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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요나서 강해'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6.10.14 요나의 세례 (욘 2:1-4)
  2. 2016.09.16 요나서 1장 7-10절 입술로만 하는 회개
  3. 2016.09.08 요나서 1장 4-6절 하나님의 간섭  (2)
  4. 2016.09.02 요나서 1장 3절: "그러나"의 신앙

요나의 세례 (욘 2:1-4)


[욘 2:1-4]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1장의 요나 -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뜻이 임했을 때에 나의 기준, 나의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반대편의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고 배 밑으로 내려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고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던 요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기준, 우리의 판단, 우리의 이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상황이 이렇게 내려가던지, 영적인 상태가 이렇게 내려가게 된다. 1장의 요나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리스도를 주라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실재로는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하는 입술신앙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 1장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암울하고 긴장되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 바로 1장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2장의 분위기는 1장과는 사뭇 다르다. 2장에는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고 눈물이 있고 회개가 있는 장이다. 왜 이렇게 분위기의 차이가 나는가? 

2장의 요나의 삶에 있어서 귀중한 전환점이 되는 장이다. 고난 중에서 일어서는 장이 바로 2장이다. 


1장에 쓰이는 동사 – 3절) 피하고, 도망하고, 내려가고 (5절)내려가서, 잠이 든지라. (10절)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12절)바다에 던지라 

2장(1-4절) 에 쓰인 단어 – 기도하여, 불러 아뢰었더니, 부르짖었더니, 내 위에 넘쳤다. 성전을 바라보겠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요나는 1장의 암흑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상황만으로 본다면 2장의 상황은 1장의 상황보다 훨씬 더 어렵고 깊은 절망의 상황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이나 갇혀 있는 상황이 이때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곳에서 요나를 일어나게 하였는가? 


1. 기도 이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1장은 고백은 있지만 회개가 없고, 질문은 있지만 기도가 없다. 

1장을 잘 살펴보면 그 곳에는 기도가 없었다. 9절에 보면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소개했지만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백했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다에 빠지는 상황에서도 그 죽음의 상황에서도 그는 오히려 죽기를 소망했지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기도를 요나가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살 가능성이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시작했다. 죽은 요나가 비로소 호흡하기 시작했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요나는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공간에서 호흡이 시작되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요나는 비로소 숨쉬기 시작한다. 성서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그것을 읽고 교훈 삼아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고 적어도 그러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우리 삶의 매뉴얼, 설명서이다. 


1절의 ‘기도하여’의 단어는 히브리 시제로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아직 완료되지 않고 진행형으로 씌였다. 계속 기도하였다는 의미이다. 어려우니까 한 번 하고 끝난 기도가 아니라 응답이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무언가 평안이 임할 때까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임재하실 때까지 기도했단 말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동안 있었는가? 3일 동안의 기간은 성경에서 완전히 죽는 기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걸어갔던 기간이 3일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기간이 3일이다. 요나는 언제까지 기도했나? 불순종했던 자신의 모든 것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도했고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여 응답할 때까지 기도하였다. 


우리도 형식적인 기도는 늘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한다. 1장과 2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요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는 상황이 달라지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기도해서 달라지는 첫 번째 것은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 삶의 방향이 바로 잡히고 내 시선이 주께로 고정되는 것이다.  


2. 요나가 고난 중에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했다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 - 하나님 여호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항상 하나님... 

여호와 ->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내가 기도하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기도의 방법과 태도는 무엇인가? 

약속, 언약, 성취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절대로 형식적으로 기도해서는 안된다.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확신의 기도를 해야 한다. 

2장의 분위기 전환은 하나님께서 내 음성을 들으신다는 확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태도가 바뀌고 마음가짐이 바뀌니까 심판의 하나님, 징벌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약속의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내가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니까 피하려고 했던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1)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인데 기도가 없다는 것은 영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2) 상황의 변화가 없어도 여호와의 언약을 확신 할 때 변화의 시작이 나타난다. 


예수 믿으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 바빠서, 힘들어서, 눌려서, - 아무리 직분이 높고 교회 출석을 해도, 기도 안하면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치고 올라갈 근거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거기까지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 거다. 거기까지 가면 너무 힘드니까..본인도 힘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도 너무 아프니까 바닥까지 내려가지 말고 먼저 기도하라는 거다. 그런데 안된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으면 세상의 방법을 취한다.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하는데도 기도 안하고 해결되는 불가능한 방법을 취한다. 한번 기도해서 안되면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절망한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게 기도해라. 네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나에게 기도해라. 너의 기도를 듣고 반드시 응답하는 내게 기도하라....


[시 86:1-4][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I am devoted to you)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엄살이 아니다. 다윗은 어느 순간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응답을 구했다. 왜 

(시 86: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3.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갔다. 

요나서 1장 1절이 시작 -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 말씀을 던지고 자기 기준과 자기 생각대로 내러감...

요나서 2장 -> 시편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도 -> 말씀이 중심이 된 기도. 요나의 기도를 가지고 쓴 논문- 그의 기도는 시편의 요약이다!


2장의 2절 처음은 시 3:4

2절의 하단절은 시 18: 4-5, 30:3

3절의 처음은 30장 6-7절

3절 후반절 – 시 23:5 

4절의 처음은 31:22절, 4절의 하반절은 시 5:7절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기도보다 능력 있는 기도는 말씀을 붙잡고 하는 기도, 이것이 한다고 나오겠는가? 하나님을 피하기 전 평상시 요나의 신앙이 드러난 기도이다. 


요나의 상황, 인간적인 기도 -> 나 죽겠어요, 살려주세요, 냄새나요

-> 문제에 대해서 탄원하는 기도에 그칠 것이다. 

요나 : 상황적, 감정적이 아닌 말씀의 기도를 드린다. 


-> 그래서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말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위급한 순간에 닥쳤을 때에 신앙의 근본이 드러난다. 

기도는 호흡이면 말씀은 양식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이 메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날 채워 놓아야 한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훈련,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훈련...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호흡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기 시작했다. 


4.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인정했다. (3절) 

내가 중심일 때 ->모든 것이 어렵고 짜증난다. 나는 보이지 않고 상황과 상대방만 보인다. 

하나님이 중심일 때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나를 발견한다. 

기도와 말씀이 회복되어지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우연과 행운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섭리이다. 

세상의 문화는 우연과 행운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 기대하고 일확천금을 꿈꾼다. 

그리스도인에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따라 오게 된다

말씀과 기도가 전제될 때 나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되고 인정된다. 


5.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나님께 화해와 용서를 구한다. 이제 내가 돌이켜 주를 바라보겠나이다. 고백하는 것이다. 믿는 다고 하면서도 자신만 바라보던, 자신의 생각만으로 살던 요나가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눈을 돌린다고 고백한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하는 고백이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은 바라보는 데에 있다. 가장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인 호흡을 하고 양식을 먹고 있는가? 

나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가? 섭리로 인정한다는 것은 고난일 찌라도 나에게 유익함을 인정하는 거다. 선하신 하나님의 일을 고난이고 아픔일지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거다. 

나는 날마다 주의 전을 사모하고 있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가? 형식적인 것에 만족하고 예배드린 것에 만족하고 기도드린 것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할 때 너무 쓸데없는 말, 의미 없는 말이 넘쳐나지는 않은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해결책이 있다. 


카타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이 묻힌 지하묘지이며 박해받던 성도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그곳에 가면 조각이나 벽화들을 볼 수 있다. 고난의 극심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며 신앙을 표현했다. 주로 예수님과 관계된 그림들 사이에서 뜻밖의 그림들이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요나의 그림. 요나가 바다에 던져 지는 모습, 요나가 다시 뭍으로 나오게 되는 모습.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그린 그림에서 요나는 자주 나신으로 그려진 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요나가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데 초대교회 박해받던 신앙인들은 요나를 그리면서 자주 나신의 요나로서 묘사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를 영세자, 즉 세례받는 사람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 때는 세례 받는 이들은 거의 옷을 벗은 채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세례는 벗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사람을 입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오는 그들은 새 옷을 준비해서 입었다. 그렇게 그들은 거듭나는 의식을 치렀다. 카타콤 벽에 그림을 그려 넣은 그 신앙의 아티스트들은 요나, 바닷물 속에 던져졌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오게 된 요나를 그런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보았다. 요나 이야기를 그들은 그들이 받는 세례의 영적 의미를 밝혀주는 이야기로 읽으며 그들의 박해를 견뎠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3절)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지금 물이 자기를 덮쳤다는 소리이다. 

그 물은 어떤 물인가? 고난의 물, 사망의 물, 환란의 물이다. 파도이고 폭풍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이 나를 덮쳤다고 표현은 해도 내 위에 넘친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넘친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긍정의 표현이다. 

은혜가 넘친다. 사랑이 넘친다. 기쁨이 넘친다 그렇지 요즘 내 주위에 사탄의 역사가 넘쳐나...그렇지 않는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는 것,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다. 바로 성령의 세례이다.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서 성령의 충만함,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상에, 욕망에, 불순종에, 자기 중심적인 자기는 죽이고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신자로 거듭난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요나서 1장 7-10절 입술로만 하는 회개


구원받은 신자들도 회개하여야 하는가? 왜 교회는 날마다 성도들에게 회개를 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번 복음을 믿었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은 후에도 회개한다면 그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대표적인 곳은 구원파다. 그러나 구원파 뿐만 아니라 기성 교회 안에도 이러한 생각이 교리처럼 자리 잡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우리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은 중생, 거듭남의 전제 조건이요, 시작점이다. 

세례요한도 예수님 자신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이전에 먼저 회개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회개가 믿음보다 앞선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그럼 이제 회개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에게도 회개가 필요한가? 

물론이다. 웨슬리는 <신자의 회개>라는 기독교의 고전과도 같은 유명한 설교를 남겼다. 

왜 한번 중생한 자가 계속적으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회개와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계속 머무르고, 계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즉 성화의 과정을 위해서도 회개와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죄에 대한 책임으로 자유로워 졌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죄의 영향력, 죄성, 죄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을 의식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비쳐졌다. 우리는 순간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우리의 불법이 사함을 받고 우리의 죄가 가리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롬 4:7).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내용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 완전히 성화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 사람들은 모든 죄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을 때에 완전히 없어진다고 믿으며 이것을 열심히 주장한다. 신자의 마음속에는 죄가 없으므로 그 순간부터 온전히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나 우리의 체험과 이성과도 다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해 느끼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지만 정욕으로 인한 죄를 짓는다. 예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죽노라 하고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한다. 원하는 의는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한다. 예수 만나 거듭난 이후의 일이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때의 회개와 다른 신자의 회개, 성화를 위한 회개이다. 


요나서는 특별히 선지자, 즉 신자의 죄를 다룬다. 중생한 신자가 회개해야 할 이유는 신자의 회개를 통하여 성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죄에 대해 눈감아 버리고 자만과 고집과 태만과 유혹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요나를 죄인의 관점에서 다가가 보자. 

그는 선지자였다. 요즘말로 말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교회 생활 잘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죄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기준과 선택에 의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먼저였다. 말씀으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씀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기가 하기 좋은 것은 열심히 했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큰 죄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가 판단하면서, 부리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자기 뜻에 맞으면 말 듣고 안 맞으면 안듣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연약함이다. 요나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요나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어디 요나보다 거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광야의 과정이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연단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신자의 죄를 그냥 넘겨 버리시지 않으신다. 예배 잘 드리니 눈감아 주겠다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때까지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기다려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 함께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나가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무작정 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범죄해도 죽기 직전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다. 탕자가 돌아오기만 하면 상거가 멀어 우리가 볼 수 없을 때에라도 먼저 우리에게 달려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 (왠만큼 기다려서는 탕자가 돌아올 때 탕자는 오직 집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그리며 올 것 이고 아버지는 할 일도 많으신대도 먼저 발견하는 것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시다) 

그래서 먼저 4절부터 6절까지 대풍과 사공과 선장을 통해서 기회를 주신다

환경을 통해서, 내가 믿었던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라는 말로서 기회를 주신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내가 지금 징계를 당하고 있다,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징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징계의 뜻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오해할 수 있다. 요나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징계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제 선장까지 나서서 이야기를 한다(6절). 이제는 극한 상황까지 가서, 계속 상황을 조여 가시는 데에도 요나는 알지 못한다. 이방인 선장이 직접 요나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도 요나는 깨닫지 못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죄 지은 자가 죄가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또 그 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숨어지내는 모습과 똑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라. 죄를 지어 거리낌이 있어도 발각되는 순간까지 끝까지 부인하며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죄를 숨기려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인내하시면서 죄인이 죄를 갖고 돌아올 때 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기다리신다.

   죄 지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십자가 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1:1의 관계이다. 원망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주신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 만나는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너무 알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자신이 변화될 것을 아니까, 자기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것을 아니까 아얘 도망을 가는 것이다. 그냥 있어도 되는데 구태여 다시스로 가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안 만큼 내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식대로 배우고 그 지식이 내 삶에 드러나고, 그리고 그 기준을 맞춰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화되어져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요나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쓰이지 않고 죄 짓는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큼 무섭고 잘못된 것은 없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죄를 지었나? 너무 잘 알아서 그것을 다 지키는 것 같은데 그 사이 사이를 다니면서 자기들을 드러내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것들이 바로 바리새인이 아니었나?

   ex) 요즘 - 검사, 부장판사, 변호사- 사회적 큰 물의-> 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법을 너무 잘 아니까 그 사이를 피해다니면서 온갖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재판가면 처벌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우리가 지은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한테?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지은 죄를 반드시 찾아내시고 드러내신다. 

   

   오늘 이 죄인을 찾아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비뽑기이다. 

   제비뽑기=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쓰인 구약시대의 방법이다. 

   

※구약시대에 나타난 제비뽑기

   첫 번째,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방식으로 아이성 전투에서의 패배의 원인이 드러난다. 아간이 죄인임이 발각되었고, 제비뽑기 방식으로 사울이 왕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법이 제비뽑기를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분별할 때에도 제비뽑기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나서에 나오는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에 나오는 제비뽑기이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비뽑기와 다르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유대인들에게 주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비뽑기라고 하는 것이 불경하고 미신적으로 사용된 경우에도(단지 답답해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기 위해서 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가 오늘의 요나서에 나오는 제비뽑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교적인 사상을 찬성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서든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언 16:33)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세 번째, 맛디아를 뽑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제비뽑기의 관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행전 2장 이후에는 교회 일을 하는데 제비를 뽑지 않고 사람들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 선택하는 일들을 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비뽑기가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성령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 우리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성령님, 어떻게 하면 좋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시대에도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제비뽑기 과정을 통해서 요나의 죄가 드러난다.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불순종한 신앙인들에게 이런 심판의 위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들어온다. 


이방인들의 질문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도록, 회개를 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1)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 처음부터의 불순종의 여정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적인 다섯가지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데 이렇게 정확하신 하나님이시다. 

2) 네 생업이 무엇인가? 

너의 직분이 무어냐? 하나님의 선지자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 

너의 직분에 충실하고 있느냐?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라도, 나귀의 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심판 전에 분명히 알려주신다. 

3) 어디서 왔느냐? 너의 출신이 어디냐?

과거로부터 도망한 요나 

과거의 요나 

지금의 요나 

 - 하나님과 교제 

 - 따뜻함, 보호, 안위...평안...

- 폭풍, 질책, 죄인..


4) 고국이 어디냐? 

너의 시민권이 어디에 속해있느냐? 

왜 도망다니느냐? 

- 육적 : 북이스라엘 사람

- 영적 : 천국이 시민권.    네 본향이 어디냐?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궁금함을 툭툭 질문하는데 그것이 요나를 코너까지 몰고 감. 

5) 어느 민족에 속해있느냐? (고국- 법적 시민권,  민족- 교제권)

네가 교제하고 있는 부류가 누구이냐? 

지금 나는 누구와 만나고 있는가? 이방사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자 그 결과로 만났던 사람   

그전 - 소수지만 하나님에 속해있던 선지자들과 만나지 않았겠나?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뜻을 논하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논하던 내가 이방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질책을 당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됨..


9절부터 대답,,,: 깨닫고 회개하는 구절인가? 

                뉘우치고 회개하는 구절인가? 


no. 

어투 - 당당하다. -> 진정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압박에 못 이겨서 하는 입술의 고백...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억울하게 항복하는 것. 

너무 많은 지식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입술의 고백에 불과하다.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고백이어야 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 나는 당신과는 다른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사람이다. 

   죽음 직전에 있지만 선민사상에 젖은 우월의식... 형식과 껍질의 사람...

-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 거짓말..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했나?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올려드림...(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드림.. 자기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림) 

알고 있는 지식 가지고 변화되지 않으면서 입술로 고백하고 기도...-> 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 교사로서, 교역자로서... -> 순간적으로 충격은 줄지라도 입술의 고백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타인 앞에 설 때에 가증하게 서는 사람들...

나는 위선자인가? 진실한 선포자인가? 

교회교육의 목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실패의 이유-> 가증한 입술의 고백으로 가르칠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다시스로 가지는 말아야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면서 어떻게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역자, 교사 -> 말이 어둔해도 진실하면 변화가 나타난다. 

              말 잘하고 능력있어도 입술의 고백을 가지고는 변화시킬 수 없다. 


- 10절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알고 

이방인들의 질문-> 어떤 이유로, -너는 도대체 누구냐? 

요나의 대답 -> 나의 신분을 먼저 -> 직접화법으로 

                 이유는 간접화법으로 두루뭉술하게... 

우리의 회개의 모습이 이렇지 않는가? 

자신의 죄는 두루뭉술하게 

“주님, 나의 연약함,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요.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자녀 됨만을 강조하면서 기도하지는 않는가?” 

회개의 시작(깨달음)은 있으나 진솔하지 못한 회개.,...


사람들..마지막 질문을 하고 장면이 바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 ->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셨던 질문..

 죄인에게 하는 질문은 항상 동일하다.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 요나의 대답이 없다. 침묵한다. 죄는 인정했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볼 때 회개할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 세상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볼 때 회개할 수 없다. 거기에는 '탓' 만 있고, 변명만 있고, 이유만 있다. 

형식적이고 가증한 입술의 고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나를 볼 때, 진정한 회개가 나온다. 

거룩에 다가갈 수 없는 진정한 고백이 나온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라는 절규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지금...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다. 당연히 용서 받는 줄...

죄의 고백이 없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가 없는데 어떻게 죄가 용서되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거리낌이 있는가? 

절대로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죄인이 돌아오길 바라신다. 

탕자를 기다리는 하나님, 상거가 멀어도 그 흔적만 가지고도 뛰쳐 나오는 아버지...

우리 모두가 가증한 요나다. 


변하고 싶지 아니한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아니한가? 

그러면 하나님의 시선에 보이는 나를 보아야 한다. 

변명이 없는, 이유가 없는, 남의 탓이 없는 나의 벌거벗은 모습,

십자가의 은혜를 주었음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의 여리고성에 갇혀 마음 문 닫고 생활하는 내 민낯을 인정해야 한다. 

입술로만 하는 회개가 아닌 영혼의 회개, 내 중심에서 나오는 진정한 고백을 원하신다. 

그분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아직도 상거가 먼데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 

내 마음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 말씀하신다. 기도하자. 


Posted by 소리벼리

요나서 1장 4-6절 하나님의 간섭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서는 4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성경이지만 믿는 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무도 강렬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불신자나 초신자가 아닌 자기 스스로나 남들로부터 신앙적으로 나름 신실하다고 인정받아왔던, 착하고 바르다고 인정받아왔던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생활 하면서 좋은 평판과 인품을 자랑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고집장이이고, 불순종하며, 자기 멋대로 하는지를 정말 무서우리만치 자세히 살핀 말씀이 요나서 입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요 나, 바로 이 불순종하며 고집불통인 나 자신을 대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명은 "자신이 판단하고 생각하는 신앙의 목적과 방향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차마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모세처럼 분명히 말씀을 받으면 누가 순종하지 않겠냐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다 순종할 수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냐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진실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자신이 신앙생활 중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순종보다 불순종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자기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 자기에게 급한 일을 언제나 선택하지 않습니까? 


요나는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눈 대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 여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했더니 다시스로 갔고 동으로 가라 했더니 서쪽 끝으로 갑니다. 육지로 가라 했더니 바다로 갔고 남을 살리라고 했더니 자기도 죽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순종 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신앙 안에서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 죽음의 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통해서 요나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의인인지 알았던 요나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정반대로 가는 악인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남들보다 못할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 말씀안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내 안의 죄가 얼마나 가득한지 그 죄로 인해 항상 민감해지고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첫째 시간을 통해서 설명했던 하나님이 명하신 곳, 니느웨는 바로 내 안의 불순종의 공간, 의로운 것 같지만 항상 자기를 주장했던 자신의 뜻, 도저히 순종할 수 없고 이것만큼은 못해요라고 말하는 불순종의 공간이었고 지난 시간 설명했던 다시스는 지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죄를 선택하면 항상 택하게 되는 죄의 공간, 내가 교회만 않다니더라도, 내가 집사만 아니라도, 내가 목사만 아니라도 하고 싶었고 반드시 했을, 죄가 나를 유혹하면 언제나 넘어갈 수 있는 세상적인 욕망, 세상적인 욕심, 세상적인 유혹의 공간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나눌 4-6절의 말씀은 불순종의 길을 가는 요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순종을 하려고 맘먹고 욥바라는 항구로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선가를 주고 배에 올라서 불순종의 길은 순탄하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불순종의 길을 갈 때 맘은 좀 불편할 수 있어도 만사가 형통하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세상의 권세자가 바로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불순종하기를 원하기에 우리가 불순종을 선택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불순종하는 자를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가는 것처럼 보여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세상을 초월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자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온 우주의 통치자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개입하고 간섭하시는 창조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고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촉구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절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에 내리시매”...큰 폭풍이 일어나...

완벽하게 진행된 요나의 도주에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됩니다. 완벽하게 진행된 불순종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의 영이 죽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자, 택한 자들이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먼저 찾아오십니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불순종한 자가 먼저 회개하고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불순종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간섭은 큰 바람, 대풍으로 오늘 요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은 요나에게 대풍을 내리시듯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커서가 아니라 나의 죄악이 그만큼 커서 그런 것입니다. 요나의 죄, 나의 불순종한 죄가 그만큼 컸기에 그 죄의 결과로 인생에 큰 풍랑이 옵니다.  

내가 아플 때, 징계 받을 때, 힘들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서라도 돌이키시기 위해서,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바로 잡고 싶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한 요나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아직도 요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죄악의 땅, 쾌락의 땅 다시스로 향하는 요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대풍을 통해서라도 그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 도피선-> 훈련선으로...

자신을 유혹의 땅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었던 도피선이 요나가 오갈 수 없도록 꼼짝 못하게 단련시키는 훈련선이 되었고, 단련선이 되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쳐버린 그것이 나의 신앙의 훈련장이 됩니다. 이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훈련의 장으로 요나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아이성 전투"를 하는데 큰 성 여리고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패배하게 됩니다.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 중에서 작은 것을 훔쳐서 자기가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간을 잡는 방법이 좀 까다롭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이스라엘 12지파 중 한 지파가 뽑힙니다. 바로 아간이 속한 지파(유다지파)입니다. 그 다음 지파 가운데 여러 족속 중에 한 족속을(세라 족속) 뽑습니다. 바로 아간이 속한 세라 족속입니다. 그 다음은 그 족속 중에서 한 가정을 뽑습니다. 바로 아간의 가정인 삽디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 중에서 한 사람 바로 아간을 뽑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 사람을 뽑는 과정이 복잡합니까? 하나님이 직접 한 사람을 택하실 수가 없겠습니까? 여러 과정 중에서 아간이 먼저 나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전쟁에 졌다고 하고 그리고 제비를 뽑아서 자기가 속한 유다지파가 나왔다면 당연히 사죄하고 잘못을 빌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한 번 죄를 선택한 죄인을 자신의 잘못이 추궁되어도 선뜻 인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잘못은 눈감아 버리고 다른 것을 탓하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선한 양심이 있었더라면 세라 족속이 선택되었을 때, 더 나아간다해도 삽디의 가정이 뽑혔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죄악중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었건만 죄인인 아간은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요나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잘못이 발각되어도 끝까지 가는 것이 죄인의 습성입니다. 다름아닌 사망을 주려는 마귀에게 놀아나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룟유다에게까지 "이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하면서 그가 돌아오도록, 그의 발을 씻기시면서까지 기회를 주시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언정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후회는 해도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연단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징계가 아니라 돌이키기 위해서, 회개 시키기 위해서, 회복시키기 위해서 때로 아픔도 주시고 고난도 주십니다.  

그 간섭의 첫 번째는 주위의 여건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기를 소망하는 자들은 내 주위의 환경이 어려워지면 먼저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예민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잘못이 무엇입니까? 알려주십시오.” 

그런데 죄인의 모습은 “왜 믿는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왜 하나님은 나한테 항상 이러십니까? 하고 항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의지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민감하다면 하나님의 간섭의 초기에 돌이키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죄의 습성은 끝까지 가보는 것이지만 갈 때까지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알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많이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요나서를 통해서도 여러 다른 말씀들을 통해서도 끝까지 가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죄의 끝까지 가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대풍이 일어나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만일 공의의 하나님만 계시다면 그것은 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거의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대풍이 불되 결코 깨어지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채찍을 들지만 인자하심과 성실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죄과를 다스리며 채찍들로 그들의 죄악을 다스리리라.

그러나 내가 나의 자애를 그로부터 완전히 거두지는 아니할 것이요, 나의 신실함도 약해지지 아니하며 내 언약도 깨뜨리지 아니할 것이요,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경시키지 아니하리라.

(시 89: 32-34) 


그러나 요나가 보통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남들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의인이라고 인정받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 때에 그것은 보통 각오가 아닙니다. 쉽게 돌이켜지질 않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의 움직임을 시작하십니다. 

5절: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사공은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생의 프로들입니댜. 경험자이고 노련한 기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큰 바람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 바람 앞에 자기들의 능력을 버리고 자기의 신을 부르고 물건을 던짐.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지가 드러납니다. 배의 전문가, 파도의 전문가들이 감당치 못할 바람이 부니까 결국 자기들의 물건을 버리고 자기들의 신을 찾습니다. 

무당들에게 가장 큰 소득을 안겨주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재계의 거물들, 정치계의 거물들이 큰 일을 당하면 찾는 곳이 무당입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나 사회적인 품격을 보면 설마 저런 사람들이 굿을 할까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감당치 못할 일을 만나면 몇억씩 돈을 들여가며 굿을 하고 부적을 붙이고, 무당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두 번째 단계의 특징은 전문가의 사람, 내가 세상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마져도 자신을 저버림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보통의 순간이라면 이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요나는 역시 대단합니다. 

5절 B "그러나 요나는 배 밑 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그러나 요나는 (그러나 -> 요나의 이름표...(3절) , 그리스도의 이름표 그러므로, 그래서...


배 밑에서 잠자고 있다... 파도 가운데 평안해서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눈 뜨고 깨어 있으면 불순종으로 인해 괴로우니까 아야 눈을 닫아 버리고 잠자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까.... 하나님을 알기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차라리 죽는 길을 택합니다. 

좀 눈을 열고 상황 파악을 하면 저렇게 가만 있을 수 없는데 불순종하는 사람은 지금 파도가 자기를 삼키는 데도 잠에 빠집니다. 도무지 주위를 살피지 않습니다. 

폭풍 가운데 잠잠할 수 있는 두 사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자 


하나님의 두 번째 간섭에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 3번째 하나님의 움직임 ,,(6절: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직접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발락과 발람...-> 불순종...-> 당나귀의 입을 통해...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피조물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치욕의 순간..부끄러움,,

왜? 불순종해서 눈이 어두우니까...


6절 - 선장 : 이방인,,<복음 선포의 대상> 

이방인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함..

선지자가 각성치 않으니까,,,, 이방인 선장을 통해서,,,

- 일어나서,,,(제발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일어나라. 각성하라,,,) 

- 하나님께 구하라,,,  ->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못살게 구는 남편이 어느날 "너 요즘 왜 교회 안가냐? 왜 요즘 안하냐?" 

그럼 얼마나 창피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런데 요나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 요나만 그럴까요? 아간도, 유다도, 사울도, 하나님 믿었다가 실패한 자들은 우리가 보기에 아니 저렇게 될 때까지 왜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을까? 왜 회개하지 않을까?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불순종의 길을 갑니다. 


아이들이 떼 쓰면 부모들은 아니어도 들어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지 않으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길 수 없음을 알았을 때에라도 "아 내가 하나님께 안되는 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해야 하는데 이 미련한 사람은 안되는구나 하면서 무얼 선택하냐면 그냥 이대로 죽자!하녀 끝까지 죽는 길로 갑니다. 


자,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일대일의 대 전투를 시작합니다. 

나를 축복하던지, 아니 하던지 일사각오로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고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만 기억하면서 아, 나도 기도해서 하나님을 이겨야겠다 생각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야곱은 환도뼈를 상하게 됩니다. 평생을 절뚝거리게 된 것입니다. 

환도뼈가 상했다는 것은 자기의 육신적인 힘, 자기 고집이 꺾였다는 것입니다. 

바뀐 것은 야곱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야곱의 걸음걸이가 바뀌고, 야곱의 인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바뀐 것을 가지고 "네가 진짜 이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진짜 이기는 것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는 안 바뀌고 하나님을 바꾸려 합니다. 

그 분은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 진리는 나 때문에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진리로 말미암아 바뀌고, 내가 바뀜으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A. 환경을 통해서

B. 주위 사람을 통해서

C. 직접 사람의 입을 통해서...


ex)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사회는 너무 어지럽고...누구도 자기는 이해해 주지 않고... 교인들도, 아내도, 자기를 탓하기만 하고... 몸에 이상이 와서 보험도 없고 해서 한약방을 갔는데 의사가 화병이라고 합니다. 울화가 나서 몸이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묻더랍니다. 

"혹시 교회 다니세요?"

차마 목사라고까진 못하고 "네 교회 다닙니다."했더랍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주변은 선생님이 아무리 불평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스트레스 받아서 화병이 생기셨는데 그냥 두면 더 병이 커집니다.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화 품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교회 가서 기도하세요. 그럼 편해집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대상이 나를 권고할 때,,.

->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대상,,,


하나님이 왜 이렇게 참으시는가? 

왜 그렇게 많은 기회를 주시는가? 

그 분이 화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오히려 내가화를 냄. 


내가 뭐기에.,,, 무슨 가치가 있기에...


-택하신 한 영혼을 이토록 사랑하심..

- 나에 대한 목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심...

- 나를 위해 더 큰 일이 남아있기에.,,,


기회를 주시는데 오히려 더 내려가고 잠자는 요나,,,


내 모습에 혹시 어렵거나 고통이 있는가? 

물론 마귀의 시험도 있고 믿음의 성장을 위한 훈련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할 때 첫 번째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이 없는가하는 것이다. 


내가 아플 때 -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이다. 


난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안 아플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아프게도 하신다.

왜? 돌이키시기 위해서,,,


Posted by 소리벼리

요나서 1장 3절: "그러나"의 신앙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But Jonahg ran away from the Lord and headed for Tarshish. He went down to Joppa, where he found a ship bound for that port. After paying the fare, he went aboard and sailed for Tarshish to flee from the Lord


  •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 북왕국의 절정기.  

일반 백성들의 기대 -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하자! 거의 실현단계. -> 거짓 선지자들의 동참.-> "하나님의 때" - 성공의 때  

참 선지자-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을 바라보는 참 선지자들의 기대- 역시 "하나님의 때"를 소망. 그런데 그 하나님의 때는 심판의 때,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의 때, 영적 회복의 때 


  • 똑같은 시대, 똑같은 환경을 통해 바라보는 시각의 차 (무엇이 판단의 기준인가?) - 

               축복을 바라는 자들과 심판을 바라는 자. 외적 현실을 바라보는 자와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자 

 

  •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요나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말씀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때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다가왔다. 


거짓 선지자들을 비롯한 일반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때는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참선지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또한 참선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라 하셨다. 요나는 그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고자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에 가서 그 말씀을 외치라 한다. 그 니느웨를 통해 회개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로 요나 자신임을 깨닫게 하신다. 


  • 수많은 사람들과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사회의 영적 위기를 진단한다. 교회의 비판의 무리에 가세한다. 

모두들 이대로는 안된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이야기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회개의 메시지는 언제나 밖을 향한다. 

저교회, 저사람, 저민족, 저죄인......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심판한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설교를 드리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 듣고 내 남편이, 저 사람이, 저 깨닫지 못하는 죄인이 말씀 앞에 굴복하기 원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점점 교만해지고, 완악해지고, 무뎌져 간다. 남은 언제나 부족하고 난 언제나 의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내 기대치를 윗돈다. 내 생각을 넘어선다. 그 말씀은 언제나 나를 향하는 말씀이다. 

말씀의 은혜는 언제 임하는가? 내 생각과 맞아 떨어졌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항상 내 기대와 다른 데에서 말씀의 충격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참 신앙은, 참 믿음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임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했다. 나중에 가서는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다. 

미디안 10만군사와 전쟁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이만명의 군사가 너무 많다 하신다. 이천명의 군사도, 천명의 군사도 너무 많다 하신다. 300명만 남기고 다 돌려 보내라 하신다. 재정신이라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충격적인 명령에 기드온은 순종한다. 


안수를 바라고 찾아온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10번 물에 담그라 한다. 물에 담그라는 것은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내 죄가 다 씻겨 질 때까지, 내 안의 상처가 다 사라질 때까지 거듭 거듭 말씀의 세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하신다.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죽고자 하는 사렙다 과부에게 그 음식을 가지고 선지자를 대접하라 한다. 기왕 마지막 남은 것 같다 여지껏 해왔듯이 나를 위해 쓰려고 하지 말로 주를 위해, 남을 위해 써보라 한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 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한다. 


도저히...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말씀들이 성경에 가득차 있다. 

환경에 의지하고, 상식에 의지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자라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말씀들이 성경엔 가득하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그 명령에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일어났다. 

예수님이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른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이것은 절대로 네 생각대로 될 지어다. 네가 부르짖는 대로 될 지어다. 네 기대대로 될 지어다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생각을 벗어난, 네 기대를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꺾고 순종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역사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 마져도 자기 합리화, 자기 고집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 


  • 3절의 시작은 불행히 "그러나"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나 중심적인" "내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내 생각을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시작은 항상 "그러나"이다. 


그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평행선을 달리는 내 고집이요, 하나님 앞에서 주제를 모르는 내 교만함이요, 결국 어리석음의 표현이다. 그러나를 통한 요나의 행동의 결과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맞서고 있는가? 


니느웨로 가라는데 다시스로 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로부터 정동쪽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다시스는 정반대인 정 서쪽 너머에 있는 도시이다. 육지로 가라는데 바다로 간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요나를 추적하며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이제부터 계속 도망다닌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하나님은 화내시지 않고 타이르시는데 요나는 선지자인데도 하나님께 역정을 낸다. 하나님은 백성을 살리라고 하는데 요나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불신자 아닌 신자의 고집이다. 


표면적인 요나 - 거짓 선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애쓴 사람

              - 비둘기란 이름의 뜻대로 인격적이고 평화로운 사람

              -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자 

‘그러나’에 포함된 요나 - 순종치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고집이 더 강한 자 

                      - 자신의 뜻이 아니라면 죽음이라도 각오하는 자 

->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내 마음에 맞으면 순종,, 안 맞으면 고집, 불순종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나의 의를 나타내는 교만이 아니었던가? 


- 왜 불순종하는가? 

Hint (욘 4: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욘 4 : 2) 


->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을까봐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니까... 거절치 않으시니까 

->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그 뜻을 내 마음과 뜻에 맞추기 위해서 불순종...(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맞추려고...) 

   

  •  그러나로 시작된 불순종의 여정 (3절) -자세히 보자 

- 2절의 ‘너는 일어나’- 안주하지 말고 각성하고 나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라  

- 3절의 '일어나' : 피하고 거역하기 위해서 일어나 

    3절에 나타나는 불순종의 여정을 나타내는 단어들..: 피하려고, 도망하려, 내려가서,얼굴을 피하여...3절 하나에만 나오는 달어들....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과정  : 임재를 피함 -> 예배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다.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다. 


  • 그러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평상시 드러나지 않던 내 깊은 죄악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쓴 자가 만사를 제치고 불순종, 위험의 길로 객기를 부린다. 

    *이스라엘 민족 : 바다에 익숙지 않은 민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니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길에 아무 준비도 없이 뛰어든다. 불순종하자 무엇이든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했던 요나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바닷길로 하나님께 물어봄 없이 뛰어 든다. 

  =>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나. 광야의 과정을 겪지 않는 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나는 항상 중요할 때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나이다. 왜 교회생활 하는가? 다듬어지기 위해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서 내가 싫어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싫어하는 나의 숨겨진 모습이 있기때문에 싫은 것이다. 그 싫은 모습과 대면하면서 나의 죄을 발견하고, 부딪치면서, 참으면서 내 죄악을 이겨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공간은 없고 온통 육적인 나만 남아 있는 것이다. 

  

  ->  나의 미래, 나의 비전, 나의 희망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따르는 신자들. 광야의 과정, 연단의 과정 없이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생활하려 하는 사람이다. 자기 목적에 합당하지 않으면 언제나 피하고 도망하고 또 다른 배에 오른다. 그런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나는 항상 ‘도망자’이다.  


신앙은 내 취향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 나의 축복, 내 가정의 축복, 내 뜻, 내 희망의 성취 -> 아멘

니느웨의 회복 -> 내 원수의 회복, 내가 싫어하는 자의 축복. -> 그러나 


자신의 기준으로 순종과 불순종이 결정 => 다듬어지지 않는 우리 모습 속에서 언제나 범하는 잘못. 초신자때는 하나님이 기다려줄 때도 있지만 계속해서 자기를 고집하면 하나님이 요나처럼 우리를 다듬어 가신다.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 다시스 

다시스로 가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다시스 - 니느웨는 동쪽에 위치, 

          다시스는 서쪽 끝단의 섬. 스페인 서남부, 광물 풍부, 금속 공예 발달 

             -> 하나님 뜻의 정 반대 

-욥바는 이스라엘의 항구 (다시스와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  

    - 다시스는 금속 공예를 통해서 무역이 활발했던 별천지와 같은 쾌락의 도시 

* 왜 하필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가? 

하나님이 그곳에는 있지 않으신가? 그는 하나님의 시선이 가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지 못했던가? 마치 아담이 죄를 짓고 바위 뒤에 숨은 것처럼,, 숨을 곳을 찾은 곳인가? 


요나는 다시스에 대한 예비지식이 많았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자 대뜸 다시스를 선택 

-> 그동안 내가 금지 했던 곳. 그러나 하고 싶었던 것, 즐기고 싶었던 곳,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곳.

-> 불순종을 생각자마자 선뜻 생각한 곳. 

   평소에 마음속에 품어 있던 죄

   연약할 때 드러나는 죄....


-> 하고 싶었지만 내가 목사니까, 내가 교사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니까 부럽지만 참고 있었던 것, 그 장소,,,,

3절 한절에 3번이나 언급... 

하나님의 니느웨가 싫어지면 3배나 더 생각나는 죄가 바로 다시스 


-나의 욥바, 나의 다시스는 어디인가? 

이스라엘 사람들 -> 광야 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불평->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 정말 풍요로왔나? 많이 먹을 수 있었었나?

      그들이 자유로왔나? 행복했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멀어지면 그리워지는 것이 바로 그 세상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서지 못했을 때에 늘 드는 생각이 바로 세상이다. 

(약 4:4)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니라  


믿는 자들이 믿음의 순간에 조용히 묻어 논 곳. 마음속에 있지만 꺼내놓지 않은 곳.

생각하지 않지만 무의식 속에 그리워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다시스다. 

하나님은 그런 죄 까지도 살피신다. 다듬어가신다.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나오면서 왜 뒤를 돌아보았나? 

롯의 아내라는 것은 바로 믿는 자 안의 믿음의 마음 밖의 또 다른 부분을 가리킨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적인 꿈, 가치관, 버리지 못한 욕망, 하고 싶은 쾌락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지 않지만 언제든 불순종의 때에 나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곳이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죄의 근원을 벗어버리라 하신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실 때에, 이방인과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좋은 것을 남기려고 한다. 자기 속에 감추어 두려고 한다. 온전히 불태우지 못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죄의 욕망을 꺼내어 놓는 것이다.  


  • 죄악의 동반자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이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착각, 역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구나...

당시에는 정기적인 배가 없었다. 비정기적,, 제때 시간 맞추는 배가 없었다. 

  -> 도망하려 했더니 마침...

  -> 하나님을 자기 기준에서 평가 (역시 하나님도 허락) 

     비 성경적인 행동을 합리화 -> 사탄의 역사 


그래 한 번 정도는 불순종해도 돼. 가서 쉬어라,,, (나의 합리화) 

늦게 일어났는데 마침 비가와... 교회가기 싫은데 마침 손님이 온데,,,,

(역시 하나님의 뜻이었어) 


죄를 선택했는데 처음엔 좋은 일들이 나타남-> 탈선의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윤활유

-> 불순종의 항해에서 마침 만나게 되는 배를 조심하라. 

편리하지만 나를 망하게 하는 배, 욥바를 떠나자마자 정체를 드러내는 배 


다시스를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 비싼 대가 -> 선가를 내야 한다. 

다시스로 가는 대가 (선가) -> 육로로 가는 니느웨보다 훨씬 비싸다. 

죄값은 항상 최상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 대가가 끝이 아니다. 선가는 배의 삵 뿐만 아니라 요나의 목숨을 대가로 하고 있다. 불순종, 죄의 대가는 항상 사망이다.) 


- 다시스로 가는 배의 유혹 

유혹의 순간 - 최고 보장. 비밀 보장, 선착순....(유혹) 

그러나 그것은 관광선이 아니라 상선이다. 나를 팔러 가는 노예선이다. 왕복표가 없다. 한 번 타면 돌아올 기약이 없다. 

 

(추락의 과정)

요나 - 배로 내려가고 - 배 밑의 선실로 내려가서 자고 - 바다 밑까지 내려가서 -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감... 스올의 뱃속.. 지옥 끝....


니느웨 - 하나님의 뜻이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 내 안의 불순종의 공간..

다시스 - 내가 항상 꿈꾸어왔던 죄의 공간. 숨어있다가 불순종하면 튀어나오는 것

      (그것은 장소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불순종하면 항상 화로 푸는 사람, 남에게 성냄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

불순종하면 항상 하게 되는 죄의 습관.. 

불순종하면 항상 같이 하게 되는 사람, 친구....


하나님은 하기 힘든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죄가 드러나게 하신다. 

광야의 과정, 연단을 통해서 당신의 숨겨진 죄를 낱낱이 드러나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당신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 안의 죄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즐거음- 

물론 그것을 대면하면 고통스럽다. 피하고 싶다. 그런데 피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피하면 피할수록 죄는 내 안에서 더 역사한다. 그것을 보게 하시는 것은 내가 변할 수 있다는,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준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내 안에 고칠 것이 없다면 이제 천국가면 된다. 이 땅에서 아직 내가 고칠 것이 있기에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 시간 나의 다시스를 놓고 기도하자 

지금은 죄를 짓지 않지만 내가 약할 때에 항상 나를 유혹하는 그것을 생각하자.

당신의 분노, 당신의 욕망, 당신의 쾌락, 당신의 연약함의 장소를 지금 내어놓자. 

그것은 내가 약할 때에 언제든 나를 지배할 죄의 근본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에 항상 거역케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실 때에 항상 뒤돌아보게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내어놓기를 원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