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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향한 기적인가!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병이어라고 불리는 예수의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도, 그리고 그 분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기적이다.

 

나도 2015년도 교회의 표어를 "너희가 먹이라!"라고 정하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여러번 오병이어의 사건을 설교를 통해서 전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에수님이 기적을 보이시고 병자들을 고치자 예수의 소문이 예루살렘 곳곳에 퍼진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33절에 보면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예수님께로 모여든다.

 

  • 그리고 그들은 때가 저물때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듣는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며 모여드는 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여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매달려 본 적이 있는가?

 

그저 예배시간 한 시간도 지겹게 힘들게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들었을까?

그들은 처음부터 오병이어의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여든 것은 예수를 보기 위해서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가 하시는 말씀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들었다.

 

은혜는 갈급함에서 온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에게 베데스다 연못에서도, 성전 미문에서도 기적이 임한다.

 

  • 예수님은 영적인 은혜만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들이 날이 저물도록 말씀을 듣고 떠나지 않자 그들이 구하기 전에 주님께서 그들의 배고픔을 알아채셨다.

신앙은 영의 것을 구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육적인 문제도, 이 세상의 문제에도 결코 소흘함이 없다.

우리의 일상을 무시하지 않는다.

 

  • 마을로 가서 이들로 무엇을 사먹게 하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주님은 갈 것 없다 하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신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다. 그러자 요한복음에 의하면 한 아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축사하시고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두 광주리를 채워 가신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각도로 해석되고 설교되어져 왔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에 대한 대표적인 기사로도 소개되었고 어린아이의 헌신에 맞추어 우리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강조하며 헌신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로도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의 역할은 극히 외면되었다.

그들은 이 사건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아닌 작은 어린아이라고 표현된 자의 헌신을 통해 오천명을 이루신다.

 

성경에서 어린아이는 "순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무력함" "존재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이기도 하다.

 

  • 오늘은 제자들의 각도에서 이 사건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빈들"이지만 요한복음은 이 사건이 "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 6:3)

 

산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다. 이 땅의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장소,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면하고 오직 주님으로만 채우는 장소, 골방, 내면의 빛, 기도의 시간, 성경은 산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그 중심엔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의 임재로 가득찬 장소이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곳에 있던 제자들을 제자라고 명하지 않고 사도라고 명한다.

사도라는 말은 사도행전 이전엔 쓰지 않던 표현이다. 유달리 이 사건에서만 성경은 제자들을 가리켜 사도라 명한다.

 

사도는 주님의 특별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 30절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 (막 6:30)

이 구절은 앞선 7절부터 13절까지 예수께서 이들을 둘 씩 짝지어 보낸 사건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그들은 특별한 사명을 띠고 파송받아 지금 돌아와 있다. 주님은 그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는다. 임무를 주시는 예수는 그 임무를 이룰 능력을 미리 주신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들을 치료할 권능을 주시고 또한 선포할 말씀을 주신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도인 것이다.

 

사도로 파송된 그들이 돌아와서 의기 양양하게 자랑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들에게도 예수처럼 능력이 나타남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좀더 신령한 자가 된 듯 했을 것이다.

 

영적으로는 한 껏 들떠 있었지만 한껏 육신적으로 피곤해있던 그들에게 주님은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육적 피곤함을 아는 주님은 그들에게 쉼을 주신다. 안식하게 하신다.

 

  •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물론 주님은 그들이 안식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음식을 먹는 시간으로 표현되지만"

예수님께 적용하면 주님은 "따로 한적한 곳"에 다다를 때마다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기도하셨다.

 

주님에게 안식은 단지 육신적인 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창조기사에서 안식은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구별되고 구별된 것에 인간이 거했을 때에 주어지는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결코 육신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질 때에 우리는 안식한다.

 

그 분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아무리 유람선을 타고 배 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잔다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의 시간이지 안식이 될 수없다.

 

  • 안식을 주신 주님이 이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다.

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말을 하셨을까? 어린아이를 돋보이게 하시려고?

그들 아니어도 주님의 행하시는 것을 강조하시려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그 표현에 주님의 진심이 들어있진 않을까?

 

각자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물고기와 떡으로 먹이시고 채우신 후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사도로 세우신 후에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던 주님께서

 

사도로서의 사명을 맡기시고 경험하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무리를 맡기시고자 진심을 다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고 계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주님의 말씀이 임하면 우리의 삶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때론 지진으로 임하고 때론 불로도 임하고 때론 세미한 음성으로 주님의 음성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다가오지만 공통적인 것은 우리 삶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갈등을 주고 우리의 일상을 흔들고, 선택을 요구하고 때로는 이삭을 바치는 것 같은 포기를 원하시기도 한다.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대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불손종할 핑계를 찾기 위해 자신이 포기 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것과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전자를 택했다.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데나리온이라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없음을 이야기하고

자기들이 이미 일을 다해 피곤하다는 육신적인 이유를 대기도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정탐하라 (자신을 살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떤 이는 "그 땅은 정말 좋은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능히 저 땅을 정복하자" 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너무 강하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스스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나바호 선교

우리에게 먹이라고 붙여준 사람들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작년에 우리가 처음 참석하면서도 앞장서서 리더의 역할을 했었는데 올해엔 갈 사람이 없다.

첫날 모임에 고민 고민 하다가 "올해 우리 교회 여건이 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말하려고 참석했는데

예배 가운데 주신 감동

계속 생각나는 부담과 그들의 소리.

 

사도들이 외면하면 어떤 어린아이, 아니 돌맹이라도 사용해서 일하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다가서서 "너희가 주어라. 난 너희가 그들을 먹이기를 원한다"하고 말씀하시는 소리 .

 

올해 제가 라이드 팀장

큰 차가 없기 때문에 어차피 12인승을 빌려가야 하는데 타고가는 사람은 고작 네 명.

 

각자가 힘들고 어려운 사정이지만 난 이 차에 적어도 우리 교인 열 두 명을 채우고 떠나고 싶다.

 

오병이어 현장 

Posted by 소리벼리

여행과 입국수속 (빌립보서 3장 20-21절)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와 관심 속에서 십 일 년 만에 고국을 다녀왔습니다.

눈도 고치고, 이도, 피부도, 건강검진도 받고 왔습니다.

그리운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동생의 제수씨도, 동생의 아이들도 보고 왔습니다.

같이 이 곳에서 공부하고 고국에 귀국해서 자리를 잡고 있는 여러 목사님도 만나보고, 한국 총회에도 참석하고 왔습니다.

 

낯설것 같았던 고국에 한 3주 가까이 있다보니 점점 친숙해지고 역시 고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돌아오긴 전 날 미국에 부칠 책이 좀 많아 우체국에 가서 배 편으로 몇 권의 책을 부치려고 하다가 갑자기 미국 집 주소와 제 미국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열 시 간 조금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한국에서의 짧은 방문기간이 여러가지 감정을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역시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남겨온 가족들이 벌써 그리워지기도 하고 동시에 미국에 두고온 성도들과 가족들에 대한 보고싶은 마음도 더해졌습니다.

 

저와 같이 여기 모인 이민교회 성도님들의 삶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고 밖에는 한나와 네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간단하게 지나갈 것 같던 입국수속이 지연되기 시작했습니다.

라인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별로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한 사람 당 10분은 걸리는 것 같은 긴 시간이었습니다.

 

얼굴을 붉히는 승객도 입국수속을 하는 관료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시간이 지연되고 몇 몇 고성도 나니까 덩컹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못들어 가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공항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아내과 딸이 더 보고싶어 졌습니다.

어떻게든 집에 가고 싶고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해 졌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장 6절)"이 말씀이 생가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집에 가야 합니다. 집에 보내 주세요. 교회에서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검사관이 제 지문과 여권을 조회하면서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면서 제 서류가 부족하다고 더 내어 놓을 것 없냐고 이게 다 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지만 검사관은 그저 더 필요한 서류를 내라고 말을 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진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 영주권을 보여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여주니 왜 이것을 이제야 보여 주냐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저를 쳐다보다가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드디어 두 시간 넘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와 딸을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전도 폭발 때 했던 질문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당신이 만일 오늘죽어 천국문 앞에 섰다면 그 곳에서 그 분을 지키고 있는 천사가 내가 널 천국에 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냐는 질문입니다.

 

그렇고 보니 천국에도 입국수속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수속 전까지는 이 땅이 고향인지, 천국이 본향인지 헤깔리고 불분명하기도 하지만 그 앞에 설 때 마치 집에 두고온 가족과 성도가 생각나듯이 내 집이 어디인지가 명확해질 것입니다.

 

때로 여행은 우리의 삶에 활력소를 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하고 재 충전의 시간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여행하다 보면 집보다 여행지가 더 좋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가장 좋은 것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입니다.

 

때로 야외예배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도 물론 우리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에 호흡을 주는 그런 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짧은 여행과도 같은 그런 특별한 시간이지만

돌아갈 집이 있고 또한 모이는 성전이 있기에 이러한 야외예배도 즐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긴 외국인의 입국수속 줄에 있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시민권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짧고 빠른 줄이었습니다.

저 시민권이 있으면 공항에서 기다리자 않고 바로 갈 수 있구나!

 

우리는 어쩌면 긴 광야같은 긴 여행길을 가는 순례자입니다.

긴 여행길에서 우리는 두 세계 사이를 늘 방황합니다.

한 세계는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 구절에 있는 이 땅에 소속을 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들의 신은 늘 자기를 채우는 자기 만족, 자기 배요, 그러한 자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가져다 줄 그런 나라이요

우리의 나라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게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나라입니다.

 

함께 이 땅의 여행길을 가고 있는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천국의 시만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소속은 하늘나라입니까?

그럼 여행자의 마음으로, 순례자의 마음으로 이 땅의 삶을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누리면서, 하늘나라의 입국수속에서 당황하지 말로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그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천국의 영주권, 천국의 시만권이 나에게 있음을 늘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 입국수속

 

Posted by 소리벼리

동산 안의 무덤 (요한복음 19장 38-42)

 

종려주일- 예수의 왕의 입성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습니까?

자기 유익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주를 떠나고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무리들이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니까 십자가에 못박으로서 외치는 군중으로 돌변

 

그런데 이 때에 주님과 함께 했던 자가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 -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던 자 - 요한복음 3장에 밤 중에 예수를 찾았던 자 - 니고데모처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자 -

 

누가복음 23장 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복음 15장 43절)

 

마가복음의 기사 - 당돌했다. -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 - 에스더서에 보면 왕비라 할 지라도 왕에게 요구하는 것 - 목숨을 건 행동

 

그리고 행한 것 -자신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냄

마태복음 27장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

 

당시의 무덤 - 개인의 묘라기 보다는 가문, 가족의 묘

예수 - 공식적으로는 사형수

 

  • 요셉의 행동- 목숨을 담보로 한 당돌한 행동

- 가문의 명예를 실추 할 수 있는...

-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다 앓을 수 있는 행동

그런데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 -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였음을 숨겼던 그가 죽은 시체가 된 예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의 시체를 장사 지냄. 자신의 무덤을 내어 줌.

 

  • 외경 - 빌라도 행전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후에 예수의 시체를 빼 돌린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서 40년형을 선고

감옥 속에서 예수가 나타나 예수의 피가 담긴 성배를 주고 가서 그 성배의 힘으로 감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언급

초대교회 유명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감옥에서 풀려난 아리마대 요셉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하고 있고 영국은 실재로 아리마데 요셉을 영국 기독교의 창시자로 정하고 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성배를 찾아 기사들이 모험하는 내용이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인 그 유명한 아서왕 이야기.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에나 존스도 그 성배를 찾아 떠나는 여행 - 그 영화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한복음 19장 41절)

At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there was a garden, in the garden a new tomb, in which no one had ever been laid.

 

눈에 띄는 대목 -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에는 무덤이 있는데 사람이 놓여 있지 않은 무덤이다.

 

  • 성경에는 동산이리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 동산은 히브리어로 "칸"이라고 부르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칸이라는 말을 낙원 (paradise)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 고대 교부 가운데 시릴(Cyril)이라는 사람은 에덴 동산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철학자 파스칼도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에덴동산은 그 뜻이 "즐거움, 기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그 동산을 파괴하였다. 아무도 거할 수 없는 동산이 되어 버리게 했다. 최상의 장소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회악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멸망의 동산이 되었고. 추방의 동산이 되어 버렸고 죄의 발원지가 되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동산을 회복하신다.

요한복음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고 한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다. 요한복음 19:41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말한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바로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 동신에 있었다.

 

겟세마네라는 의미는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이다.

감람 열매의 기름을 짠 곳이므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몸의 진액을 짜면서 기도하셨다.

구원은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왜 에덴 동산에 무덤이 있었는가?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덤에 사람을 죽게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떠나있게 한 후에 그 무덤의 주인으로 예수를 눕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금 에덴을, 기쁨을,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 주신 최상의 것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파괴의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는 그 무덤을 다시금 빈 무덤 되게 하신다. 광야를 에덴 되게 하신다. 죄악으로 무너진 모든 것을 다시 에덴으로, 축복으로, 구원으로 만들어 가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왕의 눈물 (눅 19:37-44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시고 비밀에 붙이셨던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예수께서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로 들어올 적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종려나무 - 히브리어로 (Tamar) - 다말

창 38장 - 야곱의 삼남이었던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첫 째 아들의 아내, 유다의 맏며느리가 바로 다말. 그런데 첫째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 죽고, 둘째가 당시의 법으로 형수를 취하여 자녀를 낳아야 했지만 대를 잇는 일에 불성실하여 역시 죽고 셋째에게 다시 보내졌으나 그 때 유다의 가나안 여인 아내마저 죽자자 집안의 우환의 원인이라 하여 다말마저 친정으로 보내짐,.

그런데 열매없고 불행의 상징이었던 그 다말이 유다에 의해서 다시금 자식을 낳아 유다지파, 다윗의 조상,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대를 잇게 됨.

 

마라의 쓴 물과 엘림사건 - ( 출 15장)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쓴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고 안식과 평안이 임한 상징 - 12, 70- 교회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시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의 후기와 예수님 당시에 이 호산나 라는 말은 메시야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과 결부되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로서 여겨졌습니다.

 

  1.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2.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 열매없는 다말이 자녀를 낳아 다윗의 조상이 되듯, 마라처럼 쓴 물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듯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영접하는 그들은 다름아닌 다말과 마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부르짖음이었다.

 

37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는가? 버젓이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는데 백성들이 왕의 오신것 처럼 떠들썩 하니 걱정스러웠던 게다. 헤롯에 기대어 사는 자들은 불편했던 게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외침이 정당하다고 한다.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 한다. 그 분은 단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다.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절)

그런데 그렇게 왕으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께서 그 성을 보고 우신다. 여기서 우신다는 말은 단지 슬퍼했다가 아니라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격할 정도로 슬퍼했다는 것이다.

 

왕은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자신이 다스릴 나라가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하실 교회가 썪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할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입니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도 참평화를 알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성전에 종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왜 그들을 위해 웁니까?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참 평화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통해서 장사하고, 예배를 통해서 세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신앙엔 참평화가 없습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 성전 안에 갇혀 있는, 그런 신앙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향해 우시면서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신앙은 돌하나도 남김이 없이 사라지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왕이 아니라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떄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여리고로 들어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전 마지막 사역, 삭개오만나는 사건으로 시작 .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장소는 나무 위 입니다.

나무 위를 죄인이 달려야 할 십자가 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는 십자가 위에서야 비로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마땅히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내려오게 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에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하십니다.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려 온 나무 위, 그 외롭고 험한 십자가에 예수가 올라가시면서 그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그가 감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 대신 죄없으신 그가 멸시와 고난 당하시면서 삭개오를, 예루살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들을 위해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가끔 내 기도가 잘못 될 때마다

내 마음이 소망이 참된 왕이신 주님이 아닌 헛된 세상의 왕을 기대할 때마다

이 울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참 왕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선 자기들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주님을 외면했고 떠났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이룩하신 그 나라

서로 발을 닦아 주고 용서해주고 평화를 주는 그 나라를 주님과 함꼐 세워 가게 하십니다.

참왕, 참 나라, 참 믿음을 소망하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