 
    •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 성전, 제의, 제사장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일상 생활에서 믿음을 지키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회당 중심, 말씀 중심, 일상의 삶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생활이 변화-> 예식 종교에서 배움과 기도, 말씀의 종교로 탈바꿈. 
  • 제사 중심 (제사장 중심) -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고 외적 환경에 의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 말씀 중심 - 자신들의 내면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 
  • 유다이즘 - 유대인의 정체성 - 신비하게도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이 아닌 바벨론 땅에서부터 시작- 우리의 뿌리를 지키자.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모세와 같은 리더가 없는 시기 ->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을 때에 그들이 비로서 의지하고 기댄 것 -> 말씀 (모세오경, 신명기 6장 5절 -들으라 이스라엘아)등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 - 바벨론 포로기 - 흩어진 구약의 말씀들이 수집되고 책으로 만들어지는 시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헛된 자만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실질적인 탄생을 알리는, 실질적인 유대적 정통성이 확립되는 역사의 순간이 바로 오늘 읽은 느혜미야 8장의 순간이다. 

  • 느혜미야 - 유대인 이민자 3세 출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고자 간청하여 페르시아로부터 파견나온 총독 -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이 황폐해져 있을 때에 그 성벽을 재건하러 온 인물 
  • 총 52일 만에 성벽 중건 - 임무 완성 
  • 그런데 그 일이 끝나지 않고 보이는 성벽을 중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 성전재건 - 성벽 재건 - 말씀 선포   

 

[느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누구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느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져와서 읽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고, 백성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에 집중했다. 

 

[느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말씀을 펴니 누가 미리 얘기한 것도, 교육한 것도 아닌데 모든 백성이 책을 펼 때에 일어났다. 말씀을 펼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그 분이 임재 앞에 나아가기 위해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통해 내게 찾아오신다고 마음 속에 경각심을 가진 것이다. 

 

[느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손을 들어 응답하고, 그 앞에 선 자신은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댄다. 그 분은 높이고 나는 낮아지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심정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을 대한 것이다. 

 

[느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 왜 울었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왔어야만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지켰으며 지금까지 인도해 왔는지, 자신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가 깨달을 때에 나오는 행동은 동일하다. 회개하는 것이다. 그 분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것이다. 

 

그 완고했던 백성들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나 그들이 울었는지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하고 달랠 정도였다. 

 

진정한 회개가 왜 중요한가?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에 진정한 기쁨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비로서 죄의 사슬이 우리로부터 끊어지고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느 8: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 회개 뒤에 무엇이 찾아오는가? 
    • 먹고 마시며 (참된 교제) 
    • 나누어주고 (참된 돌봄과 사랑) 
    • 크게 즐거워하니 (참된 기쁨) 

☞ 그들이 그 읽어준 말을 밝히 앎이라. (안다-> understanding 이 아니라 exerience) 비로서 그 말씀을 경험한 것이다. 

 

그들이 말로만 듣던 그 말씀, 귀로만 듣던 그 말씀 - 비로서 그 말씀이 그들의 삶에 경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뒤로 여호수아 이래로 한 번도 지킨 적 없는 초막절을 1000여년만에 지키게 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사람들과 단절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일어나는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 공동체 전체에게 일어난 자발적, 능동적 부흥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했던 자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변한 것은 한 가지다. 

경전은 바로 그 경전 - 아하스가 무시하듯 구석장이에 내팽겨쳐 버렸던 그 경전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읽어달라 한다. 

사람도 같은 사람들이다. 죄의 본성을 가진....

그런데 그들에게 달라진 것 - "말씀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남기신 그 말씀을 말로 대하지 않고, 글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존재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잃어버렸던 그 말씀을 듣게 해 달라고 에스라를 청하고 

그 책을 펼 때에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맞이하고 

말씀을 읽을 때에 두 손들어 아멘 아멘 하고 자신들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똑같은 말씀읋 읽는데 이전과 달리 그 말씀이 지금 내 앞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

왜?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고난과 재난과 어려움 까지도 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고, 믿음을 가지라고....왜?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하시는 그 분의 말씀으로 그들이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죄의 권세에 의해 포로되었던 자들의 마음이 만져 지면서 그들 안에 새로운 기쁨이, 소망이, 믿음이 샘솟는 것이다. 

 

신명기 -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땅이 너희들을 토해내리라 - 반복되는 경고 

설마 설마 하다가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서 다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경외하는 것 

 

말씀대로 살고 싶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 말씀대로 우리를 맞추기 보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맞추고 싶어한다.  (죄의 영향력) 

그리고 변화하고 싶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다. (영적 게으름) 

 

씨뿌리는 비유 (말씀을 대하는 네 가지 태도) 

  • 길 가에 뿌려진 씨앗 -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 말씀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완고한 사람- 뿌리 조차 내리지 못한다. 
  • 돌 밭에 뿌려진 씨앗 - 뿌리가 내리는 것 같지만 금방 말라 버리는 사람 -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금방 말씀을 잊어버리는 얄팍한 신앙 
  •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 - 가시가 그 말씀이 자라는 것을 찌르고 막는다. 세상의 염려, 유혹에 약한 사람

 

그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 성령의 역사를 가로 막는다. 

 

누가복음 5장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 그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는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베드로의 배에 올라 이리로 오라 하신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나랑 상관없는 말씀이 내 배, 내 삶에 올라 내게 말씀 하실 때 그 분은 예수가 되고, 실재가 되고, 나와 관계하는, 내 삶에 역사하는 말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나오기를 주저한다. 그저 베드로처럼 내 할일 해 가면서 남에게 하시는 말씀 기웃 기웃 하면서 좋은 말씀 있으면 그저 기억하는 구경꾼의 모습이 되고 싶어한다. 그 말씀이 직접적으로 내게 다가오면 뒷걸음치고 외면한다. 

그런 심령에게 주님은 지금도 문을 두드리신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을, 그 말씀을 그저 글로, 역사로, 누군가의 말로만 여긴다면 그 말씀은 전혀 나와 상관없는 교과서일 뿐이다. 

 

  • 네 번째 밭 - 좋은 밭 - 옥토밭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들어왔던 그 말씀이 어느 날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내가 그 말씀을 그렇게 듣고 있을 때, 그 말씀이 지금 눈감고 귀닫고 현실 속에서 넘어지는 그런 내 삶의 중간에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현존! 

그 때 우리는 옥토가 된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상태에 대한 말씀이다.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도록 마음을 열 때, 그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넘겨 드릴 때에, 난 말씀 앞에서 비로서 내 삶이 열려지는 것이다. 

 

루터 - 성경은 예수가 누워계신 구유이다. 네가 성경 어디를 읽던지 네 눈을 열면 그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보자

그러면 반드시 그 분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날 변화시키기를, 내가 말씀의 해석자가 아니라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고, 날 이끌 수 있도록 나를 내어 드리자. 

말씀을 통해 들린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들린 말씀에 순종해 보자. 말씀에 민감해져 보자

 

신앙생활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부담은 되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가? 

오래토록 해 왔지만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현실, 변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에 실망감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는가? 

왜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원천이요, 기쁨의 원천인 신앙이 나에겐 별 효력없는 죽은 것 같은 신앙으로 여겨지는가? 

주님이 다른가, 말씀이 다른가, 아니다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를 뿐이다. 

 

설교와 설교자 

  •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해야 한다. 설교자가 좋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옳게 들리고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찾아오고, 에스라를 통해서 그 말씀을 읽게 하듯이 설교자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한다. 
  • 그는 죄인이 아니었을까? 온전한 자였을까? 아니다. 에스라도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죄인인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전하게 하신다. 그 입술에서 나온 말을 통해 거룩한, 흠없는 역사를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을 당신의 나팔수로 사용하신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가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자는 그 죄인의 입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의 신비요, 설교의 딜레마요, 설교의 역사이다. 
  • 설교자도 자신의 입술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집중해야 하고 그의 삶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성도 역시 어떤 설교자라 할지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에 성령께서 분별의 영을 주시고 내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 

 

교회를 잃어버린 성도들 - 방황하고 무너지고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가 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으며, 삶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그런데 그 때 내 신앙의 근거가 드러나고 세워지게 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반석이 곧 교회가 아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반석은 무엇인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지 않으면 모래일 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교회가 사라져도 우리가 반석 위에 서 있으면 그 교회는 언제든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의 삶은 반석 위에 기초한 삶이 된다. 

 

당신의 교회가 무너졌는가? 좋은 기회이다. 반석을 회복하라. 말씀을 통해 무너진 교회를 세워라. 

당신의 삶의 토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라. 그 재건의 완성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대할 때, 완성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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