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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주일예배 설교'에 해당되는 글 280건

  1. 2019.10.12 그들이 가려던 땅 (요한복음 6장 16-26절)
  2. 2019.10.05 혼인잔치 2 (요한복음 4장 1-6)
  3. 2019.09.28 가나혼인잔치 (요한복음 2:1-11절)
  4. 2019.09.21 아버지의 사랑 3 (눅 15:25-32)

그들이 가려던 땅 (요한복음 6장 16-26절)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가장 큰 표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루고 있다.

이 표적은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표적 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 혹은 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사건의 의미를 6장 전체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 분의 보혈의 은혜로 잃어버린 즐거움을 회복시키시는 사건이라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말미암아 굶주려버린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늘의 만나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공급하시는 생명의 떡 되신 주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과 그것에 대한 설명 사이에서 또 다른 표적의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바로 오늘 다룰 오병이어의 현장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폭풍우를 뚫고 가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표적은 오병이어 표적 안의 또 다른 표적, 오병이어의 의미를 완성케 하는 표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는 몇번에 걸쳐 했기 때문에 오늘은 오병이어의 표적 안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 오병이어 사건 이후 백성들의 반응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 선지자 -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 그리고 그 분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그 이유를 26절을 통해 밝히고 있다.

 

26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으실 십자와 부활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 분이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위해서 표적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찾는 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다. 그리고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라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와서까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무리들과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 제자들을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보내시고 (마, 막 -> 즉시, 제촉하사) -> 무리들에게서 이들을 떼어 놓으심
  • 무리들을 보내신 다음
  • 자신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심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백성들이 예수를 왕 삼고자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껏 의기양양하고 들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 주님께서 급히 그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탔고 바다를 건넜다.

 

떡을 먹고 배부른 그 땅에 좀 더 머물면서 그 날의 은혜를 나눌 수도 있는데 주님은 급히 제자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다.

문제는 주님의 이 명령 이후에 나타난다.

 

말씀따라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를 만난다.

 

주님의 길을 가는데 왜 어려움을 만나는가?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는다" (17절)고 성경은 전한다.

어두웠다는 것은 영적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이다. 영혼의 깊은 밤이 임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혼은 밤을 맞고, 예수는 보이질 않고, 바다에는 풍랑이 인다.

내 맘대로 가다가 맞게 되는 풍랑이라면 불순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가라해서 가는데 풍랑이 일고, 주님은 보이질 않고, 영혼은 침체된다.

단 한 번만의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말씀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는데 기근을 만나고, 말씀따라 홍해를 건넜는데 광야를 만난다.

 

이 풍랑을 만난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항상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풍랑을 만나는 사건은 누가 당하는 사건인가?

제자들만 만나는 사건이다.

 

  • 배에 타지 아니한 다른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바다 건너 편에 서 있던 무리-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
    • 그들이 목격한 것 - 가버나움으로 가는 배는 단 한 척 - 예수는 타지 아니한 것을 보았음
    • 아침이 되자마자 그들은 다시 오병이어 현장으로 달려간다. 왜 그리로 갔을까? 또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기 위해, 다시 말해 또 다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그 현장을 갔을 것이다.
    • 그런데 그 현장에 가 보니 예수도 없고 제자도 없다. 예수를 찾아 무리가 배를 타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간다. 그 곳에 가니 제자들도 있고 분명이 같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예수도 그 자리에 있다.

 

-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25절) 아니 어떻게 언제? 분명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 그렇게 예수 찾으러 온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0절) 하면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더라"(66절)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니 영생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과 상관없는 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워줄 신이다. 그게 예수이건, 아니면 다른 신이건 그들은 당장 그들을 배부르게 해 줄 신만 있으면 언제든 옮겨다닌다.

 

  • 다시 배에 탄 제자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역풍을 만남 - 어떻게 하면 역풍을 피할 수 있을까? 배의 방향을 돌리면...

그런데 돌리지 않는다. 왜? 주님이 건너가라 말씀하셨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건너려니까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

배부른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려니 고난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바람을 거스르며 가는 것이다.

  • 세상을 거스르는 삶: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일 2:15-16]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죄된 본성을 거스르는 삶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고난을 당하는가?

그 길은 세상에 거스르고, 내 본성에 거스르고, 악한 모든 죄에 대하여 거스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대충 사람들 하는데로 따라가면 되는데 말씀은 그렇지 말라하고

남들 하는 것 다 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성경은 그거 해 봤자 별거 아니라고 하고....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또 나 자신의 죄성과 항상 부딪치며, 거스르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내 힘으로는 절대 갈 수 없다. 그런데 그 길을 우선 떠나야 한다.

작정하고 내가 주님 믿는 사람으로서 말씀대로, 똑바로 살려고 길을 나서야 한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모세가 미디안을 떠나 바로에게 가고, 바로에게서 광야로 가듯이, 말씀에 의지해서 떠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분명치가 않다.

대충 죄 짓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도 자기는 예수 믿는 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 말씀 한 번 읽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눈에 날마다 말씀읽으면서 마치 말씀에 얽메여서 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저렇게 믿어야 주님이 받으실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주님이 무리에게도, 배를 타고 건너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말씀따라 순종하며 파도를 만나면서 건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시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신다.

내니 (ego eimi) -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대답하셨던 바로 그 대답

I am (ego eimi) - 너희에게 온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이다.

 

  • 그 길은 주님만 바라보며 가면 건널 수 있는데 자꾸 주위를 기웃 거리면 또다시 무너진다.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항상 주변의 상황과 비교이다. 주님만 바라보면 무너지지 않는데 비교하면 주위를 보면 이 길에 대한 회의가 인다.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 힘으로 갈 수 없고 내가 주님을 붙잡을 수 없다. 주님이 내 손을 붙잡고 가는 길, 그 길이 구원이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들은 가나 혼인 잔치를 보았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보았다.

그 분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았다.

그런 주님의 말씀 따라 바다를 건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파도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배를 탄 제자들이 고백이 무엇인가?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다시 요한복음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떡을 먹고 배부른 욕망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 따라 주님 말씀하신 길을 걸어가는 신앙으로.,..

그들이 가려던 땅 - 주님이 약속하신 땅, 주님과 함께 가는 땅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땅은 어디인가?

그 땅은 주님이 말씀하신 땅인가? 아니면 죄악된 내가 가고자 하는 욕망의 땅, 죄악의 땅인가?

 

여러분이 삶을 다 한 후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땅은 어느 땅이고 싶은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처럼 주님이 찾아야만 하는 전혀 상관없는 땅에 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며 주님 부르실 때에 바로 "나 여기 있어요! "하며 달려 갈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지 않은가?

 

물 위를 걷는 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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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2 (요한복음 4장 1-6)

 

지난 시간 가나 혼인 잔치 - 즐거워야 할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건 -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진 사건

주님이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즐거움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 집에 계셔서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 비로서 주님이 주인되는 사건

 

우리 삶의 즐거움의 원천은 무엇인가? 무엇이 중한가?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

누가 그것을 아는가? 순종하는자.

 

이번 시간은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만남 - 6절까지 본문이지만 42절까지 이어지는 내용

몇 번 다룬 본문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알아보자.

 

먼저 가나 혼인잔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사건 중간에 들어있는 사건

-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만남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는 그 내용이 상당히 비교적이다. 그 비교 자체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준다.

니고데모 - 정복자, 유력자라는 의미의 유대인의 명문가로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선생. 그리고 공의회 회원

-> 개인자격이라기 보다는 유대인의 대표 자격으로 예수를 방문

그에게 하신 말씀 -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너는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도 못하느냐? 질책과 꾸중

 

사마리아 여인 - 이름도 소개 되어 있지 않고 그가 사는 지역, 그 지역에서도 아무런 사람도 교통도 없이 사람의 시선을 피해 사는 존재 - 복음서에서 질병이나 환경으로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경우 -> 그런 상황을 가진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요 4:1-2]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 이것은 앞선 3장 22절부터 일어난 세례를 놓고 일어난 예수의 무리와 요한의 무리 사이에서 일어난 헤프닝이 배경

 

[요 3:22-23]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원래 이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던 사람 - 요한, 그런데 갈릴리 지방에서 온 예수와 그 제자들이 이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사역

[요 3:26] ..."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제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마무리.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예수를 경계하기 시작함, 예수가 세례를 베풀면서 그 인기가 세례요한을 능가한다고 하니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 경계심이 예루살렘, 바리새인들에게 퍼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됨

 

[요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 압히에미 (ajfivhmi) - 떠나다, 그치다. 그만두다
  • 유대에 대한 사역을 멈추고 다시 갈릴리 고향으로 올라가심
  • 오병이어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때도, 혹은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서 모종의 적대감을 나타낼 때에도 그 자리를 피하신다.
  • 왜? 하나님의 때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자 하는 사명으로 인해 그 사명에 저촉이 되는 환경이 되면 그 자리를 피하신다.

 

[요 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Now he had to (must) go through Samaria)

  • 그런데 사마리아는 유대인이라면 결코 지나다니지 않는 땅. 멀어도 돌아가야만 했던 땅
  • BC 721 북왕국 이스라엘이 북왕국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그 후에 사마리아 땅에 앗수르 사람들을 보내어 강제 혼인 정책을 펼치게 됨 -> 유대왕국의 사람들로부터 그 후로부터 완전히 멸시 당하며 사람 취급을 당하지 못하고 살아야만 했던 땅.
  • 왜 그 땅을 가야만 했는가?
  • 하겠는지라 ( dei') 데이 - MUST -> 할 의무가 있다. 반드시 해야 한다. (사명이 있다)
  • 어떤 사명인가?

(암 9:8-9]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 무너진 야곱의 집을 세우고 다윗의 장막->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요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창 33: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 라반의 집에서 돌아올 때에 이 땅을 다른 형제들에 앞서 요셉에게 물려주는 장면이 창 48장 끝절에 소개.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 우물: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난 곳, 야곱이 아내 라헬을 만난 곳, 모세가 자기 아내 십보라를 만난 곳
  • 성경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그 아내를 만나고, 그 여자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
  •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 목적지에 다다른 사람이 털석 주저앉는 단어 -> 먼 여행길에서 드디어 찾았다. -> 마치 야곱이 라헬을 만나듯이 예수께서 반드시 와야할 사명-> 그 여인을 만나는 장면
  • 사마리아 여인 - 평생 고단한 우물가에 앉아 있는, 스스로 참 남편을 찾을 수 조차 없는 무력하고 외면당하는 그런 인생. 바로 죄인이 인생. -> 사마리아여인 -> 구원자를 기다리는, 예수가 구원하여 주어야만 살 수 있는 모든 인생들을 대표하는 인생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 (living water)를 네게 주었으리라

  • 3장 니고데모 - 유대인 중의 유대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의 대표자 - 그런데 예수님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무지한 자

[요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 4자 사마리아 여인 - 그 여인도 니고데모와 똑같이 예수가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니고데모와 다른 것은 그러한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 여인을 예수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 구원은 죄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님이 찾아오신 사건이다.

 

[요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여인의 인식의 한계 -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큰 믿음의 근거 - 야곱 -> 이스라엘 (영적 무지)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우물: 사람이 땅을 파서 만든 유한하고 인공적인 물 -> 자기 의, 자기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은혜. 율법.
  • 샘물: 샘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살아있는 물, 흐르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 요한복음 2장 성전 척결의 사건 - "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 잘못된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가 몸된 새 성전을 짓는 사건.

-> 거짓 성전을 무너뜨리고 내가 부활함으로 새 성전을 세우리라. 그 성전에서 일어날 사건

 

[겔 47:1-2]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겔 47:9-12]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슥 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계시록의 성취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사 55:1-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갈망과 간구인가 외면과 무지인가? (두 해석의 전통)

 

[요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네가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냐? 넌 무엇에 기대어 사느냐? 너의 주인은 무엇인가?

"난 남편이 없나이다."

  •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거짓일 수도 있고 진실한 고백일 수도 있다. 다섯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내게 안식을 주지 못하고 나의 참 주인이 되어주질 못했다.

그렇지만 삶의 갈증을 채울 수가 없어서 여전히 또 남편을 두고 살고 있다.

영적으로는 내가 기대어 살고 있는 우상- 넌 무얼 기대고 사는가? 무엇에 의지해서 사는가?

->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 성령을 얻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하는 것 -> 회개

예수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사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사함받았기 때문에 또 죄 가운데 살라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끊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의 잘못된 삶을 따끔이 지적하신다.

 

그 지적에 그녀의 마음이 무너진다. 외면하던 예수를 집중해서 주목한다.

"내가 보니 선지라로소이다" (19절)

 

[요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잘못된 북왕국의 예배) 하고 우리는 아는 것(하나님이 정하신 곳)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 유대인 - 아는 것을 예배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 그러나 그들의 예배도 온전치 못했다. 왜? 그들은 그 예배를, 성전을 자기를 위한 장사하는 곳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예수는 새로운 예배, 새로운 성전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인가? 생수의 강이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성령하면 이상한가? 아직도 두렵고 낯설고, 광신적이라고 여기는가?
  • 우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었다는 것. 그 영이 사라지면 곧 짐승과 똑같아진다. 아니 짐승보다도 못하다.
  •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 -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것
  • 초대 교회 가장 큰 이단 - 영지주의 -> 신앙을 지식으로 바꾸는 것 -> 지식이 곧 구원이다? NO!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했지만 예수는 그들의 성전을 무너뜨린다. 왜? 지식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어떻게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가? 먼저 여인에게 말했듯이 회개함으로, 예수 영접함으로 주님이 주인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 주님은 죄인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를 주님의 신부로 삼으신다. 신부로 삼으신다는 것은 주인이 되시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고, 온전히 교제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김학수 화백 사마리아여인과 예수님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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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혼인잔치 (요한복음 2:1-11절)

 

  • 요한복음 :1장 - 서론, 2-12장 - 7개의 표적, 13-20: 영광의 책 - 십자가와 부활 21장 - 에필로그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
  •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중 첫번째 표적 -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 표적은 기적과 다르다. 표적 - 기적(Miracle)이 아니라 이정표 (sign)

표적이라고 구분된 사건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는 사건 -> 요나의 표적...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그리고 그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뒷 부분

  • 그렇기 때문에 이 가나 혼인 잔치가 왜 그리스도의 표적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살펴야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단순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이라면 기적은 되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1. 사흘째 되던 날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날 -> 십자가의 완성
  • 1장의 연속선상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창세기 1장의 창조 모델을 가지고 시작된 본문
    • 첫째날 - 빛으로 오신 예수님 (어둠과 빛)
    • 둘째날 (29절)- 세례를 받으심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물-> 세례
    • 셋째날 (35절, 또 이튿날) - 세례요한의 제자 ->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다와 육지) 경계
    • 넷째날 (43절 이튿날) - 나다나엘. 참 이스라엘 삼으시는 주
    • 그리고 사흘 후 - 제 7일 날 - 안식일 -> 창조의 완성 -> 혼인 잔치를 통하여

 

2. 갈릴리 가나

[요 21: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1장의 마지말 사건 - 나다나엘을 부르신 예수님 ->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

그 더 큰 일을 보여주는 사건 - 가나 혼인잔치 -> 나다나엘의 고향

 

  • 성경의 처음과 끝

첫 창조 : 아담과 하와를 하나로 맺게 하심 - 죄가 들어옴으로 그 혼인관계가 깨어짐

죄가 들어오니 사람과의 관계 (탓),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다 깨어짐

아가서 - 신랑되신 예수와 신부된 교회와의 관계

호세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계시록 - 천국 혼인잔치로 끝이 남

 

  • 혼인잔치 (주님이 오신 목적)

그 분은 잔치하러 오셨다. 기쁨을 주려 오셨다.

신앙생활은 이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이다.

십자가, 고난, 광야, 성화는 모두 이 잔치를 위한 배경이다. 잔치가 목적지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문제해결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일한 대로 보상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분과 연애하는 것이요, 신랑되신 그 분을 누리는 것이다. 순교도 왜 하는가? 더 큰 기쁨을 위해서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요 2: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포도주: 잔치의 핵심. 신랑은 없어도 포도주는 있어야 잔치가 계속된다.
  •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 삶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집에서 있어서는 이제 잔치 끝났다는 말과 같다. 곧 사람들은 실망하여 떠날 것이고, 잔치는 끝날 것이다.

 

포도주가 이제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 삶의 즐거움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잔치 음식의 핵심은 포도주였다. 포도주가 없으면 잔치는 끝난다.

다른 음식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이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사하실 그리스도의 피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우리 모든 삶의 기쁨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교회는 다른 것으로 이 기쁨을 대신 할 수 없다.

콘서트를 열고 카페를 만들고, 체육관을 지어도,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강좌를 열어도 그것이 세상의 기쁨을 이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기쁨의 근원은 누가 뭐라해도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교회는, 신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마른다. 즐거움이 사라진다. 다른 모든 것은 부속물일 뿐이다.

다른 것으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들이 즐거움을 잃어버리니까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 하다가 복음을 잃어버린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 하대가 아니라 존칭으로 부른 것이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뜻밖이다. 왜 문제를 가지고 나온 마리아에게 예수의 반응이 이토록 차가운 것일까?

 

상식에서 벗어난 반응이 나올 때는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자비로운 분이신데, 그 집에 난감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고 예수님은 능히 물로 포도주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면서 왜 처음에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하신 것일까?

이 말씀은 ‘그 집 일이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잔치집에 계셨어도,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함께 계서도 기쁨이 충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 읽고 기도해도 기쁨이 회복되지 않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기쁨이 없어서 예수께 나갔는데 왜 주님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면서 매정하게 대하는가?

 

바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은 청함받은 자로, 손님으로 이 집에 계시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지 않아서, 예수님이 우리 집에 계시지 않아서 내 삶과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심령에 계셔도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같은 역사가 우리 집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집에 계시면서도 이런 기가 막한 처지가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쁨을 얻지 못하고 평안을 느끼지 못하고 염려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 영접까지 했는데 예수님께서 알아서 도와주시고 내 인생 가운데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사람도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손님이 와도 우리는 정성껏 접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손님으로 여겨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금하고 예배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은 자기가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주를 섬겼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헌금을 했는데.” 바로 큰 아들의 신앙이다. 아버지의 집에 있지만 아버지가 주인 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산다.

예수님은 손님 대접받으셨지, 주인 대접받으시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이라 여긴다면 물건 하나 살 때도, 한 시간 여유 시간을 쓸 때마다 주님께 허락을 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다면,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돈을 쓰거나 시간을 쓸 때 주님의 지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내가 이렇게 하고. 주님의 허락이 왔으니 내가 하고,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하고 싶어도 하지 않고.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나의 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니까 내가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요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그 돌항아리에는 지금 물이 있는가? 없다. 돌 항아리에 담아진 물 - 구약의 정결예식 -> 그 정결예식으로는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다. (요 3장) 큰 항아리지만 그 항아리의 물을 다 써버렸다. 그런데도 잔치집의 즐거움이 지금 다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막 7:1-7]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2:7-1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1. 예수 - 세례받고 제자들을 삼은 다음에 첫 번재 공생애 행적을 제자들과 함께 이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

그냥 잔치에 청함받은 것이 아니다. 공식적인 공생애 활동으로 참석한 것이다.

내 때 - 요한복음에 7번 등장 - 7번이 끝나면 십자가 사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 그 때를 향한 첫 시작을 하신 것이다.

 

2. 마리아 - 포도주가 떨어졌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가 예수를 아들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 대한다.

종들에게 이제 이 집의 주인이 예수가 되게끔 명령한다. 그녀 역시 손님으로 왔지만 이제 주님이 주인되신 삶이 되도록 이 집을 바꾸는 일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 자신의 신앙고백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누가복음 1장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왔을 때에 그녀가 고백한 말)

그리고 그 고백이 그 집의 종들의 고백이 되게 한다.

 

3. 하인들 -

[요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 하인들의 말이 없다. (침묵) - 여리고성
  • 아귀까지 채운다. - 온전한 순종
  • 어디에서, 누가 이 기적을 이끌었는지를 안다.
  • 오직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만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를 깨닫는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똑같이 기적을 누리고 표적을 보아도 우연히, 어떻게 하다가....자신의 생각 안에서 생각하다가 결국 믿음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4. 연회장 - 연회를 주관하고 있는 그 집의 주인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 어디서 났는지를 모른다.
  •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것이 기적인지, 누가 했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다.
  • 그 집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주인으로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른다.
  • 주님을 모르는 인생이 그렇다. 자기가 옳은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살지만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5. 이 장면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인물

제자들 - 그저 보고 그 결과 믿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만난 제자들을 혼인잔치로 데리고 오셨다.

그리고 2절과 11절 -> 제자들

그 공생애의 첫번째 표적은 누가 대상인가?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보게 하신 것 .

그의 영광 -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오직 그의 십자가, 보혈

 

예수님이 이 곳에 온 목적은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제자들은 하인들처럼 아무 소리 없이 주님이 행하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물이 무엇인지, 그 포도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후에 그 피를 기념하면서 성찬식을 베풀면서 비로서 간사한 죄인을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그 분의 보혈로서 우리 삶에 기쁨을 회복하시고 잔치를 여시는 분임을 보게 하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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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과 지지난 시간 2주에 걸쳐서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의 비유"를 가지고 첫 주에는 이른바 탕자라고 불리우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었고, 지난 시간에는 아들이 집을 나갈 때에 나가도록 두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결국 허랑방탕하여 탕자가 될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시는가하는 문제를 열왕기상 3장의 "솔로몬의 재판"에 나와 있는 사건을 살펴보면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짓 어미를 대신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산 자의 어머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아들의 비유의 마지막 시간으로 첫째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이 비유는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원독자)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가?

[눅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 장면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3. 그리고 예수와 함께 있는 제자들

-> 3절에서 말씀의 대상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 누가복음의 말씀과 평행하는 두 아들의 비유 사건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유일한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마 21:23) 백성의 장로- 존경을 받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바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혹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 그동안 이 비유는 탕자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탕자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지만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의 일등 신앙인이라고 불리던 자들.
  •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닌 두 아들의 비유로 불리워야 할 것이요, 이 메시지는 두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요, 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는 비유이다.

 

2.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첫째 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1) 그는 성실한 자이다.

맏아들은 벝애 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25절)

아버지는 부자였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동생은 유산을 챙겨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다.

형에게도 유혹이 없었을까? 나도 좀 놀면서 하자. 이제 나 밖에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때에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야 어떻든, 종들이야 어떻든 언제나 자기 일에 충실한 성실한 자이다.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29절)

동생은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나갔지만 형은 그 말씀을 어김없이 순종하는 자녀였다. 그는 순종하는 자녀였고 또한 아버지를 섬기는 자였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다.

 

4) 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31절)

아버지의 입으로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던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신앙생활 하면서 저도 그렇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성실하고 검소한 자)

어쩌면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

 

3.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사 중의 하나인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에서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하나님과 멀어지는 두 길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둘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로, 이는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 밖에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부류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 믿고 "자아 성취"를 위하여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심하게 말하면 "제멋대로"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은, 교회의 전통에 철저히 순응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자라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동생을 맞이하자 분노하여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적인, 형식적인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동생의 길은 "못되" 보이고 첫째의 길은 "착한 길"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동생이나 형이나 매한가지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오히려 비유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못된 인생을 살았던 둘째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고 형은 아버지가 계속적으로 설득하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로 끝이 난다.

그가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눅 15:28-29]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로운 전력, 자기의 선한 행동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 품을 떠난 죄인이요, 첫째 아들은 순종하지만 아버지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자 똑같이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다. 요나의 불순종처럼,...

 

영화 <아마데우스>

젊은 살리에르라는 촉망받는 음악가의 기도

"주여, 저를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음악으로 주를 찬송하며 또한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서 저와 제 작품이 사랑을 받는다면 저는 주님 앞에 저의 순결함과 근면함과 겸손함과 제 삶 전부를 드리겠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여자를 건들지도 않고, 무료로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자들을 열심히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뜻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여자들과 맨날 희희락락하면서 풍문이 끊이질 않고, 술취한 모습으로 연주하기 일쑤다.

살리에르의 고뇌에 찬 기도가 시작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하나님께 재능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하며 매사에 신중을 가하고 흠없이 살려고 본능마져도 누르려고 애쓰는데, 저 젊은 친구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어찌 아무일이 안 나타납니까?"

그러면서 급기야 "이제 하나님, 당신과 나는 적입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다. "모짜르트, 그 자가 나타나면서부터 하나님도, 그리고 나 자신도 싫어졌다..."하면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살게 된다.

 

둘째의 희망은 허랑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형의 정말 큰 문제점은 돌아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방법에 분노하게 되고 둘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끝까지 자기가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욘 4:9b)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이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볼 때 첫째에게서 없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없다. 그는 매말라 있었다. 즐거움이 없다. 그는 친구들과 잔치할지도 모르고, 가족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화평(Peace)이 없다. 그는 동생과도 불화하고 급기야 아버지와도 불화한다. 자비(Mercy,Forgiveness)가 없다. 그는 동생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금할 수가 없는 성령의 열매이다.

 

형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그런데 교만은 그 어떤 죄보다 우선된 죄다. 왜? 교만은 하나님 위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행실에 대한 회개도 해야 되지만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자기 의의 뿌리까지도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4. 아버지

탕자라고 할 때 영어. Prodigal의 의미는 "무모할 정도로 다 써버리다" "남김없이 다 쓰다"의 의미다.

아까 언급한 팀켈러 목사는 이 비유에서 정말 프로디갈한 존재는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이다고 말한다.

 

왜? 두 아들이 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만 허랑방탕하고 돌아온 둘째는 뛰어나가서 반기시며 어린 양을,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피로 먹이시고 입히시며 잔치를 여시고

그런 자신의 사랑에 분노하며 집밖으로 뛰쳐나간 큰 아들에게는 "얘, 내 아들아!" 하시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시면서 여전히 설득하시면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그 모습이야 말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 주신 은혜 안에서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런 잔치에 초청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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