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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성육신, 모든 벽을 허물고 이 땅에 오신 예수 (눅 2:8-14) 

 

[눅 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시간여행, 현재와 과거의 연결 -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 (타임머신, 블랙홀, 상상 속의 어떤 문...)
    •  상상하지만 어느 과학도 그것을 완성하지 못한다. 이론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 정도가 아니다. 
    •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그리고 창조주 VS 육신을 입고, 피조물이면서...동시에 죄로 가득 찬...
    •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장애물 중에서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의 정체를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사 59: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런데 그 멀고도 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 죄와 거룩함 사이의 간격을 예수의 나심, 성탄이 매꾼 것입니다. 모든 담을 허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회복시키고자,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 아마도 한국 개신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신학자를 한 명만 뽑으라면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는 성탄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높은 곳에 계시고 인간은 너무 낮은 곳에 있고,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하고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사귈 수가 없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셔서 인간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고 고치시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두셨을 때에는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교제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고, 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자 인간은 점점 더 밑으로 추락합니다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집니다. 

 

  • 하나님의 다가옴의 방법들...
  • 홍수를 내리시기고 하고,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시키기도 하고, 율법을 주어 정결하게도 하고,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두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의 길은 점점 더 밑으로, 어둠으로,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합니다. 어쩌다 하나님의 흔적을 본 인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화로다, 이제 죽게 되었다'고 절망할 정도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치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두려워 죽을 것 같습니다." 말할 정도로 인간은 감히 하나님께 접근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멀고도 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 죄와 거룩함 사이의 간격을 예수의 나심, 성탄이 매꾼 것입니다. 모든 담을 허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회복시키고자,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성탄, 예수의 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어디까지 낮아지셨나 그 사랑의 깊이를 볼 수 있습니다. 

탄생: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죽었을 때: [요 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 "싸여있다" 수동태 문장. 

누군가가 그를 천으로,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포대기로 그 몸을 쌌다는 것입니다. 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연약해서 강보로 쌓고 구유에 뉘인 아기...

 

그것도 어디에 누워 있습니까? 구유...사람이 누워 있는 곳이 아니라 말이나 나귀가 쉬도록 내어 놓은 구유에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쌓여 누워 있는 것입니다. 

 

  • 유대인 -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 말라기 이후 그 메시야에 대한 고대함은 절정을 이룸...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이실까? 그 소식을 전할까? 그리고 전하게 할까? 

누구에게 알려야 가장 빨리, 멀리 이 기쁜 소식이 퍼질까? 제사장? 바리새인? 헤롯? 

-> 이름 없는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 그리고 동방박사 (이방 땅의 무리들...) 

왜 하필 이들이었을까? 

 

  • 부활의 소식을 전한 자들...베드로? 요한? 아니면 빌라도와 같은 정치가? No, 증인으로 채택할 수 조차 없었던 여인들...
  • 가장 값지고 고귀한 복음을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는 바로 그 곳에 있음직한 사람들에게 온 세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목자들이 양들을 치고 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그것도 선지자도, 제사장도 아닌 지극히 초라한 목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런데 그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쁜 소식을 전할 터인데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장장 400여년 동안 선지자조차 만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 하나님께서 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우면서도 벅찬 일입니까? 그 음성을 듣고 지시하신 곳으로 큰 기대...왕은 어떤 모습일까? 메시야는 어떤 모습으로 왕림하셨을까? 하면서 경외감을 가지고 가는데....

그들이 본 것은 

포대기에 쌓인 채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였습니다. 

메시야는 이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 마태복음 2장 동방박사 이야기..

별을 보고 이스라엘 땅에 왕이 나셨음을 알고 먼 이방 땅에서부터 왕의 나심을 보러 오는 자들...

그런데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냐면 헤롯왕이 있는 궁으로 먼저 들어갑니다. 

별을 바라보며 이 땅까지 왔는데...그들은 왜 곧장 예수님이 계신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헤롯궁으로 들어갔을까요? 

메시야는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이, 메시야가 왕궁이 아닌 곳에서, 그것도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마굿간 구유에 강보에 쌓여 누워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만나시러, 가장 낮게, 가장 천한 모습으로, 연약한 아기의 모습,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어있는 모습으로 동방박사에게, 그리고 목자들에게 첫 대면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때로 금식하며 때로 문등이들과, 사마리아 여인과, 새리와, 간음한 여인과, 어부들과 어울리시며 십자가의 길을 지고 좁은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거져 주신 은총이지만 그것을 위한 그의 삶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눈 높이 교육....

어른이 된다는 것... 아버지 보다 어머니의 모습... 

 

우리에겐 누구나가 수준이 비슷한 혹은, 나보다 수준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동생들은 자기 또래들 보다는 항상 형들 누나들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더 재미나 보이고 고상해 보입니다. 

어릴 때는 어른들 이야기하는데에 끼기 위해서 얼마나 애쎴는지 모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런 세상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어른이 된 기분,,.,

 

  • 그런데 신앙 생활 하면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은, 좁은 길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수준을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추는 것. 그런데 그렇게 나를 부인하고 상대방에게 수준을 맞추다 보면 결국 모든 사람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높고 고상한 영적인 세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상에 임해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 

 

선교... 한국교회의 선교, 전도방법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잘 살게 되었어... 이렇게 부자 되었어.... 이래서 전도된 사람 거의 없다. 부러우면 믿겠지... 부러워서 믿는 사람없다. 세상에는 성공하는 책들로 가득하다. 예수믿고 성공해라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막 15:29-3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 성전을 헐고 - 어떤 성전을 헐었습니까? 장사하는 성전입니다. 신앙을 도구로 결국 자기 뱃속 채우는 교회를 허신 것입니다. 신앙을 핑계로 자기 뱃속만 채우려고 하는 맘몬주의, 물질주의, 축복 지상주의 교회를 허신 것이지요. 
  • 그것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자들- 지나가는 자라는 것은 참 신자가 아니지요. 쇼핑하는 신앙인, 교회와 성경을 둘러보면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없나 둘러보는 사람, 예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자가 아니라 지나가는 신앙인들은 그런 예수를 보며 머리를 흔들며 모욕한다는 것입니다. 사흘은 내가 죽고 새로 사는 기간아닙니까? 세상의 나는 죽고 영의 나, 신앙 안에서 부활하는 나....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은 사흘의 기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온전히 죽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 그들의 요구사항은 무엇입니까? 예수보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셨는데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 지는 것이 어찌 구원이냐?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신앙이 무슨 구원이냐를 외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신앙의 구경꾼들은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느냐? 나에게 복을 주어라. 복을 보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을 보여 주면 과연 믿을까요?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를 보여 주어도, 복에만 집중하는 자들은 결코 채워짐이 없습니다. 

 

(막 15: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 대제사장, 서기관들- 거짓 선지자들이지요. - 희롱한다. 놀린다. 에이, 복도 못 맏았으면서 무슨 구원을 논하는냐? 이 사람들은 구원을 무엇으로 봅니까? 십자가의 반대로 봅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편안함을 누리는 것, 고통을 멈추는 것. 
  • 그래서 그들에게 구원이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가 곧 구원입니다. 
  • 충격적인 것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 예수를 욕합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자기 죄 때문에 달렸습니다. 자기 죄값 치루는 것이지요. 
  • 자기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은 신앙 생활 하면서 고통 받는 자를 자기 들과 똑같이 보지 않겠습니까? 너나 내나 똑같지 않냐? 고상하게 신앙생활 한다고 하더니 그 꼬락서니가 뭐냐,... 
  •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를 바라보면서 나를 기억해 주세요.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치루지만 당신은 죄없이 십자가를 치루네요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로마는 가장 힘있고 부유하고 잘 배운 자들.... 그런데 그 로마가 유대인들에 의해 복음화 되었다. 무엇으로? 오직 십자가의 복음, 순교의 복음,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로 기뻐하며 견디는 그들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하늘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평강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가장 낮은 모습, 겸손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신다. 

그러면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역시 콧대 높게 사람들을 내려 볼 것이 아니라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어서 이 땅에서의 평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영광이다. 

 

성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장벽을 뚫고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성탄을 통해 예수님은 높아져야 살 만 하다고, 복달라고 외치는 자들에게, 너희는 이미 복의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우리에게 성공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신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떤 세상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성탄의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러한 성탄의 은혜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오늘을 준비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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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출 3:1-5) 

 

[출 3:1-5]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그 인생의 여정이 가장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 인물 -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물론 그 출생에 대한 비화를 소개하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을 아주 간략히 다루고 대부분을 마지막 40년에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 연약함에서 성숙함으로 신앙의 여정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인물
  • 그리고 그 인생이 40년을 축으로 애굽의 왕자로서, 미디안 광야의 무명인 존재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잘 나뉘어져 있는 인물. 

 

  • DL 무디 (모세의 삶을 3등분하여 신앙의 여정으로 그렸다)  
  • I am Somrthing - 구원받은 자로서의 존귀한 존재 (애굽의 왕자로서의 존귀한 삶) 

I am Nothing - 애굽의 왕자의 자리보다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서 그들을 위하고자 했으나 두 집단 모두로부터 속하지 못하는 존재. 무력, 무능, 존귀한 자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리고 나를 부인하는 자리 (미디안 광야) 

I am your man. God's person -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알며, 그 뜻을 이루는 자 

->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그 인생의 전반이 소개된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그 기간은 달라도 이러한 여정을 공통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아브라함 

- 75세때 부르심-> 축복

- 이삭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시행착오 - 모든 수단을 다 써보지만 실패 

- 이삭을 낳고 이삭을 바치며 비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2) 야곱 

- 장자의 축복권을 얻음 

- 라반의 집에서 21년동안. 

- 얍복강 가에서 이스라엘로...

 

요셉과 다윗도 마찬가지...그러한 단계를 겪었다. 

 

  • 대부분의 성도의 삶 -I am Something의 삶과 I am Nothing의 삶의 경계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때로 누리다가 인생의 문제나 고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또한 자신의 죄성과 연약함 안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왔다 갔다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삶 

 

  • 신앙의 어느정도의 연륜이 있고 성숙함을 알아가는 성도라면 고민해야 할 것 

나는 나의 무능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사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I am Nothing에서 I am yours, I am God's person으로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3장은 바로 그 전환-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애굽에서의 모든 교육과 그의 야망도 꿈도 다 포기하고 그저 한낮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아가던 모세를 불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전환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어떻게 모세가 자기의 꿈을 포기한 무능의 존재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가를 볼 수 있는 눈과 그를 통해 나의 삶의 위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떻게 해야 나의 인생과 나의 신앙이 I am Something에서 I am Nothing의 광야의 훈련을 넘어 I am God's person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의 삶의 전환점에서 먼저 보여주신 장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출 3: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나무 - 여호와의 사자가 있기 때문에...
  • 지금 모세의 상황 - 애굽의 왕자라는 자리를 버리고 히브리인을 위해 몸을 불태우고자 했으나 버림받아 꺼져버린 나무와 같은 인생...
  • 하나님의 부르심 - 내가 너를 다시 불태울 것이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꾸게 하리라. 하나님은 비전을 주신다. vision이 dream과 다른 것은 dream은 나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고, vision은 하나님의 시선이 투영된 것이다. 하나님의 꿈이 내게 임한 것이다. dream은 그것을 위해 내 인생을 불태워야 하지만 vision은 내 안의 성령이 불타고 나는 더 온전해지고 쇠하지 않고, 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까지 네 힘으로 네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 내가 인도하는데로 내가 널 이끌 것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마치 이삭을 낳기까지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쓴 후에 이제 다 해보았냐? 그것이 되더냐?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느냐? 그럼 이제 내가 하겠다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5절) 

  • 여러번 나누었지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고, 보아스가 룻을 얻기 위해 기업무를 자에게 요구했던 의미다. "네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라"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지시하는 대로 사는 삶"으로 부르는 것이다. 

 

자, 전반기 40년의 애굽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미디안에 산지 40년만에 모세의 삶이 모든 꿈과 야망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함과 동시에 매일 똑같은 편안한 일상에 안주하고 있을 때에 그를 부르신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 모세가 한 번에 승낙하지 않는다. 

 

Nothing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것 - 결코 쉽지 않다. 

목회하면서 고난 좀 경험한 인생을 사신 분들은 I am Nothing의 순간을 말씀드리면 십중 팔구는 내 인생이 지금 거기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내 인생의 바닥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닥의 순간에도 내 자존심, 내 고집, 내 주장을 여전히 꺾이지 않은 상태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가 저항한다. 

부르려면 내 인생 팔팔할 때에 40때나 50대 때 부르셨더라면 내가 힘을 다해 일할 수 있는데...

지금 내 나이 80에 내가 무슨 소용있다고 날 부릅니까? 나 안갑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하겠습니까? 내 말을 믿기나 하겠습니까? 그들이 날 믿겠습니까? 

 

그가 여전히 생각하는 것은 애굽의 왕자였을 때

내 인생에 기운이 있고 힘이 있고 재력이 있고 내세울 것 있었을 때에.....

과거의 자기를 생각한다. 그것갖다가 일했으면 좀 더 잘 하고 좀 더 쉬었을텐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다 빠진 후에 비로소 일하신다. 

네것 다 썼냐? 이제 내 것으로 일해보자 하신다. 

 

이렇게 일곱 번 여덟번 거절하는 모세의 답변 속에는 젊었던 자기 인생에 대한 회환과 동시에 이제야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비아냥도, 거절도, 온갖 감정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자기 기대와 하나님의 기대가 달랐던 자기 인생에 대한 인정하기 싫은 모든 실패가 녹아있는 거절이다. 

 

"하나님,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내가 열정이 펄펄 넘치던 때에는 나를 돕지 않고 나를 도망가게 하셨습니까? 이제 쉴 날이 가까운 내 인생의 지금 나타나 그리로 가라니요?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나로 요약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내가 모든 가치와 때와 시기와 내용과 방법을 만든다. 내가 주관자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며 네 생각이 내 계획을 움직일 수 없다. 내게로 오라. 네 경험, 네 이해, 네 만족으로 나의 계획을 판단하지 말라. 지금이 때다!" 

 

억지로, 죽을 지경에까지 가서, 모세는 떠밀리듯 바로에게 간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해서 그대로 하라는 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는데 기근을 만난 것과 같다. 

순종한다고 일이 척척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운영을 우리의 생각과 늘 다르다. 

 

바로

너희들이 미쳤구나

일이 편하니 이상한 생각 하는구나. 일을 더하라. 

 

바로는 말을 안듣고 백성들은 곤고함에 모세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불평이 극에 달한다. 

 

  • 10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바로를 굴복시키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고, 무엇보다 하나님 하시는 일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다. 인턴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번에 바로를 무릎꿇리지 못하셨을까? 

왜 오랜기간, 오랜 방법을 통해 서서히 그들을 굴복시키실까? 왜 서서히 믿게 하실까? 

1학년, 2학년...10학년에 이르기까지...

한달이면 될 가나안의 여정을 40년이나 돌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은 

한단계 한단계이다. 

 

  • 우리가 원하는 방법은 늘 로또 방식이다. 

은혜받아 한 번에 무너뜨리고 한번에 변화시키시길 원하신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눈물 흘리고 회개 했어도 그 삶을 알아가는 데엔 똑같이 긴 여정이 필요하다.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난 주님은 바울을 아라비아 호렙산으로 인도해서 3년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은 기간동안 그를 훈련시키신다. 

 

10가지 재앙이 끝나고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라 명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첫 유월절을 통해 급히 출애굽 할 때 

또 다른 시험이 그들에게 닥친다. 

 

뒤에선 후회한 바로와 군사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앞엔 홍해라는 스스로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막고 있다. 

 

그 때 모세가 첫 번째...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첫 고백과 선포를 한다. 첫번째 신앙고백이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

  • 자기 인생의 모든 실패를 고백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처음으로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 안에는 그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불신앙이, 내가 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 오만함이 다 사르러들면서 그가 비로서 경험했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 두려워말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비로소 호렙산 떨기나무의 메시지를 통해 주셨던 그 메시지 - 너희는 불타지 않고 내가 불타게 할 것이다. 내가 불탈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내가 너희를 위해 죽고 너희는 살 것이다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I am Nothing에서 I am Yours를 알리는 첫 장면 

마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를 고백한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그 전환점이 되는 것, 3장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비로서 시작하게 되는 전환점이다. 

10가지 재앙 - 바로를 잡기 위한 재앙이 아니라 모세를 변화시키기 위한 재앙이다. 

 

물론 이 후에도 몇번의 또 다른 전환점을 통해 모세의 신앙은 깊어간다. 

출 32장 - 황금송아지...그들이 만든 우상-하나님을 우상화한 것이다.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범죄는 하나님 아닌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한 하나님을 만들어 그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예배하며 자기 마음 대로 사는 삶- 이사야 

주님을 따르며 십자가 반대로 가는 삶-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 신앙.... 하나님은 이런 우상을 못견뎌 하신다. 

 

그들을 쓸어 버리겠다 하니까 모세가 처음으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중보한다. 

비로서 아비의 심령을, 종의 신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 말을 신약에서 누가 받아 고백하는가? - 바울 

[롬 9:1-4]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 - 그들을 버리지 말라.
  • 하나님의 심부름꾼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절절하게 느끼는 부모의 심령, 아버지의 심령,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주신다. 내가 죽을지라도, 내가 설사 생명책에서 지워질 지라도 저들을 구원하소서. 
  • 바울의 마음 - 같은 유대인들을 위해 상한 마음을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이해를 넘는 일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 자신의 모든 꿈과 욕망과 실현을 철저히 죽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심장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고난과 광야의 훈련을 통해 우리의 이기적이고 교만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라게 하신다. 그러한 존재를 창조해 나가신다. 

 

40년간의 미디안에서 철저히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의 죽음을 경험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40년간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모세에게는 여전히 자기 고집, 자기 꿈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고 그 뜻대로 이루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시는 것에 대해 거절하고, 분노하는 연약함이 남아 있었다. 

7번의 설득과 그리고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 가시는 한 단계, 한단계의 재앙이 모세에게는 한과목의 수업이 되어 그를 변화시켰다. 

내가 불타지 않고 내 안의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가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40년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예수님 - 철저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삶으로 나타내신 분. 

 

그 분은 철저히 자신의 힘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분. 

 

때로 우리는 힘들다 라는 말을 한다. 언제 그 말을 하는가? 

내가 힘을 쓴 대로 열매가 없을 때, 내 맘대로, 내가 뜻한 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힘들다라고 표현한다. 왜 힘이 들까? 우리가 힘을 쥐고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돈을 움켜쥐고, 크고 작은 권력을 쥐고, 그것을 호령하고 싶어한다. 

자기 마음에 원하는대로 살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뜻 마저도 내 뜻과 안 맞으면 우리를 화를 내고 요나처럼 다른 길로, 아니면 푹 꺼져 잠을 자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십자가는 "힘 있음"이 아니라 "힘없음"이다.

십자가는 "힘 줌"이나 "힘 쥠"이 아니라 "힘 놓음"이다. 

인생이 왜 힘든가? 힘을 들고 살아 그렇다. 

힘들지 않으려면 힘을 놓고 살면 된다. 

힘을 들고 사는 삶이 아니라 힘을 놓고 사는 삶! 

그것이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여주시면서 내가 타지 않고 성령이 타는 삶

신을 벗어 주님께 내 모든 힘을 내려 놓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당신의 삶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I am something의 시기를 보내며 즐거워하는가? '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I am Nothing을 경험하며 한껏 기죽어 있는가? 걱정하지 마시라. 

내 죽음이 곧 그의 부활로 나타난다. 

힘들지 말고 힘을 내려놓고

신을 벗어놓고

주님이 내 안에서 불타오르게 살고 싶지 않은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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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심으로 (요한복음 16장 7절)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신앙생활 하면서 소망하게 되는 것 - 주와 동행하는 것,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

반대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 -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기도해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 특히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재로 만나 그분의 말씀을 직접듣고, 그 분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던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그들의 믿음은 얼마나 확실할까? 

 

그 분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던 요한은 예수님을 체험한 그의 경험, 그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라고 표현한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교제하고 (자세히 보고) 만진 그 분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그 분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장 많은 책망을 들은 자들이다. 

"너희가 믿음이 없는 고로....믿음이 없는 자여...오히려 여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켜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는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고까지 말씀하신다. 보지 않고 믿은 우리가 오히려 그들보다 복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복음 16장 7절에는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이라 말씀하신다. 왜?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이면서도 우리에게 잘 와닿지 않는 말이다.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이다.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유익일 수 있을까? 

우리는 육신적 예수를 만난 적 없이 보혜사 성령의 때를 살고 있다. 성령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그들보다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왜 주님은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 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럴 때에 우리는 그가 떠남으로 얻는 "유익"의 의미를 알고 그 유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1. 언제 이 말씀을 하시는가? 

요한복음 13장 - 최후의 만찬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또한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의 배반,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13장 마지막에는 그가 아버지께로 가게 됨을 비로소 말씀하신다. 

 

[요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14장에 가서는 본격적으로 그가 가야될 곳을 제자들에게 알리신다.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그리고 예수가 아버지 집에 가면서 대신 보내 주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보혜사 : advocate(변호사) -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 
    •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가르치고 생각하게 하시는 분 - 제자들: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셨으나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누가 더 높냐를 가지고 싸우고, 부활한다 하셨는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왜? 진리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담을 마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또 이해시키신다. 내 외부의 선생이 예수님이었어도 깨달을 수 없었던 말씀을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 예수님은 잠시 잠깐 함께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
  •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밖에 존재하시는 분이시지만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 
  • 그리고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듯, 아버지와 예수와 우리가 함께 거함을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3. 그러면서 그 유명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요 15:1-5]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 (죄사함을 받았다, 구원받았다)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 맺을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 졌는데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이게 어떤 상태일까? 
    • 출애굽을 했다. 홍해를 건넜다. 바울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성도의 세례 사건으로 표현한다. 세례 받았다는 것은 곧 거듭났다는 것, 구원 받았다는 것의 상징이다. 
    •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에 거하는 자들은 그 삶에 열매가 없다. 오직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으로 먹고 산다. 이것도 역시 은혜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불평 불만한 삶을 살고, 그 삶에 그들의 합당한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그들이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여전히 애굽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비교 대상도 오직 애굽이다. 은혜에 합당한 열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야 열린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애굽을 잊어 버린다. 그곳에서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는 것이다. 
    • 우리는 여호수아를 함께 나누며 출애굽 할 때에 건너는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는 유일한 사건이지만 성경에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통해,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그리고 나아만 장군을 통해, 세례 요한을 통해 거듭 나오게 되는 성령의 은혜, 성결의 은혜라는 것을 나누었다. 중생은 한 번 경험하는 유일한 경험이지만 성령의 충만함과 성결의 은혜는 때에 따라 거듭 경험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경험이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이적을 보이시고, 기도하셨어도, 그들은 스스로 열매 맺지 못하였다. 단 한 시간만 깨어 기도하라 하였건만 "육신이 연약한 고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한 시간을 기도하지 못한다. 언제 비로서 기도하는가?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에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그 이후에도 매일 같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존재가 된다. 주님이 옆에 계셔도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무력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진리를 말해도 깨닫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렵고 불가능하다. 
  • 이미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존재로 오셨다. 바로 주님의 성육신이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우리와 함께 거하러 오셨는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주님과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도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님 밖에 거한다. 마치 성전 마당 뜰만 밟고 되돌아 가는 성도와 같다. 이 안타까움을 주님은 계시록 3장의 말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요한에게 증언하신다.
    •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우리 안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것, 우리가 주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 오직 성령 안에서 가능하고 또한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4. 우리가 맺어야 할 참 신앙의 열매는 무엇인가? 

주님은 13장부터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면서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시면서도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포도나무와 가지를 말씀하시면서도 이 계명을 강조하신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계명이 성령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주님이 계실 때에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때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다른 스승의 제자들과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킨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서로 분쟁하고, 경쟁하고, 다투는 관계가 되어간다. 

 

그런데 주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실 때에 그들은 비로서 연합하고 교회를 세우고, 또 그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더 나아가 이방 땅까지 가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린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바울을 통해, 또한 열 두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계로 전파된다.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주님의 계획, 주님의 열매,- 바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막힌 담을 허물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교회에 대해 담을 쌓게 만드는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담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요 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바울을 출교 시키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착각 -왜?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므로...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구약의 선지서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제사와 예물과 제단이 아니다. 정의와 자비, 긍휼한 마음이다. ->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5. 결론 

물론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떠나야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또다시 제자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유하실 정도를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셨지만 아무리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함께 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눈으로 증거하고,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어도, 그들 안에 예수가 없으면 그들의 믿음은 공허한 신념일 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이 없이는 주님을 주님 되게 알 수 없다. 내 안에 역사하는 빛, 내 안에 나를 움직이시는 영, 그 분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예수의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 안에 예수가 주인되신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주님을 거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분의 말씀을,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고, 감동시키고, 인도하신다. 

그 분의 이끌림 없이는 때로 우리 열심이 주님을, 주님의 뜻을, 주님의 계명을 삼킬 수도 있다. 

 

그 분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한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찾아 헤메는 자가 아닌, 우리의 존재로서 벽을 허무러뜨리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하나되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보혜사 성령의 가장 최고의 사역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넘어 사랑할 수 없었던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떠나가심으로 주님은 그 분의 사역을 완성시키신다. 때로는 없음을 통해 그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존재의 소중함을 알고,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응답하시는 그 분이 은혜를 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많은 삶의 영역에서 없음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함께 모여 식사하며 왁자지껄하게 함께 했던 시간들, 추수감사절을 지내며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여러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쇼핑을 다니며 연말 분위기를 내는 모습, 맛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가족과 함께 극장에서 연말의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매 주 모여 예배 드리며 그 분의 있음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 

그런데 그 없음을 통해 유익을 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았으면 한다. 

이 없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유익은 무엇인가?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눈 밖의 경험으로 체험했던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내 안에서 뜨겁게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분이 주신 새 계명, 사랑을 통해 내가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은 무엇인지, 내가 다가가야할 사람은 누구인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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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형편에든지  (빌립보서 4장 11-13절)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

  • 한 해 동안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적으로 본다면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당한 분이 없음에 먼저 감사하게 됩니다. 특히 이귀자 권사님 가정, 이옥희 집사님 등 연로하신 분들도 이 시기를 잘 버티고 마음은 좀 불편할지라도 코로나로부터 지켜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 하면서 코로나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집사님들, 코로나로 부터 지켜주심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년의 대부분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며, 어느새 학교 안간다는 즐거움보다는 답답함과 지루함과 많아진 숙제량으로 인해 힘듦에도 잘 견뎌주고 있는 학생부 아이들을 보면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 그러나 그 마음 한 편에는 정말 감사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이라기 보다는 코로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 어떤 성도는 코로나로 인해 사업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어떤 분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거나, 일이 많이 줄은 분들도 있습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서 다시금 코로나 확진이 많아지면서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교회나 성도들도 어두운 그늘을 많이 보게 됩니다. 
  • 특히 장사하시는 분들은 추수감사 때부터 연말까지 선물과 쇼핑으로 인해 한 해의 큰 수익을 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 때에 맞이하는 추수감사절, 아니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에 감사를 말하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없는 예배, 마음에 없는 감사를 받으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몇 주 전부터 저는 감사를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전하면서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향의 땅을 떠나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막연한 땅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 긴 항해를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 낯선 땅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사람들이 추위로, 부적응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칠면조를 잡아 이웃을 초청하여 드렸던 예배가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마음 먹으면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정도의 큰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감사는 또한 밭에 감추인 보배를 찾듯이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도 나누었고 하박국을 통해서는 한 밤중에 드리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외적인 고난과 아무 것도 없는 내적 공허의 상태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의 비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기도를 통해 오천명이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큰 숙제 앞에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마리라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식사기도 하면서 의탁하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기는 예수의 기도를 나누어보았습니다. 

 

함께 나누었던 설교를 종합해보면 우리에게 남는 한가지 질문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와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왜요? 감사는 자신의 상황을 자족할 수 있는 데서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이 자족이라는 말, 많이 나누었지만 외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복, 곧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고 있는가? 아니, 지금 행복한가?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나? 

 

Well-being이라는 말이 삶의 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정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주위에서 참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니, 바울의 예를 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기를 설교하는 것이 성도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참 적당하고 적절한가? 진실히 이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경험했던 일은 제 마음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시에서 교회 건물에 대한 경고장을 받은 후에 우리는 이제 교회를 옮겨야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주소록에 올라 있는 모든 교회에 이메일을 보내 클로스로드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교회 가까이,  좋은 교회에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었지만 직접 만났을 때에는 여러가지 환경으로 불가능하게 됨을 알고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주 줌 미팅을 통해서 Harbor Light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고 50명 정도 들어가는 채플 장소와 사무실 자리까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제 회의를 통해서 확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요일날 문자를 통해 Alameda County에서 모든 대면 예배에 대한 전면 금지명령이 떨어졌다고 통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따라서 교회 렌트에 관한 상황도 지금은 추진하기가 힘들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건물 계약기간은 다가오고, 시청으로부터는 독촉이 날라오고, 이사할 장소는 보이질 않고...정말 하박국이 맞고 있는 상황처럼 답답하고 어두운 밤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감사절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누었던 설교말씀이 정작 나 자신에게조차 잘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묵상을 녹화하고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좀 막막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려는데 기도가 잘 집중이 되지 않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에 제가 주로 하는 것은 다윗의 시편을 읽는 것입니다. 한편 한편 눈으로 넘겨가며 지금의 나의 심정을 대변할 수있는 구절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몇장을 쭉 넘기다가 시편 57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소리가 다윗의 절규처럼 들려왔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고 싶은 마음, 재앙이라는 말도 눈에 꽂혔습니다. 

제목을 보니 사울을 피해 엔게디 굴에 숨어있을 때 지은 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 때 나단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목동에서 왕궁으로 하루 아침에 거쳐를 옮긴 다윗. 

골리앗을 무찔러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을 때의 그 기쁨과 환호도 잠시 지금 그는 사울을 피해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루 앞 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 57: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의 영혼이 지금 사자들 가운데 누웠다고 말합니다. 사자라고 표현된 그 대적은 다름아닌 사람들입니다. 말로 찌르고, 무기로 공격하는 대적들입니다. 그의 영혼이 불사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7절부터 다윗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시 57:7-9]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확정되었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 아마도 그는 기억했을 것입니다. 양들을 칠 때에 사자로부터, 곰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셨던 하나님. 그리고 골리앗 앞에서 자신을 높여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다시금 붙들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그는 그의 마음을 확정합니까?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무엇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 기도: 내 마음의 소원을 올려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내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주님 앞에 내 삶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둘러쌓여있는 자신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 찬양: 그리고 그는 찬양했습니다. 만민 중에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했습니다. 뭇 나라라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환경들 가운데서, 폭풍우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사건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에게 어둠이 임하고 불안과 불만과 부정적인 모든 것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은 생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출애굽을 시키시고 광야 가운에서도 그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이 가나안 앞에서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로잡혀 들어가려 하지 않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삶을 맡긴다라는 뜻 - 가장 심각한 상황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냥 하나님 뜻이라면 죽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나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때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지 못하면 난 부정적이고 불안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없어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 -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그 분의 손길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없어지지 않아도 더 이상 그 상황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견딜 수 있고, 맞설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그날 이후로 기도 시간 마다 핸드폰에 있는 노트를 열어놓고 하나 하나 체크를 해갑니다. 

- 난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진짜로 그 분이 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 마음이 아니면 다시 내 인생을 인도하신 그 분을 기억하며 믿음을 구합니다. 

- 난 그 분께 내 삶을 맡기고 있는가? 도와달라고는 하면서 여전히 짐을 지고 가진 않는가? 여전히 내가 짐을 지고 있으면 다시 그 분께 구체적으로 나의 짐을 아뢰고 의탁합니다. 

- 난 지금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 

- 난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은 지금 행복한가? 

 

상황은 변한 것 없는데 내 인생이 여기서 멈춘다 하더라도 후회하거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버티고, 누리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하나님께서 이후로도 영원토록 지키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배워 나가길 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형편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보내면서 모두가 언제 옛날처럼 돌아갈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Edward John Stetzer라는 목사님이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난 교회가 언제 예전처럼 돌아갈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를 지내면서 또 예전처럼 돌아갈 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코로나가 하나님의 심판이냐, 인간의 잘못의 결과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코로나를 통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참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홀로 있어도 참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난 내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고 굳세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언제 지나가지만을 생각한다면 예전의 삶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예전의 나를, 예전의 내 신앙을, 예전의 교회를 바꾸지 않고는 앞으로의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교회건물을 넘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고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고난을 통해 배워나가고,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때 나눈 말씀처럼 

  • 모든 고난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떠한 고난보다 크다. 고난이 내가 너에게 만들려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내가 고난을 통해 주려는 것은 네게 받는 고난을 해결하는 것보다 크다. 네가 고난을 극복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 고난은 부활로 오기 위한 죽음의 길이지만, 그 고난에 압도되지 말고 고난을 통해 너에게 찾아오는 부활을 바라보라. 그 부활의 집을 세우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통해 부활의 소망의 집을 세워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그래서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행복의 키를 발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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